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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수복과 나비
장 도미니크 보비, 양영란 / 동문선 / 199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며칠 전, 조금 눈이 감겨 있는 상태에서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모르는 번호와 밤. 보이스피싱의 기운은 아닐 것이라 생각했다. 혹시 옛 여인의 흔적? 그럴 리가. 나처럼 기억력이 좋은 사람이 번호를 완전히 상기하진 못하더라도, 그 낌새만은 붙잡았을 것 같다. 한 앳된 목소리의 여자가 내 이름에다 ‘선배’라는 호칭을 붙어주고 나서야, 나는 조금 설레는 마음이 가셨다. 그리고 침착해졌다. 모교인 한 대학교의 대학언론사 기자인 후배는 나에게 특강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순간 단어들이 끊기면서,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돌출되었다는 표현이 더 ‘영상’적일까. 아직...석사....공부 중...무엇을...강의...교육..대학..언론...옛날..추억..글쓰기...커뮤니케이션.. 후배의 또랑또랑한 목소리를 뒤로 한 채. 고민에 빠졌다. 나에게는 암튼 첫 강의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강의에 관한 전체적인 틀을 부탁하는 또 다른 후배의 메일을 받고 나서, 나는 집에 있는 책들을 뒤적거렸다. 그리고 무심코 집어든 책이 장 도미니크 보비가 쓴 [잠수복과 나비]다.
‘커뮤니케이션과 사회’라는 주제 아래, 사회와 ‘나’가 어떻게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을까라는 제법 무거운 강의 주제를 던져주었다. 나는 솔직히 말해, 이런 좋은 주제, 진지한 주제에 관해 멋진 말을, 의미 있는 말을 해줄 수 있는 능력이 없다. 대학원에 들어 와서, 마음속으로 챙겼던 그 순진하고 정결했던 맹세들은 사라지고, 이제 나에게 남은 것은 넘쳐나는 ‘학구적 체취’였다. 타인에게 공격받지 않기 위해, 학문이라는 좋은 테두리로 나를 감싸고, 하루를 연명하는 지식 노동자. 아직 대학원 생활을 해보지 않은 사람에게, 밥이나 사주면서, 헛된 자랑을 일삼는 어눌한 지식인. 그건 정말 내가 원하던 모습이 아니었다. 겸손해지고 싶었다. 아니, 좀 더 무거운 표현을 쓰자면, 나 스스로에게 겸허해지고 싶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책 이전에 영화로 먼저 접한 이 이야기의 이미지들을 떠올리면서, 내가 만약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이라면?이라는 진부한 자기계발서 식의 달콤한 물음표를 만들어보게 되었다. 이 책은 그러나, 달콤한 물음표마저 사치로 만들어버리는 깊이 있는 작품임이 분명하다. 영화의 ‘이미지’가 책의 글자를 한 톨, 한 톨 따라가며 내 머릿속을 스치는 이미지와 겹쳐질 때, 장 도미니크 보비의 얼굴과 그의 역할을 맡은 마티유 아맬릭의 얼굴이 함께 떠오른다.
요즘 나는 미셸 푸코의 [말과 사물]을 다시 읽고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재도전’이라는 표현이 어울리겠다. 양이 많을수록, 빨리 이 책을 정복하고 싶다는 마음에 이 책에 들어있는 두터운 진리를 속도로 짓눌러 보겠다는 욕심이 생긴 첫 경험. 나는 그 경험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그 가운데 깨달음이 다가오고, 그 다가옴은 지금 내가 매만지고 있는 장 도미니크 보비의 흔적과 맞닿아 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수많은 말들을 하고 산다. 정치꾼들은 그 말로 신뢰를 생성하며,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그러한 정치가들의 말을 둘러싼 신뢰와 기대치가 바로 ‘정치 언어’, 공약이라고 설명한다. 어디 이런 말과 신뢰, 혹은 말이 다루고 있는 수많은 현상들이 정치가들에게만 해당하랴.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 또한,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수없이 말을 하고 산다. 그리고 그 말들이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사물(현실)이 된다. 말이 존재를 획득할 때, 우리는 그것에 기대를 걸거나, 후회를 하거나, 슬픔을 느낀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는 침묵을 원하고, 그 침묵이 우리 인간의 영원한 희망이 되리라고 본다. 장 도미니크 보비에게 주어진 조건은 얼마 남지 않은 삶 가운데, 주어진 소중한 침묵이다. 그리고 그 침묵으로 말미암아, 보비는 내면 속에서 수없이 자신에게 말을 건네고, 그 내면 안에 생성된 사물은 자유롭고 감동적이다. 우리의 입 밖으로 나온 말들이 사물화되어, 이리저리 여행을 다닐 때, 우리는 행여 그 말을 꺼내기 전 타인이 상처나 받지 않을 지, 걱정하지만 보비에게 그런 걱정은 오히려 소망과 같은 위치에 있다. 그가 글을 쓰고 있는 순간은 그래서 소중하다. 표현이 넘치는 이 세상에, 말이 과다해서, 살기를 불러일으키는 이 세상에. 그의 신체적 제약이 주는 불가피한 장면은, 우리로 하여금 말과 글의 과잉 시대에 ‘다시’말하기 그리고 ‘다시’ 글쓰기를 생각하게 만든다.
첫 강의로 어떤 텍스트가 고려되고 있는지 묻는 후배의 메일에 나는 답장을 보냈다. 그리고 이 책 [잠수복과 나비]를 영화와 함께 책으로 읽어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전달했다. 대학 언론의 위기 같은 아주 급급한 의제를 전달하고 공유하는, 아마 ‘사회과학’을 연구하는 내 위치에 맞는 주제와 관련된 책 혹은 자료들을 소개할 수도 있었겠지만, 이상하게 이 책의 가치를 그저 나만 알고 싶지는 않았다.
장 도미니크 보비가 그려내는 마음 속의 풍경은 그의 신체적 증상이 주는 아픔과 반비례하는 편안하고 애잔한 그 무엇으로 가득 차 있다. 물론 그런 편안함과 애잔함을 표출하는 과정 속에서, 그가 글이라는 것으로 자신의 고통을 담담하게 전달하거나, 때론 유머러스하게 드러내는 것은 삶이 주는 그만이 획득한 깨달음의 진실인 듯하다. 나는 그 진실을 오직 그만이 가지기를 바란다. 그 진실의 깊숙한 부분을 내가 다 가지겠다는 것은 과욕인 것 같다. 학문이라는 것을 하면서, ‘지식노동자’라는 명칭이 붙으면서, ‘사회과학자’라는 범주가 주어지면서, 나는 계속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 ‘나는 정말 사람을 챙기고 가려는 의지가 있는 걸까?’
[잠수복과 나비]는 이 세상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떠난 어느 한 남자의 이야기다. 우리는 이것을 아주 소소하게 추억해도 좋고, 때론 격정적이고 교훈적인 허밍으로 음미해도 좋다. 하지만 나는 말하고 싶다. 우리 삶에서 나는 얼마나 나를 챙기고 가려는 의지가 있는 것일까. ‘나’에게 주어진 잠수복, 그 제약 속에서 나에게 허락된 그 들숨과 날숨의 순간들. 그 순간들로 연명되는 삶의 귀엽고 세심한 한 자락들. 피아노의 선율이 갑자기 굵어지고, 키보드 소리가 지금 내 방을 가득 채우고, 아직 커피 자욱이 진하게 묻은 하얀 색 커피잔이 놓여진 내 앞, 그리고 내 안의 풍경을 보면서, 나는 장 도미니크 보비처럼 잠시 한 눈만 뜨고 세상을 바라본다. 억지로 감은 눈이 아프고 떨린다. 다른 한 눈마저 감고 싶다. 결국 두 눈을 감았다. 보는 것은 행복하다. 다시 눈을 떠 보니 알겠다. 상실의 아픔 속에서 나비여 찾아오기를. 아직 내 삶에 꽃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나비여, 헬로우. 그 나비가 나의 첫 강의를 들을 친구들에게 찾아왔으면 좋겠다. 사회를 비판하기 전에, 알아야 할 것은 바로 내가 얼마나 사회에 애정이 있냐는 물음의 생성이 아닐까. 적어도 나는 사람을 챙기고 싶은 사회과학도가 되고 싶으니까. 세상을 향한 글쓰기를 하려는 사람들에게 나는 나비를 나눠주는 강의를 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