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정반대의 마음 작동 1~2’를 쓰고 나서


신문이나 책을 읽으면 글감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러면 그 글감의 주제와 관련된 것들이 자연히 떠오른다.


‘정반대의 마음 작동’이란 글은 홍은희 저, <삶의 시간들>에서 하나의 부부싸움을 보는 남자들과 여자들의 시각이 정반대인 것을 보고 쓰게 된 글이다. 이 글을 보자마자 내가 경험한 것들이 떠올랐다. 그중 타인에게 오해를 받았던 경험을 써 넣었는데, 쓰고 나니 고등학생 때 금붕어가 죽은 일이 생각났다. 그런데 금붕어 얘기까지 쓰면 글이 길어지고 산만할 것 같아 두 개로 나눠 글을 완성했다.


‘의사소통의 어려움’을 주제로 하여 쓸 수도 있었는데, 그냥 정반대의 생각을 하는 사람들의 이상한 심리에 초점을 맞췄다. 글을 블로그에 올리고 나서 한 가지 빠뜨린 게 있다는 걸 깨달았는데, ‘금붕어 이야기’에서 금붕어가 한 명의 친구가 생긴 것에 대해 반길지 적대시할지에 대한 연구를 하지 않은 나의 실수를 넣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런 문장을 넣었어야 했다.


“상대의 마음 작동이 내가 예상한 것과 다르다고 해서 상대를 원망할 게 아니라 미리 상대에 대해 알고자 노력해야 했다. 가령 금붕어의 경우, 그 금붕어가 새 친구가 생기는 것을 좋아할지 싫어할지에 대해 알려는 노력이 내게 없었다. 책을 찾아서라도 금붕어의 특성을 먼저 공부했어야 했다.”


하지만 이 글을 고치진 않았다. 그냥 다음에 쓸 때 유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2. ‘익숙한 것들을 점검하라’를 쓰고 나서


이 글을 쓸 때 명언을 넣으려고 찾아본 명언 책엔 다음과 같이 딱 네 개의 명언만 있었다. 내가 쓰려는 ‘글의 주제’에 부합하는 명언들만 있었다는 게 신기하였다. 왜 다른 명언은 없을까. 얼마든지 다른 뜻의 명언이 있을 법한데. (여러분도 신기하지 않습니까. 다른 명언이 없다는 것이.)


모든 일은 익숙해지면 아무것도 아니다.(스위프트)

비관주의는 일단 거기 익숙해지면 낙관주의처럼 편안한 것이다.(아널드 베넷)

아름다움은 곧 애인에게 익숙해져서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게 된다.(J. 애디슨)

역경에 익숙해지면 그것은 더 이상 괴롭지도 않다.(클라우디아누스)

- <세계의 명언 2>, 해누리, 369쪽.


3. ‘영장류 인간과(科) 동물도감’의 리뷰를 쓰고 나서


책 제목이 영장류 인간과에 속하는 동물, 즉 인간에 대한 도감이라는 뜻 같다. 별점을 매길 때 네 개의 별표에만 점수를 줬다. 다섯 개의 별표에 모두 점수를 주지 않은 이유는, 나는 재밌게 읽었지만 그래서 이런 책을 또 사 볼 용의가 있지만, 에세이라는 장르에 관심 없는 독자나 인간관찰에 관심 없는 독자에겐 시시할 수 있겠다 싶어서였다. 별점을 보고 책을 구입하는 독자들을 염두에 두고 신중을 기했던 것이다.


나는 ‘인간’에 대해 관찰한 글은 모두 좋아한다. 이 책에 있는 하나의 예를 소개하면 이런 글이 있다. 인간은 부모의 장례식장에서 슬픔도 모른 채 잔칫집처럼 설치다가 장례식이 끝나고 한참이 지나서야 비로소 부모의 죽음을 슬퍼하며 울 수 있는 존재임을 보여 주는 글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슬픔보다 놀람이 앞서 절절한 눈물을 흘리지도 못한 채 장례식이 끝났다. 문상객들의 밤참은 초밥이 좋을지, 아니면 이틀 연속으로 같은 음식을 내놓기엔 죄송하니 돌아가신 아버지가 좋아했던 장어가 어떨지, 그런 걱정을 하고 있어서 차분히 울 수도 없었다.”(51쪽)


“유족 되시는 분들은 앉아 계세요.”(52쪽)


“그런 야단을 맞으면서도 방석이 모자라네, 재떨이는 준비했나, 하며 분주히 뛰어다녔다. 아버지는 아마도 저 세상으로 편히 가시지 못했을 것이다.”(52쪽)


그러고 나서 한참 지난 뒤에야 아버지의 슬픔을 느낀다. 나는 이런 불완전한 인간의 모습에 마음이 끌린다.


4. ‘우리는 자신의 마음을 읽을 수 없다’를 쓰고 나서


한 작가의 전작을 반 이상 읽고 나면 결국 작가가 어떤 메시지 하나를 독자에게 주고 싶어서 인물을 달리하고 사건을 달리하며 작품을 변형해서 썼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나 역시 ‘인간’에 대해 관심을 갖다 보니 비슷한 글을 많이 쓰게 되는 것 같다. 주제는 같으나 다른 표현으로 쓴 글들이 많다. 내가 쓴 글들의 주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우리가 아는 것은 인간의 일부일 뿐.

인간은 어리석다.

인간은 정확히 대답할 줄 모른다.

인간은 자신의 마음조차 읽을 줄 모른다.

잘못을 저지르고 살기 때문에 인간인 것이다.  

 

이것들을 하나로 압축해 표현하면 ‘인간은 부족한 존재이다’가 된다. 내가 알기로 인간은 불완전하고, 불합리하고, 오해의 왕이면서 착각의 왕이며,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다. 또 하나 덧붙이자면 인간은 모순덩어리이다. 엉뚱하고 우스꽝스러운 면이 있어서 독해(讀解)가 불가능한 존재이다.

인간이 독해 불가능한 존재임을 잘 알기에 어떻게든 독해 가능한 존재임을 밝혀 보려는 심리학에 흥미를 느끼게 된다.


5. <어느 독서광의 노트>라는 페이퍼 제목을 짓고 나서


독서광?(이건 건방지다), 독서애호가?(이건 길다), 독서가?(이건 밋밋하다)


조지 오웰의 에세이 <나는 왜 쓰는가>에 ‘어느 서평자의 고백’이란 글이 있다. 조지 오웰이 서평을 쓰던 시절에 대해 쓴 글인데(그는 서평을 많이 썼다), 난 그 제목에 마음이 끌렸다. 그래서 나도 그 제목과 비슷한 이름을 짓고 싶다고 생각하던 중, 떠오른 게 ‘독서광’이었다. 그래서 ‘어느 독서광의 노트’라고 정한 것이다. 여기에 책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독서광’이라고 써서 블로그에 올려 놓고 나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주 내가 건방을 떠는구나’ 싶어서였다. 그래서 다른 것으로 고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얼마 뒤 생각이 달라졌다.


스스로 ‘독서광’이라고 하면 잘난 척하는 것 같아 고치려 했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자신이 독서광임을 나타내는 것이 잘난 척이라고 여기는 것 자체가 잘난 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독서광임을 자랑스러워한다는 뜻이니까. 그런데 그저 책을 열광적으로 좋아할 뿐인데, 왜 독서광임을 자랑스러워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야구광이나 영화광이나 낚시광이나 무엇이 다를까. 그래서 그냥 쓰기로 했다.


<어느 독서광의 노트>, 맘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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