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 분야의 주목할만한 신간 도서를 보내주세요
인간은 아무래도 마지막에 와서야 뒤를 돌아보도록 프로그래밍 되어 있나 보다. 마지막 책 추천 페이퍼를 쓸 때야 되서야 지난 몇 개월 간을 돌이켜보게 된다. 서평단 활동이라는 것, 동시에 같은 책을 읽고, 한 가지 책에 대해 각자 다양한 견해를 내어놓는다는 것. 생각해보면 재미있는 일이다. 동시간에, 같은 기한을 정해놓고, 같은 책을 읽게 되어 있는 이 구조 말이다. 거의 같은 시간에 같은 책을 읽고서도, 각자 나름의 (매우) 다른 목소리들이 나온다. 그래서 가끔 놀라거나, 아리송해지기도 한다. 이 책을 읽고서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가 있을까. 그러나 거기에는 일종의 시기나 경쟁, 혹은 반대라는 것보다는 견해의 나눔이라는 의미가 더 크다. 개인적으로는 이 서평단 활동을 통해, 여러가지를 배우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생각하는 법에서도 그렇고, 이야기를 풀어내거나, 글을 쓰는 방식에 있어서도 다른 분들의 좋은 글들을 보며,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그것의 일차적인 시작은 좋은 책을 만나게 됨에서 비롯되었다. 예전에 다른 곳에서도 서평단 경험이 있지만, 이번의 서평단이 더 좋았던 이유는 자신이 읽고 싶은 책들을 스스로 고를 수 있게 하는 방식이었다. 물론 상당수의 경우는 다른 분들이 고른 책을 받아들여야 하는 경우들도 있었지만, 예전처럼 밀실 속에서 전혀 알 수 없는 경로로 선택되는 책들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방식보다는, 이번과 같이 상당히 오픈되어 진행되는 경우는, 다른 분들의 고견이라 생각하고 기쁘게 받아들여 읽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런 마음으로 마지막 추천 페이퍼도 기쁜 마음으로 작성해본다. 그리고 마지막이니만큼, (그간은 그저 마음가는 대로 아무 책이나 선택해왔으므로), 이번에는 조금 더 정치적이고, 특정의 목적을 내세우고 책들을 골라본다. 그것은 여차저차한 이유로, 그간 소외되었다고 생각되는 분야의 책들을 추천해보는 것이다.
인문/사회의 해당 분야로는 고전, 과학기술, 사회과학, 역사, 인문학, 인물/평전과 같은 것들이 제시되어 있는데, 그간 많은 책들의 선정이 사회과학이나 인물/평전 부분에 치우쳤던 것 같다(물론 이 분류라는 것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이긴 하지만). 과학기술 분야도 이번에 <대칭>이 선정됨으로써 구색을 겨우 맞추게는 되었는데, 고전은 그렇다 치더라도, 역사나 문화, 종교 분야의 책들이 선정되지 않은 것은 못내 아쉽다. 그러므로 마지막 책들은 역사, 문화 및 종교 같은 관련 분야들에서 골라본다.

한국학 그림과 만나다 / 정민, 김동준 외 / 태학사
읽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가지고 싶다는 욕구가 드는 책이다. 우리의 젊은 인문학자 27명이 각자 자신의 분야의 이야기들을 여러 볼거리와 함께 들려준다. 제목은 '그림과 만나다'지만, 여기에는 그림만 포함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박영효의 양장(洋裝) 사진을 통해 한국 근대 복식의 흐름을 살펴보기도 하고, 영화 <왕의 남자>를 통해, 조선시대의 공연 문화가 담고 있던 담론들을 펼쳐내 보이기도 한다. 한문학, 희곡, 미술사, 군사학, 연극학, 서지학 등의 다양한 소장 학자들이 필진으로 포진되어 있는 만큼 흥미롭고 다양한 이야기들과 다채로운 볼거리들을 기대해 본다. (예술/대중 문화 파트에 들어가야 하는지도 모르겠지만, 책 분류도 인문학으로 되어 있기에 추천도서로 넣어본다.)

러시아 혁명의 진실 / 빅토르 세르주 / 책갈피
존 리드의 <세계를 뒤흔든 열흘>과 더불어, 러시아 혁명을 다룬 고전으로 불리는 빅토르 세르주의 <러시아 혁명의 진실>이 전면개역되어 출간되었다. 아주 예전에 과방에서, 혹은 선배 방에서 굴러다니던 책을 주워서 같이 굴러 다니며 떼굴떼굴 읽었던 기억이 있는데, 이번에는 좀 더 진중하게 다시 읽어볼 때이다. 제목은 어떤 특정의 시각을 담은 것이 아닌가 하고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는데, 그보다는 (개인적으로는) 하나의 르포로 보고 접근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르포이자, 하나의 전환기적 역사를 다룬 책으로서도 손색이 없다. 이집트 및 아프리카 여러 곳곳에서 혁명의 기운이 꿈틀대는 이 때에 혁명이라는 것의 전면적인 양상을 한 번 고찰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이런 전면개역은 언제든 환영.

장자 교양강의 / 푸페이룽 / 돌베개
최근에 동양고전, 특히 장자에 대한 관심이 많이 높아진 것 같다. 이는 무엇을 반영하는 것일까. 글쎄. 이는 어쩌면 '너'에 대한 관심에서 '나'에 대한 관심으로의 이행이라는 현대 사회의 풍경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상대에 대한 '인'과 '예'라는 유가적인 가르침에서, '내가 나비인지, 나비가 나인지'를 탐구하는 자신의 내면으로의 이행. 조금 어렵지 않을까 걱정도 되지만, '북경TV의 교양 프로그램에서 일반 시청자를 대상으로 하는 장자 이야기'라는 문구가 반갑다. 장자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자신의 내면으로 침잠해 보는 것은 어떨지.

신의 이름으로 - 종교 폭력의 진화적 기원 / 존 티한 / 이음
아이러니하게도, 요즘 많은 사람들은 '종교'라는 말에 '폭력'이라는 말을 연상하는 것 같다. 종교와 가장 먼 곳에 있어야 할 이름이 종교의 뒤에 가장 가깝게 따라붙는 이 아이러니. 그렇다면 종교의 어떤 '타락'이 지금의 이 상황을 만들어낸 것일까. 저자 존 티한이 보는 관점은 이것과는 조금 다른 것 같다. 그는 종교의 본성을 거슬러 올라가면, 도덕이라는 이름의 종교와 폭력이라는 이름의 종교가 뿌리가 같음을 드러내보인다. 종교학 교수인 저자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진화심리학의 여러 이론들을 여기에 접목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의 결론은 종교의 근원을 일종의 악에서 찾고, 결국 종교를 부정하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종교의 본질을 찾아나가는 흥미로운 기원 여행.
중국 소수민족의 눈물 / 루셴이 외 / 안티쿠스
얼마 전에 우연한 기회에 사라진 언어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그 프로그램에서는 세계의 6000여 개의 언어 중 90% 이상이 없어져 가고 있다고 했다. 거의 대부분 한정된 지역에 살고 있는 원주민들, 소수민족들의 언어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중국의 55개 소수민족이 포함된다. 중국 내 55개 소수민족의 어계(語系)만도 크게 5가지로 분류할 수 있으며, 그 안에는 세부적인 수많은 언어가 있다(정재남, <중국의 소수민족>, 살림지식총서 333 참고). 언어가 사라진다는 것은 거기에 담긴 문화, 종교, 생활풍습, 역사, 이야기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람이 사라진다는 이야기이다. 중국의 경우에는 또 한편으로 이러한 사라짐에 일종의 강제성이 들어있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 이 책 <중국 소수민족의 눈물>은 풍부한 사진 도판과 이야기들로 그들의 사라져가는 것들을 기록하고 있다. 여러모로 소중한 책이 아닐 수 없다.
덧.
버트런드 러셀의 삶과 그의 이론을 만화로 쉽게 풀어낸 <로지코믹스>를 추천의 글까지 다 썼다가 지워야 하는 것이 못내 아쉽다. 그리고 <게이 컬처 홀릭>을 추천할 수 없는 것도 안타깝다. 왜 이 책이 '에세이' 파트에 들어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언론에 보도되는 혐오스러운 게이와 드라마들의 샤방샤방한 게이들의 사이 어딘가쯤에 위치하고 있는 동성애에 대한 (나의) 인식의 오해들을 조금이라도 걷어낼 수 있는 책이 아닐까 싶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