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멜의 모더니티 읽기
게오르그 짐멜 지음, 윤미애 외 옮김 / 새물결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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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서로를 바라보고, 서로에 대해서 시기를 한다. 그들은 서로에게 편지를 쓰거나 같이 점심을 먹는다. 그들은 구체적인 이해 관계와 전혀 상관없이 서로 공감하거나 또는 반감을 가지면
서 접촉한다. 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길을 묻기도 하고, 서로는 서로를 위해서 옷을 입고 치장을 한다. 사람에서 사람으로 연결되는, 순간적인 또는 지속적인, 의식적인, 덧없는 또는 중대한 이 모든 무수한 관계들이 우리를 지속적으로 함께 묶는 것이다. 매일같이 그리고  매 시간마다 이와 같은 관계들이 형성되고 소멸되며, 새로이 시작되고, 다른 관계들에 의해서 대체되고, 그것들과 뒤섞인다.
(중략)
여기에 오로지 심리학적인 현미경을 통해서만 접근이 가능한 사회의 원자들 사이의 상호작용이 존재한다. 이들 상호 작용이야말로 명백하지만 불가해한 사회적 삶이 지니는 모든 끈질김, 유연성 그리고 모든 다양성과 통일성의 바탕이 되는 것이다.

                                                                         - 게오르그 짐멜, 감각의 사회학 중에서 -

 

 

내가 사실 이 책을 알게된 것은 게오르그 짐멜보다, 이 책을 번역한 사람 중 한 명인 사회학자 김덕영 때문이다. 예전에 <논쟁으로 보는 사회학>이란 책과 <막스 베버, 이 사람을 보라>라는 책에서 풍긴 날이 선 문장이 매력적이었기 때문에, 나는 이 책에서 그가 게오르그 짐멜이란 학자를 어떻게 한국식으로 소화시킬 것인가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이 책은 엄밀히 말하자면, 게오르그 짐멜이 발표했던 글들 일부를 취합해 만든 것이다. 고로 게오르그 짐멜을 맛보고 싶은 사람을 위한 학술적 에세이라고 보면 되지 싶다. 학술과 에세이라는 표현이 만났다고 해서, 에세이라는 표현이 학술의 진중함을 상쇄시킬 것이라는 우려는 일찌감치 놓아두는 것이 낫다. 우리는 어차피 게오르그 짐멜이 당시 사회학의 장 안에서 ‘요상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그의 기이한 사회학적 관심이 주류사회학적 관심의 변두리에 위치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그 앎 속에서 사후적으로 주목받게 된 짐멜의 풍성한 지적 여정 가운데, 우리는 차분하게  그의 매력을 음미하면 되는 것이다.

사회학의 골수분자들이라는 표현을 무례하지 않는 것이라고 이해해준다면, 나는 그들이 게오르그 짐멜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단순히 오늘날처럼 이제 “재평가받아야 할 우리 시대의 사회학자”라는 평이한 수사를 붙이기 이전에 말이다. 사실 문화연구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내가 정통 사회학의 장 안에서 공부를 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렇기 때문에 사회학 내부에서 게오르그 짐멜을 둘러싼 담화들이 궁금한 듯하다. 나는 그런 호기심으로 이 책을 읽었다. 맑스와 베버, 뒤르켐에서 출발하는 사람들, 그 혈맥을 짚고, 여기저기 사회학적 피들을 분출해 보려는 한국의 사회학도들에게 게오르그 짐멜은 “어떻게 이런 것이 사회학적 주제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의 입장인 것인지, 혹은 “이런 사회학적 심미안을 가진 짐멜을 당대가 몰라주었던 것은 무척 서글픈 일이다”라고 평가하는 것인지. 난 그 미묘함을 체득하고 싶었다. (하긴 전자의 입장은 사회학을 피상적으로 아는 독자들도 가질 의문일 것 같다)

게오르그 짐멜의 생각은 여기저기 접합이 가능한 또 하나의 사회학적 뿌리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이 다루는 짐멜의 생각들을 좇아가다보면, 미국 시카고학파들 중 조지 허버트 미드의 상호작용론이나 어빙 고프먼의 연극무대론이 연상된다. 특히 본 책으로만 미루어보건대, 짐멜의 기술 방식은 어빙 고프먼의 저작과 무척 유사하다. 어빙 고프먼은 게오르그 짐멜을 참조한 것일까? 이렇게 생각한 이유는 이 책이 ‘의례’에 관한 사회학적 관심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혹은 이 책에서 흐르는 혈류는 미셸 마페졸리 등이 창안한 ‘일상생활의 사회학’과도 닮았다. 행여 우리가 진부하게 치부할 수 있는 일상의 요소들을 짐멜은 ‘사회학적 미학’이라는 방식으로 설명하는 데서 이는 드러난다.

짐멜은 ‘문화의 비극’이란 개념을 통해, 사람들이 생산하는 객체들, 즉 예술, 과학, 철학 등을 포함하는 사람들의 객관적 문화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것과 달리, 시간과 함께 사람들의 창조적 능력이 적어도 조금은 성장하겠지만, 그것을 바탕으로 한 개인적 문화의 생산량 증가는 객관적 문화의 양과 비견할 수 없을 정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는 진단을 내린다. 어쩌면 ‘사물을 철학하기’라는 또 다른 제목을 붙일 수 있을 것 같은 이 책은, 게오르그 짐멜이 현대 사회를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가를 조금 알 수 있는 입문서로 이해하면 좋을 듯하다. 혹은 짐멜을 어느 정도 아는 사람들이 그의 생각을 편하게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되는 책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게오르그 짐멜이 일상에 갖는 관심은 사회학이라는 영역을 확장시켜주었다는 점에서 짐멜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학자라고 생각한다. 특히 오늘날 게오르그 짐멜이 보여주는 사유의 힘은 바로 일상의 분절화, 다원화 속에서 사회적 개인이 사회라는 풍경에 가치를 찾아나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다는 점에서도,  그는 재독해할 필요성이 있는 학자임 또한 분명하다. 짐멜의 사회학은 ‘형식사회학’이라는 개념을 통해, 사회와 개인의 상호결합된 삶의 스타일들을 사회학적 시선으로 바라보고, 그것으로 이루어진 유형화된 삶의 근거들을 추출한다는 점에서, 사회학이 추구하려는 기본적인 자세 또한 유념하고 있다. (그의 사상은 오늘날 소비사회학을 비롯하여, 특히 문화/예술 사회학에도 큰 영향을 주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 ‘사회학적 신체’라는 것은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갖게 된다. 이 책을 통해 나타난 짐멜의 시선은 어찌 보면 너무 흐물흐물한 사회학자, 안이한 태도를 가지고 사회를 편하게 바라보는 학자가 아니냐라는 반문을 받을 수 있겠지만, 내 생각은 좀 다르다. 게오르그 짐멜은 집요하고 또 집요하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현상을 사회학적 개념으로 이해하려 노력하면서, 학자가 가져야 할 어떤 신념을 고수하고 있다. 그는 분명 ‘사회학적 신체’를 가진 학자이다. (어떤 면에선 사회학적 관심사에 있어, 노르베르트 엘리아스와 유사한 학문적 신체를 가진 것 같다)   

 

 

역자도 강조한 부분이지만, 게오르그 짐멜을  '미시사회학자'라고 섣불리 단정짓는 것은 좀 고려해봐야 할 문제다. 그것은 마치 이정우가 미셸 푸코의 <지식의 고고학>을 번역하면서, 각주에 적어 놓은 문제제기처럼, 푸코를 쉽게 포스트구조주의자, 포스트모더니즘의 대변자로 몰아가려는 경향과 유사한 것이다. 게오르그 짐멜의 심미안은 그런 점에서 ‘현미경’이라는 비유를 끌어오는 것이 적당하다고 본다. ‘사회학적 현미경’. 물론 이런 ‘현미경’적인 자세는 학자라면 누구나 견지하고 싶은, 견지해야 할 태도이지만, 적어도 게오르그 짐멜의 세계에서, 이러한 자세는 짐멜이 만들어놓은 사회학적 의의로서 존중받아야 할 것 같다.  그는 미시와 거시의 가교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음을 잊지 말자. 그는 사회학이라는 풍경 안에서, 간과할 수 없는 고전사회학의 토대가 된 사람이다.  오늘날 사회와 개인 속에서 ‘문화’라는 매개를 주목할 때, 에밀 뒤르켐과 함께  그는 충분히 숙고해야 할 ‘문제적 학자’라고 주장하고 싶다. 
 

 


덧붙임) 게오르그 짐멜 선집은 다들 알다시피 여러 권으로 출간되었다. 예의상 그 선집을 낸 출판사는 언급하지 않겠다. 이후 다른 리뷰를 통해, 게오르그 짐멜의 생각들을 더 살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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