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제 - Kill Theory, 2009

  감독 - 크리스 무어

  출연 - 아그네스 브루크너, 패트릭 플러거, 태린 매닝, 테디 던



  대학 졸업을 앞둔 7명이 친구네 별장으로 놀러간다. 거기서 만난 별장집 아들의 의붓여동생까지 합세해서 8명이 신나게 놀고먹고 마시고. 이어 커플들은 뜨거운 밤을 보내고, 그 외에는 각자 게임을 하는 등등 시간을 보낸다. 그런데 갑자기 들려온 비명 소리. 누군가 처들어 온 것이다. 별장에 갇힌 그들. 아침 6시가 될 때까지 단 한 명만 살아 있어야 한다는 정체불명 괴한의 협박! 서로 죽여서 한 명만 살아남든지 아니면 다 죽든지 결정하라!


  이제 그들은 결정해야한다. 서로 죽이든지, 아니면 같이 뭉쳐 싸우든지. 친구들은 서로를 죽일 수 없다고 하지만, 괴한은 모든 것을 다 대비해놓았다. 그들이 서로 불신하고 싸울 뭔가를 갖고 있었다.


  사람은 위기 때 본성을 드러낸다고 하던가? 이 영화에서는 그런 면을 잘 보여주었다. 목숨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자신이 누굴 제일 사랑하는지, 자신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 겉으로 말 못하던 본심이 어떤 거였는지, 친구와 연인에 대해서 서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영화는 8명의 젊은이들을 통해 말하고 있다.


  거기에 덧붙여서 무심코 내뱉은 말이 어떤 결과가 가져오는지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말을 잘못해서 15년 동안 군만두만 먹은 영화도 있는데, 여기서는 상대를 우습게보고 오만한 마음에 내뱉은 말이 큰 화를 불러일으켰다. 역시 제일 무서운 것은 ‘혀’라는 예전에 읽은 동화가 떠올랐다. 탈무드였다고 기억한다.


  또한 어떤 상대든지 우습게 보는 것도 좋지 않다는 교훈도 주고 있다. 내가 우월하고, 상대방이 내 손안에 놓여 있다고 생각되어도 절대로 우쭐해서는 안 된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린다.’는 옛말이 그냥 있는 것이 아니다. 매사에 겸손하고 남을 배려해야한다. 그렇다고 기죽어 살라는 말은 아니다. 이 세상을 나 혼자 사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호러 영화를 보다보면 간혹 여자들의 힘에 놀라곤 한다. 이 영화도 그랬다. 여자도 막판에 몰리면 삽으로 사람을 패죽일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삽질의 본보기가 아닐까?


  영화를 다 보고 생각해보았다. 여기서 진정한 악인은 누구일까?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살인범? 자기들끼리 죽인 불쌍한 청춘들? 아니면 치료라는 명목으로 살인범을 더 분노하게 한 무책임한 의사?


  역시 다른 사람에게 피해주지 않고, 조용히 살아가는 것이 제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솔직히 영화는 그냥 그랬다. 던져주는 주제 의식은 좋았지만, 그걸 끝까지 끌고 나가는 힘은 많이 부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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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제 - Last House On The Left. 1972

  감독 - 웨스 크레이븐

  출연 - 데이빗 헤스, 루시 그랜섬, 산드라 카셀, 마크 쉬플러



  1972년 미국에서 만들어진, 지금 생각해봐도 고개가 절래 절래 저어지는 인간 말종들이 나오는 슬픈 복수극.


  17살된 마리는 친구와 함께 도시에 구경을 간다. 공연을 보러 간 것. 그런데 대마초를 피워보겠다는 호기심에 길에서 아무나 붙잡고 ‘대마초 파세요?’라고 물어본다. 공연 끝났으면 생일 파티 준비하는 부모님이 계시는 집으로 돌아갈 것이지, 왜 요상한 동네로 가서 대마초를 사려고 하는지. 그러니까 지 무덤을 지가 판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와 친구를 꼬인 남자는 수배 중인 탈주범 일당의 하나였고, 그들은 마리와 친구들에게 강간은 기본으로 온갖 이상한 짓을 가한다. 그들이 두 소녀를 고문하는 장면은 진짜 보면서 할 말이 없었다. 결국 처참하게 죽어버린 두 소녀.


  그런데 운명의 장난일까? 탈주범 일당이 숨어든 곳은 바로 마리네 집이었다. 그곳이 상당히 외진 곳에 있어서, 옳다구나 하고 차가 고장 났다는 핑계로 들어간 것. 이후의 이야기는 안 봐도 비디오. 처음에는 그래도 손님이라고 잘 대접을 했는데, 나중에 딸을 죽인 게 놈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부모의 분노와 처절한 복수가 이어진다.


  나쁜 놈들이 두 소녀를 고문해서 죽게 만드는 과정을 보면서 무척이나 화가 났다. 아니, 처음부터 두 소녀가 거리를 배회할 때부터 화가 났다. 이 멍청한 것들아, 대마초 살 생각하지 말고 집에 가! 넌 영화도 안 봤냐? 빨리 튀어! 그 쪽이 아니야! 등등.


  그러면서 ‘어떻게 자라면 저런 못된 짓을 할 생각을 할까?’하고 탈주범과 그 일당들을 욕하고, 그들은 그렇게 키운 누군지 모를 부모를 욕하고. 또 멍청하고 느려터진 경찰은 보면서 한숨을 쉬고.


  얼마나 몰입을 했는지, 마리의 부모님이 탈주범들을 죽일 때 ‘잘했어! 더 찔러! 잘라버려!’ 라고 응원을 하고 있었다. 이건 정의감의 발현이지, 절대 고어 신을 더 보여 달라는 요구가 아니었다.


  언제나 그렇지만 성폭력에 관한 영화는 그냥 썰고 썰리는 영화보다 백만 배 더 기분이 나쁘고 끔찍한 느낌이다. 내가 여자라서 그런가? 아니면 더 현실성이 있기 때문일까?


  아마 후자일 것이다. 신문을 보면 하루가 멀다 하고 나오는 것이 성폭력에 관한 것이니까. 의붓딸을 상습 추행한 계부라던가 여중생 내지는 동급생을 집단 강간한 고등학생들 얘기, 인터넷 채팅으로 만나서 어쩌고저쩌고. 얼마 전에는 초등학생 셋이 20대 지체장애아 여성을 성추행한 기사도 나왔다. 그런 것을 볼 때마다 한국은 너무 관대하다! 특히 정치인과 성범죄자들에게는 더욱 더 관대하다.


  그래서 저런 영화를 보면, 속이 다 시원해진다. 그래, 강간범들은 저렇게 죽여야 돼. 다 잘라버리고 말이지! 만약에 울 조카들에게 저런 일이 생긴다면 아마 나도 저 부모들처럼 할 것이다. 음, 상상할 수 있는 최고로 잔인한 방법으로 놈들을 죽여 버릴지도.


  어쩌면 이 세상에서는 건강하고 아무 탈 없이 살아남는다는 것이 제일 좋은 삶의 목표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 영화 엔딩 크레딧의 노래는 왜 그리 신나는지……. 그 부분만 보면 뭐랄까, 전원생활의 즐거움과 황당 사건을 그린 코미디 영화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우리는 즐겁게 삶을 살고 있지만, 이 지구상 어딘 가에서는 저런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역설을 보여주려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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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독 - 이혁수

  출연 - 석인수, 김윤희, 홍명진, 이계인



  처음 봤을 때, 너무 무서워서 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던 영화이다. 친구들과 여름에 놀러가서 봤는데, ‘무서워! 놀라 죽을 거 같아!’ 라는 기억이 남는 영화이다. 중간에 귀신이 나올 때 친구 하나가 비명을 지르면서 방을 뛰쳐나가고, 그 소리에 어른들께서 무슨 일이냐고 놀라서 달려오셨다. 그런데 커서 다시 보니, 음……. 무서운 부분은 여전히 무서웠다. 하지만 내가 나이가 들었고 호러 영화를 많이 보아서 그런지, 무서운 장면보다는 깔깔대고 웃은 장면이 더 많았다. 


  어느 양반집에 기괴한 일이 생긴다. 첫날밤만 치르면 아들이 죽어 나가는 것. 이미 위의 두 아들은 죽었고, 남은 것은 막내 하나. 게다가 동네에 소문이 흉흉하게 돌아서, 사돈을 맺으려는 집안도 없어 조만간 가문의 대가 끊길 지경이다. 그러다가 조금 먼 곳에 있는 동네의 가난한 집 딸을 막내며느리로 데리고 오는데 성공한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어서, 결혼 첫날 밤 막내아들은 귀신에게 홀려 죽고 만다. 그러나 하늘의 도움인지 용케 막내며느리가 임신을 하게 된다. 그 짧은 첫날밤, 단 한 번의 관계로! 파워 정력왕인 막내아들이다!


  사실 이 집안에 저주를 내리는 존재는 시아버지가 젊었을 적에 데리고 놀다가 죽여 버린 여자였다. 임신을 했다고 하자, 도망가자고 해놓고는 죽여 버린 것. 한을 품은 그녀는 막내며느리의 뱃속 아기마저 죽여서 집안의 대를 확실히 끊어놓으려고 노력하는데…….


  뭐니 뭐니 해도 이 영화에서 제일 생각나는 것은, 귀신인지 흡혈귀인지 그것도 아니면 여우가 둔갑한 것인지 정체성이 모호하기 그지없는 피 빨아 먹는 귀신의 정체이다. 원한을 품은 이 여자의 귀신이 시어머니로 변신해서 들어오는데, 특이하게도 밤만 되면 가축의 피를 빤다. 그뿐만 아니라, 그것을 목격한 하녀도 죽여서 피를 빨고……. 인간이건 동물이건 가리지 않는다.


  눈과 입에서 피를 질질 흘리고 눈을 흰자만 보이게 훼까닥 뒤집어서 밤중에 노려보는 그 모습은……. 게다가 바로 밑에서 랜턴을 비쳐주는 센스까지! 그 장면이 제일 무서웠다. 아, 포스터 검색하다가 그 장면 사진도 덩달아 보이는데, 환한 대낮에 봐도 무섭다. 


  그리고 지렁이 국수! 아, 이건 웩이다! 싫어! 난 다리 많은 것도 싫고 없는 것도 싫다고! 진짜 지렁이를 썼다는 말도 있는데, 그 얘기를 듣자 영화배우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 서리가 내린다는 말이 있는데, 그 말이 맞은 거 같다. 자신과 뱃속의 아이를 죽였다는 이유로, 자신의 순정을 차버렸다는 이유로, 자신을 그냥 노리개로 여겼냐는 그런 증오와 한으로 한 집안을 거의 박살을 내니 말이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이 집안의 아들들은 왜 한을 안품은 걸까? 물론 그렇게 하면 영화가 복잡해진다고 스스로 납득하지만, 그래도 역시 아쉬웠다. 게다가 억울하게 죽어버린 시어머니는 왜 한을 안 가졌을까? 멀쩡하게 잘 키워놓은 아들을 셋이나 잃고, 자기마저 죽었으니 억울했을 텐데 말이다. 양반은 죽어도 양반이라는 걸까? 그들은 너무도 우아하고 고상해서 한 따위는 품지 않고 그냥 구천을 떠돌 뿐일까?


  게다가 모든 일의 원인은 시아버지에게 있는데, 이 아저씨 그냥 뒷전으로 물러나서 방관만 하고 있다. 나름대로 뭔가 한다고  큰소리는 치지만, 힘든 일은 다 하인에게 시킨다. 심지어 귀신과 맞서 싸우는 것 역시 막내며느리의 몫이었다. 원흉은 그 인간인데 말이다.


  막바지에 다다르면, 두 여자가 맞대결을 펼친다. 한 명은 죽어버린 자신의 아기와 자신을 위해, 다른 한 명은 이제 태어날 자신의 아기와 자신을 위해……. 하지만 자신을 위한다기보다는, 자식을 위해서 싸운다는 것이 맞는 말 같다. 한 쪽은 한을 위해, 다른 쪽은 미래를 위해.


  광선검 또는 레이저 빔이라는 놀라운 비밀 병기를 가지고 싸우는 두 여자. 귀신 시어머니는 그것을 눈에 달았고, 막내며느리는 가슴에 장착했다. 일본 애니 ‘그레이트 마징가’에 나온 여자 로봇이 생각났다. 가슴 미사일을 능가하는 가슴 레이저빔! 멋지다! 잘 나가다가 막판에 영화가 황당해지긴 한다. 막내 조카가 즐겨 보던 특촬물이나 전대물도 아니고.


  그 부분만 빼면, 아주 무서운 영화였다.


  PS. 이계인씨가 머슴으로 나온다. 다소 모자라지만, 착하고, 세상을 달관한 철학가 같은 대사를 중얼거린다. 그리고 희극적이지만 슬픔을 숨기고 있으며, 실마리를 주고 때로는 긴장감을 주기도 한다.


  처음에는 귀신을 속이고자 막내며느리를 머슴 이계인씨의 색싯감으로 데려온다. 그도 그렇게 알고 있었고 말이다. 그러나 주인집 막내아들이 귀신 따위는 유명 도사님이 주신 검으로 죽이겠다고 큰소리치자, 결국 원래 계획대로 혼인을 치르기로 한다. 장가간다고 좋아했지만 졸지에 결혼이 취소되자 애써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는 이계인씨. 그 때 대사가 이러했다. 


  "도련님은 아무도 시집오겠다는 사람이 없으니, 이번에 하셔야쥬. 지는 나가면 여자들이 줄을 섰다니까요."


  그러나 큰소리치던 도련님은 귀신 잡는다는 칼 한 번 못 휘두르고 죽어버린다. 그리고 이계인씨는 홀로 남은 막내며느리를 은근슬쩍 도와주는데……. 그 모습을 보니 갑자기 박진영씨의 노래가 떠올랐다.


  "니가 사는 그 집 그 집이 내 집이었어야 해……."


  이런 마음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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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제 - Diabolique, 1996

  감독 - 제레미아 S. 체칙

  출연 - 샤론 스톤,이자벨 아자니,채즈 팔민테리,캐시 베이츠

 

 

 

  미리 말해두지만, 디아블로가 아니다. 그것은 게임 이름이고 이 영화 제목은 디아볼릭이다. 나만 헷갈렸나…….

 

  소설 '악마 같은 여자'를 원작으로 한 프랑스 영화 ‘디아볼릭 Diabolique, 1955’을 리메이크한 작품으로, 미국에서 만들어졌다. 캐스팅은 그 당시로는 초호화여서, 남편 가이 역에는 채즈 팔멘터리, 병약한 부인 미아 역에는 프랑스 여배우 이자벨 아자니, 애인 니콜 역에는 샤론 스톤 그리고 형사 역에는 캐시 베이츠가 열연하고 있다.

 

  내용은 예전 영화와 비슷하다. 교장 가이는 학교를 마음대로 주무르고, 부인과 애인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나쁜 남자이다. 그래서 두 여자는 그를 죽이기로 공모한다. 니콜의 집으로 그를 초대해 수면제가 담긴 술을 먹인다. 그리고 욕조에 익사시킨 뒤, 학교 수영장에 버린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시체는 발견되지 않고, 그가 살아있다는 흔적만 자꾸 나오는데…….

 

  병약한 부인 역에 이자벨 아자니는 그야말로 딱 어울렸다. 그녀가 푸른 눈을 동그랗게 뜨고 머리를 풀어헤치고 있으면……. 소녀 같은 분위기의 하얗고 풍성한 잠옷 원피스를 자주 입고 나오는데, 창백한 얼굴에 긴 검은 머리는 영락없는 처녀귀신이다.

 

  반면에 샤론 스톤은 딱 달라붙는 옷차림에 몸매를 아낌없이 보여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짧게 자른 머리에 빨간 립스틱을 발라 강하고 섹시한 팜므 파탈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시체가 담긴 궤짝을 나르는 장면에서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그녀의 엉덩이는 너무도 매력적이었다. 거기다 가이와 섹스를 나누는 장면도 옷을 벗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야했다.

 

사진 출처 - 다음 영화

 

  원작 소설과 56년 영화에서는 두 여자의 관계가 동병상련의 아픔을 겪는 사람들끼리의 동지애나 우정 정도로 묘사되며 은근슬쩍 넘어갔는데, 여기는 달랐다. 아마도 샤론 스톤이 영화 ‘원초적 본능’ 에서 보여줬던 이미지가 너무 강렬해서 그랬을 수도 있다. 아니면 그 이미지를 살리기 위해서 감독이 의도했거나.

 

  예전에 읽은 외국 단편 소설이 떠올랐다. 제목이나 작가는 까먹었다. 배가 아주 많이 고팠나보다. 그 소설에서는 약간의 우울증과 불안증에 시달리는 유명 작가 가 자살을 한다. 사인회였던가 하여간 그런 것 때문에 다른 곳에 왔는데, 자꾸만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문제는 그 일들이 그에게만 보이고 들린다는 것이다. 결국 그는 호텔에서 떨어져 죽게 되는데, 알고 보니 그의 매니저와 부인이 꾸민 일이었다. 두 여자가 돈과 사랑을 동시에 차지하기 위해 남편을 죽인 것이다. 소설의 마지막은 두 여자가 축배를 들면서 침대에서 포옹하는 걸로 끝이 난다고 기억한다. 그 당시 결말이 참 충격이었다.

 

  뜬금없이 소설 얘기가 나왔는데, 이 영화를 보면서 그 작품이 떠올랐다. 그렇게 나가도 괜찮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문일까? 영화는 반전에 반전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초반부터 분위기를 몰아갔기 때문에, 그런 결말이 나올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영화 후반에 캐시 베이츠의 미소가 모든 것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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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제 - Village Of The Damned

  원작 - 존 윈드햄의 소설 ‘미드위치 쿠쿠(1957)’

  감독 - 울프 릴라

  출연 - 리처드 버논, 조지 샌더스, 로렌스 네이스미스, 마이클 그윈

 

 

 

  영화 시작과 동시에  MGM 영화사의 사자가 두 번 울었다. 좋은 영화라는 의미이다.

 

  영국의 작은 시골 마을 미드위치. 어느 날 마을 사람들 모두가, 아니 마을에 있는 모든 동물이 동시에 잠이 들어버리는 기이한 일이 일어난다. 수도를 틀어놓고, 다림질을 하다가, 전화를 하다가, 버스를 몰다가 모두 일제히 움직임을 멈춘다. 마을을 중심으로 어느 정도 거리가 멀어지면 괜찮은데, 범위 안으로 들어가면 그냥 맥없이 잠에 빠지고 만다. 하지만 몇 시간이 지나자 모두들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깨어나 일상으로 돌아오는 듯 했다.

 

  그렇지만 그 날 이후, 마을 여자들에게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임신을 할 능력이 되는 여자들이 거의 다 아기를 가진 것이다. 17살밖에 안된 소녀에서부터 남편이 원양어선을 타고 나갔던 사람의 부인까지. 그리고 그들은 같은 날, 비슷하게 생긴 아이들을 낳는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의식을 공유하며, 다른 애들보다 빨리 자라고, 지능이 월등히 높으며, 심지어 초능력까지 발휘한다.

 

  처음에는 아이를 가졌다고 좋아했었지만, 사람들은 그들이 커갈수록 무서워하고 불안해한다. 그러다가 아이들이 사람을 죽이자, 급기야는 그들을 죽이자고 공모까지 한다. 물론 실패한다. 그렇게 위태로운 생활이 이어지던 중, 아이들은 마을을 떠나겠다고 선언을 하는데…….

 

  흑백영화였지만, 아가들 눈이 빛나면서 색이 바뀌는 장면은 오싹하다. 아직 말도 채 떼지 못한 아이들이 눈빛만으로 서로 의사소통을 하고, 다른 사람들을 조종하다니! 자기들에게 해를 끼친 어른들을 자살하게 만드는 장면은 그야말로 섬뜩 그 자체였다. 그냥 눈 색깔만 바뀌는 단순한 장면만으로, 피가 튀기지 않고 그야말로 귀여운 아이들이 단지 무표정하게 바라보고 있는 장면만으로 공포를 느낄 수 있었다.

 

  아이들의 리더격인 데이빗의 엄마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장갑을 입에 문 채 절규하는 장면에서는 마음이 아팠다. 사랑으로 낳고 길렀지만, 어느 순간 자신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아들이 있다는 좌절감, 공포, 안타까움 그리고 자신의 아들을 두려워하는 엄마의 죄책감 등등이 보였다.

 

  반면에 데이빗의 아버지이자 이 영화의 주인공인 교수 역시 처음에는 아이들을 관찰하고 연구하려는 마음이었다. 임신 소식에 기뻐했던 그였지만, 마을 여자들에게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면서 태도가 바뀐다. 그에게 데이빗은 아들이 아니라 관찰하는 실험 대상에 불과했다. 그래서 그가 마지막에 그런 결정을 내리게 된 것에는 어느 정도 공감을 한다. 실험을 더 이상 진행할 수 없는 모르모토는 대개 폐기처분하니까.

 

  도저히 자신의 힘으로는 통제가 되지 않는, 그 누구도 제어할 수 없고, 그들의 행동을 막을 수도 없는, 인간의 능력을 벗어나는 엄청난 존재. 그런 대상을 만나면 인간은 호기심을 갖고 다가간다. 한 번 다뤄보려고 한다. 그러다가 자신의 이해 능력을 벗어나면 두려워하며 배척하거나 경외한다.

 

  이 영화에서는 두려워하고 배척했다.

 

  그 아이들이 어디서 왜 왔는지는 알 수가 없다. 누가 모르모토인지도 알 수가 없다. 아이들인지 아니면 다른 마을 사람들인지 모르겠다. 각자 서로를 실험 대상으로 생각했을 수도 있다. 어쩌면 말이다.

 

  다만 알 수 있는 것은, 인간은 자신과 다른 존재를 무서워하고 거부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차별이 생기고, 미움이 싹트고 오해가 빚어지고 전쟁이 끝나지 않는 게 아닐까.

 

  이 작품의 획일적인 아이들은 공산주의를 상징한다는데 글쎄? 나에겐 나와 다른 존재에 대해 무서워하는 인간과 남들보다 우월하기에 자만심에 빠진 인간을 보여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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