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짜한 스타와 예술가는 왜 서로를 탐하는가
존 A. 워커 지음, 홍옥숙 옮김 / 현실문화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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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의 키워드인 '명성'은 문화 ㆍ예술사회학이 추구하는 학문적 성격에 상응한다. 좀 잔인하긴 하지만(?) 명성은 분명 그것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주체들에 의해 매겨진 하나의 가격이라고 할 수 있다. 명성은 '관계지향적'이다. 이러한 관계지향성은 문화 ㆍ예술사회학에서 찾아내려는 예술세계 내 '의미의 망'을 불러낼 수 있는 요인이자 결과이기도 하다. '의미의 망'은 피에르 부르디외의 '문화자본론'으로 설명될 수 있고, 때론 하워드 베커의 '예술세계론'으로도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부르디외나 베커가 설명하는 두 이론은 차이가 있지만, 예술세계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이 지니는 특성을 지향한다. 이것에 충실하자면, 예술가는 독존적일 수 없다. 예술가가 바라보는 풍경, 혹은 예술가를 둘러싼 풍경에 문화 ㆍ예술사회학은 귀를 기울인다. '예술'이 '예술세계'로 명명되었을 때, 그 효과는 세계 내 존재하는 다양한 요소들을 소환한다. 예술세계의 각 요소에 대한 소환은 문화를 매개하는 사람들, 예술세계의 고유성을 지켜내는 제도, 대중과의 소통 방식을 도모하는 매체 및 (예술을 하는 데 중요한) 현대 기술의 특성 들을 문제화한다. 그렇다고 이 문제화의 과정이 예술가를 둘러싼 맥락 찾기에 매몰된 나머지, 예술가의 자율성에 기인한 예술적 창작의 영역을 훼손해선 안 될 것이다.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우리가 바라보는 한 예술가의 작품 속 특성을 파악하고, 그 특성이 표출하는 주제의식 등을 유념하면서, 그 주제의식을 둘러싼 물질적, 비-물질적 조건 등을 배치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워커가 그려내는 스타와 예술가의 상관성은 오늘날 대중문화와 고급문화의 상관성이 빚어내는 접점을 밝힌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넘어선 일정한 '전략'이 동반된 커뮤니케이션 행위와 그 행위로 이어진 '관계의 고리'를 그릴 수 있게 된다. 본 책은 스타와 예술가들의 내면에 숨겨진 일정한 '야심'이 드러나는 스타일리쉬한 예술 행위에 주목하면서, '의미의 망'이 직조해내는 관계성들을 재구성한다. 그리고 이러한 재구성의 효과는 우리가 “연기 혹은 노래 이외 할 줄 아는 게 있어?”라고 무시해 왔던 스타들의 모습에 대한 일정한 놀라움을 표시하는 것을 넘어, 그들이 대중 앞에서 보이고 싶어하는 모습들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이뤄지는지 알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또한 예술가의 입장에선 그들이 갖고 있는 '사회자본', 그것이 형성하는 관계의 경계가 아우르는 폐쇄성 및 유연성이 자신의 이름을 견고히 하는 데, 또 널리 알리는 데 어떤 작용을 하는지, 인식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예술가들이 추구하는 사회자본은 일정한 '그룹'을 형성하여, 서로의 미적 스타일에 대한 의견을 공유하고, 그 스타일을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매개가 된다. 이는 예술을 소비하는 일정한 계급층들의 담화적 공간을 만들기도 했다(대표적으로 '살롱'문화가 있다). 이처럼 문화자본과 사회자본이 주축이 되어 형성된 예술세계는 예술을 생산하는 예술 생산자, 이들의 작품을 알리고 평가하는 문화 매개자, 그리고 이를 소비하는 예술 소비자들의 관계를 되짚어보게 한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의 이음새와 강도를 관통하는 것은 본 책이 강조하는 대중문화의 상관성에 따르자면, 대중문화를 형성하는 방식, 매체의 힘과 그것을 반영하는 예술 생산 방식의 특이점들과 결부된다.


'사회과학자'의 감수성을 체득하길 좋아하는 나에게 '풍경'이라는 개념이 선사하는 효과는 '내가 무엇을 바라보는가'를 넘어, '내 주위를 둘러싼 풍경의 이채로움은 과연 무엇인가'에 주목하게 한다. 그리고 그러한 주목은 다양한 '의미의 망'들을 만들고, 풍경의 개념을 다채롭게 한다. 풍경을 문화에 비유해 보았을 때, 우리는 문화가 표층과 심층이 겹친 '중층 구조'임을 알게 된다. 우리는 그림을 통해 풍경의 표면을 보며 감탄하지만, 연구자로서 가지는 혹은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로서 가지는 특유의 지적 감수성은 풍경의 그 표면을 넘어선 심층의 의혹과 신비함을 매만지게 한다. 중요한 것은 표층과 심층의 관계 인식과 조절이다. 그리고 배치다. 연구자들은 또 다른 풍경을 디자인할 준비를 해야 한다. 예술의 자율성과 그 자율성을 형성하는 사회적 조건들을 어떻게 매만질 것인가. 그 이상적 감촉을 위한 학문적 실천에 대한 고민이 더욱 필요한 때다. 

 
- 이 글은 미디어아트 웹진 앨리스온(http://www.aliceon.net/)에 올려진 제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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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정치의 겉과 속 - 한국 정치는 왜 늘 복마전인가?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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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유시민의 [후불제 민주주의]를 살까, 아니면 강준만의 신간을 살까 하다가, 결국 후자를 선택했다. 강준만의 다작에 스며든 글쓰기-메커니즘이 이제는 좀 눈에 보이는 듯한데, 그의 글을 꾸준하게 접한 지도 햇수로 9년 정도는 된 듯하다. 이 책은 내 눈치로 보자면, 그가 근래에 냈던 [지방은 식민지다]의 기운이 잔존해있다. (참고로 아직 나는 그 책을 사 보진 못했다 그러나 이 책에서 비판하는 서울 일극체제에 대한 이야기는 제법 익숙한 테마다) 강준만은 언제나 그렇듯이 이론의 식민화에 매몰된 학계를 비판하고, 현상마저 외국의 것을 좆아, 우리 실정에 맞지 않는 태도를 보이는 지적 경도를 준엄하게 꾸짖는다. 그리고 그 범주 안에 정치와 미디어가 결속되어, 미디어가 정치를 너무 안일하게 바라보는 것은 아닌가라며, 그가 속해있는 커뮤니케이션학 본령의 사명에 대해 숙고할 것을 제안하는 어조로 글은 정리가 되어 있다.

강준만은 특히 정치판에 대한 한국사회의 엄청난 냉소에 대하여, 무조건 정치인만 힐난하고, 비난하며 살아가는 대중들의 태도에도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그는 정치인이 작동하는 정치 장의 메커니즘을 알아야하며, 외국 이론의 수입과 무비판적 적용으로, 늘 ‘신선한 현상’만을 좇는 한국 학문의 현실을 바로 깨닫고, 지성인들이 그 어떤 편견과 오인을 초월하여, 우리나라 상황을 직시할 수 있는 지적 토대가 만들어져야 함을 역설한다.

이론의 식민성과 탈식민성에 대한 논의는 사실 학계 내에서 그동안 엄청난 말과 글들이 쏟아졌고, 강준만은 그것을 주장한 대표적 학자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아마 그가 지향하는 논조의 대상을 볼 때, 그러한 학계의 솔직한 풍경을 대중들에게 따가운 장면 그대로 전달하려고 노력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특히 이번 책의 중심 테마인 ‘정치’와 관련되어, 그가 나의 편견을 뒤집은 것은 한국이야말로, ‘정치 과잉 사회’라는 것이다. 투표 참여율 저조와 젊은 세대들의 정치에 대한 혐오 및 정치인들의 변함없는 무능함 같은 것으로 대변되는 우리나라 정치판에서, 그것으로 말미암은 부정적 이미지들은 괜히 우리나라가 정치적으로 ‘최소 국가’가 아닌가라는 이미지를 심어주기도 하지만, 그것은 강준만의 논리에 입각하자면, 정말 ‘이미지’일 뿐인 것이다. 강준만은 현미경을 들고 우리나라를 대상으로 올려, 한국 사회의 현실을 해부할 것을 요청한다. 그러다보면, 한국 사회는 정치에 있어 정말 뜨거운 나라이며, 지금 우리가 정치를 어둡게 바라보는 것도, 어쩌면 민주화 이후의 또 다른 소산이자 효과 중 하나로 봐야함을 주장한다.

나는 요즘 ‘정치사회학’이라는 과목을 수강하면서, 과연 우리 시대에 정치라는 것은 무엇이며, 옛날부터 정치라는 것은 어떻게 이야기되어 왔는가라는 역사적 관점에 관심이 많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강준만이 늘 지향하는 ‘역사적 요인과의 접촉과 이로 인한 현재와의 지점 만들기’가 여전히 드러난 저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강준만의 매력은 역시 ‘지적 안전주의’에 대한 철저한 비판이다. 그는 지식의 교전과 충돌을 좋아하는 학자 같다. (나는 막스 베버와 게오르그 짐멜의 견해를 우리나라에 적극적으로 소개해 준 김덕영 교수의 <논쟁으로 보는 사회학>을 읽고, 강준만의 얼굴이 떠올랐다. 우리는 정말 논쟁을 싫어하는 게 아닐까. 논쟁으로 인해 서로가 주고 받는 지적 자극의 효능에 대해 너무 무심한 것은 아닐까.) 강준만은 꼭 좌와 우로 보려는 시각, 한국 사회의 이념과 파벌(이 역시 그가 짚는 영원한 한국인 코드이자, 그가 늘 강조하는 주제다)의 형성이 빚어내는 ‘중간파’들의 억울한 희생을 꼬집는다. 꼭 좌와 우, 보수와 진보 어느 한 쪽에 치우쳐야, 논객도 논객 대접을 받고, 현실 정치인도 현실 정치인다운 우리나라의 정치 장 가운데, 과연 대중들은 어떤 사고를 가지고 그들과 우리를 경계짓는가도 이 책을 통해 발견할 수 있는 포인트다.

강준만이 결국 결론으로 내세우는 것은 ‘정치교육’의 일상화다. 나 역시 ‘교육’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바, 어떻게 하면, 나를 포함한 우리 20대들이 정치를 너무 잔인하게 혹은 그릇되게 보지 않을까를 고민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이 책의 결론에서 느껴진 기운을 예전에 읽었던 어느 논문 속 기억나는 한 구절로 마무리하며 글을 맺고 싶다.

“민주주의가 대화를 만들어간다는 생각은 중요하지만..대화가 민주주의를 만들어간다는 생각은 더욱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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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9-04-05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몇 년 전에 나온 <노무현과 국민사기극>에서도 우리나라 보통사람들이 정치인들을 욕하는 태도를 비판한 내용은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논쟁으로 보는 사회학>에서는 평소 관심이 있던 칼 람프레히트와 독일 역사학파 경제학자들이 매우 자세히 소개되어서 좋았습니다.방법론 논쟁은 경제학에서도 취급합니다만 요즘 경제학에서는 아무래도 100년 전의 독일,오스트리아 쪽의 지적 풍토는 소홀히 다루는 것 같지요? 방법론 논쟁은 나중에 다른 학자들의 저서로 한 번 더 공부해 볼 생각입니다.

얼그레이효과 2009-04-06 0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 경제학쪽은 전혀 모릅니다만...노이님께서 말씀해주신 경제사상사 논쟁 부분은 어렴풋이 기억나는군요..저는 요즘 막스 베버의 <경제와 사회>를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도 역시..제게 논쟁형 인간은 위르겐 하버마스로 남는 군요. 제가 과학사회학쪽도 관심있는 편이라, 칼 포퍼를 둘러싼 논쟁도 흥미로웠던 것 같습니다. 들려주셔서 고맙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04-06 2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경제와 사회> 번역본이 나왔습니까?

얼그레이효과 2009-04-06 2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이에자이트님 반갑습니다. 제가 알기론 나남 출판에서 번역본을 출간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있는 동네 서점에도 꽂혀 있더군요. 알라딘에 찾아보니 번역본이 있네요.

노이에자이트 2009-04-07 0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그렇군요.열심히 공부하십시오.
 
역사인류학이란 무엇인가
리햐르트 반 뒬멘 지음, 최용찬 옮김 / 푸른역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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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주 전, 책을 좋아하는 나의 스승과 함께 택시 안에서 ‘붐’이라는 표현을 쓸 수 있을 정도로 하나의 현상이 된 것 같은, 역사 관련 서적들의 출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 가운데 나는 미시사, 일상사, 풍속사, 신문화사 등등 새로운 역사적 접근 방식을 언급하며, 이러한 방식에 호감을 느낀다고 밝혔다. 아마도 본 책의 저자인 리하르트 반 뒬멘이 이야기하는 ‘역사인류학’에는 내가 앞에서 말한 역사학의 새로운 조류들이 다 포함될 듯하다. 역사인류학이란 그렇다면 무엇인가? 이 책의 내용을 잠시 빌리자면,

역사인류학은 행동하고 생각하며, 느끼고 고통받는 구체적인 인간을 역사적 분석의 중심에 세운다. 이때 역사인류학적 발상은 철학적 인류학에서의 인간론과는 본질적으로 구별되는데, 이는 역사인류학이 역사 속 인간 존재의 일반성에 대해 묻기보다는 오히려 시간의 변화에 따른 문화사회적 조건의 다면성, 그리고 인간 행위의 독특성과 고유한 의미를 묻는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따라서 여기서는 폐쇄적이고 통일적 인간상은 배제된다. 인간상이란 오직 역사적 과정에서 형성된다. (59쪽)

역사인류학은 저자도 강조하듯이,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강조함으로써, ‘역사주의’가 갖고 있는 역사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의 제한성을 극복한다. 역사인류학자들은 ‘모든 인간’에게 관심이 많으며, 특히 이들에게는 문화사적 감수성이 중요하게 여겨진다. 문화사와 함께 자연스럽게 결부되는 미시사적 접근 또한 강조점이다. 그러면서도 미시사가 놓쳐서는 안 될, 사회사가 견지하는 인간과 사회의 거시적 연결 고리도 지향한다. 역사인류학자들은 저 오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그 시간을 공간으로 삼았던 이들의 문화적 경험들을 파헤치기를 희망한다. 그리고 그러한 연구 행위 속에서 역사를 생동감있게 기술하려는 역사 쓰기의 실천성을 염두하여 둔다.

역사인류학은 인류학에서 파생된 학문이 아닌, 역사학에서 파생된 학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학의 흐름들을 접목하면서, 방법론에서 ‘인류학’적 시선을 고려한다는 인상이 강하다. 여기서 ‘방법론’이라는 표현이 반드시 어떤 명시적인 조사 방법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인류학적 시선이라는 것을 하나의 인식론적 개념으로 간주할 때, 이 책의 저자이자 역사인류학의 제도화에 힘쓴 리하르트 반 뒬멘이 강조하는 것은 거대한 것과 사소한 것의 공유점을 이어, 사소한 것에서 어떤 정연한 논리와 행위의 규칙들을 찾으려는 노력, 그리고 인간에게 다가가 진정으로 인간들이 써 내려간 역사의 진실성 추구와 확보, 과거를 통해 인간의 사고와 행위를 교훈적인 차원으로 혹은 성찰적인 차원으로 격상시킴으로써,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영향력 보급인 듯하다. 역사인류학은 바로 이러한 지점에서 변동하는 사회와 그 변동의 영향을 받는, 그리고 그 변동을 직접 추동하는 인간의 살아있는 접점들을 만들어가는 학문이다.   

역사인류학적 시각은 역사학이 고려하는 역사적 시각 간의 통합이자, 그러한 통합을 통해 역사를 보다 인간에 가깝게 놓으려는 노력의 산물이다. 번역자인 최용찬은 키스 젠킨스의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에서 접했던 분인데, 역시나 당차고 분명한 문체로 책을 번역해 호감이 간다. 비교적 간결한 번역체 속에서, 역사학의 조류를 이미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정리의 기분을, 입문하려는 사람에게는 좋은 지식의 통로로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아무래도 전자 쪽이 더 유리할 듯하다. 역사인류학적 시선이 적용된 사례라고 할 수 있는 본 책의 저자 리하르트 반 뒬멘의 [개인의 발견]을 다음에 언급함으로써, 이 논의를 더 이어나가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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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수복과 나비
장 도미니크 보비, 양영란 / 동문선 / 199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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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며칠 전, 조금 눈이 감겨 있는 상태에서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모르는 번호와 밤. 보이스피싱의 기운은 아닐 것이라 생각했다. 혹시 옛 여인의 흔적? 그럴 리가. 나처럼 기억력이 좋은 사람이 번호를 완전히 상기하진 못하더라도, 그 낌새만은 붙잡았을 것 같다. 한 앳된 목소리의 여자가 내 이름에다 ‘선배’라는 호칭을 붙어주고 나서야, 나는 조금 설레는 마음이 가셨다. 그리고 침착해졌다. 모교인 한 대학교의 대학언론사 기자인 후배는 나에게 특강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순간 단어들이 끊기면서,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돌출되었다는 표현이 더 ‘영상’적일까. 아직...석사....공부 중...무엇을...강의...교육..대학..언론...옛날..추억..글쓰기...커뮤니케이션.. 후배의 또랑또랑한 목소리를 뒤로 한 채. 고민에 빠졌다. 나에게는 암튼 첫 강의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강의에 관한 전체적인 틀을 부탁하는 또 다른 후배의 메일을 받고 나서, 나는 집에 있는 책들을 뒤적거렸다. 그리고 무심코 집어든 책이 장 도미니크 보비가 쓴 [잠수복과 나비]다.

‘커뮤니케이션과 사회’라는 주제 아래, 사회와 ‘나’가 어떻게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을까라는 제법 무거운 강의 주제를 던져주었다. 나는 솔직히 말해, 이런 좋은 주제, 진지한 주제에 관해 멋진 말을, 의미 있는 말을 해줄 수 있는 능력이 없다. 대학원에 들어 와서, 마음속으로 챙겼던 그 순진하고 정결했던 맹세들은 사라지고, 이제 나에게 남은 것은 넘쳐나는 ‘학구적 체취’였다. 타인에게 공격받지 않기 위해, 학문이라는 좋은 테두리로 나를 감싸고, 하루를 연명하는 지식 노동자. 아직 대학원 생활을 해보지 않은 사람에게, 밥이나 사주면서, 헛된 자랑을 일삼는 어눌한 지식인. 그건 정말 내가 원하던 모습이 아니었다. 겸손해지고 싶었다. 아니, 좀 더 무거운 표현을 쓰자면, 나 스스로에게 겸허해지고 싶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책 이전에 영화로 먼저 접한 이 이야기의 이미지들을 떠올리면서, 내가 만약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이라면?이라는 진부한 자기계발서 식의 달콤한 물음표를 만들어보게 되었다. 이 책은 그러나, 달콤한 물음표마저 사치로 만들어버리는 깊이 있는 작품임이 분명하다. 영화의 ‘이미지’가 책의 글자를 한 톨, 한 톨 따라가며 내 머릿속을 스치는 이미지와 겹쳐질 때, 장 도미니크 보비의 얼굴과 그의 역할을 맡은 마티유 아맬릭의 얼굴이 함께 떠오른다.

요즘 나는 미셸 푸코의 [말과 사물]을 다시 읽고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재도전’이라는 표현이 어울리겠다. 양이 많을수록, 빨리 이 책을 정복하고 싶다는 마음에 이 책에 들어있는 두터운 진리를 속도로 짓눌러 보겠다는 욕심이 생긴 첫 경험. 나는 그 경험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그 가운데 깨달음이 다가오고, 그 다가옴은 지금 내가 매만지고 있는 장 도미니크 보비의 흔적과 맞닿아 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수많은 말들을 하고 산다. 정치꾼들은 그 말로 신뢰를 생성하며,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그러한 정치가들의 말을 둘러싼 신뢰와 기대치가 바로 ‘정치 언어’, 공약이라고 설명한다. 어디 이런 말과 신뢰, 혹은 말이 다루고 있는 수많은 현상들이 정치가들에게만 해당하랴.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 또한,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수없이 말을 하고 산다. 그리고 그 말들이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사물(현실)이 된다. 말이 존재를 획득할 때, 우리는 그것에 기대를 걸거나, 후회를 하거나, 슬픔을 느낀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는 침묵을 원하고, 그 침묵이 우리 인간의 영원한 희망이 되리라고 본다. 장 도미니크 보비에게 주어진 조건은 얼마 남지 않은 삶 가운데, 주어진 소중한 침묵이다. 그리고 그 침묵으로 말미암아, 보비는 내면 속에서 수없이 자신에게 말을 건네고, 그 내면 안에 생성된 사물은 자유롭고 감동적이다. 우리의 입 밖으로 나온 말들이 사물화되어, 이리저리 여행을 다닐 때, 우리는 행여 그 말을 꺼내기 전 타인이 상처나 받지 않을 지, 걱정하지만 보비에게 그런 걱정은 오히려 소망과 같은 위치에 있다. 그가 글을 쓰고 있는 순간은 그래서 소중하다. 표현이 넘치는 이 세상에, 말이 과다해서, 살기를 불러일으키는 이 세상에. 그의 신체적 제약이 주는 불가피한 장면은, 우리로 하여금 말과 글의 과잉 시대에 ‘다시’말하기 그리고 ‘다시’ 글쓰기를 생각하게 만든다.

첫 강의로 어떤 텍스트가 고려되고 있는지 묻는 후배의 메일에 나는 답장을 보냈다. 그리고 이 책 [잠수복과 나비]를 영화와 함께 책으로 읽어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전달했다. 대학 언론의 위기 같은 아주 급급한 의제를 전달하고 공유하는, 아마 ‘사회과학’을 연구하는 내 위치에 맞는 주제와 관련된 책 혹은 자료들을 소개할 수도 있었겠지만, 이상하게 이 책의 가치를 그저 나만 알고 싶지는 않았다.

장 도미니크 보비가 그려내는 마음 속의 풍경은 그의 신체적 증상이 주는 아픔과 반비례하는 편안하고 애잔한 그 무엇으로 가득 차 있다. 물론 그런 편안함과 애잔함을 표출하는 과정 속에서, 그가 글이라는 것으로 자신의 고통을 담담하게 전달하거나, 때론 유머러스하게 드러내는 것은 삶이 주는 그만이 획득한 깨달음의 진실인 듯하다. 나는 그 진실을 오직 그만이 가지기를 바란다. 그 진실의 깊숙한 부분을 내가 다 가지겠다는 것은 과욕인 것 같다. 학문이라는 것을 하면서, ‘지식노동자’라는 명칭이 붙으면서, ‘사회과학자’라는 범주가 주어지면서, 나는 계속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 ‘나는 정말 사람을 챙기고 가려는 의지가 있는 걸까?’ 


[잠수복과 나비]는 이 세상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떠난 어느 한 남자의 이야기다. 우리는 이것을 아주 소소하게 추억해도 좋고, 때론 격정적이고 교훈적인 허밍으로 음미해도 좋다. 하지만 나는 말하고 싶다. 우리 삶에서 나는 얼마나 나를 챙기고 가려는 의지가 있는 것일까. ‘나’에게 주어진 잠수복, 그 제약 속에서 나에게 허락된 그 들숨과 날숨의 순간들. 그 순간들로 연명되는 삶의 귀엽고 세심한 한 자락들. 피아노의 선율이 갑자기 굵어지고, 키보드 소리가 지금 내 방을 가득 채우고, 아직 커피 자욱이 진하게 묻은 하얀 색 커피잔이 놓여진 내 앞, 그리고 내 안의 풍경을 보면서, 나는 장 도미니크 보비처럼 잠시 한 눈만 뜨고 세상을 바라본다. 억지로 감은 눈이 아프고 떨린다. 다른 한 눈마저 감고 싶다. 결국 두 눈을 감았다. 보는 것은 행복하다. 다시 눈을 떠 보니 알겠다. 상실의 아픔 속에서 나비여 찾아오기를. 아직 내 삶에 꽃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나비여, 헬로우. 그 나비가 나의 첫 강의를 들을 친구들에게 찾아왔으면 좋겠다. 사회를 비판하기 전에, 알아야 할 것은 바로 내가 얼마나 사회에 애정이 있냐는 물음의 생성이 아닐까. 적어도 나는 사람을 챙기고 싶은 사회과학도가 되고 싶으니까. 세상을 향한 글쓰기를 하려는 사람들에게 나는 나비를 나눠주는 강의를 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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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멜의 모더니티 읽기
게오르그 짐멜 지음, 윤미애 외 옮김 / 새물결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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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서로를 바라보고, 서로에 대해서 시기를 한다. 그들은 서로에게 편지를 쓰거나 같이 점심을 먹는다. 그들은 구체적인 이해 관계와 전혀 상관없이 서로 공감하거나 또는 반감을 가지면
서 접촉한다. 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길을 묻기도 하고, 서로는 서로를 위해서 옷을 입고 치장을 한다. 사람에서 사람으로 연결되는, 순간적인 또는 지속적인, 의식적인, 덧없는 또는 중대한 이 모든 무수한 관계들이 우리를 지속적으로 함께 묶는 것이다. 매일같이 그리고  매 시간마다 이와 같은 관계들이 형성되고 소멸되며, 새로이 시작되고, 다른 관계들에 의해서 대체되고, 그것들과 뒤섞인다.
(중략)
여기에 오로지 심리학적인 현미경을 통해서만 접근이 가능한 사회의 원자들 사이의 상호작용이 존재한다. 이들 상호 작용이야말로 명백하지만 불가해한 사회적 삶이 지니는 모든 끈질김, 유연성 그리고 모든 다양성과 통일성의 바탕이 되는 것이다.

                                                                         - 게오르그 짐멜, 감각의 사회학 중에서 -

 

 

내가 사실 이 책을 알게된 것은 게오르그 짐멜보다, 이 책을 번역한 사람 중 한 명인 사회학자 김덕영 때문이다. 예전에 <논쟁으로 보는 사회학>이란 책과 <막스 베버, 이 사람을 보라>라는 책에서 풍긴 날이 선 문장이 매력적이었기 때문에, 나는 이 책에서 그가 게오르그 짐멜이란 학자를 어떻게 한국식으로 소화시킬 것인가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이 책은 엄밀히 말하자면, 게오르그 짐멜이 발표했던 글들 일부를 취합해 만든 것이다. 고로 게오르그 짐멜을 맛보고 싶은 사람을 위한 학술적 에세이라고 보면 되지 싶다. 학술과 에세이라는 표현이 만났다고 해서, 에세이라는 표현이 학술의 진중함을 상쇄시킬 것이라는 우려는 일찌감치 놓아두는 것이 낫다. 우리는 어차피 게오르그 짐멜이 당시 사회학의 장 안에서 ‘요상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그의 기이한 사회학적 관심이 주류사회학적 관심의 변두리에 위치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그 앎 속에서 사후적으로 주목받게 된 짐멜의 풍성한 지적 여정 가운데, 우리는 차분하게  그의 매력을 음미하면 되는 것이다.

사회학의 골수분자들이라는 표현을 무례하지 않는 것이라고 이해해준다면, 나는 그들이 게오르그 짐멜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단순히 오늘날처럼 이제 “재평가받아야 할 우리 시대의 사회학자”라는 평이한 수사를 붙이기 이전에 말이다. 사실 문화연구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내가 정통 사회학의 장 안에서 공부를 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렇기 때문에 사회학 내부에서 게오르그 짐멜을 둘러싼 담화들이 궁금한 듯하다. 나는 그런 호기심으로 이 책을 읽었다. 맑스와 베버, 뒤르켐에서 출발하는 사람들, 그 혈맥을 짚고, 여기저기 사회학적 피들을 분출해 보려는 한국의 사회학도들에게 게오르그 짐멜은 “어떻게 이런 것이 사회학적 주제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의 입장인 것인지, 혹은 “이런 사회학적 심미안을 가진 짐멜을 당대가 몰라주었던 것은 무척 서글픈 일이다”라고 평가하는 것인지. 난 그 미묘함을 체득하고 싶었다. (하긴 전자의 입장은 사회학을 피상적으로 아는 독자들도 가질 의문일 것 같다)

게오르그 짐멜의 생각은 여기저기 접합이 가능한 또 하나의 사회학적 뿌리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이 다루는 짐멜의 생각들을 좇아가다보면, 미국 시카고학파들 중 조지 허버트 미드의 상호작용론이나 어빙 고프먼의 연극무대론이 연상된다. 특히 본 책으로만 미루어보건대, 짐멜의 기술 방식은 어빙 고프먼의 저작과 무척 유사하다. 어빙 고프먼은 게오르그 짐멜을 참조한 것일까? 이렇게 생각한 이유는 이 책이 ‘의례’에 관한 사회학적 관심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혹은 이 책에서 흐르는 혈류는 미셸 마페졸리 등이 창안한 ‘일상생활의 사회학’과도 닮았다. 행여 우리가 진부하게 치부할 수 있는 일상의 요소들을 짐멜은 ‘사회학적 미학’이라는 방식으로 설명하는 데서 이는 드러난다.

짐멜은 ‘문화의 비극’이란 개념을 통해, 사람들이 생산하는 객체들, 즉 예술, 과학, 철학 등을 포함하는 사람들의 객관적 문화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것과 달리, 시간과 함께 사람들의 창조적 능력이 적어도 조금은 성장하겠지만, 그것을 바탕으로 한 개인적 문화의 생산량 증가는 객관적 문화의 양과 비견할 수 없을 정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는 진단을 내린다. 어쩌면 ‘사물을 철학하기’라는 또 다른 제목을 붙일 수 있을 것 같은 이 책은, 게오르그 짐멜이 현대 사회를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가를 조금 알 수 있는 입문서로 이해하면 좋을 듯하다. 혹은 짐멜을 어느 정도 아는 사람들이 그의 생각을 편하게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되는 책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게오르그 짐멜이 일상에 갖는 관심은 사회학이라는 영역을 확장시켜주었다는 점에서 짐멜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학자라고 생각한다. 특히 오늘날 게오르그 짐멜이 보여주는 사유의 힘은 바로 일상의 분절화, 다원화 속에서 사회적 개인이 사회라는 풍경에 가치를 찾아나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다는 점에서도,  그는 재독해할 필요성이 있는 학자임 또한 분명하다. 짐멜의 사회학은 ‘형식사회학’이라는 개념을 통해, 사회와 개인의 상호결합된 삶의 스타일들을 사회학적 시선으로 바라보고, 그것으로 이루어진 유형화된 삶의 근거들을 추출한다는 점에서, 사회학이 추구하려는 기본적인 자세 또한 유념하고 있다. (그의 사상은 오늘날 소비사회학을 비롯하여, 특히 문화/예술 사회학에도 큰 영향을 주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 ‘사회학적 신체’라는 것은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갖게 된다. 이 책을 통해 나타난 짐멜의 시선은 어찌 보면 너무 흐물흐물한 사회학자, 안이한 태도를 가지고 사회를 편하게 바라보는 학자가 아니냐라는 반문을 받을 수 있겠지만, 내 생각은 좀 다르다. 게오르그 짐멜은 집요하고 또 집요하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현상을 사회학적 개념으로 이해하려 노력하면서, 학자가 가져야 할 어떤 신념을 고수하고 있다. 그는 분명 ‘사회학적 신체’를 가진 학자이다. (어떤 면에선 사회학적 관심사에 있어, 노르베르트 엘리아스와 유사한 학문적 신체를 가진 것 같다)   

 

 

역자도 강조한 부분이지만, 게오르그 짐멜을  '미시사회학자'라고 섣불리 단정짓는 것은 좀 고려해봐야 할 문제다. 그것은 마치 이정우가 미셸 푸코의 <지식의 고고학>을 번역하면서, 각주에 적어 놓은 문제제기처럼, 푸코를 쉽게 포스트구조주의자, 포스트모더니즘의 대변자로 몰아가려는 경향과 유사한 것이다. 게오르그 짐멜의 심미안은 그런 점에서 ‘현미경’이라는 비유를 끌어오는 것이 적당하다고 본다. ‘사회학적 현미경’. 물론 이런 ‘현미경’적인 자세는 학자라면 누구나 견지하고 싶은, 견지해야 할 태도이지만, 적어도 게오르그 짐멜의 세계에서, 이러한 자세는 짐멜이 만들어놓은 사회학적 의의로서 존중받아야 할 것 같다.  그는 미시와 거시의 가교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음을 잊지 말자. 그는 사회학이라는 풍경 안에서, 간과할 수 없는 고전사회학의 토대가 된 사람이다.  오늘날 사회와 개인 속에서 ‘문화’라는 매개를 주목할 때, 에밀 뒤르켐과 함께  그는 충분히 숙고해야 할 ‘문제적 학자’라고 주장하고 싶다. 
 

 


덧붙임) 게오르그 짐멜 선집은 다들 알다시피 여러 권으로 출간되었다. 예의상 그 선집을 낸 출판사는 언급하지 않겠다. 이후 다른 리뷰를 통해, 게오르그 짐멜의 생각들을 더 살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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