파수꾼 - Bleak N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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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 <파수꾼>은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영화 그 자체의 어떤 것 보다는, 우리에게 일시적으로 다른 것을 환기하게 한다. 아주 오래전 기억들, 낡고 끊어지고, 바래져 가는 기억들, 혹은 무의식적으로 밑바닥에 밀어넣어 두었던 기억들의 일부를 아주 조심스레 끄집어내게 만든다. 물론 그것들의 거의 대다수는 영화 속의 어떤 일들처럼 저런 극적인 사건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런 비슷한 기억들이 있다. 다른 어떤 것들에 밀려 잊고 있었던 것들, 이제는 도저히 만날 수 없는 옛 친구들, 그리고 그 친구들과의 좋았던 시간들. 그리고 이제는 그것이 어떤 일 때문이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그러나 분명히 지금 기준으로서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을 옛날의 (친구와 멀어지게 된) 사건들. 예를 들어 영화 속 기태(이제훈)의 모습은 옛날 학교 가던 길에 나에게 갑자기 이단옆차기를 날렸던 어떤 친구를 생각나게 한다. 그것이 어떤 것 때문이었는지는 세세한 것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 사건의 중요한 몇몇 부분은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들 상당수는 그런 시간을 살아왔다. 어떤 것은 기억하지 않으려 애쓰면서, 또 어떤 것은 기억하려고 애쓰면서. 그리고 동시에 기억하지 않으려는 것은 기억하고, 기억하려고 애쓰는 것은 잊으면서.

이 영화의 등장인물들의 행동에 어떤 심리학적인 디테일한 설명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설명들이 의미가 있을까. 아니, 의미가 있다해도, 그것을 또 애써 설명하는 것은 잔혹한 일이지 않을까. 기태는 자신에게 왜 그랬는지 설명해 보라는 동윤(서준영)의 요구에 항변한다. 설명할 수 없는 것도 있잖아. 이 부분은 상황을 무마하려 넘어가려는 기태의 시도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나는 도리어 그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느꼈다. 기태는 설명할 수 없다. 아니,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그 설명이 아무 의미가 없음을, 그것 자체가 정당한 대답이 될 수 없음을 기태 자신이 잘 알고 있다. 결국 이 영화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 하고 있다. 그것은 이 영화의 기본 구조가 아들이 자살한 이유를 찾아다니는 아버지의 질문들로 이루어진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 아들이 왜 죽었을까. 반복되는 질문들 속에 답은 없다. 아니, 답은 있지만, 그 답이 설명될 수 없는 것임을 동윤이나 희준(박정민)이나 알고 있다. 애써 설명한다고 해도, 그 아버지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 설명과 그 설명이 결국 말해주는 것과 그것이 받아들여지는 방식. 그것에는 커다란 간극이 있다.

그 때의 우리들에게는 그것만이 가능한 관계의 전부였으니까. 그 관계들만이 지극히 중요한 것이었으니까. 그러나 지금의 우리에게는 중요해져 버린 것들이 너무도 많다. 아니, 실제로 중요하지 않은 것이어도, 우리가 중요하다고 믿고 있는 것들이 너무도 많다. 그러므로 나는 이 영화가 청소년들의 어떤 미성숙성을 기본 바탕으로 삼고 있다고 말하기를 주저하게 된다. 기태와 동윤과 희준의 이러한 관계는 청소년기의 특수성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관계가 아니다. 이러한 관계는 언제 어느 때에나 누구에게나 이루어질 수 있으며, 지금도 우리 주위에 살짝 가로놓여져 있다. 다만, 그것이 파국으로 끝나지 않는 이유는, 우리에게 다른 중요해진 것들이, 아니, 좀 더 정확하게는 우리가 다른 것이 더 중요하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의 우리는 파국에 이르지 못한다. 단단해져야만 깨질 수 있는 법이다.

그러므로 역설적으로 청소년기의 비극이란, 그러한 관계들이 필연적으로 단단해질 수밖에 없는 것에 그 이유가 있다. 아무 것도 쉽게 허용되지 않는 시기에 우리는 대부분 한두 가지에 모든 것을 걸고, 그것을 단단하게 만들려고 한다(타인이 보기에는 약해보여도, 자신들은 단단하다고 믿고 있다). 그러므로 그 때의 우리에게는 '파수꾼'이 필요하다. 그것이 깨지지 않도록 지켜봐주는 파수꾼이. <호밀밭의 파수꾼>의 홀든이 벼랑 너머로 누군가 떨어지려고 하면, 붙잡아주려고 했던 것처럼. 혹은 기차가 지나가려고 할 때 지켜보며, 종소리를 울려주는 누군가가 필요한 것처럼. 마지막 기차길에서의 동윤의 회한은 그래서 마음을 아프게 한다. 그들은 서로에게 파수꾼이 되어야만 했다. 그들에게 다른 파수꾼들이란 없었으니까.
.............................

설명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한편의 영화로 만들어내는 것. 이 어려운 작업을 가능케 하고, 이것에 힘이 느껴지는 원동력 중에 하나는 독특한 서사구조와 그것을 화면에 구현하는 방식에 있다. 이야기의 실마리를 던져놓고, 그것을 지연시킴으로써 이야기에 긴장을 불어넣는 방식도 그렇거니와, 대과거와 과거, 현재를 독특하게 붙이는 리듬이 훌륭하다. 예를 들어 마지막 장면에 동윤이 울다가 나와서 기태를 만나고, 기태와 대화를 하고(이 장면에서 기태와 동윤은 분절되어 있다. 거울을 기민하게 활용하여 두 사람의 대화는 이어지되, 감정은 분리시킨다.), 다시 기태 아버지의 전화를 받는 장면을 자연스럽게 잇는 것을 보거나, 기태가 벤치에 앉아있는 장면과 기태 아버지가 벤치에 앉아있는 장면을 비슷한 구도로 만들어내는 장면 등을 보면, 이는 감독의 탁월한 감각이라고 밖에 말할 수가 없다. 여기에 배우들의 좋은 연기가 결합되어, 관객들의 마음을 건드린다. 이 영화 <파수꾼>은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는 법을 아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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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1-04-10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 요즘 상영한 건가요? 생소해서요.
맞아요. 청소년기엔 파수꾼이 필요하죠. 님 말씀처럼 깨지지 않도록 멀리서 지켜봐주는 파수꾼. 부모의 역할일듯.

맥거핀 2011-04-11 14:10   좋아요 0 | URL
네..상영한지 한 달 정도 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런 류(?)의 영화가 그렇듯이, 상영관은 몇 군데 없지만요. 기회되신다면 꼭 보세요. (가능하면, 찾아가서 보시라고도 권하고 싶구요.) 분명히 만족하실 겁니다.^^;
부모가 파수꾼의 역할을 맡는 것이 맞기는 한데, 한편으로 이 영화에서의 이야기는 부모가 맡을 수 없는 부분을 드러내 보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그것이 이 아버지에게 끝내 만족한 답이 주어지지 않는 이유겠지요.

2011-04-18 16: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4-18 22: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4-21 09: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네오 2011-05-04 07: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올해 3대천왕 독립영화중 이 영화만 안봤네요^^

맥거핀 2011-05-04 01:21   좋아요 0 | URL
<혜화, 동>하고 <무산일기> 말씀하시는 거라면, 저는 아직 그 두 영화 모두 못봤습니다. 이 <파수꾼>도 참 어렵게 봤네요..;; <무산일기> 보러가야 하는데요..
 
레드 라이딩 후드 - Red Riding H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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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과 크게 관계없는 새로운 빨간망토 이야기. 추리물로써 나름 나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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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오 2011-03-29 2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작과 다루군여~ 원작소설도 이미 출판되거 하며 이 영화 홍보 많이 하더라구여~

맥거핀 2011-03-29 22:56   좋아요 0 | URL
네..거의 하이틴 로맨스물입니다. 뭐 그래도 머리 비우고 보니까, 나름 재미는 있던데요. 캐서린 하드윅이 그래도 옛날 가락이 좀 남아 있는듯..

네오 2011-03-30 08:23   좋아요 0 | URL
캐서린 하드윅~ 배우인줄 알았다는 ㅠㅠ(검색해서 알았져ㅋㅋ)
<트와일라잇> 전 재미있게 봤어요~ 극장에서 본 건 아니구요(이런 영화가 있는줄 잘 몰라서요) 케이블 방송할때 봤어요~ 그다음 크리스틴 스튜어드 팬 됐습니다~ 모든게 착하잖아요^^

맥거핀 2011-03-30 18:23   좋아요 0 | URL
옛날에 홀리 헌터 나오는 13살의 어쩌구인가 하는 영화는 좋았어요. 지금은 거의 판타지 하이틴 로맨스 전문 감독(?)이 되었지만..
 
블랙 스완 - Black Sw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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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있음)


가끔씩, 이야기를 읽거나 볼 때마다, 어떤 인물들의 뒷이야기가 궁금해지는 때가 있다. 주인공의 대사에 맞장구만 쳐주던 조연들, 인상적인 한 장면을 보여줬던 엑스트라, 악인이 죽고난 후, 그 악인의 나름 충성스러웠던 부하들. 이른바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증후군. 영화 <블랙스완>을 본 후 발레 <백조의 호수>의 이야기가 궁금해져서 내용을 찾아보았는데, 이야기를 찾아보고서 정작 궁금해진 것은 백조 오데트보다는 흑조 오딜이다. 비극적인 결말에서라면 오데트와 왕자가 호수에 뛰어들어 죽고난 후, 그리고 희극적인 결말에서라면 오데트와 왕자가 하늘로 승천한 이후, 오딜은 도대체 어떻게 되었을까. 오딜의 그 뒷이야기가 그려지지 않는 것은 아마도 현실적인 이유가 조금은 있었을 것이다. 오데트와 오딜을 한 무용수가 공연한다는 이유가 그것. 마지막에 오데트의 장엄한 최후를 보여주어야 하는데, 오딜 같은 것을 보여줄 틈이 있겠나.

사실 여기에는, 묘한 모순이 작동하는 것 같다. 발레 <백조의 호수>에는 오딜과 오데트가 겹쳐서 등장하는 장면이 없다. 물론 그것은 위에서도 말했듯이 한 무용수가 두 역할을 모두 해야 한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여기에는 다른 것도 작용하는 것 같다. 백조 오데트와 흑조 오딜은 일종의 거울상이다. 한쪽이 선하다면, 한쪽은 악하다. 한쪽이 욕망을 제어당한다면, 한쪽은 욕망을 마음껏 발산한다. 거울 이편과 거울 저편의 존재. 그러므로 두 존재가 한 공간에 동시에 있을 수는 없다. 그 둘이 모두 한 공간에 있는 것을 상정하려면, 우리는 다른 차원의 공간을 상상하거나, 거울을 왜곡시켜야만 한다. 그러나 흥미로운 점은, 관례적인지 아니면 특정의 공연에서만 그러는지는 발레에 대한 조예가 깊지 못해 잘 모르겠지만, 이 오데트와 오딜을 한 명의 무용수가 모두 표현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영화 <블랙스완>에서 니나(나탈리 포트만)의 분열, 혹은 일종의 착란 증세는 거의 예정되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고도 말할 수도 있다. 거울 속 이편의 존재와 저편의 존재를 모두 완벽하게 담아내려고 하는 거울은, 아니 자아는 필연적으로 왜곡될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자아가 왜곡을 피하는 방법은, 그 둘을 느슨하게 병치시키는 것이다. 그것을 다른 말로 하자면, 필요에 따라 그 둘 중의 한 가지를 적당하게 억압하는 것이다. 혹은 강제적으로 (다른 누군가에 의해) 억압되는 것이다. 영화 속 니나의 경우라면 그것은 스스로에 의해 작동한다기 보다는, 어머니(바바라 허쉬)에 의해 수행된다. 어머니는 니나의 욕망하는 자아를 억압한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니나를 어린아이로 묶어두는 것이다. (이것은 한편으로 인간을 백조 안에 묶어둔다는 <백조의 호수> 이야기의 다른 버전이기도 하다.) 어머니의 끊임없는 관심과 감시로 니나의 욕망은 제어되어, 니나는 정신적인, 혹은 육체적인 어린아이에 머문다. 니나의 방안에는 인형이 가득하고, 방의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니나의 그림 속에 니나 자신은 박제되어 있다. (그러므로 니나가 그림을 찢고, 인형을 내버리는 것으로 그 억압을 벗어나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이런 감시의 체제는 너무 오랫동안 지속되었기 때문에, 니나에게는 이미 내면화되어 있으며, 그 스스로가 자기 자신을 감시하는 것으로 추동된다. 예를 들어, 니나가 자신의 몸(어깨)을 긁어대는 것도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신체 변형 서사의 일부라고 볼 수도 있지만, 어른이 되려는 자기자신을 끊임없이 무의식적으로 방해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것은 날개(욕망)가 자라나는 것을 막는 것, 어른이 되려는 자신을 스스로 제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어른이 되기를 거부하는 것은 그것의 종착점과도 관련이 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서서히 늙어가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 영화에는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전작 <더 레슬러>에서도 그러했듯이 나이들어 사라지는 것에 대한 공포가 자리잡고 있다. 발레단에서 스타는 한 명 뿐이고, 그 스타는 나이가 들고, 아름다움의 강도가 덜해지면, 다른 스타로 대체된다. 발레단의 외부에서 보여지는 공연은 화려하지만, 그 내부에는 위험하고 필사적인 사투가 자리잡고 있다. (이러한 형국은 한편으로는 백조를 닮았다. 물 위에서는 화려하지만, 물 속에서는 필사적으로 버둥거려야 하는 백조의 숙명.) 이것은 물론 권력의 문제로도 볼 수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완벽한 아름다움을 향한 사투라고 볼 수도 있다. 발레단의 스타였던, 이제는 물 속에 가라앉아 버린 베스(위노나 라이더)의 병실에 찾아간 니나는 "나는 완벽하지 않다"라는 베스의 고백을 듣고, 그 말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 그러므로 니나는 완벽해지는 것을 꿈꾸고, 그것을 실행에 옮긴다. 그것은 완벽의 순간을 영원히 보존하는 것이며, 완벽의 순간을 박제하는 것이다. 다시는 복제되지 않을, 단 한 번의 최고의 공연. 그러므로 마지막에 니나는 "완벽함을 느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른 관점에서는 이를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니나가 마지막에 완벽한 아름다움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그녀가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떤 예술가들은 죽어가는 순간에 최고로 아름다운, 매혹적인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었다. 그것은 완벽한 아름다움이라는 것에 반드시 포함되는 어떤 '결여'를 그들이 눈치채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름다움에는 일종의 미스테리가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어떤 이야기에 매혹되는 것은 그것이 완벽하게 모든 것을 설명해주기 때문이 아니라, 설명될 수 없는 어떠한 점들이 그 이야기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 우리가 어떤 얼굴이 매혹적이라고 말할 때, 그 얼굴은 완벽한 좌우 대칭이 아닐 경우가 더 많다. 아니, 인간의 얼굴에 완벽한 좌우대칭이 있을까. 우리가 매혹을 느끼는 것은 엄밀히 말해서 '완벽한 좌우대칭'이 아니라, '완벽한 좌우대칭에 가까운' 얼굴이다. 도리어 우리는 완벽한 대칭(로봇의 얼굴)에 때로는 공포를 느낀다. 마찬가지로 완벽함을 추구하면 할수록 우리는 때로 그것에 매혹당하기 보다는 거부감을 느끼는 때가 있다. 우리가 매혹당하는 것은 도리어 결여의 순간이다. 어떤 것이 (드러나지 않은) 결여가 내포되어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의 미스테리한 아름다움에 매혹당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레슬러>에서 랜디 램(미키 루크)이 더 이상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을 가지고 날아오를 때, 그 결여의 아름다움에 순간 매혹당한다. 그리고 <블랙 스완>에서 니나가 죽어가면서 공연을 펼칠 때 그 공연은 거부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담은 것이 된다. 더구나 이제 그 공연은 다시는 재생되지 않을 것이므로, 그 이상 완벽한 것을 이야기 할 수 있을까.


덧.
이 영화 <블랙스완>이 꿈꾸는 것은, 영화에서 니나가 꿈꾸는 것과 맥이 닿아 있다. 영화로서 완벽해지는 것.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조탁 솜씨는 전혀 녹슬지 않았다. 영화의 관점을 완전히 흩뜨려 놓고, 관객에게 니나의 심리 상태를 그대로 체험하게 하는(사실 이 영화에서 니나가 실제로 본 것과 그녀의 환상을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다) 이러한 방식에서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연출력은 독보적인 것이다. 예전에 <레퀴엠>을 보러갔다가, 영화를 도저히 끝까지 견뎌서 보지 못하고 나와야만 했던 기억이 있다. 나중에 못 본 부분이 궁금하여 나머지를 찾아서, 참아가면서 보기는 했지만, 그 때의 기억은 아직도 꽤나 무시무시하다. 다만, 나는 이 영화 <블랙스완>을 보다가 조금은 씁쓸해졌다. 심리적 타격의 힘은 그 때나 지금이나 비슷한 것, 아니 오히려 이번이 더 강력해진 것 같은데, 나는 견딜만해졌다. 견딜만해졌다는 사실은 내가 달라졌다는 뜻일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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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1-03-09 1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강력한 이미지의 영화에, '이미지 준비중입니다'는 왠말이냐.

2011-03-10 21: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3-11 13: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네오 2011-03-14 2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이미지 준비중이라는 말에 빵터졌습니다~ 진짜 뭐져~ 그런데 '레퀴엠'을 처음봤을때 끝까지 안보셨군여,,사실 이 영화는 나의 은밀한 일기장에 첫번째로 자리잡고 있는 영화이기도 한데여~ 처음나왔을깨 당시 비디오천국에서 힙합몽타쥬라고하며 신세대감각이다 라고 신나게 홍보를 해서 궁금해서 보긴봤는데 휠씬 좋았던걸로 그때 그 당시에 생각되여~ 지금도 가끔보닙다. 그리고 블랙스완을 보고 나서 후덜덜 했져~ 블랙스완이라고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가 쓴 금용서도 있는데,예전에는 이책이 유명했는데 이제는 검색어치면 이 영화가 일순위가 되있더라구여 ㅎㅎ

맥거핀 2011-03-16 00:12   좋아요 0 | URL
그때 막 천재감독 대런 아로노프스키 이러면서 홍보가 나왔던 때라, 영화의 내용이 뭔지도 모르고 보러 갔습니다만, 마치 내가 마약을 한 것처럼 속이 울렁울렁거려서 나왔습니다. 할리우드의 젊은 천재라고 불렸던, 대런 아로노프스키나 크리스토퍼 놀란이나 모두 참 지금 재능을 빵빵 터뜨리고 있네요. 일반적인 평판은 놀란에 조금 더 무게중심이 있는 것 같은데, 저는 아로노프스키를 더 위에 놓고 싶네요.:)

네오 2011-03-16 00:00   좋아요 0 | URL
"아로노프스키를 더 위에 놓고 싶네요" 이 말씀에 적극 동감합니다:D
 
만추 - Late Autum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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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의 스포 있음)




<만추>라는 제목은 즉각적으로 그 시간과 시간에 배인 정서를 떠올리게 한다. 만추. 늦가을. 모든 것의 수확이 끝나버린 때. 새롭게 무엇을 시작하기에는 이미 늦은 시간. 겨울을 최대한 미루고 싶은 시간. 어떻게든 유예하여야 하는 시간. 죽어가는 시간. 이제 잠들어야 하는 시간. 그리고 훈(현빈)의 시간. 애나(탕웨이)의 시간. 그리고 그 둘이 만나는 시간.

영화 속 애나의 시간과 훈의 시간은 다르다. 애나의 시간은 그녀 자신 안에서 최대한 늦춰지면서 천천히 흘러간다. 7년간의 수감 이후, 어머니의 죽음으로 단 72시간만의 귀향을 허락받은 애나에게 그 시간들은 일분 일초가 소중한 것이다. 그녀는 어떻게든 그 시간을 잡아두어 천천히 흐르게 하려고 한다. 어떻게든 잡아두고 싶은 시간들. 어떻게든 유예시키고 싶은 72시간 후의 막내림. 반면 훈에게 시간은 빠르게 흘러가고 있다. 훈에게 흐르는 시간은 그에게는 그렇게 큰 의미가 없다. 그에게 오늘은 이 여자를 만나, 이 여자에게 빠르게 맞추는 시간이고, 내일은 또 다른 여자를 만나, 다른 여자에게 빠르게 맞추는 시간이다. 그러므로 처음 애나에게 돈을 빌렸을 때, 훈은 그 대신 기꺼이 시계를 내민다. 그에게 시간을 확인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처음 이 두 사람은 본인들에게 가장 의미가 없는 것을 서로 교환한다. 그것은 훈에게는 시계이며, 애나에게는 돈이다.

그러나 영화가 흥미로워지는 것은 여기서부터다. 영화는 이 두 사람의 다른 시간을 공명시키기 위해 영화적 판타지를 은밀하게 작동시킨다. 서사적 단절을 감수하면서도, 두 사람은 우연의 힘을 빌어 다시 만나고, 또 다시 헤어지고는, 다시 만난다. 물론 그런 영화적인 판타지가 가장 강력하게 드러나는 것은, 두 사람이 놀이공원에서 한 남녀를 만나고, 그 남녀의 환상을 보는 장면이다. 이 환상은 언뜻 이 두 사람의 시간을 비유하여 보여주는 것처럼 보이는데, 한 공간 안에서 두 남녀의 시간은 다르게 흘러간다. 그리고 그 시간은 다시 앞으로 당겨지고, 다시 시작되고, 다시 반복된다는 것이 형상화되어 차례로 보여진다. 이 장면의 아름다움은 말로써 표현하기 어려운데, 그 아름다움이 더해지는 것은 그 장면을 다음으로 연결시키는 방식에 있기도 하다. 그 장면은 자연스럽게 훈과 애나에게 반복되며, 그 환상이 깨어짐과 동시에, 그 두 사람의 시간을 다시 드러내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두 사람의 시간의 차이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니다. 도리어 시간의 공명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판타지적 장치이다. 그러므로 두 사람의 만남에 따른 이 시간은 영화 속에서 그 안개만큼이나 흐릿해진다. 예를 들어 두 사람이 만날 때, 그 두 사람을 보고 깜짝 놀라는 '유령 투어'를 하는 사람들. 이 때의 시간은 도대체 언제일까. 이 시간들이 환기되는 것(물론 흐릿하게 만드는 것 만큼이나, 환기시키는 것 역시 중요하다)은 오로지 두 사람에게 걸려온 전화를 통해서이다. 애나에게는 그녀의 예정된 귀환을 상기시키는 것으로, 그리고 훈에게는 그에게 이 시간들을 빨리 써야 한다는 것(빠른 시간 안에 그는 어디론가 도망쳐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것으로 말이다. 

영화가 더 할 수 없이 흥미로워지는 것, 혹은 더 할 데 없이 아름다워지는 것은 물론 그 마지막에 있다. 안개 때문에 버스는 정차하고, 훈에게는 애써 무시했던 전화 속의 유령이 환기되어 돌아온다. 그리고 여기에서 훈과 애나의 시간은 역전된다. 무한정 남은 것처럼 보였던 훈의 시간은 급속도로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이 때부터 남은 아주 짧은 시간은 훈에게는 더없이 소중해진다. 즉 다른 말로 하자면, 훈의 시간 흐름은 지금까지의 애나의 시간 흐름이 된다. 그리고 훈은 그제서야 애나가 가진 시간의 의미를 진정으로 깨닫는다. 그 어떻게든 유예시켜야 하는 시간의 의미. 그 일분 일초가 소중한 시간의 의미. 그래서 그는 그제서야 애나에게 진심을 담은 키스를 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다시 애나에게 이번에는 훈의 시간이 전이된다. 애나에게 이제 남은 시간은 빠르게 흐르게 되었다. 다시 훈을 만나야 하는 시간이 기다리고 있으므로, 이제 그녀에게 남은 시간들은 빠르게 흘러보내야 하는, 아니 빠르게 흐를 수밖에 없는 시간이 되었다.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듯이 애나는 허둥대며, 훈을 찾아나선다. 그러나 훈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고, 남겨져 있는 것은 잠든 애나에게 훈이 둘러주고간 시계 뿐이다. 물론 같은 행동이지만, 이 때의 시계의 의미는 처음과 다르다. 처음의 시계가 훈에게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면, 이 시계는 '당신의 시간을 이해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영화의 마지막에 애나가 훈에게 '오랜만이에요'라고 말하는 것은 이제 그의 시간을 이해한다는 의미이다. 그가 견뎌야할 그 많은 시간들을 이해하고 이제 나를 그 시간들에 공명한다는 것. 영화의 그 마지막은 판타지를 소중히 간직한 채 아름답게 말한다. 사랑의 다른 이름은, 상대방의 시간을 이해하고 공명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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넙치 2011-03-02 2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이에요에 대한 통찰력있는 해석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맥거핀 2011-03-03 17:1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이렇게 생각할수도 있지 않을까..싶어서 한 번 써본 짤막한 글입니다. 마지막 '오랜만이에요'가 참 좋았는데, 그 무엇이 날 흔들었을까..하고 생각하면서요.^^

2011-03-03 00: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3-03 17: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네오 2011-03-03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훈에게는 애써 무시했던 전화 속의 유령이 환기되어 돌아온다"는 애나에게 걸려오는 확인 전화를 말씀하는 건가요? 시간의 역전이라는 흐름과 애나의 시계라는 장치, 너무 와닸네여~

사랑의 다른이름은 상대방의 시간을 이해하고 공명하는 것이다라는 구절이 마음을 흔드네여

맥거핀 2011-03-03 17:22   좋아요 0 | URL
훈에게 걸려오던 전화 말입니다. 훈은 경고하던 친구가 말한 그 전화의 내용을 거의 믿지 않는 것처럼도 보였거든요. 일종의 특유의 허세일수도 있구요. 근데 사실 나중에 그 옥자 누님의 남편이 나타나는 장면은 좀 이상해보이기도 했어요. 그 남자가 일종의 유령처럼 보였다고 할까요. 뭔가 이상한 분위기를 풍기기도 했고, 뭔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어요. 제 느낌에는.
 
몬티 파이튼의 성배 - Monty Python and the Holy Grail
영화
평점 :
상영종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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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1-02-11 0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지만 이러한 풍자의 아이러니는,그 풍자를 즐길 수 있는 자들은 동시에 그 풍자의 대상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풍자의 한계가 여기에서 발생한다. 풍자는 기본적으로 그 대상에 대한 애정이 없이는 성립될 수 없다는 한계.

네오 2011-02-11 08:20   좋아요 0 | URL
아트시네마에서의 이준익 감독님 추천작이져?? 테리 길리엄작품이죠?? 풍자에 대한 애증에 대한 현상학인가요?? 재미있겠다^^

맥거핀 2011-02-11 17:30   좋아요 0 | URL
풍자의 애정에 대한 현상학이라고 말하면 이 영화에 대한 조금 더 고차원적인 농담이 될지도 모르겠네요.^^; 제 취향은 솔직히 아니었어요. 저도 그냥 즐기고 싶었는데, 왜 나는 즐기지 못하고, 다른 생각만 하고 있을까라는 절대적으로 쓸데없는 생각만 하다가 왔네요.

2011-02-12 12: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2-12 23:13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