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주소 : http://news.khan.co.kr/section/khan_art_view.html?mode=view&artid=200912111733465&code=900308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자의 죽음…당대비평 기획위원회 | 산책자 

  왜 많은 사람들은 노무현의 죽음에는 눈물을 흘리지만, 용산의 죽음에는 무심한가. 무크지 ‘당비의 생각’ 3호는 2009년에 있었던 몇 건의 죽음에 관한 사회적 기억을 다뤘다. 만인은 죽음 앞에 평등하다고 하지만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기억은 동일하지 않다. 전직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자살과 그 후의 격랑이 그 몇 달 전에 온 몸에 불이 붙어 사라져간 생명들에 대한 사회적 망각을 촉진했던 사실이 그를 입증한다. 1년이 다 되도록 고인들이 천도조차 하지 못하고 냉동고에 누워 있는 현실만 끈질기게 그 죽음을 증언하고 있을 뿐이다.

엄기호 우리신학연구소 연구위원은 용산의 죽음을 외면하는 핵심에 ‘사유재산’이 있다고 한다. “단지 이들이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이 아니다. 한국에서 민주주의도, 자유도, 인간의 권리도 침해당할 수 있지만 결코 재산에 대한 질서는 흐트러질 수 없다”는 것이다. “재산에 대한 질서”는 곧 “자본주의의 심장”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의 재산에 ‘해코지’했다고 비난받는 용산의 망루에 올라간 사람들이 지키려고 했던 것도 자신의 재산이다. 본질적인 차이는 앞의 재산이 곧 개발이라면, 뒤의 재산은 삶의 터전 그 자체라는 점이다. 고로 “용산은 삶에 대한 요구가 개발에 대한 요구를 결코 앞설 수 없다는 것”이다.

송경동 시인은 “최고의 권력과 명예를 거머쥐어 보고도 외로울 수밖에 없었던 그(노무현)의 죽음에도 이 시대 보편적인 산재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며 “화살이 단지 또 하나의 관절로 기능할 이명박 개인에게로 쏠릴 뿐, 단 한 번도 이 사회에 만연한 죽음의 구조들에 대한 천착으로 나아가지 않았다”고 했다. 한 영웅의 죽음에 매달리려 하면 노무현, 김대중 정부 시절에도 많은 이가 학살을 당할 수밖에 없는 구조는 망각될 수밖에 없다. 김원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대중과 대중운동에 필요한 것은 구원자가 아닌, 새로운 정치를 구성하기 위한 자기 조직화”라고 했다.

<손제민기자 jeje17@kyunghyang.com>(2009.12.1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어제 뮤지컬 <스프링 어웨이크닝>을 보고 오면서 몇 년 적 기억을 떠올렸다. 나는 대학교 교수님의 제안으로 모 청소년 영상제에 심사위원을 맡게 되었는데, 솔직히 말해 고민들이 너무 착했다. 그 많은 심사대상작들을 보면서, 나는 혹시 이 아이들이 너무 영악해져서, '좋은 상'을 받기 위해 이런 '평이한 고민'들을 소재로 삼은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술 문제, 담배 문제, 이성 교제 문제, 그 뻔하디 뻔한 문제 의식들..나는 누군가가 그 시기엔 다 그 문제로 고민하지 않아요? 반문하겠지만, 나는 그건 고민의 게으름이라고 본다. 그래서 새싹들의 파릇파릇함을 응원하기 위한 진부한 위로와 응원의 심사평 대신, 좀 혹독한 매질의 시각을 심어줄 필요가 있겠다 싶었다. 나중에 팜플렛에 실린 내 냉평을 본 내 학교 동창이 "너무 깐 것 아니냐"고 걱정해주었지만, 나는 당시 내 결정을 후회하지 않는다.  

토니상을 몇 개나 받았고, 한국에서도 엄청 좋은 평을 받았다는 것. 내겐 다 그저 그런 문제이다. 내가 문제삼고 싶은 건 이런 류의 고민들이 1980년대 <조찬 클럽>과 별 다를 바 없는 차원이다. 나는 두 가지 측면을 문제삼고 싶다. 진부한 일 단계 지적. 그래. 사회가 '여전히' 변한 것이 없다는 차원이다. 그러면 개인은 좀 위로받을 지 모르겠다. 여전히 변한 것이 없기 때문에, 우린 이 문제에 눈물을 흘릴 이유가 있다는 것. 이 문제에 환호하고, 이 문제에 내재된 억압이란 것들, 성의 문제란 것들, 사춘기의 방황이란 것들. 이런 것에 공감할 권리가 있다고. 근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건 '평이한 위안'의 문제다. 좀 거시적으로 말하자면, 이건 높은 단계의 고민을 막는 우리 사회의 분위기라고 보고 싶다. '적당한 수준'의 성찰. '적당한 수준'의 공감. 그래서 이런 '평이함'을 즐기면서, 이런 '일반성'을 적절히 소비하면서, 그 날 하루를 버티는 것이다. 그래서 개인은 더 많은 정보를 습득하지만, 지성의 성장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예전보다 똑똑해졌다고 하지만, 그것이 지성의 배가라고 생각하진 않은 사람으로서, 나는 <스프링 어웨이크닝>이 던지는 '청춘의 언어'들이 너무나 식상하고 맛이 없었다. 그 언어가 던지는 몇몇의 풍경들은, 우리 시대가 이제는 떨쳐버려야 할 진부함이 아닐까 싶었다. 내가 말하는 진부함은 비단 새로운 소재 찾기에 골몰하라는 촉구가 아니다. 다만 이런 진부한 단계에 갇혀, '비혁신적'인 혁신에 환호하는 그 어떤 수준에 일갈하는 이들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 아쉽다.  

나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비혁신적' 혁신의 분위기가 두렵다. 이것은 자신이 정말 성장하고 있다는 거짓된 위안을 심어줄 뿐, 그 실체는 허약하다. 매번 포장되는 '혁신의 가면'을 쓴 언어들이 결국 우리에게 강요하는 건 '평이한 위안' , 적당한 눈물과 적당한 웃음뿐이라면 이 짧은 삶. 너무 우울하지 않은가. 그 틈에서 게으른 미디어들이 다루는 단어들이란 고작 '파격'이란 것일 뿐.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월따 2009-12-09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스프링 어웨이크닝 보셨군요. 보희샘 추천을 받았을때도, 저 제목에서 딱 풍기는 뭔가 상투적인 그것 때문에 약간 긴가민가하긴 했었죠; (아 저는 ㅂㅎㅈ임다 ㅋ)

얼그레이효과 2009-12-13 1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컨디숀이 안 좋을 때 봐서..다시 봐야할 것 같기도 하구요.+_+
 

26살 때, 한 문화단체에서 일 제의가 들어왔다. 당시 나를 '스카웃(?)'하러 온 저명한 문화평론가 한 분과의 일화가 떠오른다.  

"자네, 올해 나이가 몇 인가?" 

"예. 스물 여섯입니다.." 

"오..그래. 스물 여섯. 사실 그 나이 때는 벌써 날고 기는 애들 많은데.." 

(나 : 씩 웃으며 '그런가?', '그런가ㅜ'한다) 

"그래. 4학년인 것으로 아는데, 진로는..?"  

(대학원에..진학을..이란 말을 마음 속에 생각하고 있었는데..이미 진로는? 하고 

그 분이 나의 미래를 알아서 그려주셨다) 

"거 뭐..대학원 가서.. 학부 후배들한테 밥이나 사주면서..들은 거 몇 개 주절거리고.. 

그런 것보다야... 차라리 나와 함께 일 좀 해보는 게 어때..? 글 쓰는 것 계속 좀 키우면서.. " 

(나 : 고개를 끄덕거린다. 그리고 물었다) 

"선생님, 어떤 글이 좋은 글이죠..?" 

그는 손을 살짝 펴고는 

"그건 말이야. 누군가 자네 글을 만졌을 때 앗 뜨거!하는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생기게끔 

하는 글이 좋은 거지.." 

그 말을 현실화시키려고 참 많이 썼지만, 아직 답을 찾지 못했다.. 

많이 쓰고, 많이 떨어지고, 미지근한 것 몇몇 개 받고..그런 걸로 괜히 과장된 자랑이나 하고.. 

간사가 되고 나서, 논문을 쓰고 나서..내 스스로에게 가장 안타까운 건 '날렵한 글'을 쓸 수 

있던 능력이 많이 감퇴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작년에 지도교수에게 얼굴 벌개진 상태로.. 

"전 문학적인 논문, 칼럼 같은 논문을 쓸겁니다.."란 객기를 부렸나보다.. 

'열문'의 경지.. 

이젠 좀 토나올 정도로 써야 겠다... 

왼손 오른손에 연필 하나 끼고 비벼보자....손에서 불이 날 때까지... 

글에서 불이 날 때까지..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09-12-08 00: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2-09 08: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소비의 사회
장 보드리야르 지음, 이상률 옮김 / 문예출판사 / 2015년 9월
장바구니담기


소비사회의 특징은 매스 커뮤니케이션 전체가 3면기사[사회면 기사]적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정치적, 역사적, 문화적인 모든 정보는 3면기사라고 하는 대수롭지 않은, 그러나 동시에 기적을 부르는 것 같은 형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들 정보는 완전히 현실적인 것, 즉 눈에 띄기 쉽게 극적인 것이 되며, 그리고 동시에 완전히 비현실적인 것, 즉 커뮤니케이션이라고 하는 매개물에 의해 현실로부터 멀어진 기호로 환원된다. 따라서 3면기사는 단순한 하나의 범주가 아니라 우리들의 주술적 사고, 우리들의 신화적 축이 되는 범주이다. 이 신화는 현실, '진실'과 '객관성'의 한층 더 탐욕스러운 요구 위에 입각하고 있다. 어디에도 실록영화, 현지르포, 플래시(flash)뉴스 [순간적인 장면을 찍는 것], 충격적인 사진, 증언다큐멘터리 등이 있으며, 그 어디에서도 추구되고 있는 것은 '사건의 핵심' '소란의 진상' 있었던 그대로의 기사, '대면' - 사건의 현장에 있었던 것 같은 환상, 체험자가 느낀 대전율- 즉 또 다시 기적이다.왜냐하면 텔레비전에서 보거나 녹음기를 통해 들은 것은 사실은 내가 그곳에 없었다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6쪽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진실보다 더 진실인 것, 달리 말하자면 그곳에 없으면서도 그곳에 있는 것, 즉 환시인 것이다. 매스 커뮤니케이션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은 현실 그 자체가 아니라 현실의 환기증 또는 말장난은 아니지만, 현기증없는 현실이라고 해도 좋다. 왜냐하면 아마존 밀림의 핵심, 현실의 핵심, 정열의 핵심, 전쟁의 핵심, 매스 커뮤니케이션이 묘사하는 기하학적 장소이며 매우 심한 감상벽의 원천이기도 한 이 핵심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장소인(26) 것이다. 핵심이라고 하는 것은 정열과 사건의 비유적인 기호이며, 기호는 이렇게 하여 안심시켜주는 기능을 가지게 된다. 이처럼 우리는 기호에 의해 보호받고, 현실을 부정하면서 살고 있다. 이것이 바로 기적적인 안전이라고 하는 것이다. 세계의 여러 이미지를 볼 때 잠깐 동안의 현실에의 침입과 그 장소에 있지 않다고 하는 깊은 기쁨을 누가 구별할 것인가? 이미지, 기호, 메시지, 우리가 소비하는 이 모든 것은 현실세계와의 거리에 의해 봉인된 우리들의 평온이며, 이 평온은 현실의 폭력적인 암시에의 의해 위험에 처하기는커녕 오히려 위로받고 있을 정도이다.-26~27쪽

지금까지의 모든 사회는 엄밀하게 필요한 것 이상으로 항상 낭비하고 탕진하고 소모하고 소비하였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은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즉, 개인이나 사회가 생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진정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은 초과분과 여분을 소비할 때라는 것이다.이러한 소비는 '소모', 즉 순수하고 단순한 파괴에까지 이를 수 있는데, 그때에는 특별한 사회적 기능을 갖는다. (중략) 또한 지금까지의 어떤 시대에도 귀족 계급은 쓸데없는 낭비를 통해 자신들의 우월성을 확인하였다.-43쪽

풍부한 우리 사회의 막대한 낭비는 이렇게 읽어야 한다. 희소성에 도전하고 풍부함을 역설적으로 의미하는 것은 이 낭비이다. 효용이 아니라 이 낭비의 원칙이야말로 풍부함의 중심적인 심리학적, 사회학적 및 경제학적 도식이다.-47쪽

사물의 '사용'은 그 완만한 소모를 초래할 뿐이며, 급격한 소모 속에서 창조되는 가치가 훨씬 더 크다. 그러므로 파괴는 생산에 대한 근본적인 대극이며, 소비는 그 양자의 중간항에 불과하다. 소비는 자신을 넘어서 파괴로 변모하려는 경향을 갖고 있다. 바로 이 점에서 소비는 의미있는 것이 된다. 현대의 일상생활에서는 대부분의 경우 소비는 유도된 소비행태로서 생산성의 명령에 복종하고 있다. 따라서 대부분의 경우 사물은 장소에 어울리지 않게 존재하고 있는 것이며, 사물의 풍부함 자체는 역설적으로 말하면 가난함을 의미한다. 재고품이라고 하는 것은 결핍에 붙어 있는 쓸데없는 장식이며 고뇌의 표시이다. 사물은 파괴에 있어서만 남아돌 정도로 존재하며, 그리고 소멸 속에서 부의 증거가 된다. 여하튼 폭력적이고 상징적인 형태(개인적 또는 집단적 해프닝, 포틀라치, 파괴적 행위)로건 체계적이고 제도적인 형태로건 간에 파괴는 탈공업화사회의 지배적인 기능의 하나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50쪽

평등주의 신화의 담당자가 되기 위해서는, 행복은 계량 가능한 것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토크빌이 민주적인 사회들은 사회적 불운의 해소와 모든 인간 운명의 평등화로서 보다 많은 복리를 항상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고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행복은 사물과 기호로 측정될 수 있는 복리, 물질적 안락이어야 한다.-53쪽

빈곤과의 투쟁에 열중하는 체하면서 또 그 은폐된 목적에 따라 본의 아니게 빈곤을 부활시킴으로써 성장의 신화는 빈곤의 신화에 의해 고양되는 것이다. -64쪽

생활필수품 수준에서의 상대적 균질화는 따라서 가치의 '점차적인 변화'와 효용의 새로운 서열을 수반한다. 왜곡과 불평등은 소멸한 것이 아니라 이전한 것이다. 일상적인 소비재는 점차 사회적 지위의 상징이 되지 못하며 또한 소득도 매우 큰 불균형이 감소되고 있는 만큼, 차별기준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해간다. (눈에 보이는 사물에의 지출, 구매 및 소유라는 의미에서의) 소비는 사회적 지위의 변하기 쉬운 체계 속에서 현재 행하고 있는 우월한 역할을 조금씩 잃고, 그것을 다른 기준과 다른 유형의 행동에 양보하는 일도 일어날 수 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소비가 모든 사람의 속성이 될 때에는 그것은 더이상 어떤 의미도 갖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66쪽

소비과정이 다음의 두가지 근본적인 측면에서 분석될 수 있다 : 1. 소비활동이 포함되고 의미를 갖게 되는 코드(code)에 기초한 의미작용 및 커뮤니케이션의 과정으로서의 측면, 이 경우 소비는 교환체계이며, 또 언어활동과 똑같다. 이 수준에서 소비를 다루는 것은 구조분석에 의해 가능 / 2. 분류 및 사회적 차이화의 과정으로서의 측면, 이 경우 기호로서의 사물은 코드에서의 의미상의 차이뿐만 아니라 서열에서의 지위상의 가치로서도 정리된다. 여기에서는 소비가 전략적 분석의 대상이 될 수 있는데, 그러한 분석은 (지식, 권력, 교양 등의 사회적 의미를 가지는 것들과 관련해서)지위를 나타내는 가치들의 배분 속에서 소비의 특정한 비중을 측정.-72쪽

소비자는 자유롭게 자기가 원하는 대로 또 자신의 선택에 따라 타인과 다른 행동은 하지만, 이 행동이 차이화의 강제 및 어느 한 코드에의 복종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다. 타인과 자기를 구별짓는 것은 동시에 항상 차이의 질서 전체를 만드는 것이 되는데, 이 질서야말로 처음부터 사회 전체가 해야 할 일이며, 좋든 싫든 개인을 초월해버리는 것이다. 각 개인은 차이의 질서 속에서 점수를 얻어 질서 그 자체를 재생산하며, 따라서 이 질서 속에서는 어쩔 수 없이 항상 상대적으롼 기록된다. 각 개인은 차이에 의한 자신의 사회적 득점을 절대적인 득점으로 체험하지만, 질서내의 위치는 교환되도록 하면서도 차이의 질서 자체는 그대로 남게 하는 구조상의 제약은 체험하지 못한다.-73쪽

직업상의 문화적인 갈망보다 훨씬 더 큰 유연성을 나타내는 (물질적 또는 문화적인) 순수한 소비갈망은 사실 어떤 계급에게 있어서는 사회이동의 면에서의 중대한 실패를 보상하는 것일 수 있다. 소비충동은 사회 계급의 수직적인 서열에서의 충족되지 않은 욕구를 보상하는 것이 될지(77)도 모른다. 따라서 (특히 하층계급의) '과소비' 갈망은 지위를 추구하는 요구의 표현인 동시에 이 요구의 실패를 체험한 데서 나오는 표현일 것이다.-77~78쪽

차이화의 증대는 반드시 사회계층의 상하간의 거리의 증대 및 '척도기준의 비뚤어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차별의 증대, 양극이 접근한 서열 내부에서의 차이표시기호의 감소경향을 의미한다. 균질화와 상대적인 '민주화' 는 더욱더 격렬한 지위추구 경쟁을 수반한다.-79쪽

세탁기는 도구로서 쓰여지는 것과 함께 행복, 위세 등의 요소로서의 역할도 한다. 바로 이 후자의 영역이 소비의 영역이다.-98쪽

소비는 기호의 배열과 집단의 통합을 보증하는 체계이다. 따라서 소비는 도덕(이데올로기적 가치들의 체계)인 동시에 의사소통의 체계, 즉 교환의 체계이기도 하다.-101쪽

청교도는 자기 자신을, 그 자신의 인격을 최대한으로 신을 찬양하기 위해 이익이 생기게 하는 기업으로 보았다. 그러한 산출을 위해서 한평생을 보낼 때 그의 '인격적인' 자질, 그의 '성격'은 그에게서는 투기도 낭비도 하지 않고 잘 관리해야 하고 시기적절하게 투자해야 하는 자본이었다. 이와는 바대로, 그러나 같은 방식으로, 소비인간은 자기 자신을 향유를 의무로 삼는 존재로, 향유와 만족을 꾀하는 존재로 간주한다. 달리 말하면 행복해야 하고, 사랑해야 하고, 귀여워하거나 귀여움을 받아야 되고, 유혹하거나 유혹받아야 하며, 또 활력에 가득 차야 하는 존재로 간주한다. 그것은 접촉 및 관계를 증대하는 것, 기호와 사물을 집중적으로 사용하는 것, 향유의 모든 잠재력을 체계적으로 개발하는 것 등을 통해 생존을 극대화하는 원리이다.-104쪽

대중을 노동력으로 사회화한 산업체계는 더 나아가서 자신을 완성시키지 않으면 안되며, 또한 그들을 소비력으로서 사회화(즉, 통제)하지 않으면 안되었다.-107쪽

오늘날에는 성의 해방에 제재를 가하는 것은 억압의 개인적 심급, 소위 내면화된 검열이다. 검열은 더이상 성을 절대적으로 적대시하는 (종교적 ,도덕적, 법/률적) 제도가 아니라 개인의 무의식 속에 들어가 성과 똑같은 원천에 의거하여 존속할 것이다. 현대인을 둘러싸고 있는 성적 관대함 속에는 끊임없는 자기검열기능이 잠재해 있다. 성에 관해서는 공공연한 억압은 더이상 없으며 (또는 적어지며), 자기검열이 일상생활의 하나의 기능이 되었다. -218~219쪽

현재 입을 모아 떠들어대는 방탕과 그곳에 침투하는 막연한 고뇌는 '생활을 변형시키기는커녕' 성이 사실상 성적 관심사가 되는 집단적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정도의 것일 수밖에 없다. 이 분위기에서는 성은 자기 자신을 날카롭게 의식하고 자신에게 도취하기도 하고 지루해하기도 하는 것이지만, 이것이야말로 성이 풍속을 통해서 만들어낸 체계, 성을 하나의 정치적 장치로 이용하는 체계의 이데올로기에 다름 아닌 것이다.왜냐하면 더 잘 팔기 위해서 성을 '이용하는 광고업자들의 배후에는, 인간의 전면적 해방으로 향하는 위험한 변증법에 대항해서 성해방을 (도덕적으로 비난하기도 하지만) '이용'하는 기존의 사회질서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219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국민으로부터의 탈퇴 - 국민국가 진보 개인, 반양장
권혁범 지음 / 삼인 / 2004년 2월
장바구니담기


국가주의 사유 체계에서도 개인은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다양하(27)고 주체적인 수많은 개인 중의 유일한 하나로서의 개인이 아니라 국민적 정체성을 담지하고 실현하는 집단주의적 개체로서의 개인이다.-27~28쪽

국가주의적 집단주의 문화 안에서 '개인'은 부정적인 의미를 띠게 되고 '이기심'과 동의어로 인식된다.(33)대신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개인보다는 집단적 규율에 복종하고 집단적 가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인간형이 찬양된다.-33~34쪽

현재 한국사회에는 미국을 바라보는 세 가지 시각이 병존한다. 첫째, 과거의 반공-친미적 입장은 지배층 및 중간 계층에서 여전히 강하다. 그것은 다시 냉전주의적 권위주의에 경도된 입장과 자유주의적 입장으로 나뉠 수 있다. 두 번째, 급진적 관점에서 미국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유지하고 있는 세력은 주로 진보적 지식인이나 노동 운동을 중심으로 한 기층 운동에서 강하다. 세 번째로 일반 대중들은 민족주의적 정서에 토대하여 미국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이 강한 편이다. 하지만 이 경우 막연한 반미 정서가 꼭 정치적 반미주의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첫 번째의 반공-친미의 경우도 정치적으로만 그럴 뿐 문화적으로는 매우 보수 권위주의적인 입장에서 미국을 비롯한 서구 문화의 개인주의나 개방성, '퇴폐성'을 부정적으로 보는 복합성이 존재한다.-98쪽

경제적 개방과 정치적, 문화적 보수주의를 결합하는 이중적 입장 -99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