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장류 인간과科 동물도감 - 나오키상 수상작가 무코다 구니코의 유쾌한 인간관찰기
무코다 구니코 지음, 곽미경 옮김 / 강 / 2011년 7월
평점 :
절판


 

독서는 ‘자기 내면으로의 여행’이며 ‘자신과의 대화’라고 한다. 그 이유를 이 책 <영장류 인간과(科) 동물도감>이 알게 한다. 이 책을 읽으면 독서가 작가의 글을 읽으며 동시에 독자인 ‘나’를 읽는 행위임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일본 드라마 작가로 알려져 있는 무코다 구니코의 에세이 38편이 담겨 있는 책이다. ‘유쾌한 인간관찰기’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인간이 가진 불편한 진실에 주목했다.


불편한 진실 첫 번째.




길을 걷다보면 맞은편에서 부모형제가 걸어오고 있을 때가 있다. 이럴 때 나는 어쩐 일인지 너무 당황스러워 갈팡질팡하며 어디다 시선을 둘지 모르고 만다.


아, 하고 무심코 손을 들어 알은체하는 일은 거의 없다. 대부분은 알아봤다는 걸 상대가 눈치 채지 않도록 모른 체한다. 서로 스쳐 지나가기 직전에 그제야 알아본 듯이 좀 무뚝뚝하게 말을 건다.


- ‘아는 얼굴’, 22쪽.





이 글을 보고 깜짝 놀랐다. 나 자신의 경험을 딴 사람이 글로 옮겨 놓은 듯해서다. 나만 그런 줄 알았다. 이십대에 있었던 일이다. 혼자 가는 길에서 우연히 아버지를 만났는데 못 본 척하고 그냥 지나가고 싶었다. 그런 기분에 대해 그 누구하고도 얘기해 본 적이 없다. 그런 사실이 있었다는 것조차 잊어 버렸다가 이 글을 읽고 나에게도 그런 적이 있었음을 알았을 정도이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는 안도감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작가의 능력에 감탄했다. 이런 걸 끄집어내어 글로 쓸 수 있다니.)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가장 친숙하고 가장 사랑하는 가족을 밖에서 우연히 보게 되면 반가워서 달려가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런데 피하고 싶은 당혹감은 왜 일어날까. 어색함과 쑥스러움 때문일까. 나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 때문일까. 상대가 부끄러워할 것 같아서일까.


불편한 진실 두 번째.




(태풍 오는 날에) 손전등을 비춰가며 화장실에 가고, 비바람 소리를 들으며 잠자리에 드는 것은 어린 마음에도 이상하리만치 흥분되는 일이었다. 형제간 싸움도, 부부 싸움도 태풍이 부는 밤만큼은 휴전이었다. 엄마와 할머니 사이의 약간 서먹한 기운도 수그러들었다. 그렇게 온 식구가 하나로 뭉쳤다. 나는 그런 게 너무 기뻤다.


이제나저제나 몹시도 긴장하며 기다렸던 태풍이 빗나가는 것만큼 재미없는 일이 또 있을까.


어른들의 말투나 몸짓에서도 (태풍이 빗나간 것에 대해) 분명 아쉬움 같은 게 느껴졌는데, 겉으로는 그런 걸 요만큼도 내색하지 않는 게 조금 얄미웠다.



- ‘태풍 오는 날’, 74쪽~75쪽.




인간 안에는 분명 명쾌하게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걱정하던 태풍이 무사히 지난 간 것에 안심하기보다 어떤 아쉬움 같은 게 남아 있는 이 경우도 그렇다. 이제 더 이상 긴장감을 느낄 수 없음에 대한 아쉬움일까, 가족애가 오가는 시간이 끝났음에 대한 아쉬움일까.


불편한 진실 세 번째.




식사 시간에 온 손님은 반드시 밥을 먹고 왔다고 한다.


“뭐, 괜찮지 않은가요. 초밥 먹을 배는 따로 있다지 않아요.”

“정말 먹고 왔다니까요. 조금도 들어갈 배가 없어요.”

“아휴, 그러지 마시고 조금만 드셔보세요.”

“그럴까요? 그럼……”


아침을 어중간하게 먹어서 아직 배가 고프지 않다는 손님에게는 “그냥 맛이라도 ……”라고 권하면 대부분은 접시를 깨끗이 비운다. 하지만 먹고 왔다는 말을 해놓고 도중에 노선을 변경하는 건 모양새가 좋지 않다고 생각해서인지 끝까지 젓가락도 대지 않고 돌아가는 손님도 있다.


- ‘뻔한 인사말’, 86쪽~87쪽.




똑같은 상황이 연출되는 것을 보면 일본인이나 한국인이나 사람은 다 같은 모양이다. 남에게 폐를 끼치기 싫어서 밥 먹고 왔다는 말을 한 것까진 괜찮다. 그런데 만약 한 젓가락쯤 먹고 싶은 상황이 되어서도 자신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젓가락을 대지 않아야 한다면, 그런 인간의 모습은 우스꽝스럽다.


다음과 같이 작가의 유머를 발견하는 즐거움을 주는 글도 있다.




(안경테가 망가져서) 노안경을 손보려면 (잘 보이지 않아) 또 하나의 노안경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손전등으로 손전등을 찾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나만 있어도 그걸로 충분하다.


깨끗하게 해놓지 않으면 혼이 날 것 같아 나는 비누를 씻기 위한 비누를 찾았다. 물론 비누를 깨끗이 하려면 더러워진 그 비누를 쓰면 된다는 걸 곧바로 깨닫고 혼자서 웃고 말았지만.


- ‘혼자서 웃고 말았다’, 78쪽~82쪽.





작가의 따뜻한 마음을 느끼게 해 주는 글도 있다.




시대극을 볼 때 가장 마음 아픈 건 애송이나 하급관리가 죽는 장면이다. 악당 두목을 따른 죄밖에 없건만, 버러지같이 무참히 죽는다.


나 같은 인간에게 가장 큰 위로가 되는 순간은 시체가 되어 쓰러져 있는 배우들이 과격한 난투 끝에 숨이 가빠졌는지 참았던 숨을 후우 하고 내쉬거나, 거친 숨결 때문에 배가 불룩거리는 걸 보았을 때이다. 엄격한 연출가는 이런 장면을 NG로 판단해 다시 찍자고 하는데, 제발 그대로 내버려두었으면 좋겠다. 아아, 다행이다. 정말 죽은 게 아니야. 이제 저 사람들은 1만 엔이든 1만 3천 엔이든 일당을 받고 돌아간다. 이렇게 안심하는 마음 약한 관객도 있는 것이다.


- ‘베다’, 220쪽~221쪽.





이처럼 작가들의 훌륭한 점의 하나는 우리들이 무심한 채 스쳐 지나가는 생각들을 잘 포착해서 글감으로 만드는 그 ‘찾음’의 능력일 것이다. 밀란 쿤데라가 <소설의 기술(책세상 출판)>에서 인용한 다음의 글도 그것을 말하고 있다. 
 

“시인은 시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다.

시는 저 뒤쪽 어디에 있는 것

오래오래 전부터 그것은 거기에 있었고

시인은 다만 그걸 찾아내는 것일뿐.”(얀 스카첼)  
 

나는 <영장류 인간과(科) 동물도감>이 배달되던 날, 책을 펼치자마자 그날로 다 읽어 버렸다. 부담 없이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최근에 읽은 조지 오웰의 에세이집 <나는 왜 쓰는가(한겨레 출판)>와 비교한다면, 조지 오웰의 에세이가 세계의 ‘무거운’ 진실을 전하는 글이라면, 무코다 구니코의 에세이는 개인의 ‘가벼운’ 진실을 전하는 글이다. 그건 그것대로 이건 이것대로 매력이 있다.     


독자에 따라서는 정치적 목적을 중시하는 조지 오웰의 글에 더 가치의 무게를 둘 수도 있겠다. 하지만 우리들의 삶이란 그런 무거움만으로 채워져 있지도 않고 또 무거움만으로 채워져서도 안 된다는 생각에서 이 ‘가벼운’ 내용의 책은 읽을 만하다. 코믹한 영화를 보듯 웃음 짓게 만드는 유쾌함과 봄 소풍을 가는 발걸음 같은 경쾌함을 기대하는 독자라면 더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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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1-08-18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지 오웰과 같은 이의 글만 읽을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것도 일종의 허영심이겠죠.평이하고 잔잔한 글도 좋은데 말이죠.하긴 조지 오웰의 글도 늘 심각한 주제만 다룬 것만은 아닌데요.

페크pek0501 2011-08-19 11:56   좋아요 0 | URL
맞아요. '나 좋을 대로'와 같은 가벼운 에세이도 있어요. ㅋ

평이하고 잔잔한 글의 매력을 아신다니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