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칼럼> 누군가를 이해할 수 없을 때


며칠 전, 중학교 2학년인 딸이 전화통화로 친구와 다투는 것 같았다. 여러 번 전화가 오기도 하고 전화를 걸기도 하면서 밤 열한 시가 넘도록 통화가 계속되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자야 할 시간이니 그만 자라고 했을 텐데, 울먹이며 말하는 아이를 보니 자기 나름대로 심각한 것 같아 편히 잠들기는 틀렸다는 생각이 들어 그냥 놔 두기로 했다.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그런 뜻으로 한 얘기가 아니야”, “네가 오해한 거야”라고 말하기도 하고 “그건 내가 오해한 것 같아”, “미안해”라는 말을 하기도 하였다. 밤 열두 시가 되어서야 서로 화해가 되었는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고선 전화를 끊었다.


아이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어서 들어 보았더니, 서로 상대방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인한 잘못된 의사소통의 문제였다. 어른도 상대방에 대해 제대로 이해를 하지 못해 오해가 생겨 서로 섭섭한 일이 많은데, 어른에 비해 미성숙한 중학생들에겐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겠구나 싶었다.


우리는 공중을 날아다니는 잠자리의 기분을 알 수 없으며, 바닥을 기어다니는 개미의 기분을 알 수 없다. 그것을 알려면 잠자리가 되어 보아야 하고, 개미가 되어 보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타인의 마음을 알려면 타인과 똑같은 삶을 사는 사람이 되어 봐야 하므로 타인에 대한 완전한 이해는 사실 불가능하다. 그래서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문제일지 모른다. 고부간의 갈등이 생기고 부부간의 갈등이 생기는 것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해 의사소통이 순조롭게 되지 않아서일 경우가 많다.


어느 지인의 장례식장에서였다. 고인의 부모가 문상객들을 환한 웃음으로 맞이하고 있었다. 사십대에 암으로 죽은 지인이기에 안타까움이 더 컸고, 그래서 큰 슬픔에 잠겨 있을 그 부모님을 어떻게 뵈어야 하나, 하는 생각으로 갔던 곳이라 그 부모님의 모습에 충격을 받았었다. 나의 상상으론 자식의 죽음 앞에 부모가 기절을 하든지, 아니면 최소한 삶의 의욕을 잃은 침울한 표정의 얼굴을 하고 있어야 했다. 나는 그 부모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이방인’이라는 소설이 있다. 주인공 뫼르소는 양로원에서 지내던 어머니의 부음 소식을 알리는 전보를 받고도 평소와 다름없이 식당에서 태연히 점심을 먹는다. 또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아랍인을 권총으로 쏘아 죽이고 나서 살인의 동기에 대하여 “그것은 태양 때문이었다.”라고 말한다. 찌는 듯한 더위와 뜨거운 태양 때문에 총을 쏘았다는 것이다. 뫼르소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정말 그렇게 느껴서 말한 것이다. 이런 뫼르소를 우리는 이해할 수 있을까.


마침내 뫼르소에겐 사형 선고가 내려진다. 검사는 이렇게 말한다.




“배심원 여러분, 어머니가 사망한 바로 그 다음날에 이 사람은 해수욕을 하고, 부정한 관계를 맺기 시작했으며, 희극영화를 보러 가서 시시덕거린 것입니다.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알베르 카뮈 저, 이방인, p126, 책세상>




검사의 말에 의하면, 어머니가 사망한 바로 그 다음날에는 해수욕을 해서는 안 되고, (이성과) 부정한 관계를 맺어서는 안 되며, 희극영화를 보러 가서 시시덕거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어머니의 죽음 뒤에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은 정상적인 사람이 아닌 것이며 도덕적인 사람이 아닌 것이다.


정상적인 사람과 비정상적인 사람으로 나눠 생각하는 우리의 사고는 우리가 모든 사람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는 것에 근거해서 생긴 것 같다. 그러나 우린 모든 인간을, 모든 인간의 행동과 생각을 이해할 수 없다. 사람은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살아온 삶의 역사가 다르고 사고방식이 다르며 생활방식이 다르다. 이렇게 나와 아주 다른 타인을 우리는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타인에 대한 완전한 이해란 불가능한 일이라는 전제로, 한 가지 잣대로 누군가에 대해 정상적인 사람인지 아닌지를, 또는 도덕적인 사람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타인에 대해 우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자세를 가져야 하고, 그래도 이해가 되지 않을 땐 ‘사람은 각기 다르다’라는 생각으로 이해하길 포기해야 하는지 모른다. 중요한 것은 인간에겐 남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인지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디즈레일리가 말했듯이 ‘경험은 생각의 산물이고 생각은 행동의 산물’이라고 볼 때, 타인의 경험을 똑같이 공유할 수 없기에 이런 말도 가능하다. ‘나처럼 살아보지 않고서는 누구든 나를 비난할 수 없다.’


남들이 보기에 엉뚱하고 우스꽝스러운 뫼르소. 그는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 때문에 의사소통이 원활히 이뤄지지 않아 소외감을 느꼈을 것이다. 우리 모두에겐 어딘가 뫼르소와 닮은 데가 있을 것이다.


누군가를 이해할 수 없을 때 그를 비난하는 대신 ‘뫼르소’ 같은 사람인 모양이다, 라고 생각하며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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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카뮈 저, 이방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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