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칼럼>

희생의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


이번에 큰딸이 ‘수능’이라 일컫는 대입 시험을 봤다. 그리고 수시모집에서 낙방의 고배를 마셨다. 아이가 공부를 열심히 했다고 믿었기에 나의 실망은 컸다. 아이는 거의 매일, 학교에서 수업을 마치고 곧장 독서실로 가서 공부하여 밤 열두 시 넘어 집에 돌아왔다. 그러면 나는 자지 않고 기다렸다가 간식을 주고 말벗을 해 주고 새벽 한 시가 되어야 잘 수 있었다. 그것이 내가 고등학생 자식을 둔 어머니로서 삼 년 동안 했던 뒷바라지였다. 그런데 불합격이라니, 그 결과 앞에서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새어 나왔다.


“내가 삼 년간 새벽 한 시에 자고 여섯 시 반에 일어나 새벽밥을 먹인 결과가 불합격이란 말이지.”


이에 대해 아이가 태연히 웃으며 말했다. “내가 엄마보고 그냥 자라고 했잖아.”


사실 아이의 말이 맞다. 아이는 간식만 식탁에 챙겨 놓고 먼저 자라고 내게 여러 번 말했었다. 그 말을 듣지 않은 건 나였다. 다른 엄마들은 아이가 힘들까 봐 학교와 학원을 자동차로 데려다 주기도 하고, 아이가 밤새 공부하면 옆에서 뜨개질을 하기도 한다는 말을 들어서, 이 정도의 뒷바라지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그렇게 해 주었다. 그래야 내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 그래야 편히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아서 했던, 나 스스로의 선택인 셈이다. 아이가 집에 들어오지 않은 밤에 편히 잘 만큼 내 신경은 무디지 않으니까. 그런데도 나는 자식으로 인해 수면 부족을 견디며 지낸 것을 대단한 희생으로 착각했었나 보다.


사실 나는 내 생활로 바빠 아이 공부에 마음을 크게 써 주지 못했다. 그저 밤잠을 적게 잔 것 빼고는 특별히 뒷바라지한 게 없다. 그런데도 아이의 낙방에 서운함과 허탈함을 느꼈으니 나보다 더한 어머니들은 어땠을까, 헤아려진다.


자식을 위해 부모가 희생하는 삶의 대표적인 경우가 ‘기러기 아빠’의 삶이 아닐까 한다. 그 아내도 힘든 삶을 살기는 마찬가지일 게다. 나는 ‘기러기 아빠’의 사연을 들을 적마다 이런 생각이 떠오른다. 아이가 부모가 바라는 대로 성공의 길을 걷게 되면 모를까, 만약 아이가 부모의 기대치에 이르지 못하면 그 부모들은 어떤 기분이 들까, 부모가 “너 하나 외국에서 공부시키겠다고 우리 부부가 떨어져 사는 것도 감수했는데, 결과가 이게 뭐니?”라고 말했을 때 그 자식이, “누가 엄마 아빠한테 그렇게 떨어져 살라고 했어요?”라고 한다면….


희생은 부모 자식 간에만 있는 게 아니라 부부 사이에서도 있다. 어느 부부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누가 알뜰하래?”


부부 이야기 하나. 남편은 명품을 좋아하는 사람이고 아내는 알뜰한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함께 백화점 쇼핑을 갔다. 남편은 자신의 옷과 선글라스를 값비싼 것으로 샀고 아내는 아무 것도 사지 않았다. 집에 돌아온 부부는 싸움이 났다. 아내가 남편에게 한 말은 이러했다. “난 그렇게 알뜰하게 사는데, 당신은 꼭 그렇게 비싼 물건을 사야 돼?” 이에 대해 남편이 말했다. “당신도 비싼 물건 사지 그랬어?” 그리고 이어진 말은, “누가 알뜰하래? 당신이 알뜰해서 하나도 고맙지 않아, 오히려 그래서 피곤해.”였다. 아내는 어이가 없었다.


“누가 당신한테 아들을 낳아 달라고 했어?”


부부 이야기 둘. 마흔 살이 다 되어 뒤늦게 늦둥이를 낳은 아내의 사연 또한 이와 비슷하였다. 딸 둘을 낳고 세 번째로 낳은 자식이 그동안 열망하던 아들이었는데, 남편은 아이의 기저귀조차 갈아주지 않았고 아이를 좀 봐 달라고 하면 고단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내가 남편에게 따졌다. “난 당신이 아들이 없어서 허전할까 봐 힘든 걸 감수하고 아들을 낳았어. 난 당신을 위해서 그렇게 했는데, 당신은 아이를 위해 하는 일이 없잖아.” 이에 대해 남편은, “누가 당신한테 아들을 낳아 달라고 했어? 괜히 낳아서 아이의 울음소리에 밤잠도 못 자게 하잖아.”라고 응수했다. 아내는 할 말을 잃었다.


알뜰한 아내는 남편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 스스로 알뜰히 살아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 스스로 그렇게 살았다고 여겼어야 옳았다. 늦둥이를 낳은 아내 역시, 남편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편에게 아들을 낳아 주고 싶은 자신을 위해서 스스로 늦둥이를 낳았다고 여겼어야 옳았다. 그래야 불행을 피할 수 있었다.


기러기 아빠의 가정이 생겨난 것도 누구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닌 자신들의 선택에 의해서다. ‘자식 때문에’라기보다는 ‘외국에서 조기 유학을 하는 자식을 두고 싶어서’, ‘외국 유학으로 남들보다 월등히 사회적 성공을 거둘 자식을 두고 싶어서’, 그런 욕심에 그런 결정을 했다고 생각하는 게 옳다. 그래야 자식에게 대가를 바라지 않게 된다.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라고 넋두리가 생기기 시작하면 부모 자식 간 좋은 관계가 되기 어렵다. 그런 부모에 대해 자식이 부담스럽게 생각할 게 뻔하고 어쩌면 짜증을 느낄지도 모른다.


결국 자신이 한 일에 대한 대가를 바라게 되면 그 대상을 원망하거나 자기혐오에 빠지기 십상이다. 그러므로 누구를 위해서 무엇을 했든지 그것은 타자를 위해서가 아닌, 나 자신을 위해서 한 일이라고 보는 마음자세를 갖는 것은 타자와의 관계를 위해서도,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


도스토예프스키(소설가)는 “자기를 희생하는 것만큼 행복한 일은 없다.”라고 하였다. 누군가를 위해 자기를 희생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분명 행복한 일이다. 이 행복을 불행으로 맞바꾸지 않으려면, 그 결과에 실망이 되는 일이 있더라도 그 탓을 상대에게 돌려서는 안 된다. 자신이 선택한 일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자신에게 있으므로.


.....................................................................................


<후기>


수시모집에서 낙방한 아이는 결국 정시모집에선 합격하여 자신이 원하는 학교, 자신이 원하는 학과의 대학생이 되었다. 내 생활로 바빠 밤잠을 적게 잔 것 빼고는 엄마로서 마음을 크게 써 주지 못했는데도, 대학에 무난히 합격해 큰 기쁨을 안겨 준 딸에게 이 글을 통해 고마움을 전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바밤바 2010-03-07 0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보다 연배가 꽤나 있으시군요. 저는 공유하는 문제의식이 비슷해서 제 또래인 줄 알았습니다. ^^;; 따님께 축하한다고 전해 주세요. ㅎ

님의 글또한 라캉이 이야기한 '욕망의 주체'란 주제로 환원될 수 있을 듯 보이네요.
내가 추구하는 행복이 아니라 타인의 행복에 더 신경을 쓰다보니 저런 자잘한 충돌이 생긴 듯. 라캉이 말했듯 인간이 어릴 땐 엄마란 존재의 눈치를 보며 살고 커서도 그러한 종속 관계가 대상만 바뀌었을 뿐 여전히 삶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이기에 결국 제 욕망이 아닌 타인의 욕망을 좇으며 산다는 뭐 그런 말.
지나치게 환원론적이 말일 수도 있지만 어차피 대부분 사안은 지극히 같은 뿌리에서 나온 잔가지인 경우가 많은 듯 합니다. 좋은 밤 되세요~ㅎ

페크pek0501 2010-03-07 00:59   좋아요 0 | URL
그렇죠, 같은 뿌리에서 나온, 거기서 거기인 얘기, 그런 경우가 많죠. 책을 읽다보면 같은 내용의 글을 저자마다 각각 다르게 표현하고 있구나 싶을 때가 많아요. 그래서 그런 말이 생각나죠. '하늘 아래 새로울 것은 없다. 그저 새로운 방식이 있을 뿐이다.' - 내용은 같은데 표현방식만 다르다는...

젊은 친구를 만나서 영광?입니다. 사실 전 바밤바님이 최근까지 여자인 줄 알았답니다. ㅋㅋ 그런데 님의 글 중에 '누나'라는 낱말을 쓰길래 알았어요.

좋은 글 많이 쓰세요. 종종 들르겠습니다. 저는 '많이 읽고 적게 쓰자'주의거든요. 반가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