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윤기 감독의 <멋진 하루>를 보면 갈등하는 속마음을 쳐다보게 된다. 갈등의 구도는 이러하다. 이 영화를 여행으로 인식하고 싶은 마음 대 여행임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  '촬영'이라는 행위가 여행의 의미를 변질시키고 있다는 비판은 이제 익숙하다. 그런 맥락에서 <멋진 하루>에서 카메라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 영화를 여행이란 관점에서 해석하는 데서 벗어나고픈 이에게 안도감을 줄지 모른다. 


2. 허나 카메라의 등장 유무가 중요하다고 보진 않는다. 외려 관심을 갖게 되는 건 어떤 사고의 형태다. 내가 바라보는 이 순간이 '여행이길 바라는 마음' (이를 '여행적인 것'이라 부르려 한다). 여행은 일과 여가라는 낯익은 구분선 안에서 구획된 행동이다. 이 구분선은 우리에게 일=채워넣음, 여행=비움이라는 사고 구조를 심는다. 사람들의 점심 대화, 계절을 알리는 주말 뉴스 소식을 통해 우리는 이 구조에 익숙한 장면을 접한다. 흔히 '인파'라고 하는 표현은 이 장면을 고착화시킨다. 


3. '여행적인 것'이라는 사고 구조는 이 구분선을 크게 따지지 않는다. 물론 일에 찌들어 있고, 쉼이 무색해지는 삶의 형태를 의식해서 나온 것일 수 있지만. 어찌되었든 도시는 지금 내가 쳐다보는 하나하나의 사물, 건물, 사람이 여행의 흔적이길 도모한다. 도시는 도시인을 '지도적 인간'으로 만든다. 그리하여 도시를 사는 나는 '가볼만한 곳' / '그러지 않은 곳'이라는 구분선으로 공간을 인식하는 데 길들여진다. <멋진 하루>는 이 지점에서 문제를 던지는 영화다. 그래서 흥미가 생긴다. 


4. <멋진 하루>의 주인공 희수(전도연)와 병운(하정우)는 빚으로 다시 만난 옛 연인 사이다. 병운은 희수에게 350만원이란 빚을 갚아야 한다. 표면적으로 영화의 시작점은 350만원이며, 영화의 끝점은 0원이어야 한다. 수치는 '목적성'을 불러일으킨다. 고로 보는 이는  <멋진 하루>의 완결성을 빚을 다 갚는 데 몰두하는 것으로 정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영화의 묘미는 그 목적성에서 오는 긴장감이 아니라, 그 긴장감을 이완시키는 두 주연의 행동이다. 그 이완의 찰나가 두 인물이 자신들의 이 경험적 순간을 여행으로 인식하게끔 만든다. 빚을 갚기 위해 병운과 함께 가는 곳은 '가볼만한 장소'가 아니다. '찍어볼만한 장소'도 아니다. 허나 희수는 시내버스에서 젊은 연인의 대화를, 타워팰리스 로비의 거울에 비친 할머니의 쓸쓸한 모습을, 성도여중 미술실에서 껌을 떼내고 있는 소연을, '쳐다보면서' 여행적인 감정을 느낀다. 카메라는 없지만, 희수는 자신의 눈이 절로 카메라가 되고 있는 지점을 체험한다. 희수의 쳐다봄은 단순 관찰을 넘어 '여행적인 느낌'을 도모하는 분위기를 자아낸다.


5. 병운은 여행의 요건을 부정함으로써 이 작품에 '여행적인 것'을 불어넣는 역할을 맡는다. 가령 그는 영화 초반, 희수가 네비게이터를 꺼내자 언짢아 한다. 대신 그에겐 기억이란 요소가 자리잡고 있다. 희수와 잘 갔었던 식당 '제주집'이 문을 닫아버린 것을 확인한 순간은 이 영화의 '여행성'을 보여준다. <멋진 하루>에서 병운의 화법은 '과거 지향적'이다. 이 과거 지향적인 화법은 '지도적 인간'의 핵심 요소다.  당연한 말이지만 지도적 인간에게 '갔던 곳' '그때 우리 그랬었지?라고 떠올리게 하는 곳'은 '가볼만한 곳'만큼의 위상을 지닌다. 희수는 처음엔 동요하지 않지만, 병운이 계속 추억을 언급하자, 병운의 사연을 들어보려는 형태로 태도를 바꾸어나간다. 그러면서 희수도 기억을 섞어 지금 현재의 행동(빚을 갚아야 한다는)이 중요함을 잊지 말라는 태도를 보인다. 그리고 그 현재 행동의 목적은 점점 물렁물렁해진다. 
















6. 결국 <멋진 하루>가 제기하는 '여행적인 것'은 '영화적인 것'이란 문제를 돌아보게 만든다. 그렇다면 '영화적인 것'을 사유하기 위해 보는 이는 도시에서 스크린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걸까. 아니면 (보드리야르가 『아메리카』에서 제시하듯) 외려 영화적인 것을 고민하려면 스크린 안에서 도시 바깥으로 가야 하는 걸까. 그렇다고 여기서 영화적인 것이 '내가 보는 이 모든 풍경이 영화적이다'라고 하는 인상에 머무는 감탄으로 머문다면, 이는 정작 이 질문에 여행을 기념하고픈 카메라를 들이대는 것과 같다. 


7. 아직 답을 찾진 못했다. 여러 개의 단서들. 그중 흔히 '모빌리티'라고 하는 개념에 안주하고 마는 자동차에 대해 나는 '영화적인 것'을 사유하고픈 유혹과 매혹을 느낀다. <멋진 하루>에서 희수와 병운이 타고 다니는 자동차와 그 창들. 이 영화에서 여행적인 것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기능을 하는 이 자동차는 '영화적인 것'을 엮어 생각하게 만드는 기능을 한다. 병운은 희수가 네비게이터를 꺼내 설치하자 대뜸 텔레비전 기능이 되는지 묻는다. 희수는 호응해주지 않는다(이 장면과 더불어 병운이 음악을 듣자고 하자 희수가 호응해주지 않는 장면도 인상적이다). 한때 영화와 대결했던 매체의 부정과 부재. 자동차 안에서 남은 것이란 다시, '쳐다봄'의 행위. 이 순간이 사진적이길 넘어, 여행적이길 넘어, 이제 영화적일 수 있는 장면들은 무엇일까. 고로 나는 이 영화를 '다시 쳐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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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홍상수 감독의 <북촌 방향>을 총 36씬으로 나누는 편이다. 즉흥이 곧 규칙이 되는 그의 영화답게 9번째 씬-17번째 씬-25번째 씬, 이렇게 8개 장면 단위로 작품의 주무대 술집인 '소설'이 나온다.


2. <북촌 방향> 속 인물들의 대화는 성격심리학에서 '개인구성개념'이라 부르는 내용에 충실하다. 이는 '나'가 낯선 누군가를 만나, 자신이 보유한 사람의 감정지식이 담긴 고유의 틀에 따라, 그 상대가 어떠한 사람인지 정리하고 평해주는 태도를 뜻한다. 본 영화에선 유난히 '난 어떤 사람인 것 같아요?'란 질문이 많다(홍상수 영화엔 이 질문이 자주 나온다). 영화의 주인공인 영화감독 성준(유준상), 그의 선배인 영화평론가 영호(김상중), 또다른 선배인 영화배우 중원(김의성)은 그 질문에 능수능란하면서도 확신에 찬 답을 내놓는다.


3. 이 영화의 공인된 하이라이트는 아마도 36번째 씬에서 성준이 사진가인 한 영화팬(고현정)을 만나 기념사진을 찍기 전까지 예전에 알고 지내던 영화 관계자와 우연히 조우하는 씬의 연속일 것이다. 이는 같이 술을 마신 영화학과 교수 보람(송선미)이 술자리에서 꺼낸 화제가 그대로 이행되는 것이기도 하다.


4. 17번째 씬.보람은 중원이 끼어 새 술자리가 된 소설에 오기 전까지, 20분간 영화감독, 영화제작자, 음악감독을 우연히 차례로 만난 일이 너무나 신기하다며 이야기한다. 이에 성준은 이유가 없는 게 이유라고 답한다. 삶은 어쨌든 나름의 살만한 이유를 사람들이 조합해가며 산다는 맥락에서, 성준은 스스로 누군가의 성격이나 특성을 파악하고 평해주는 자신의 태도를 자신도 모르게 조롱한다. 이는 같은 자리에 있던 영호와 중원의 태도에도 해당된다.












5. 홍상수의 영화를 볼 때마다 나는 '보법'(걷는 법)을 눈여겨본다. 여기서 보법이란 어떻게 걷느냐가 아니라, 다리와 발이 딛고 있는 땅이란 현실감각이 무색해지는 어떤 몽환에 가깝다. 다리와 발이 디디는 땅에선 말이 되는 이야기가 나오는 게 정상이라 생각하지만 홍상수의 영화는 이를 늘 어긴다. 그래서 그의 인물들은 평범한 말들("넌 참 착해" "좋은 사람이야" "넌 특별해")에 집착하며 생각을 하고 살아야겠다며 매번 다짐한다. 
벤야민식으로 이야기하자면 그들이 걷는 이 도시 속 장소엔 늘 꿈나라가 스며들어 있다. 
각성하면 괴롭지만 그렇다고 각성하지 않으면 사람 구실을 할 수 없다는 처연한 핑계로 홍상수가 늘 집착하는 김현의 명제인 '잘 살아간다는 것/살아볼만한 것'의 의미를 부착하고 지내야 하는 인물들이 그려진다.


그러나 홍상수 영화에서 인물들의 각성 여부가 중요한 건 아니다. 그래서 인물들은 늘 덜 깨어 있다. <북촌 방향> 속 인물들의 안부 인사가 "ㅇㅇ야 너 되게 피곤해 보인다"라는 건 그저 우연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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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올리버 색스의 유머를 좋아한다. 그는 의사이면서 실인증 환자였지만 그렇다고 그 사실에 구슬퍼 하진 않았다. 외려 자신과 반대 증상을 보이는(올리버 색스가 사람의 얼굴을 잘 인식하지 못했다면 그의 아버지는 아무에게나 아는 체하는 신경질환에 걸렸다) 아버지에 대한 걱정을 낙천적으로 그려내며 타인을 이야기한다는 것의 분량을 세심히 챙길 줄 알았다.



2. 그렇다고 그를 마냥 유머러스한 '의학 에세이스트'로 두기엔 그 공로의 범주가 좁은 듯하다. 나는 갈수록 유머가 더해지고 그 유머에 깔린 인간에 대한 집요함이 돋보이는 후기작도 좋아했지만 《편두통》 같은 다소 건조한 아카데미 스타일의 초기작에 애착이 간다. 흔히 아우라 하면 발터 벤야민을 떠올리지만, 《편두통》에는 올리버 색스식 아우라의 해석 영역이 있다.



3. '언젠가'란 단서를 붙일 수밖에 없지만 내게 르포르타주를 써보고 싶게 만드는 이는 인류학자 클리퍼드 기어츠 그리고 올리버 색스였다. 이 노인의 재치는 생사의 문제에 잠겨 있다. 그래서 더욱 눈여겨보게 된다. 죽는다는 건 대체 어떤 느낌일까. 깎을 타이밍을 놓친 길이의 손톱으로 노트를 북북 긁어대는? 색스는 부지런히 죽음의 느낌을 살폈고 이를 떠벌리는 전개 방식보다는 논거와 위트로 독자들이 그 느낌에 마냥 허우적거리지 않게 도왔다.



4. 그는 시각적으로 예민했지만 그 예민함을 과신하지 않았다. 인간의 장점과 매력을 찾아보려 노력했으며 그 노력은 확신이 있는 밝은 곳보다 존재 증명의 불안을 느끼는 이들의 어두운 곳에 가까이 있었다.



5. 비판이론은 사라지고 고통과 상처에 대한 감각적 진단이 그 자리를 꿰차는 시간 속에서, 올리버 색스의 기록을 읽는다는 건 왠지 비판적 지성을 예열하기 위한 휴식 같지만 그것이야말로 고인을 기리면서 범할 쉬운 무례일 것이다. 올리버 색스는 자신이 처한 싸움을 선명하게 인식했고 미셸 푸코와는 다른 스타일로 의학이 우리 삶의 투쟁 영역임을 보여준 사람이었다. 그의 담백한 유머가 그 지점을 잠시 잊게 해준 것은 그의 천성에서 나온 선물이자 이 생을 살고 있는 우리가 여전히 안고 가야할 실천의 과제 부여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별은 지지만 밤은 아직 있다. 그리고 내일 밤을 기다린다. 하루의 간격을 그렇게 측정하면서 이 연약한 인간은 살아낸다. 올리버 색스가 남긴 '고맙다'는 말에 인간으로서의 믿음을 덧대고 싶은 이유다.


올리버 울프 색스

Oliver Wolf Sacks (1933~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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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비평지《말과활》9호에 머리글을 썼다.


이하 전문.



어느 '문학 쪼렙'의 고백


소스sauce와 소스source


몇 년 전 내게 소설은 소스sauce였다. 텁텁한 논문에 풍미를 더할 향신료였다고 할까. 연구 주제를 맛깔나게 살릴 글귀를 논문 서두에 인용한 뒤, 흡족하다는 듯 모니터를 쳐다보곤 했다. ‘아, 글이 좀 몽글몽글해졌어.’ 허나 인용한 작품 몇 줄이 삼십 쪽 넘는 주장보다 예리하다고 깨닫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소설을, 시를 읽는 데 재미가 붙었다. 다만 누군가에게 이 작품을 읽는 중입니다, 하면 “그 작가를 별로 좋아하진 않습니다만…”으로 시작하는 훈수를 잘 따라가진 못한다. 게임 용어를 빗대면 나는 아직 문학 ‘쪼렙(초보 단계)’이다. 여전히 눈으로 페이지만 넘기는 작품이 많다. 등장인물의 긴 이름, 역사적인 무대가 이리저리 횡단하는 소설은 일단 오른손으로 넘길 페이지를 고정시킨다. 그리곤 왼손으로 읽었던 앞 페이지 구절을 짚어가며 재차 읽어야 고개를 끄덕인다.




최근 씨름했던 작품은 김솔의 소설집『암스테르담 가라지세일 두 번째』다. 읽자마자 기가 죽었다. 동원된 재료가 촘촘하게 짜인 문장 때문이었다. 김솔이 쓴 온갖 재료에는 읽은 기록, 읽지 않은 기록이 수없이 등장했다. 그 점이 딱히 중요하진 않았다. 작품 속에서 넘실거리는 재료의 인용·(재)활용이 글쓴이의 독서력과 여행력을 확인하는 데 그친다면, 그 일 또한 작가에겐 서글플 것이다. 감탄과 시샘의 초점을 잠시 옮긴다.


오늘날 소설가에게 소설을 쓰기 위한 재료란 무엇일까. 새삼스럽지만 논문 쓰기와 소설 쓰기를 비교해본다. 논문에서 재료는 사실이 입증된 정보다. 가령 내가 1980년대 국내 소설가의 창작 환경을 연구하고자 문학사회학자 루시앵 골드맨의 한 논문을 인용했다면? 그 논문 자체는 사실로 존재하는 재료다. 한데 소설에서 재료는 꼭 사실일 필요가 없다. 소설가는 재료를 허구로 만들 수 있다. 소설가가 작품을 위해 찾아낸 소스source는 작품성을 북돋우는 사실적 정보에 머물지 않는다. 





소설가 김신식이 등단작 소재로 1982년 2월 27일 부산 동대신동에서 일어났던 일을 당시《부산일보》사회면 기사를 참조해 썼다고 치자. 1982년 2월 27일의 일이 ‘정말 벌어졌던 일’이라 할 까닭은 없을뿐더러, 그 전개에 따라 기사도 허구로 설정되어 주석이나 본문에 배치될 수 있다(나는 후자의 묘미 때문에 문학이 부럽다!). 소설가들에게 더 이상 소스는 이곳, 현실을 입증하기 위한 출처가 아니다. 소설에 쓰이는 주석, 작품 본문을 유영하는 『』속 이름을 유심히 챙겨보는 이유다.






시간을 향한 집착에서 벗어나기



















평단에선 이처럼 소스의 의미를 재정의하는 작가들을 ‘라이브러리 키드’라 부른다고 들었다. 도서관·문서고를 휘저어 작품으로 내놓지만, 정작 이들이 다녀온 지식 창고는 작가의 머릿속에 존재 가능한 사실과 허구의 조합이다. 도서관이나 문서고 하면 일단 시간의 이미지가 떠오른다(그리고 보르헤스가). 하고 싶은 이야길 산드러지게 뽑아줄 책을 찾아 입으로 먼지를 털어내면 드디어 발견했다는 통쾌함, “이미 이야기되었다는 슬픔”이 함께 찾아온다. 프랑스 문학 연구자 자클린 세르킬리니툴레는 이 슬픔을 연구했다. 그녀는 14~15세기 중세 문인이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다는 스트레스를 어떻게 표현했는지 살폈다. 자클린의 분석에 따르면, 당시 문인은 창조력의 고갈을 함函, 즉 상자란 은유로 풀었다. 그들은 자신의 말과 글을 즉시 꺼내는 데 점점 주저했다. 대신 상자에 고이 담아두었다. 상자에 쌓인 기록은 주제가 고갈된 나머지, 재활용을 시인해버리는 작가의 운명이었다. 한편으론 새것을 향한 즉각적인 소란에서 벗어나 언젠가 인정받으리라 꿈꾸는 작가의 모색이었다.





그렇다고 상자 안 기록이 반드시 환영받는 것은 아니다. 무관심에 묻힌 기록을 반가워하는 쪽도 있다. 대중음악에서 유행하는 샘플링sampling은 상자에 담긴 실패담을 환영한다. 한 곡을 완성하기 위해 몇 마디 따고 싶은 음원이 많은 이의 귀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좋은 샘플이다. 음악비평가 사이먼 레이놀즈는 유명하지 않은 비트·그루브만 좇는 음악인을 ‘도굴꾼’에 비유했다. 레이놀즈의 설명에 따르면, 이 음악 도굴꾼들은 남들이 되도록 듣지 않았을 법한 음반을 구입하고자 중고품 가게, 벼룩시장, 바자회를 돌아다니고 가방에 담는다. 샘플링 과정에서 음악은 여전히 귀와 친숙하지만 도굴꾼이란 비유에서 보듯, 샘플링은 채취採取이기도 하다. 손을 부지런히 움직여 희귀한 약초를 캐내듯이 되도록 희소한 음악 샘플을 찾아 캐내려는 행위가 샘플링의 시작이다. 문서고에서 아무의 손때도 타지 않은 채 잠들어 있던 기록을 집어든 작가처럼. 샘플링이 과해 표절 문제가 거론되면 흔히 귀를 의심하지만, 사실 귀만큼이나 손도 중요하다. 대중음악인에게 손의 성실성은 귀의 그것만큼이나 자신의 독특한 음악 취향을 선보일 수단이기 때문이다.





대중음악이든 문학이든 갈수록 새로운 매체 환경과 친숙해져 가는 이때, 문학은 대중음악에 비해 손의 성실성, 진실성을 믿는 편이다. 문학에서 손은 곧 ‘장인의식craftmanship’으로 수렴된다. 문학은 아직 (맨)손의 가치에 무게를 둔 감정을 신봉한다. 가령 작가에게 필사는 단지 키보드 쓰기에 사라져간 손글씨의 추억을 되새김질하는 게 아니다. 필사는 자신이 빚어내려는 작품보다 먼저 태어난 작품에 대한 예우다. 때론 맹목적인 가치에 휩쓸리지 않은 채, 어떤 정수精髓를 지키겠다는 결심이다. 사람들은 이를 따라 작가의 필사를 장인의 마음으로 해석했다. 소설가는 자연스레 외로이 손수 물건을 만들어내는 공방에 위치했다. 허나 익히 알다시피 오늘날 문인의 손은 공방이란 은유에 묶여 있지 않다. 그러했을 때 문인들의 손은 미셸 푸코의 이 말을 불러낸다.




“나는 문학적 분석은 오직-우리가 언어와 시간을 혼동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이제껏 사로잡혀 있었던 이 모든 시간적 도식을 망각한다는 조건 아래에서만 고유한 의미를 갖게 되리라고 믿습니다. 이러한 도식들 중에는 특히 창조의 도식이 있습니다. 만약 비평이란 것이 그렇게도 오랫동안 이 최초의 창조 순간, 작품이 태어나고 자라는 순간의 회복을 자신의 기능과 역할로 삼아왔다면, 그것은 다만 비평이 언어의 시간적 진화를 따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비평의 향수, 필요성이 늘 존재해 왔습니다.” 








문인을 공방에 가둘 때, 창작은 순수한 창조creation의 신화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창조의 신화를 옹호하든 벗겨내든 시간에 집착하는 문학 비평은 여전히 ‘영향에 대한 불안’을 의식한다. 선구자를 지목하고, 거스르며, 오독을 권장한다. 누가 먼저 그 주제에 관한 생각의 우선권을 소유했는가, 후세의 작가는 어떻게 선대에서 후대로 이어지는 순차적 시간을 창작으로 거스르는가 주목한다.



그러나 지금 비판가들 사이에서 영향에 대한 불안, 이미 이야기되었다는 슬픔은 엉뚱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작가는 평자의 비판을, 평자는 작가의 비판을 금세 식상함/식상하지 않음이란 틀에서 검사한다. 서로의 비판은 제대로 읽히지 않은 채, 일단 품바 타령 취급을 받는다(‘작년에 왔던 각설이가 죽지도 않고 또 왔네~.’) 누군가의 입장에서 진부함을 솎아내는 비판은 상대의 논의를 ‘또 그 이야기냐’는 피로로만 읽어낼 뿐이다. 문학의 그늘에 대한 폭로는 그런 취급을 당하지 않길 바라지만, 외려 문학계 비판이 이를 부추기는 형국이다. 폭로를 피로라는 코드로 접근했을 때, 폭로에 대한 반응은 결국 누가 그 작가의 숨겨진 필화를 더 많이 알고 있느냐, 더 나아가 당신이 들은 문학의 위기보다 더 무시무시한 위기를 알고 있다는 ‘정보값’ 자랑으로 와전되고 만다. 이 흐름이 ‘이제야 그 이야기를 알았느냐’는 냉소에 기대고 있음은 자명하다.





논쟁적 사안을 두고 창작의 주제 고갈만큼이나 비판의 관점 고갈에만 몰두할 때, 비판가는 피에르 부르디외가 “이론적 성직자”라 부른 모습을 자연스레 닮아간다. “이론적인 성직자는 이론적 오류를 먹고 살아간다. 이론적 오류를 고치고, 비난하며, 내쫓는 것은 그의 몫이다.” 학자가 이론적 오류를 지적하는 일은 당연하다. 부르디외가 굳이 성직자라는 비유를 쓴 것은 “영업허가를 받은 마르크스주의자”라 자임한 이들 때문이었다. 부르디외가 보기에 이 성직자들은 마르크스의 예언을 이해하며, 오독하고, 반역할 수 있는 권한이 스스로에게만 있다는 듯 행동했다. 문학이라고 다를 리 없다. 비판가가 자신도 모르게 성직자가 되었을 때, 문학판은 서로의 윤리적 제스처를 검사하는 위생소衛生所가 되어버린다.


이 와중에 ‘젊은’ 작가들은 이 형국을 무마시켜줄 심판으로 대책 없이 ‘소환’된다. 소환하는 자들은 자신의 피로를 젊은 작가들에게 전가한다. 먹을 밥상은 이미 사라지고 없는데, 기성 작가와 평단은 외려 굶은 자에게 새 밥을 차려 달라 아우성친다. 그런 사이에 비판가들은 괜히 제조manufacturing라는 은유에 기대어 문학의 현실을 ‘출판상업주의’로만 몰고 간다.




결국 문학은 흡수하고 뒤돌아본다, 작품으로





“문학은 이 이해 가능성 양태를 해석과학들에 전달했는데, 이 과학들은 역으로 그것을 문학에 적용하여 문학으로 하여금 숨겨진 진리를 자백하도록 강요한다. 발송인에게 환송은 너무 쉬운 것이고 불필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이 과학들이 하나의 방법론으로써 문학을 탈신비화하겠다고 주장하는 그 방법론은 사실 문학 스스로가 제공했으며, 또한 이 비판들의 개입 없이도 문학은 스스로를 진단과 수정의 대상으로 삼으면서 자신의 과학에 의문을 제기해왔기 때문이다.”

_자크 랑시에르







문학을 계속 하려는 자들, 앞으로 하고 싶은 자들, 읽고 싶은 자들을 위한 배려 없는 논쟁들. 결국 이 따가운 말들을 양분으로 전환시키는 것은 문학 작품이라 생각한다. 앞서 라이브러리 키드라 불리우는 소설가들의 경향에서 살펴봤듯 문학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표절의 논의와 전혀 다른 말의 공간을 스스로 모색해왔는지 모른다. 이 모색은 문학의 현실을 자가 진단한다. 어느 기록, 어느 사건, 어느 경험을 ‘담았다’는 작품의 세계가 그 작품을 읽는 내가 접한 기록·사건·경험들과 ‘닮았다’는 해석이 무색해지는 공간. 작가들은 그 무색함을 전하기 위해 작품을 통해 인용·재료·출처를 꾸며내고 있다. 이로써 현실을 마땅히 그려내는 데 충실해야 한다는 정보의 사명감은 사라진다. 문학의 정보는 그 자체로 허구의 생명력을 얻어 뻗어나간다. 어쩌면 이 논쟁 또한 누군가의 작품 속 재료가 될지도 모르겠다. 혹시 이 사건을 기초로 쓰인 것입니까라는 질문에 작가가 코웃음 치더라도 상처받지 말자. 이 코웃음은 우리를 새로운 세계로 데려다줄지 모르니 말이다.






그러나 랑시에르의 말대로 이처럼 문학이 스스로 진단하고 있다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일까. 이 순간 《말과활》은 우스갯소리로 ‘말하면 입만 아프지’ 하며 넘어가는 질문 하나를 독자들에게 꺼낸다. 과연 비평이란 무엇일까. 이 글이, 이 잡지가 분명한 해답을 줄 수 있다면 오만일 것이다. 다시 비평의 처지를 돌아본다. 비평은 지금 텔레비전 시트콤에 등장하는 관객의 인공 웃음이 되어버린 게 아닐까. 작품을 읽으며 울고 웃어야 할 독자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진 않는가. 비평은 울어야 할 작품은 울어야 한다고, 웃어야 할 작품은 웃어야 한다며 독자의 기분을 세심히 상상하며 쓰는 기록이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그러했을 때 어느새 정서적 지식으로 덧대어나가는 평문에 마냥 좋은 비평이란 지위를 부여하고 있진 않는가. ‘착한 비평’이란 지목 아래 작품을 향한 ‘어떤 긍정’인가를 문제 삼지 않은 채, 긍정 자체가 무조건 문제라는 식으로 비평을 단순히 판별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이 문제들을 껴안은 채 문학을 읽는다. 비평을 읽는다. 아니, 문학을 계속 읽을 것이다. 비평을 계속 읽을 것이다.





“우리는 여러분의 기분을 달아오르게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여러분에게 감정의 자백을 전염시키고 싶지 않습니다.”

_페터 한트케, 『관객 모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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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2030 세상보기. 이번 달엔 <사과 디자이너Apology Designer들에게>란 테마를 고민해보았다. 


원문 링크 '사과와 변명의 차이' 

사과문은 오늘날의 윤리를 체험하는 관광명소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야구 커뮤니티에서 상대 팀을 댓글로 조롱한 자부터, ‘땅콩 회항’이라 불리는 사건까지. 일이 터지면 사람들은 맨 먼저 어떤 사과문이 나올지 기다린다. 사과가 깔끔하지 못하면 사람들은 기꺼이 사과문의 편집자가 된다. 사람들은 사과문을 읽으며 머리를 굴린다. 읽었을 때 사과한 측에서 머리를 굴린 티가 나면 좋은 사과문이 아니다. 자초지종(自初至終)의 비중이 높을수록 분노를 사기 쉽다. 공분에 휩싸인 사과문은 수정된 채 다시 발표된다.


허나 사과의 세계에서 ‘재차’ 사과한다는 것은 실패나 다름없다. SNS로 인해 성공적인 사과의 통과 기준은 과거에 비해 높아졌다. 사과 하나하나에는 고도의 지식이 투자된다. 그러다 보니 사과를 어떤 식으로 하면 좋은지 세세히 조언하는, 이른바 ‘사과 디자이너(Apology Designer)’들이 생겨났다.


기업의 윤리적 경영·사회적 책무가 화두가 된 지 오래다. 사과 디자이너도 이런 흐름 가운데 나타났다. 이들은 적절한 사과를 위해 유감, 해명, 개선의 내용이 각각 어느 정도 들어가야 할지 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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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가 하나의 윤리적 노동이 되었을 때, 철학자 알랭 바디우의 말을 빌자면, 그 윤리는 과연 투쟁을 위한 형식인가 투쟁하지 않기 위한 변명인가.

그러했을 때 '쿨Cool한' 사과론을 외치는 PR 전문가들과 기업 컨설턴트들은 그들의 사과론에서 무엇을 놓치고 있는가. 쿨한 사과론에는 사회적 약자가 끼어들 틈이 있는가. 이미 명성을 누릴 수 있는 자들의 뻔한 권리가 오늘날 쿨한 공적 사과가 아닌가. 정치인, 기업인의 납작 엎드린 사과가 을/피해자/희생자의 입장에서 최종의 정서적 승리로 인식되어선 안 되는 이유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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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족 2015-08-21 13: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듣고 싶은 말을 해주는 것과, 정직하게 좀 더 열심히 말해보는 것, 권력의 큰 격차를 고려한다면 전자를 원하는 게 맞나 싶다가도, 그래도, 정직하지도 않다면 듣고 싶은 말을 듣는 게 무슨 의미야, 싶기도 합니다.

얼그레이효과 2015-08-28 13:00   좋아요 0 | URL
네 저도 그런 마음과 비슷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