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양장)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0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알랭 드 보통 지음 / 청미래


“한 번 만난 사람을 사랑한다면 그건 사랑일까 착각일까”


열정과 사랑을 구분할 수 있을까. 나의 사랑이 변하는 것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상대방이 변하기 때문일까. 사람에 따라 사랑의 개념도 각기 다른가.


우리는 사랑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어쩌면 사랑을 모르는 채 잘 안다고 착각하고 살고 있는지 모른다. 이 책을 읽고 나니 내가 사랑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제 조금 알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도(道)라고 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다’라는 노자의 말의 형식을 빌려 말하면 ‘안다고 말하는 것은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반대로 ‘무엇에 대해 알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잘 모르겠다’라고 말한다면, 이제 제대로 알기 시작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어떤 것에 대해 알기 시작하면 헷갈리는 법이니까.


누구나 그렇듯이 나도 젊은 시절에 연애 경험이 있고 그동안 연애소설도 많이 읽었는데도, 이 책 속엔 내가 새로 알아야 할 ‘사랑에 대한 지식과 정보’가 가득 차 있었다.


토머스 프리드먼(퓰리처상 수상 작가)에 의하면 ‘좋은 글이란 좋은 글과 좋은 분석이 결합된 것’이라고 한다. 나 역시 좋은 글은 좋은 분석이 밑바탕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 소설은 저자가 특유의 통찰력을 가지고 사랑에 대하여 분석하는 기법으로 썼는데, 그 분석은 탁월하다. 여기에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칸트, 몽테뉴, 스탕달 등의 이론까지 끌어들인 점은 매우 흥미롭다. 그래서 장르는 연애소설이지만 사랑 이론서 같이 읽혀진다. 두 남녀의 연애과정을 보여 주며 그 사이 사이에 사랑과 연애에 관한 이론적인 글들을 끼워 넣고 있다.


화자(남자 주인공)는 처음 만난 클로이라는 여자를 그날로 사랑하게 된다. 이렇듯 사랑은 상대방의 실체를 정확히 알기도 전에 분별없이 시작될 때가 많다. 이런 걸 진정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적어도 상대방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한 뒤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그 상대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당신이 지금 나를 사랑한다면, 그것은 당신이 내 전체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p85>

 

화자가 클로이를 처음 만난 장소는 비행기 안이다. 둘은 서로의 옆자리에 앉게 된다. 화자는 클로이와 자신이 옆자리에 앉을 이론적 확률을 계산한다. 이 수치는 둘이 만나기 무척 힘든 확률을 말하므로 그만큼 둘의 인연이 깊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듯 사랑이 시작되면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작은 것에도 의미를 부여한다.


사랑에 빠지는 일이 이렇게 빨리 일어나는 것은 아마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사랑하는 사람에 선행하기 때문일 것이다.<p27>


인간은 연애하고 싶어 하고 그 연애하고 싶은 마음이 누군가를 사랑하길 재촉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상대방을 사랑한다기보다 연애(또는 사랑)를 사랑하는 경우도 생기리라.


(중요한 것은) 나는 누구인가?가 아니라 나는 그녀에게 누구인가?였다.<p49>


이와 같이 사랑하게 되면 상대방의 눈을 통해 나 자신을 보게 된다. 그래서 옷을 입을 때조차도 내가 그에게 어떻게 보일까를 생각하며 거울 보며 점검을 한다.


몽테뉴는 말했다. “사랑에는 우리를 피해서 달아나는 것을 미친 듯이 쫓아가는 욕망밖에 없다.” 아나톨 프랑스 역시 “우리가 이미 가진 것을 사랑하는 것은 관례적이지 않다”는 말로 같은 입장을 보여 주었다. 스탕달은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 것이라는 두려움을 기초로 해서만 생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p92>


그래서 상대방의 애매모호한 태도는 사랑에 더 빠지게 만든다. 내가 원하는 것을 상대방이 허락할 듯하면서도 허락하지 않을 때 애가 더 타는 법이다.



소설 후반부에 이르면 뜻밖의 반전이 일어난다. 클로이에게 새 연인이 생겨서 두 사람이 이별하게 되는 것. 그런데 클로이가 새로 사랑하게 된 사람은 화자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바로, 함께 만난 적이 있는 자신의 친구였던 것. 클로이에게서처럼 사랑의 유효기간은 그리 길지 않은 게 사랑의 비극이라면 비극이다. 하지만 그래서 사랑은 더 달콤한 게 아닐까. 꽃이 아름다운 건 꽃 피운 시간이 짧기 때문이듯이.


여기서 재밌는 건 화자의 유머러스한 해석이다. 그녀가 (완벽하지 못한) 나 같은 사람을 사랑한다면, 그녀의 취향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사람이 정말로 그렇게 멋진 사람이라면, 어떻게 나 같은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p76>’하고 의문을 갖는다. 그런데 그녀와 이별하게 된 뒤엔 이렇게 생각한다. ‘그녀가 나를 찬 것은 나에게 결함이 많다는 증거라기보다는 그녀가 근시안적이라는 표시였다.<p289>’


사랑에 대해 이만큼 파헤친 저자의 능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 소설이 저자의 처녀작이며 그때 나이가 스물다섯 살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물론 이 책이 사랑에 관한 총체적인 것을 보여 준다고 할 수는 없다. 어차피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안다고 할 때 우리는 부분을 통해서 전체를 해석할 수밖에<p181>’ 없기 때문에, 저자 역시 사랑에 관한 몇 가지의 분석으로 사랑 전체를 이해한 것일 따름이니까. 하지만 사랑 전체를 숲이라고 가정한다면, 이 책을 읽음으로써 적어도 그 숲의 나무 몇 그루에 대해선 확실히 파악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독자에 따라서는 이 책의 어떤 내용에 반론을 제기하며 읽을 수도 있을 텐데, 그것도 유익한 독법일 것이다. 예를 들면 ‘상대가 우리더러 마음대로 살라고 허락한다면 그것은 보통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다.<p108>’라는 글에 독자는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사랑의 반대말을 무관심이라고 생각한다면 위의 말이 맞다. 하지만 상대가 자유로워져야 행복할 수 있다고 믿으며 그런 자유를 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생각한다면 위의 말은 틀린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사랑은 ‘상대가 행복에 겨워 웃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것을 실천하는 일은 어렵다. 만약 그렇다면 상대에게 새 연인이 생겨 행복해 하는 모습에도 축하를 해줘야 한다는 결론인데, 이건 인간으로서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난 이 책을 사랑에 대해 잘 안다고 자신만만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에게 권하고 싶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안다고 말하는 것은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닐 수 있으니까. 무엇을 완전히 안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삶을 살면서 나 자신에 대해서조차도 모를 때가 많지 않던가.


문학작품에서부터 대중가요 가사에 이르기까지 많은 부분이 ‘사랑’에 관한 것이다. 그만큼 사랑은 우리 삶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뜻이겠다. 그러므로 사랑을 아는 것은 마치 우리 삶의 비밀 중 절반 이상을 아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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