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 때부터 '법 영화'를 보는 것을 참 좋아했다.  이 쪽의 대가는 지금은 그 인기가 많이 죽은 듯한 존 그리샴이 아닐까 싶다.  <야망의 함정>,<펠리컨 브리프>,<의뢰인>,<타임 투 킬>, <가스실>,<레인메이커> 등등 그의 소설을 각색한 영화가 나오면 꼭 챙겨봤고, 비디오테이프로도 소장해놓았다. 영화가 흥미로우면 소설도 덩달아 샀던 때가 많았는데, <야망의 함정>의 원작인 『그래서 그들은 바다로 갔다』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어린 시절, 외국 소설의 문체가 눈에 제대로 익지도 않았을 때인데, 막무가내로 읽었던 듯하다. <야망의 함정>을 감독했던, 이제는 고인이 된 시드니 폴락은 내가 소장한 dvd 타이틀 중 아끼는 작품인  <마이클 클레이튼>에 출연하기도 했다.  2008년도 아카데미시상식에서 작품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던 <마이클 클레이튼>은 한때 인기 장르로 자리매김했던 법정 영화의 맥을 전유하고 있다.  





<마이클 클레이튼>을 대충 본 이들에게 가장 의문으로 남는 씬은, 마이클 클레이튼이 곧 폭발할 자동차에서 내려  기이하게 세 마리의 말을 쳐다보는 순간일 것이다. 그러나, 이 씬은 <타임 투 킬>에서 매튜 멕커너히가 사건이 풀리지 않아 괴로워할 때, 아내인 애슐리 주드가 갑자기 귀신처럼 나타나 어떤 영감을 주는 그런 '신비스러운' 장면과는 차원이 다르다. 클레이튼이 말 세 마리를 바라보는 장면은 본 작품에서 큰 핵심이며, 제이슨 본을 치밀하게 조직한 경험이 있는 토니 길로이는 이 씬을 위해 친절하게 힌트용 두 씬을 깔아놓는다. 죽은 친구인 변호사 아서와 클레이튼의 아들은  『Realm & Conquest』 란 책을 통해 클레이튼의 죽을 운명을 변화시켜주는데, 사실 이 대화 이전에, 아들이 클레이튼에게 삶에서 누구나 믿을 수 없다라고 하는 메시지가 책에 들어 있음을 간접적으로 알려주는 대목- 정확히 말하면, 클레이튼은 이렇게 말한다. "(아들이 책 속의 각 캐릭터들은 15개나 되고, 이 캐릭터들은 모두 서로를 믿지 못한다고 말하자) 삶과 같군"-은   삶의 어떤 윤리, 지켜야 할 정의, 그리고 자본과 법의 관계를 묻는 이 영화의 theme scene이기도 하다.  





법정 영화에선 특히 법을 잘 파악하고 있는 자들의 양심을 해부하는 작업을 자주 시도한다. 법은 우리 사회의 부패를 막아주기 위한 도구로 활용되지만, 그 부패의 온상의 토대가 된다는 점에서 법은 사실 가냘픈 그 무엇이기도 하다. 아감벤의 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생각. 법이 갖고 있는 강건함을 약삭빠르게 아는 권력자들은, 법에서 법이 아닌 듯한 법을 위치시켜놓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법은 이런 모호한 관계에서 자신의 강건한 '법체'를 유지한다. 그리고 그 '법체'의 모호함을 그 누구나가 다 알지 못하게  관리하는 권력자들에게 법은 상을 내린다.  그러나, 이 상은 법의 틈이자, 부정의함의 열림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열림은 법과 마주친 개인의 양심이 어떤 경계 속에서 '죽은 체'연기를 해야할 지, 살아있다는 '선언'을 해야할 지를 갈등하게 만드는 진입구이기도하다. 클레이튼은 여기서'죽은 체 하는 연기'를 포기한다. 그는 아들의 말을 따라, 『Realm & Conquest』에 나오는 이들처럼, 같은 꿈을 꾼 듯한 모습으로 말이 있는 그 동산으로 갔으며, 거기서 죽은 친구의 어떤 부름을 각인해야 하는 의식을 치룬다. 법을 이기는 어떤 신비로움. 이 신비로운 장면은 사실 이 영화의 서사를 망치는 판타지가 아닌, 충분히 개연성이 있는 하나의 문제적 씬이다.

# option - 그리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Last Scene (이 영화의 품격을 보여주는 장면) 



마이클 클레이튼이 사건을 해결하고 50불만큼 길을 돌자는 말을 택시 기사에게 한다. 나는 이 장면이 너무나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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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외상태 What's Up 6
조르조 아감벤 지음, 김항 옮김 / 새물결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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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외상태는 법률 차원에서는 이해될 수 없는 법률적 조치라는 역설적 상황에 놓이게 되며, 어떤 법률적 형식도 가질 수 없는 것의 법률적 형식으로 나타나게 된다. 다른 한편에서 법이 생명에 가 닿고 스스로를 효력 정지시켜 생명을 포섭하기 위한 근원적 장치가 예외상태라면 예외상태에 관한 이론은 살아 있는 자를 법에 묶는 동시에 법으로부터 내버리는 관계를 정의하기 위한 전제조건이 된다. -14쪽

현대의 전체주의는 예외상태를 통해 정치적 반대자뿐 아니라 어떠한 이유에서건 정치 체제에 통합시킬 수 없는 모든 범주의 시민들을 육체적으로 말살시킬 수 있는 (합)법적 내전을 수립한 체제로 정의될 수 있다.이때부터 항구적인 비상 상태의 자발적 창출이 (반드시 그렇(15)게 한다고 선언하는 것은 아니지만 현대 국가의 본질적 실천이 되었다)-15~16쪽

예외상태란 상이한 권력 형태들(입법,행정 등)이 아직 구분되지 않은 원초적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하지만 앞으로 살펴볼 것처럼 예외상태는 오히려 텅 빈 상태, 즉 법의 공백 상태에 근거하고 있으며, 아무런 구분 없이 충만한 원초적 권력이라는 생각은 자연 상태라는 개념과 유사한 법적 신화소로 간주되어야 한다.-21쪽

권력 분립이라는 민주주의 원칙이 오늘날 의미를 잃어버렸으며 행정 [집행] 권력이 사실상 부분적으로는 입법권을 흡수해버렸다는 것이다. 의회는 더이상 법률을 통해 시민들에게 의무를 부과하는 독점적 권한을 가진 주권 기관이 아니다. 행정 권력이 선포하는 여러 법령을 인가하는 존재로 축소되어버린 것이다. -42쪽

예외상태의 고유성이 법질서의 (부 (51)분적 혹은 전면적 )효력 정지라면 그러한 효력 정지가 어떻게 여전히 법질서 속에 포함될 수 있을까? 아노미가 법질서 안에 자리매김될 수 있다는 것일까? 그렇지 않고 만약 예외상태가 단순한 실제 상황이라면 , 즉 법률 바깥에 존재하거나 법률에 위배되는 것이라면 어떻게 법질서가 결정적 상황에 고유한 하나의 공백을 포함하는 일이 가능할까? 과연 이 공백의 의미는 무엇일까?-51~52쪽

긴급 사태는 적법하지 않은 것이 적법한 것이 되는 것을 허용하는 것을 넘어, 특수한 개별 사례마다 예외를 통해 [법률] 위반 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이 되고 있다. / 긴급사태라는 형태를 띠는 한 예외상태는 - 혁명이나 헌정 질서의 사실상의 수립과 더불어 - '비합법적'이지만 절대적으로 '법률적이고 헌법적인' 하나의 조치로 모습을 드러내며, 이는 새로운 규범(혹은 새로운 법질서)의 생산으로 구체화된다.-54 / 59쪽

예외상태는 규범의 공백에 대응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며, 오히려 규범의 존립과 정상 상황에 대한 규범의 적용을 보증하기 위해 질서 안에 하나의 픽션적 공백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 공백은 법률 내부에 존재하지 않으며 법률이 현실과 맺는 관계, 법률의 적용 가능성 그 자체와 관련되어 있다. -65쪽

법질서 바깥에 있으면서도 그러한 법질서에 속해 있다는 것이야말로 예외상태의 위상학적 구조이며, 논리적으로 볼 때 예외에 관해 결정하는 주권자의 존재가 사실상 이러한 구조에 의해 규정되어 있기 때문에 주권자 또한 벗어남-속함이라는 모순 어법에 의해 특징지어질 수 있다. -72쪽

예외상태는 어디까지나 현실에 대한 효과적인 규범화가 가능하게 하기 위해 아노미의 지대를 법 속에 도입하는 셈이다. -75쪽

현대의 공법 이론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민주주의 국가들이 겪은 위기에서 비롯된 전체주의 국가들을 독재 체제로 정의하는 일이 관습으로 정착되어 있다. 그리하여 히틀러도 무솔리니도 프랑코도 스탈린도 모두 똑같이 독재자로 제시되어왔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무솔리니도 히틀러도 독재자로 정의될 수 없다. 무솔리니는 국왕에 의해 합법적으로 임명된 수상이었으며, 히틀러도 바이마르 공화국의 적법한 대통령에 의해 임명된 제국 총통이었기 때문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이탈리아 파시즘 체제와 독일 나치즘 체제의 특징은 현행 헌법 (알베르티노 법과 바이마르 헌법)을 존속시킨 채, '이중 국가'라고 예리하게 정의된 패러다임에 기초해 법률적으로 정식화되지는 않았지만, 합법적인 헌법 옆에 예외상태에 힘입어 제2의 법적구조물을 둘 수 있었던 데 있다. 법률적 관점에서 이런 체제를 '독재'라는 용어로 묘사하는 것은 전혀 적합하지 않다. 게다가 오늘날의 지배적인 통치 패러다임을 분석하기 위해 민주주의 대 독재라는 말라비틀어진 대립 도식을 이용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95쪽

동란은 주권자의 죽음과 일치하며, 법의 효력 정지는 장례 의식 속에 통합되어 있다. 이는 마치 주권자가 본인의 '존엄한'인격에 모든 예외적 권력, 즉 호민관의 영원한 권한에서부터 보다 크고 무제한적인 전 집정관의 최고 명령권까지를 흡수해 이른바 살아 있 131 / 는 유스티티움이 됨으로써 죽음의 순간에 자신 속에 있던 가장 내적인 아노미적 성격을 드러내는 동시에 동란과 아노미가 자신으로부터 해방되어 도시전체를 뒤덮는 것을 보는 것처럼 보인다. -131 /1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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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sbs.co.kr/section_news/news_read.jsp?news_id=N1000684162 

이 주소로 보시면 방송보실 수 있습니다. 

단독 리뷰는 아니고, 중간에 짧게 나옵니다. 

인터넷뉴스 바이러스란 곳에서도 당비의생각03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자의 죽음>을 읽을 책으로 꼽아줬군요. 

http://www.1318virus.net/modules/news/view.php?id=145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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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그레이효과 2009-12-14 2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에스비에스가 무슨일로 ㅡ.ㅡ
 

 한보희 선생이 영화 <국가대표>비평을 <온라인 당비의생각>에 연재한다. 분량이 많아서, 글을 나누었는데, 첫 파트가 올라왔다. 흥미로운 부분이 많아서 공유하고자 링크를 건다. 한보희 선생은 현재 《당대비평》기획위원회의 기획위원이자 what's up총서 시리즈의 기획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 시리즈 중 하나인 슬라보예 지젝의 <전체주의가 어쨌다구>를 번역했으며, 또 한 권을 열심히 번역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http://dangbi.tistory.com/30 

2009년 12월 22일 화요일 당비의생각03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자의 죽음>과 관련된 작은 이야기모임을 가지려 한다.  이 이야기의 내용은 <온라인 당비의생각>에  소개될 예정이다. 

패널은 한윤형(<키보드 워리어 전투일지>, <뉴라이트 사용후기> 저자)  / 엄기호 (우리신학연구소 연구위원,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저자) / 송인혁 (전 연세대학원신문사 편집장) / 한보희 (<당대비평> 기획위원) 예정이다. 

그리고 나와 웅진씽크빅 인문교양담당 임프린트 산책자 분들이 수고해주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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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주소 :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392842.html 

젊은 연구자들 눈으로 본 죽음의 정치학
노무현 추모열기서 엿본 ‘대안 없는 애도’
민주주의 확장 이어지지 못한 원인 짚어 

 어째서 추기경과 늙은 소를 향해 쏟아졌던 ‘애도의 눈물’이 용산참사 희생자들은 외면했을까?

100만 이상이 합류한 김수환 추기경 장례 추모행렬과 역시 100만을 넘겼던 독립영화 <워낭소리> 대박 현상을 “도덕적·인권적 감수성에 대한 대중들의 열망의 징후”로 읽은 제3시대 그리스도교연구소 정용택 연구원은 물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행렬엔 500여만이 공권력과의 충돌을 무릅쓰고 집결했다. 그 사건들 앞뒤로 화물연대 박종태씨, 7명의 쌍용자동차 파업 노동자와 그 가족들이 목숨을 버렸지만 용산처럼 그들은 잊혀졌다.

2009년의 죽음들에 관한 이 뚜렷한 사회적 기억의 비대칭성. 진보적 젊은 두뇌 집단인 당대비평 기획위원회가 엮어낸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자의 죽음>은 바로 그 현상과 배후를 여러 필자들이 다양하게 해석하고 질문한다. 상당한 세월을 지나서인지 해석과 질문들은 정제되고 순도가 높다.

‘종교가 되어버린 광장의 애도’라는 글에서 기억의 비대칭을 낳은 “시민사회의 문화적 동학”에 주목한 정용택 연구원은 “마땅히 애도돼야 했던” 용산참사와 “너무 과도하게 애도된” 추기경과 늙은 소와 노 전대통령 현상 사이에 모종의 길항작용이 존재한 것으로 본다. 우선 그는 용산에 대해 대중은 애도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애도할 수 없었다고 말한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애도란 보통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 또는 사랑하는 사람의 자리에 대신 들어선 어떤 추상적인 것, 즉 조국, 자유, 어떤 이상 등의 상실에 대한 반응”이다. 이런 반응은 대개 삶에 대한 총체적인 의욕의 소멸로 집약되는데 심한 애도의 슬픔은 채워질 수 없는 깊은 공허와 무기력을 수반한다.

이런 애도가 제대로 수행되려면 애도의 주체가 자신이 상실한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명확히 인지해야 한다. 용산참사는 이명박 정권이 내세운 ‘뉴타운’, 그리고 ‘민주주의를 달성하고 선진화를 이룩한 대한민국’이라는 성공신화가 허구라는 사실을 드러냈다. 그리하여 애착의 대상을 상실했음에도 그 신화에 애착을 지녔던 대중은 거기에 집중된 리비도를 철회하지 못하고 부유했다.

권력의 폭압 속에 대상의 상실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한 대중은 용산을 외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대상의 현존에 대한 불신 또한 떨쳐버리지 못한다. 그들의 귓전엔 용산을 기억하라는 외침이 계속 맴돈다. 그때 추기경이 선종했고 <워낭소리>가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대중은 정체 모를 상실감을 거기에 전이시켜 알 수 없는 대상의 상실에 대한 애도를 쏟아부었다.

‘알 수 없다’는 것은, 정신분석학적으로 보면 의식적으로는 알지 못하나 무의식적으로는 알고 있다는 걸 의미한다. 제대로 된 애도가 불가능한 이런 상태는 우울증을 앓는 주체의 행동과 유사하다.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실을 애도하는 우울증 환자의 애도는 언제나 실패할 수밖에 없다. 
 

잘못된 애도는 자아를 회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더욱 빈곤하게 만들고 우울증은 더욱 심화된다. 용산참사로 인한 상실감을 추기경이나 <워낭소리>의 늙은 소에 대한 애도 행위로 극복하려던 대중의 빗나간 애도는 필연적으로 상실감과 슬픔을 더 키웠다. 그 결과 뒤이은 노 전 대통령 타계 때 대중은 더욱 폭발적인 애도를 표시했다. 정 연구원은 사회학자 뒤르켐의 종교적 집합의례 개념을 빌려, 노무현이라는 기표가 그의 자살을 통해 초월적 기의로 기능하면서 성화(聖化)됐다고 본다. 그것은 ‘탈정치화된 정치인’, ‘권력의 술수에 따른 정치적 희생양’, ‘바보 노무현’ 이미지로 재현됐다.

성화된 노무현은 물론 실재의 노무현이 아니었다. 이라크 파병, 비정규직 양산,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강행, 평택 대추리 진압, 재임 기간 23명의 노동자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노동자 탄압 등 ‘신자유주의’로 포괄할 수 있는 정책들을 노무현·참여정부의 한계가 아니라 한국이라는 국가의 어쩔 수 없는 한계로만 돌릴 수 있겠느냐고 정 연구원은 반문한다.

그럼에도 대중은 전직 대통령이 자살하자 ‘원래 없던’ 성화된·이데올로기화한 그의 자질을 실재한 양 착각하고 그것을 상실한 것처럼 애도함으로써 결핍을 상실로 기만적으로 전이하는 우울증적 주체와 유사한 오류를 범했다.

이 모든 현상의 근원에는 이명박이 자리잡고 있지만, 노무현의 실재가 이명박과 얼마나 다르냐고 정 연구원은 묻는다. “우리는 대중들이 갖고 있는 노무현과 이명박의 이 기묘한 대칭구도 자체를 문제삼아야 한다. 이상화된 노무현의 이미지를 깨버렸을 때, 드러나는 실재의 노무현은 사실 이명박과 너무나도 닮았다는 것을. 나아가 지금 대중들은 노무현을 상실해서 우울한 것이 아니라 이미 다른 일로 인해 우울하기 때문에 노무현의 죽음을 상실로 인지하고 그 상실을 회복하기 위해 세계 내의 기호, 곧 노무현이라고 하는 상상의 이미지를 삼킨 것임을 말해야 한다. 우울증적 대중들은 자신들이 단 한 번도 소유해본 적이 없는 ‘노무현’ 또는 그것이 역설적으로 지시하는 ‘민주주의’의 상실을 연기(演技)하고 있으며, 동시에 그 민주주의의 회복을 끊임없이 연기(延期)하고 있다.”

노무현 지지자들은 애도의 집합의례를 수행하면서 상상의 도덕공동체를 만들었고, 반대자들과 대립구도를 이루면서 서로 배제하며 포함하는 동치(同値)관계를 이루었다. 그 결과 피아의 이분법 속에 제3의 정치적 삶의 자리는 허용되지 않고 대안적 시선은 존재할 여지가 없어졌다. 그렇게 해서 용산과 화물연대, 쌍용자동차의 희생자들은 잊혀졌다.

결국 대중이 잃어버린 것은 노무현이 아니라 민주주의이며 민주공화국의 이상이다. 이를 향한 대중의 우울증적 충동은 애도나 촛불집회와 같은 집합의례 형식으로만 살아남아 단지 광장에서 대중들이 모였을 때만 현존할 뿐이다. 그것만으로는 현실의 구조를 바꿀 수 없다.

“모든 죽음의 수행자, 이 시대의 지배적 구조인 신자유주의 질서에 대한 저항”을 촉구한 시인 송경동은 가장 단호하게 그런 입장을 견지한다.

이에 비해 “사회주의가 자유주의를 적대시한다면, 파시스트들이 자유주의자로 행세하도록 방치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라며 ‘무의식적 보수성’ 극복과 자유주의적 법치 확립을 우선해야 한다고 한 박동천 전북대 교수는 노무현의 공도 평가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한승동 선임기자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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