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론> 인류의 종족 유지 본능 때문에 사랑을 한다?
남녀 간에 엄숙하고 뼈에 사무친 사랑의 고뇌와 환락은 바로 인류의 종족 유지라는 대전제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만일 그게 아니라면 인류는 그 엄숙하고 고뇌에 찬 사랑에 자신의 목숨을 바치지도 않았을 것이며 사랑이 생의 목표가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 <사랑은 없다>, 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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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연인에 대한 절대적인 사랑과 찬미가 아무리 훌륭하고 아름다운 시라 해도 그 최종 목적은 오직 인류의 종족 유지라는 사명감을 완수하는 데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 <사랑은 없다>, 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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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는 남자와 여자의 만남이 늘 2세에 대한 잠재적인 형상을 염두에 두고 이뤄진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남자는 2세를 위해 체력이 뛰어나고 아름다움을 갖춘 여성을 선호하며, 이 조건이 갖추어질수록 사랑은 더욱 강렬해진다는 것이다. 결국 두 연인의 결합은 아이를 낳음으로써 곧 그들 개체의 생명의 연장을 뜻하는 일이 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재혼하기 위해 연애를 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재혼하려는 사람들 중에는 아이를 낳지 않기로 전제하고 연애를 하는 경우가 있다. 이럴 때 아이를 낳지 않기로 합의한 관계에서도 사랑에 빠지는 경우를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또 불륜 관계는 어떠한가. 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사랑해서는 안 될 상대를 어쩔 수 없이 사랑하게 되어 괴로워하는 사람에 대해선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불륜의 사랑을 하는 사람들은 2세 따위에는 관심이 없을 텐데 말이다. 사랑의 강물에 빠지면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제하지 못해 강물 속으로 점점 들어가고 마는 경우의 사랑을 생각하면 사랑은 이성적이라기보다 비이성적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무분별하지 않은 애인은 애인이 전혀 아니다(하디),
사랑에 빠지면 누구나 장님이 된다(프로페르티우스),
사랑은 결점을 보지 못한다(T. 풀러).’
이런 명언에서 알 수 있듯이 사랑엔 이성이 설 자리가 없는 것 같다.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을 만큼 맹목적이 아니라면 그건 사랑이 아닐 듯싶다. 그러므로 2세를 생각할 만큼 계산적인 이성이 자리하고 있다면 그건 진실한 사랑이 아닐 것이다.
훗날 낳게 될 자식을 위해 좋은 유전자를 갖춘 상대에게만 사랑에 빠진다면 짚신에게는 짝이 없겠다. 이에 대해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짚신에게도 닮고 싶은 장점이 하나라도 있게 마련이오. 그리고 좋은 유전자를 가진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것은 거의 본능적이고 무의식적이오.”라고.
또 만약 2세에 대해선 관심이 없는 동성연애자들이 서로 사랑하게 되는 경우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라고 묻는다면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대답할 것 같다. “난 남녀관계에 대해서만 언급한 것이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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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쇼펜하우어 저, ‘사랑은 없다’를 읽고 그의 글에 반론을 제기해 보았다. 위대한 사상가의 생각에 지지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고 가정해 보면, 이런 반론을 제기하는 글은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듯하다.
쇼펜하우어의 저작의 가치는 그의 말이 옳은지 그른지 하는 문제에 있는 게 아니라고 본다. 중요한 건 그의 메시지가 우리로 하여금 그 말의 옳고 그름을 따지기 위해 곰곰이 생각하게 만든다는 데에 있다고 믿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들에 대해 쇼펜하우어는 반론의 글을 썼고, 나는 그의 글에 대해 반론을 썼다. 그의 생각에 반론을 제기해 봤지만 그의 생각이 옳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이 옳은가, 하는 판단은 물론 독자들의 몫이다.
이 글과 관련한 책 : 쇼펜하우어 저, <사랑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