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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연구자들 눈으로 본 죽음의 정치학
노무현 추모열기서 엿본 ‘대안 없는 애도’
민주주의 확장 이어지지 못한 원인 짚어
어째서 추기경과 늙은 소를 향해 쏟아졌던 ‘애도의 눈물’이 용산참사 희생자들은 외면했을까?
100만 이상이 합류한 김수환 추기경 장례 추모행렬과 역시 100만을 넘겼던 독립영화 <워낭소리> 대박 현상을 “도덕적·인권적 감수성에 대한 대중들의 열망의 징후”로 읽은 제3시대 그리스도교연구소 정용택 연구원은 물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행렬엔 500여만이 공권력과의 충돌을 무릅쓰고 집결했다. 그 사건들 앞뒤로 화물연대 박종태씨, 7명의 쌍용자동차 파업 노동자와 그 가족들이 목숨을 버렸지만 용산처럼 그들은 잊혀졌다.
2009년의 죽음들에 관한 이 뚜렷한 사회적 기억의 비대칭성. 진보적 젊은 두뇌 집단인 당대비평 기획위원회가 엮어낸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자의 죽음>은 바로 그 현상과 배후를 여러 필자들이 다양하게 해석하고 질문한다. 상당한 세월을 지나서인지 해석과 질문들은 정제되고 순도가 높다.
‘종교가 되어버린 광장의 애도’라는 글에서 기억의 비대칭을 낳은 “시민사회의 문화적 동학”에 주목한 정용택 연구원은 “마땅히 애도돼야 했던” 용산참사와 “너무 과도하게 애도된” 추기경과 늙은 소와 노 전대통령 현상 사이에 모종의 길항작용이 존재한 것으로 본다. 우선 그는 용산에 대해 대중은 애도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애도할 수 없었다고 말한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애도란 보통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 또는 사랑하는 사람의 자리에 대신 들어선 어떤 추상적인 것, 즉 조국, 자유, 어떤 이상 등의 상실에 대한 반응”이다. 이런 반응은 대개 삶에 대한 총체적인 의욕의 소멸로 집약되는데 심한 애도의 슬픔은 채워질 수 없는 깊은 공허와 무기력을 수반한다.
이런 애도가 제대로 수행되려면 애도의 주체가 자신이 상실한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명확히 인지해야 한다. 용산참사는 이명박 정권이 내세운 ‘뉴타운’, 그리고 ‘민주주의를 달성하고 선진화를 이룩한 대한민국’이라는 성공신화가 허구라는 사실을 드러냈다. 그리하여 애착의 대상을 상실했음에도 그 신화에 애착을 지녔던 대중은 거기에 집중된 리비도를 철회하지 못하고 부유했다.
권력의 폭압 속에 대상의 상실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한 대중은 용산을 외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대상의 현존에 대한 불신 또한 떨쳐버리지 못한다. 그들의 귓전엔 용산을 기억하라는 외침이 계속 맴돈다. 그때 추기경이 선종했고 <워낭소리>가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대중은 정체 모를 상실감을 거기에 전이시켜 알 수 없는 대상의 상실에 대한 애도를 쏟아부었다.
‘알 수 없다’는 것은, 정신분석학적으로 보면 의식적으로는 알지 못하나 무의식적으로는 알고 있다는 걸 의미한다. 제대로 된 애도가 불가능한 이런 상태는 우울증을 앓는 주체의 행동과 유사하다.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실을 애도하는 우울증 환자의 애도는 언제나 실패할 수밖에 없다.
잘못된 애도는 자아를 회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더욱 빈곤하게 만들고 우울증은 더욱 심화된다. 용산참사로 인한 상실감을 추기경이나 <워낭소리>의 늙은 소에 대한 애도 행위로 극복하려던 대중의 빗나간 애도는 필연적으로 상실감과 슬픔을 더 키웠다. 그 결과 뒤이은 노 전 대통령 타계 때 대중은 더욱 폭발적인 애도를 표시했다. 정 연구원은 사회학자 뒤르켐의 종교적 집합의례 개념을 빌려, 노무현이라는 기표가 그의 자살을 통해 초월적 기의로 기능하면서 성화(聖化)됐다고 본다. 그것은 ‘탈정치화된 정치인’, ‘권력의 술수에 따른 정치적 희생양’, ‘바보 노무현’ 이미지로 재현됐다.
성화된 노무현은 물론 실재의 노무현이 아니었다. 이라크 파병, 비정규직 양산,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강행, 평택 대추리 진압, 재임 기간 23명의 노동자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노동자 탄압 등 ‘신자유주의’로 포괄할 수 있는 정책들을 노무현·참여정부의 한계가 아니라 한국이라는 국가의 어쩔 수 없는 한계로만 돌릴 수 있겠느냐고 정 연구원은 반문한다.
그럼에도 대중은 전직 대통령이 자살하자 ‘원래 없던’ 성화된·이데올로기화한 그의 자질을 실재한 양 착각하고 그것을 상실한 것처럼 애도함으로써 결핍을 상실로 기만적으로 전이하는 우울증적 주체와 유사한 오류를 범했다.
이 모든 현상의 근원에는 이명박이 자리잡고 있지만, 노무현의 실재가 이명박과 얼마나 다르냐고 정 연구원은 묻는다. “우리는 대중들이 갖고 있는 노무현과 이명박의 이 기묘한 대칭구도 자체를 문제삼아야 한다. 이상화된 노무현의 이미지를 깨버렸을 때, 드러나는 실재의 노무현은 사실 이명박과 너무나도 닮았다는 것을. 나아가 지금 대중들은 노무현을 상실해서 우울한 것이 아니라 이미 다른 일로 인해 우울하기 때문에 노무현의 죽음을 상실로 인지하고 그 상실을 회복하기 위해 세계 내의 기호, 곧 노무현이라고 하는 상상의 이미지를 삼킨 것임을 말해야 한다. 우울증적 대중들은 자신들이 단 한 번도 소유해본 적이 없는 ‘노무현’ 또는 그것이 역설적으로 지시하는 ‘민주주의’의 상실을 연기(演技)하고 있으며, 동시에 그 민주주의의 회복을 끊임없이 연기(延期)하고 있다.”
노무현 지지자들은 애도의 집합의례를 수행하면서 상상의 도덕공동체를 만들었고, 반대자들과 대립구도를 이루면서 서로 배제하며 포함하는 동치(同値)관계를 이루었다. 그 결과 피아의 이분법 속에 제3의 정치적 삶의 자리는 허용되지 않고 대안적 시선은 존재할 여지가 없어졌다. 그렇게 해서 용산과 화물연대, 쌍용자동차의 희생자들은 잊혀졌다.
결국 대중이 잃어버린 것은 노무현이 아니라 민주주의이며 민주공화국의 이상이다. 이를 향한 대중의 우울증적 충동은 애도나 촛불집회와 같은 집합의례 형식으로만 살아남아 단지 광장에서 대중들이 모였을 때만 현존할 뿐이다. 그것만으로는 현실의 구조를 바꿀 수 없다.
“모든 죽음의 수행자, 이 시대의 지배적 구조인 신자유주의 질서에 대한 저항”을 촉구한 시인 송경동은 가장 단호하게 그런 입장을 견지한다.
이에 비해 “사회주의가 자유주의를 적대시한다면, 파시스트들이 자유주의자로 행세하도록 방치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라며 ‘무의식적 보수성’ 극복과 자유주의적 법치 확립을 우선해야 한다고 한 박동천 전북대 교수는 노무현의 공도 평가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한승동 선임기자 (1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