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334 

173년 전 토크빌의 ‘미국 예찬’을 어설프게 흉내내
예상보다 과격한 우파에 당황… 알맹이 없는 조언

베르나르앙리 레비가 ‘공공의 적’을 자처하긴 하나, 매번 출간이 될 때마다 그의 책들이 프랑스 언론을 움직이는 건 사실이다. 공산주의, 유일신론, 실존주의, 이슬람 공격에 나섰던 레비가 이번에는 미국으로 관심을 돌렸다. 앞선 토크빌의 행보를 따른 것이었을까? 미국인의 반응으로 판단해보건대, 그의 책은 미국인들에게 가르침보다는 즐거움을 준 것 같다.

1831년 미국을 방문한 알렉시스 드 토크빌은 스스로에게 중대한 정치적 임무를 부과했다. 민주적 평등이 자리잡은 미국에서 평등이 개인의 자유에 미치는 영향은 다른 곳에서보다 덜 끔찍했다. 토크빌은 미국인들이 어떻게 이런 결과에 이를 수 있었는지 알고 싶었다. 그로부터 173년이 흘러 베르나르앙리 레비는 토크빌의 뒤를 따라 미국 여행을 떠난다. 하지만 레비가 중대한 정치적 임무에 투신한 건 아니었다. 그는 시사 월간지 <애틀랜틱 먼슬리>의 취재 요청으로 그곳에 간 것이었다. 잡지사에서는 레비에게 차 한 대와 기사 한 명을 내주었고, 화제의 인물들과 4차원적 인물들 및 미국의 지식인으로 여겨지는 사람들로 화려한 만남 일정을 만들어주었다. 책 속에서 레비는 토크빌과 마찬가지로 붓 가는 대로 글을 써내려간다. 하지만 예의 그 토크빌이 보여줬던 시상과 심리적 깊이, 사회적 농도는 결여돼 있다.(1)

저자가 여행을 한 2004년,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레비 역시 ‘반미주의’에 관심을 갖는다. 그해 반미주의는 미국에서든 해외에서든 특히 두드러진 감정이었다. 하긴 공화당원들은 이라크전쟁에 대한 비판 여론은 무조건 반미로 몰아붙였으니 말이다. 자신의 오른팔 딕 체니 부통령의 위험한 영향을 받은 조지 부시 당시 대통령은 이 나라를 불필요한 전쟁으로 몰고 갔고, 전쟁 때문에 미국은 동맹국도 잃고 재정 출혈도 극심했다. 조지 부시와 그의 몰지각한 자문위원들이 했던 약속과는 달리, 이라크에서 미 점령군은 자유의 수호자로 받아들여지기는커녕 막대한 손실을 입게 됐다. 얼마 전에는 대테러 전쟁이 상황 수습을 위해 고문, 불법 감시, 심지어 고문이 일상화된 제3국으로 전쟁 포로를 보내어 ‘하청’ 처리를 하는 ‘이상한 송환’이라는 방법을 사용했음이 알려졌다. 혐의자에 대한 이런 신병 인도 방식을 이용하면, 은밀한 뒤처리가 쉽게 이뤄질 수 있다. 같은 해 11월 부시 대통령에게서 헤어나려던 우리의 꿈은 거짓, 부패, 정보 조작이 극에 달한 선거운동 이후 산산조각나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요컨대 2004년은 미합중국의 역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미국의 병적 사회현상까지 극찬

베르나르앙리 레비라는 방문객은 미국의 가장 충격적인 병적 측면을 과도할 정도로 예의 바르게 보여줬다. 미국 사회에서 민감한 부분 가운데 하나인 교도소를 둘러보되, 그는 우리가 당황하지 않도록 (작가 스스로 얼마 되지 않는다고 여기는) 수감 인구 수치를 언급하는 친절함까지 베풀었다(그 후 이상하게도 2004년 226만7787명에 달했던 교도소 수감 인구는 계속해서 늘어나기만 한다). 저자는 미국식 사형제도의 비참함을 애써 외면했다. 고맙게도 레비는 미국을 찬양하기 위한 목적에서 왔기 때문이다. 그의 눈에 비친 미국인은 개방적이고 호의적인 사람들이었으며, 프랑스인 혐오주의를 예상했으나 놀랍게도 이는 느껴지지 않는다.

미국에 대해 레비가 묘사해놓은 내용은 감탄을 자아낼 만하다. 그 핵심을 살펴보면 여행 전문지에나 나올 듯한 글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가령 저자는 그랜드캐니언을 매우 좋게 봤다. 네바다의 어느 창가에서 그가 이끌어낸 와인 빛깔 벨벳에서 알 수 있듯, 그는 내부 장식에서는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애틀랜틱 먼슬리> 쪽은 그에게서 확실히 단순한 유람기와는 다른 걸 기대했다. 따라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지식인들 다수와 만남을 주선해준다. 안타깝게도 이 만남들이 순조롭게 이뤄진 건 아니었다. 하버드대 새뮤얼 헌팅턴과의 저녁 만찬에서, 저자는 멕시코 이민 문제와 관련해 헌팅턴 교수가 표명한 관점에서 벽에 부딪힌다. 윌리엄 크리스톨과의 만남도 저자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크리스톨과 다른 네오콘들에게서 레비는 일말의 고차원적 지성을 발견하고 싶어했으나, 부시 행정부의 충실한 아첨꾼인 크리스톨은 이라크전쟁에 대해서 한 치의 의심도 보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사형제도와 낙태 반대법 및 부시의 사회적 의제 구실을 수행하는 구시대적 규정들을 열렬히 옹호함으로써 상대방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이에 분개한 레비는 크리스톨에게 레오 스트라우스, 한나 아렌트, 쥘리앵 방다의 책을 다시 읽으라고 조언할 수밖에 없었다.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대학교수들과 제법 유순한 양이 되지 못하는 네오콘들 외에도 또 다른 놀라운 사실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미국인들이 생각했던 것만큼 뚱뚱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물론 로스앤젤레스에서 240kg 가까이 나가는 여성을 만나기는 했으나, 이는 예외적인 경우였다.

그렇다고 모든 게 예상을 빗나간 건 아니었다. 국민들 사이에 과체중이 널리 퍼져 있진 않았으나, 그는 경제적 비만, 공항의 비만, 교회의 비만, 주차장의 비만 등 다른 형태의 비대함에 주목한다. 저자가 ‘비만’이라는 단어를 좋아한다는 걸 한눈에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여기에서도 우리의 저자는 자신을 흥분시킨 현상에 대해 명확히 조명하지 못한다. 인구밀도가 상대적으로 낮긴 하나 인구가 꽤 많다는 게 그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공항, 교회, 주차장에 대해서는 이 설명이 적용된다. 하지만 알다시피 상세한 설명은 <아메리칸 버티고>를 쓴 작가의 강점이 못 된다.

알맹이 없는 미국식 ‘모델’ 제시

이 책의 허접함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났던 건 책의 마지막 부분, 저자가 미국식 ‘모델’을 관통하는 몇 가지 결론을 써보려고 발악한 대목이었다. 토크빌이 미국을 이해하려 했던 건 유럽의 운명이 미국식 민주주의의 조건에 달려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반대로 레비는 미국이 유일할 거라고 믿는 것 같다. 하지만 그는 이런 예외성이 어떤 성격을 지니는지 명시하지 않는다. 이 성격은 분명 국가로서의 미국과 ‘공동체의 막대한 신성성’(이런 식의 표현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사이의 해소되지 않은 갈등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레비는 미국이 무너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소수의 횡포’로 인한 위기는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이들 질문과 관련해, 레비는 더 이상 오류 속에 파묻혀 있을 수 없게 됐다. 사실 미국은 새롭고 유일한 정치 형태를 구현한다기보다 (물론 늘 그랬던 건 아니지만) 고전적인 국민국가라고 할 수 있다. 토크빌이 미국을 여행할 당시, 미국은 근본적으로 분권화되고 지역적으로 통치되는 새로운 정치 형태로 나아가는 걸로 보였다. 토크빌은 자기 눈앞의 이 나라를 높이 평가했다. 엄청난 크기의 나라였어도 미국은 다른 수많은 유럽 국가들에 없던 무언가를 이미 가진 상태였다. 다른 나라의 문명과는 구별되면서도 내적으로 단일화한 공통 문명을 가졌던 것이다. 그의 주장을 따르자면, 약 1600km가량 떨어진 메인주와 조지아주의 차이보다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떨어진 노르망디 지방과 브르타뉴 지방의 차이가 더 두드러진다는 것이다. 분명 다양해 보이기는 하나, 오늘날의 미국은 이민자 집단 상당수를 동화시키고 있다. 정치적·도덕적 가치를 공유하는 독실한 영어권 미국인으로 이들 모두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소수의 횡포’를 걱정해야 할 건 미국이 아닌 유럽이다. 유럽은 서로 다른 집단들을 하나의 단일화한 국가적 공동체로 묶어주지 못했다. 이 상대적 실패를 이해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정치적 과업도, 지식 과제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점에서 우리는 확실히 레비의 책보다는 토크빌의 책에서 배울 점이 훨씬 더 많다.




<각주>
(1) 베르나르앙리 레비, <American Vertigo: Travels in Toqueville’s Footsteps>, 2006.(한국어 번역본 <아메리칸 버티고>, 김병욱 역, 2006.)

글린 모건 Glyn Morgan 하버드대 정치학 교수
번역 배영란 runaway44@ilemond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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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화 - 인정(認定)이론적 탐구 나남신서 245
악셀 호네트 지음, 강병호 옮김 / 나남출판 / 2006년 9월
구판절판


확장되어 가는 상품교환의 행위(28)영역에서 주체는 사회적 삶의 참여자보다는 관찰자로 행동하도록 강제된다. 가능한 수익에 대한 쌍방적 계산은 순수하게 사실적이고, 가능한 한 무감정적인 태도를 요구한다. 이러한 관점의 변화와 동시에 주체는 상황과 관련된 모든 요소를 "물화하며"지각하게 되는데, 교환되어야할 대상들, 교환 상대자 그리고 마침내는 인성적 잠재력까지 양적으로 가치증식될 수 있는 속성이란 측면에서만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태도가 그에 상응하는 사회화 과정에 힘입어 상습적인 습관이 되면, 그래서 그것이 개인의 행동을 일상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규정하게 되면, 그러한 태도는 "제2의 자연"이 된다. 이러한 조건에서 주체는 자신의 환경세계를, 직접 교환과정에 관여하고 있지 않을 때조차도, 한낱 물건으로 주어진 것이란 본에 맞춰 지각한다. 그러므로 루카치에게 "물화"란, 단지 관찰하는 행동이란 습관 혹은 습성을 의미한다. 이러한 관찰하는 관점에서는 자연환경, 사회세계 그리고 자신의 인성적 잠재력은 단지 초연하게 그리고 물건 같은 것으로 파악될 뿐이다. -28~29쪽

루카치에 따르면 "물화"는 일종의 도덕적으로 그릇된 행동, 그러니까 도덕원칙에 대한 위반으로 개념화되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도덕적 어휘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것일 수 있는 주체의 의도가, 그러한 왜곡 자세에는 빠져있/기 때문이다. -29~30쪽

하이데거에게 "마음씀"이란 개념이 그런 것처럼, 루카치에게는 공감하는 실천이란 아이디어가 지배적인 주체-객체 도식에의 고착을 근본적으로 부정할 수 있는 열쇠를 제공하는 것 같다. 이러한 종류의 행위형식을 전제하면 주체는 더 이상 인식되어야 할 실재에 중립적으로 마주 서 있지 않을 것이다. 주체는 항상 이미 질적인 의미로 개시되는 세계와 실존적 관심 속에서 관계를 맺고 있을 것이다.-37쪽

근원적으로 주어진 지지하는 자세를 떠나는 것은 환경세계의 요소들을 그저 물적 실체로, 그러니까 한낱 "전재자"로 경험하는 태도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데, 이로써 우리를 이끌어왔던 주제와 다시 연결된다. 물화는 이제 그에 상응하여 하나의 사고습관, 그러니까 습관적으로 굳어진 관점을 의미한다. 이러한 관점을 취함으로써 주체는 공감하고 관심 갖는 능력을 잃어버리고, 마찬가지로 그의 환경세계는 질적으로 개시되어있다는 특성을 상실한다. -43쪽

"인정" 개념은 이런 기초적 수준에서 듀이의 "실천적 관여"뿐만 아니라 하이데거의 "마음씀", 루카치의 "공감"과도 기본생각을 공유하고 있다. 세계가 가치로 가득 차 있다는 경험을 자양분으로 하는, 세계에 대한 실존적 관심의 우선성이라는 생각 말이다. 그러므로 인정하는 자세는 다른 사람이나 물건이 우리 현존재의 생활에 대해 갖고 있는 질적인 의미에 대한 적절한 가치평가의 표현이다. -45쪽

듀이가 언급한 "술사화(predication)"란 개념 주목. 술사화는 우리가 인식 대상을 고정시키려고 시도할 때 행하는 언어적 추상화의 예이다.-46쪽

원 명령적 지시 : 아이는 엄마가 그 대상을 가져다주기를 바라고 그 대상을 갖게 되었을 때 만족한다. 또 다른 하나는 원표명적 지시로 아이는 엄마가 그 대상을 함께 보기를, 그리고 그 대상의 이름을 불러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렇게 해주면 만족한다. 이상 피터 홉슨과 마이클 토마셀로의 견해 정리.-52쪽

루카치가 자신의 개념전략을 통해 수행하는 물화와 객관화의 동일시는 사회발전과정에 대해 대단히 의문스러운 상을 제시한다. 그러니까 근본적으로 루카치는 선행하는 인정의 중립화를 요구하고 그것을 제도적으로 지속시키는 모든 사회적 혁신을 물화의 경우로 보아야 한다. 그래서 그는 결국 막스 베버가 근대 유럽에서 사회의 합리화과정으로 묘사했던 모든 것을 전체적으로 사회의 총체적 물화의 원인으로 파악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동시에 루카치는 공감이란 근원적 태도가 그것의 사회구성적 기능으로 인해 결코 완전히 사라질 수 없다고 주장해야 하기 때문에, 그의 사회상은 여기서 한계에 부딪힌다. 사회의 모든 과정이 그것이 객관화하는 태도를 강제한다는 이유만으로 물화되었다면 인간의 사회성은 이미 해체되었어야 한다. 이러한 모든 곤란한 귀결은, 루카치가 물화와 객관화를 하나로 만듦으로써 채택한 개념전략의 결과들이다. 이로부터 앞으로의 고찰을 위해 얻어질 수 있는 교훈은, 물화과정을 루카치가 자신의 텍스트에서 한 것과는 다르게 개념화해야 한다는 것이다.-66쪽

"물화" 개념의 새로운 규정을 위한 열쇠로 삼고 싶은 것이 바로 이 망각의 계기, 기억상실의 계기이다.우리가 인식활동을 하면서 그것이 인정하는 자세 취하기의 덕택이라는 감을 상실하는 만큼,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한낱 감각 없는 객체로 지각하는 경향을 발전시킨다. 여기서 한낱 객체, 나아가 "물건"에 대한 언급을 통해 의미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기억상실과 더불어 다른 사람들의 몸짓표현을 우리에 대한 반응요구로 즉각 이해하는 능력을 상실한다는 것이다. -69쪽

주체들이 마지막에 언급된 성격을 갖는 자기제시의 제도에 강하게 편입되면 될수록 개인의 자기물화 경향이 증가할 것이라는 나의 추정이다. 잠재적으로는 개인들로 하여금 특정 감정과 느낌을 소유하고 있는 척 하기를 강제하는, 또는 자신의 감정을 완결된 것으로 고정하도록 강제하는, 모든 제도화된 유무형의 장치는 자기물화하는 태도의 형성을 촉진한다.
-1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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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문화주의에 대해 불편한 어떤 부분을 갖고 있었는데, 개인적으로 이 글을 읽고, 내 불편한 한 부분을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  

원문 :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590 

 관변 다문화주의 비판
‘포섭’-‘배제’의 모순 되풀이하는 국가동원체제
‘다문화’라는 이름뒤의 획일성·서열화 깨뜨려야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이 구사한 사회통제 시스템을 국가동원체제라고 부른다. 국가동원체제는 대중의 동의를 동원하는 방식으로 국가 독재를 정당화한다. 대표적인 것이 새마을운동이었다. 1970년대 국가동원체제의 핵심인 새마을운동과 2000년대 후반 한국 사회를 달구는 다문화주의 열풍은 기이하게도 닮아 있다. 첫째, 철저하게 국가 주도로 진행된다. 둘째, 대상 대중의 역량 강화와 사회 통합을 강조하지만 실제로 일어나는 일은 분할통치(divide and rule)에 의한 내적 분열과 사회적 배제다. 셋째, 당사자들의 주체적 자율성은 결코 허용되지 않는다.

새마을운동의 이념과 조직은 철저하게 국가 주도로 위에서 아래로 전파되고 확산되었다. 이런 이유로 ‘새마을운동이라는 이름하에 수행된 모든 사업은 권위주의적이고 전시행정적’이었다. 그러나 명목적인 수준에서는 대중의 자발적 참여를 이끌어내야 했기에 ‘대중동원적’ 성격을 띠었다. 다문화주의도 다를 바가 없다.

갑작스런 다문화주의 바람

한국은 반이민국가이다. 세계에서 유례없이 동질화의 압력이 강한 사회이며, ‘순혈’에 대한 강박을 바탕으로 전근대적 인종주의가 작동하는 사회다. 게다가 다문화주의는 유럽과 미국에서 퇴조하고 있는 정치철학이다. 그럼에도 한국 사회에서 다문화주의는 대유행하고 있다. 불과 2~3년 사이에 놀라운 속도로 주류 담론이 되어버렸다. 바로 국가가 주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다문화주의는 2006년 급작스럽게 사회적 의제로 부상한다. 결정적인 계기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제공했다. 2006년 5월 개최된 ‘제1회 외국인정책회의’에서 노 전 대통령은 ‘다문화·다민족 사회로의 전환’을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과제로 제시한다. 이후 각급 지자체를 포함하는 정부의 모든 부처는 ‘표류와 과잉’이라는 비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관련 제도와 시설의 선점 경쟁에 뛰어든다.

그러나 국가가 주도하는 다문화주의는 허구적이며 모순된 효과 이상을 낳을 수 없다. 국가는 국가 통합성이 훼손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서만 이질적인 소수자 집단을 수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국가의 입장에서는 소수자들의 ‘포섭’과 ‘배제’라는 상반된 작업이 일관된 통치 행위의 일환으로 수행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혈통 중심의 편협한 국민주권 개념을 고수하는 한국의 경우 이런 문제는 좀 더 노골적인 형태로 발현된다. 한편에서는 다문화주의를 부르짖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자신들이 지원했던 ‘다문화’ 활동가를 가차없이 쫓아내야만 하는 것이 한국 다문화주의의 현실이다. 2009년 10월 23일 미누에게 일어났던 일이다. ‘다문화 사회에서 이주민의 인권 보호와 증진’을 위한 ‘서울 가이드라인’이 공표된 2008년 11월 12일, 마석가구공단에서는 법무부와 경찰 직원 280여 명이 투입된 ‘인간사냥’식 합동단속을 통해 130여 명의 이주노동자들이 붙잡혔다. 그 가운데 5명은 심각한 부상을 당했다.
  

국가 주도 다문화주의의 위선적 양면성은 ‘다문화’라는 상징에 대한 ‘대중의 동의’를 동원하는 방식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 ‘다문화’라는 상징이 대중의 내면에 친숙한 일상성으로 착근되는 과정은 ‘새마을정신’이 내면화되는 과정과 비슷하다. 새마을운동은 대중매체와 학교 교육 그리고 국가가 지정한 85개 사회교육기관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국가 주도 다문화주의 역시 다를 바 없다. 1990년대 10년간 다문화와 관련한 기사 건수는 총 235개에 불과했다. 그러던 것이 다문화주의가 공론화된 이듬해인 2007년 한 해에만 무려 2만7894건으로 급증했다. 2008년에는 3만6778건으로 더욱 늘어났다. 공익광고를 통해 다문화 사회는 ‘사랑하는 마음도 더 많아지는 사회’로 칭송된다. 다문화 시범학교들이 지정되고 다문화 교육센터, 다문화 복지센터, 다문화 가족 지원센터 등 전국적으로 수백 곳의 ‘다문화’ 관련 기관들이 설립되어 운영된다. 법무부가 지정한 ‘ABT’(Active Brain Tower)라고 명명된 ‘다문화 사회통합 주요 거점 대학’만도 20여 곳에 이른다. 이 기관들을 중심으로 ‘다문화 전문가’, ‘다문화 복지사’, ‘다문화 멘토’, ‘다문화 전문 상담원’, ‘다문화 지도사’ 등으로 불리는 전문가 집단이 속성으로 양성되고, 수많은 의사(擬似) 자격증이 남발된다. 다문화를 주제로 하는 각종 행사와 강좌에는 자원봉사자와 수강생으로 발 디딜 틈을 찾기 어렵다. 
 

새마을운동의 또 다른 특징은 명목적으로는 농민층의 자기 역량 강화와 사회통합을 목표로 했지만 실제로는 농민층에 대한 차별적 접근을 통해 ‘농민층을 분해’시키고 국가 통제에 종속시키는 결과를 낳았다는 점이다. 새마을운동은 영세 소농에게는 오히려 농촌을 떠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구조적 강제로 작용했다. 한 월간지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한다. “1960년대 전반에 농촌 인구 100명 가운데 13명이 ‘헌마을’을 떠났는데 1970년대 후반에는 해마다 37명이 ‘새마을’이 된 농촌을 떠났다.” 이 점에서 역시 다문화주의는 새마을운동을 꼭 닮아 있다. 영세 소농이 ‘새마을’에서 쫓겨났듯이, 이주민 역시 ‘다문화 마을’ 만들기라는 명목으로 추진되는 개발 프로젝트에 의해 자신의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있다. ‘다문화 특구’로 지정된 안산시 원곡동 일대가 대표적이다. 인위적인 개발 프로젝트는 이주민의 삶을 더욱 불안정하게 만들 뿐이다.

제2, 제3의 ‘미누’들

한국의 다문화주의는 짐짓 이주민의 사회통합을 목표로 하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전형적인 분할통치 방식으로 이주민 공동체의 내적 분열과 인종적 서열화를 조장한다. 다문화주의에 의해 선진국 출신 이주자와 개발도상국 출신 이주자, 비자 소지자와 만료자, 한국 국적을 취득한 이주자와 비국적 취득 이주자 사이의 경계와 위계는 더욱 엄격하고 뚜렷해진다. 이주민 공동체는 ‘선별적 포용’과 ‘폭력적 배제’의 대상으로 뚜렷하게 분리된다. 이 과정에서 ‘한국 민족’ 역시 1세계 거주 에스닉(ethnic) 코리안, 남한인, 3세계 거주 에스닉 코리안, 북한 이탈 주민 등의 순으로 ‘인종적으로 서열화’된다.

다문화주의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가혹한 사회적 배제와 차별의 가장 큰 피해자는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이다. 이주노동자들은 한국의 이주민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집단이다. 2009년 1월 현재 한국에는 64만여 명의 이주노동자가 존재한다. 그 가운데 약 27%에 해당하는 18만여 명이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이다. 그들의 90%는 한국인이 기피하는 ‘3D’ 업종에서 근무한다. 내국인 노동자의 40~50%의 임금으로 하루 평균 11시간에서 12시간을 일한다. 2007년 이주노동자의 재해율은 1.01%로 한국 노동자 전체 재해율인 0.72%보다 훨씬 높았다. 그들은 ‘국내 노동시장을 보완’할 뿐만 아니라 소중 제조업의 생존에 절대적 기여를 하는 한국 사회에 필수적인 존재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 이주노동자의 대다수는 인권과 노동권의 사각지대에서 ‘일회용 노동자’와 ‘불법 인간’ 사이의 선택을 강요받고 있을 뿐이다. ‘재한외국인처우기본법’(2007), ‘거주외국인지원조례’(2007), ‘다문화가족지원법’(2008) 등 2006년 이후 제정된 일련의 이주민 관련 법령으로부터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은 완전히 배제되어 있다. 출입국관리법 개정을 통해 미등록 체류자에 대한 단속 및 강제 퇴거 정책은 더욱 강화되었다.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며 매년 말 정기적으로 실시되는 미등록 체류자 합동단속을 통해 수많은 ‘미누’들이 강제 퇴거당한다. 2007년 한 해에만 2만2546명의 이주노동자들이 단속되었고 그중에 1만8462명이 강제 퇴거당했다. 대부분의 단속반원들은 사복 차림이다. 신분증을 제시하거나 동의나 허락을 구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들의 79.5%가 수갑을 사용했으며, 4.5%는 경찰 장구를 사용했다. 전자충격기와 그물총을 사용하는 경우도 2.9%에 달했다. 그 과정에서 2003년 이후에만 무려 100여 명의 이주민들이 사망했다.

‘국가 관료’가 주도하는 새마을운동 과정에서 농민은 ‘실질적 주체’가 아니었다. 농민의 자조적 민주주의가 강조되었음에도 농민의 ‘자율성’은 보장되지 못했다. 한국 다문화주의의 가장 큰 특이성은 바로 이 점과 관련된다. 한국의 다문화주의에는 이주민이 설 자리가 전혀 없다. 이주민 대중에게는 그 어떤 주도적인 역할도 허용되지 않는다. 한국에서 다문화주의가 공론화될 수 있었던 결정적 요인은 이주민 인구의 증가였다. 1990년에 5만여 명이 채 되지 않던 외국인 인구의 규모는 2007년에는 106만여 명으로 늘어났다. 전체 인구의 2%를 웃도는 규모였다. 이 시기를 전후해 ‘다문화·다민족 사회로의 전환’이라는 문제의식이 전 사회적 의제로 확산될 수 있었다.

그러나 다문화주의 담론에서 이주민 자신들의 목소리는 찾아보기 어렵다. 모든 것은 한국인들만이 결정한다. 그런 방식으로 획일적인 (곧 반다문화적인) 다문화의 규정, 자격, 기준, 매뉴얼이 작성된다. 이주민은 ‘온정과 연민’, ‘교육과 상담’의 대상일 뿐 결코 문화적 주체로 존중되지 않는다. 이주민들에게는 또 다른 양자택일의 선택지만이 강요될 뿐이다. 한국인에 의해 주도되는 다문화주의를 수용하든지 혹은 거부하든지 둘 중 하나만이 가능하다. 그렇게 또 하나의 외적인 강제가 되어버린 다문화주의는 ‘다문화’라는 이름으로 다문화의 주체들을 배제하고 소외시킨다. 자신들의 절박한 현실적인 욕구들을 외면하고, 자신들의 존재를 왜곡하는 한국의 다문화주의에 대해 이주민 당사자들은 냉소적인 무관심과 침묵으로 대응한다.

성찰, 비판 그리고 재구조화

국가동원체제로서 한국의 다문화주의는 ‘다문화 사회’라는 말이 연상시키는 여러 가치와는 별 연관성이 없어 보인다. 다문화 사회는 전통적으로 공약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던 ‘다름과 평등’이라는 가치의 조화를 추구하는 사회다. ‘다름’을 이유로 차별하지 않으며 ‘평등’을 이유로 동화를 강요하지 않는 사회, 다시 말해, 사회 구성원이 제 각각의 개성과 문화적 정체성을 향유하되, 평등한 권리와 의무를 공유하는 사회가 다문화 사회인 셈이다. 이를테면 어떤 다수 집단(과 그들의 정체성 혹은 문화)도 ‘보편(표준)의 지위’ 혹은 ‘주류의 권위’를 주장할 수 없는 사회가 다문화 사회다. 물론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중심’과 ‘표준’, ‘주류’와 ‘다수’의 위상을 누렸던 기존의 인식틀과 제도들 그리고 정체성에 대한 성찰과 비판, 그리고 재구조화가 요구되는 탓이다. 그 핵심에는 민족국가를 재규정하는 문제가 자리잡고 있다. 구성원에게는 인위적 동질성을 강요하고 소수자에게는 자의적 차별을 자행하는 ‘표준화된 권위’의 근간이자 거점이 민족국가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다문화주의는 민족국가를 재동원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문화 사회를 추구하는 철학이요, 정치 지향이요, 문제의식이자 전망으로서의 다문화주의와는 확연히 구분된다. 한국의 다문화주의는 ‘국가가 추구하는 목적 실현을 위해 행정 및 관변 조직을 최대한 활용해 국민을 동원하고 참여시키는 정치’적 슬로건일 뿐이다. 국가가 주도하는 한국의 다문화주의는 위선과 모순을 정당화하기 위해 적극적인 방식으로 대중의 동의를 동원한다. 대중에게 다문화는 친숙한 일상으로 내면화되지만, 정작 다문화 사회의 주체라고 할 수 있는 이주민 공동체는 내적으로 분열되고, 한민족의 인종적 서열화가 이루어지며, 이주민의 자기결정권과 삶의 주도권은 더욱 취약해진다.

다문화주의라는 이름으로 1987년 이후 쇠퇴한 것으로 평가되는 국가동원체제가 재가동되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새마을운동이 그러했듯이 ‘정치·사회·경제적 위기를 관리하고 통치체제의 안정성을 도모하려는 목적’임은 분명하다. 만약 다문화주의를 재가동되고 있는 국가동원체제로 이해한다면, 다문화주의에 대한 우리의 평가와 태도는 수정될 수 있어야 한다. 한국의 다문화주의가 보여주는 위선과 모순의 분열증은 서구적 이론과 개념에 의존해서는 이해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국가동원체제의 맥락에서라면 그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국가 통치술의 일환일 뿐이다. 국가는 우리에게 ‘다문화주의’를 ‘강요’하고 있다. 전 국가적이며 전 사회적인 수준에서 ‘다문화’는 우리의 강령이 되어가고 있다. 나는 결코 다문화주의를 반대하지 않는다. ‘다문화’라는 이름으로 우리 모두가 똑같아지고 있는 것이 싫을 뿐이다.

글·오경석
한양대학교 다문화연구소 연구교수. 여러 동료들과 함께 <한국에서의 다문화주의: 현실과 쟁점>(한울,2007)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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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18 13: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위클리 경향에 당대비평 신간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자의 죽음>에 대한 서평이 올라왔네요. 최재천 변호사의 글입니다. 혹시 민주당 전 의원? 최재천?  

원문 : http://newsmaker.khan.co.kr/khnm.html?mode=view&code=116&artid=200912171045541&pt=nv 

 

공동체의 문제를 정치 문제로 이해하지 못하고 정치로 풀어나가지 못하는 정치가 주범이다. 그렇다면 대안은 바로 정치다.

핑계 없는 무덤은 없다. 무덤은 그 자체가 핑계이다. 죽은 자를 상징적 질서 속에 기억으로 묻기 위해 필요한 것은 바로 죽음에 대한 합당한 핑계, 그것을 망각하거나 기억하기 위한 핑계이다(김성태).” 이 문장만으로도 충분히 불편할 것 같다. 며칠 전 용산참사 미사 현장에서였다. 신부님의 강론을 듣다 말고 나치 시절을 담은 잉게 숄의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을 떠올렸다. 당대비평 기획위원회의 사유 구조도 비슷했다. ‘당비의생각’ 3권이 ‘누구에게나 기억되는 죽음’과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죽음’을 제재로 불길하고도 불편한 질문을 던져 왔다. 애도도 아니고, 회고도 아니고, 생뚱맞게 무슨 ‘기억’이냐고? “기억은 과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현존하는 공동체의 정체성을 진작시키는 역할을 수행(정진성)”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당대의 젊은 논객들이 2009년 한국 사회 일상의 죽음 가운데 ‘정치적 공간을 배회하던 죽음’을 비판적 반성의 무대로 불러올렸다. 초혼제다. “죽음의 문제를 넘어 한국 사회에서 정치적 삶의 정체성을 헤아리고 그것을 통해 민주주의적 정치를 지속적으로 활성화할 수 있는 계기를 찾아보려는 의지(서동진)”에서다.

먼저 죽음의 성격을 정리했다. “노무현의 죽음이 ‘정치적’ 죽음이라면 김대중의 죽음은 ‘역사적’ 죽음이었다. 그리고 용산은 ‘정치 자체의’ 죽음이다.(엄기호)” 그렇다면 애도와 기억이라는 관점에서는 어떤 차이를 드러냈을까. “김대중과 노무현의 죽음은 기억할 만한/기억해야만 하는 죽음이었는 데 반해 용산의 죽음은 침묵되는 죽음”이었다. 용산은 애도를 거부당했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자의 죽음’이 됐다. 개인과 집단의 전반적인 삶 자체를 어떻게 살 것인가를 결정한다는 고유한 의미에서의 ‘정치’적 시민이 되고자 했던 용산 철거민들의 투쟁을 “국가가 각 사람을 계급과 계층에 맞게 자리와 기능을 분배해 위계를 유지시키는 협상과 관리의 기술인 ‘치안’의 대상으로 환원(정용택)”시킴으로써 가능한 일이었다.

지난 여름 ‘6·9 작가선언’은 “용산 참사로 상징되는 ‘벌거벗은 삶’의 죽음에 대한 애도를 작가들의 한 줄 서명으로 표명하면서 ‘이명박 정권 하의 한국 사회를 민주주의의 아우슈비츠, 인권의 아우슈비츠, 상상력의 아우슈비츠로 명명’했다(권명아).” 그렇게 해서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과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자의 죽음’이 만날 수 있는 근거가 됐다. 그렇다면 용산의 불길을 회피해 온 살아남은 자들의 의무는 어떠해야 한다는 걸까. 애도와 기억이면 되나? “지켜주지 못해 죄송하다는 ‘부끄러움’ 역시 실상 ‘죄의식’이기보다 우울증적 증상의 변형(정용택)”에 불과하다고 했다. “애도의 광장에는 ‘종교’만 있을 뿐 ‘정치’가 보이지 않고, 그러므로 문제는 더 이상 ‘죽음’만이 아니(김성태)”라는 것. “슬픔의 연대만으로는 아직 정치학이 아닌 것처럼 애도 역시 아직 적절한 정치학에 이른 것이 아니(김영민)”라는 것이다. 공동체의 문제를 정치 문제로 이해하지 못하고 정치로 풀어나가지 못하는 정치가 주범이다. 그렇다면 대안은 바로 정치다. 애도와 기억을 뛰어넘는 정치의 복권이다. “새로운 정치를 구성하기 위한 자기조직화(김원)”다. 이렇게 되는 순간 애도와 기억의 대상은 전복된다. “오히려 추모받아야 하는 이들은 노무현이나 김대중이나 용산 철거민 열사들이 아닌 살아 있는 우리들인지도 모른다. 우리 사회의 궁핍과 무지와 나약함인지도 모른다(송경동)”는 논리가 자연스럽다. 그럼에도 우리는 부끄러워할 줄 모른다. 노여워할 줄도 모른다. 분노를 잊은 지 오래다. 이런 슬픔과 노여움과 수치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오늘도 용산을 우회한다. 애써 망각하려 한다. 우리 모두는 공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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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한국에서 당대비평 신간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자의 죽음'을 언급해줬습니다.  

원문: http://weekly.hankooki.com/lpage/coverstory/200912/wk20091216140633105450.htm 

[작가, 왜 사회에 참여하나] '지금 내리실…' 등 세 권의 책 2000년대 젊은 지식인의 고민 드러내 

 <지금 내리실 역은 용산 참사역입니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자의 죽음>, <리얼리스트>.

최근 잇따라 출간된 세 권의 책은 2000년대 젊은 지식인들의 고민을 드러낸다. 흥미로운 점은 다양한 문화적 스펙트럼을 지닌 지식인들이 모두 용산참사에 주목하고 있다는 것이다.

제목에서 드러나듯 <지금 내리실 역은 용산 참사역입니다>는 용산 참사에 관한 작가들의 헌정집이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자의 죽음>는 김수환 추기경, 노무현 전 대통령, 김대중 전 대통령 등 굵직한 인물들의 죽음에 가려진 용산 참사의 의미를 되묻고 있다. 반년간 문예지 <리얼리스트>의 특집 역시 '용산, 냉동고에 갇힌 민주주의'로 용산 참사에 대해 다루고 있다.

다양한 스펙트럼의 문화예술인들이 입을 모아 용산 참사를 말하는 이유는 뭘까? 이 새로운 시각이 우리 사회에 던진 변화는 무엇일까?

2009년 한국사회 키워드는 용산

젊은 지식인들이 다시 용산에 주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자의 죽음>을 편집한 김수한 편집주간은 "책의 출간 시점이 12월임을 감안해서 올 한해 정치 풍경을 조망하는 방향으로 기획했다. 올 초부터 용산참사, 김수환 추기경과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등 한국사회를 좌우한 사건 중 하나가 '죽음'이라는 데 편집위원 모두 동의했다. 단순한 애도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사회에서 앞으로 일어날 정치 징후를 보여주는 집약적 사건들이다"라고 말했다. 용산 참사는 올 한해 한국사회를 드러내는 대표적인 사건이지만, 미디어와 대중의 뇌리에서 망각되고 있다는 진단에서 책을 기획하게 됐다는 설명이다.

<리얼리스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박일한 책임편집인은 기획의도에 대해 "용산을 통해 한국사회의 현주소를 돌아보는 동시에 문학이 놓여야 할 자리에 대한 성찰의 장을 마련하기 위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정당한 삶과 언어가 파괴되는 현실 앞에 작가들이 제대로 된 복원을 위한 노력에 나서지 않는다면 직무유기에 해당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지금 내리실 역은 용산 참사역입니다>를 엮은 작가들의 시선도 이와 맞닿아 있다. 이 책의 기획을 맡았던 신형철 문학평론가는 "온라인 공간을 통해 선언 이후 활동 방향을 논의했는데 용산 참사가 오늘날 한국사회의 가장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상처라는 판단에 합의했다"고 밝혔다. 젊은 작가 200여 명이 모인 '작가선언 6.9'는 현 정부에 대한 비판부터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에 관한 비평까지 다양한 정치 담론이 생성되다 7월부터 용산 참사를 중심으로 활동해왔다.

용산 참사역입니다

지난 8일 저녁 용산 참사 현장에는 30여명의 문인을 포함해 100여 명의 시민이 한 자리에 모였다. '작가선언 6.9'가 엮은 <지금 내리실 역은 용산참사역입니다>의 헌정식에 모인 이들이다. 소설가 박상의 사회로 염무웅 평론가가 대표 인사를 전했고, 윤예영 시인, 최창근 극작가, 김용민 시사만화가, 노순택 사진작가, 김종도 화가가 유가족들에게 책을 헌정했다.

'작가선언 6.9'는 지난 해 촛불시위부터 올해 용산 참사,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등 일련의 사회변화를 겪으며 올해 5월 27일 젊은 문인 30여명이 첫 모임을 가지면서 결성됐다. 총 192명의 문인이 작성한 한 줄 선언을 모아 6월 9일 선언문 '6.9 작가선언'을 발표했고 이를 모아 <이것은 사람의 말>을 출간한 바 있다.

다양한 정치담론을 생성하던 '작가선언 6.9'는 7월부터 용산 참사를 중심으로 활동해왔다. 용산과 관련한 인터넷 신문 기고, 릴레이 1인 시위를 벌였고, 젊은 작가들이 올해 발표했던 칼럼, 시, 소설, 비평 중 용산 참사와 관련된 글을 모아 헌정집을 묶었다.

424쪽의 문집에는 '작가선언 6.9' 회원들이 쓴 시와 에세이가 담겨 있다. 1,2부에는 용산 참사와 관련된 시 31편과 시인들의 에세이를 실었다. 3,4부에는 인터넷 신문 등 매체를 통해 발표한 문인들의 칼럼을 엮었고, 5부에는 이윤엽 화가, 김종도 화가, 이동수 만화가, 노순택 사진가의 작품과 가수 조약골의 에세이를 담았다.

'작가선언 6.9'가 활동하는 방식은 이전의 지식인 단체와 다르다. 가장 큰 특징은 구심점 없이 200명에 가까운 문인들이 자발적으로 활동한다는 것인데, 모든 활동은 자율적인 논의를 거쳐 결정한다. 예를 들어 6월 9일 발표한 공동 선언문의 경우 대표자가 작성하면 온라인 공간에 수백 개의 댓글이 달리고 이를 보완해 다시 한 줄씩 고쳐가며 최종본을 완성했다.

70년대 문인들의 민주화 투쟁에 앞장섰던 염무웅 문학평론가는 "세상이 달라진 것만큼 문인들의 사회적 활동도 달라진 것 같다. 요즘은 산발적이고 각자 자유롭게 활동한다. 시대 변화에 따라 작가들의 운동 방식이 달라진 것"이라고 말했다.

리얼리스트 100

<리얼리스트>는 문학단체 '리얼리스트 100'에서 펴내는 반년간 문학 전문지다. '리얼리스트 100'은 2007년 9월 리얼리즘 문학을 고민하는 작가들을 주축으로 탄생한 문인단체. 100여명 안팎의 문인들은 온라인(www.realist.kr)을 통한 작품 발표와 함께 '대운하 저지를 위한 작가행동', '비정규직 차별 철폐를 위한 연대활동', '용산 참사 해결을 위한 작가행동' 등 대외활동을 병행해 왔다.

'민중문학'의 맥을 잇고 있는 작가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는데, 작가 면면을 살펴보면 시인 백무산, 김해화, 정우영, 김해자, 박일환, 송경동, 문동만, 황규관, 임성용, 이민호와 소설가 김성동, 이시백, 안재성, 홍명진, 이인휘, 이재웅, 평론가 박수연, 고명철 등이 멤버로 활동하고 있다.

박일환 시인(<리얼리스트> 책임편집인)은 "현실문제에 고투하고 현장을 뛰어다니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작품에 반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시도는 일시적 흐름, 현상이 꾸준히 지속되어야 한다"고 창간 배경을 설명했다.

이민호 시인(<리얼리스트> 편집위원)은 "특별한 작가를 지향하지 않고, 작품 선정에 있어서 객관성을 기했다. 지난 시기 노동문학과 민중 문학의 한계를 극복하면서 리얼리즘의 정신을 더 펼쳐보자는 시도"라고 설명했다.

<지금 내리실 역은 용산 참사역입니다>가 젊은 문인들의 사회참여를 담아낸 책이라면, 문예지 <리얼리스트>는 사회참여와 창작을 병행했던 기존 작가들의 문학적 결실을 선보이는 장인 셈이다. 작가들이 회비를 걷어 잡지의 제작비와 원고료를 충당했다는 점도 기존 문예지와 차별화된 점이다.

창간호 특집 주제는 용산 참사. 백무산 시인의 시 '민주공화국 수도 서울 한복판에서 자행한 학살 만행을 보라!'와 홍명진 소설가의 단편 '2009, 서울 피에타', 김순천 르포작가의 작품 '용산, 격렬한 혼돈'과 송경동 시인의 시론 '용산이라는 질문', 임동근 연구원의 논단 '개인의 욕망으로 굴러가는 주택정책', 박김형준 작가의 사진, 김대중 작가의 만화 '폐허 위에'를 통해 용산 문제를 총체적으로 바라본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자의 죽음

사회비평지 <당대비평>이 정간되며 발행된 단행본 형식의 기획 시리즈 '당비의 생각' 3권의 제목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자의 죽음>. 제목처럼 책은 두 전직 대통령과 용산 참사를 대조해 한국사회를 분석한다.

기획주간인 서동진 교수(계원디자인예술대)는 서문을 통해 "어떤 죽음이 대대적으로 애도될 때, 그것은 단지 죽은 자의 사회적 지위 탓으로 돌릴 수 없는 애도하는 자의 정치적 욕망이 투영되어 있음을 가리킬 것이다"고 지적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이 '정치적' 죽음이라면, 김대중 전 대통령의 죽음은 '역사적 죽음'이며 용산 참사는 '정치 자체의 죽음'이라는 것. 책은 죽음의 의미의 위계화와 차별화는 추모하려는 사람들의 의지만이 아니라 죽음을 순응시키며 갈등을 잠재우는 통치의 전략 혹은 방식이라고 말한다.

'애도에 대한 질문', '기억에 대한 성찰'로 나뉜 책은 10편의 비평을 실었다. 필진들의 면면을 보면 엄기호 우리신학연구소 연구위원, 권명아 동아대 국문과 교수를 비롯해 김성태 문화평론가, 송경동 시인, 박동천 전북대 정치학과 교수 등 사회각계각층의 다양한 스펙트럼의 지식인들이다.

조동환, 조해준, 이경수 작가의 구술드로잉과 이상엽 다큐멘터리 사진가, 김흥구 사진작가, 조습 사진 작가의 작품도 함께 실었다. 지식인의 글과 문화예술인들의 작품이 결합된 형태의 무크지인 셈.

김수한 편집주간은 "다양한 문화예술인, 지식인이 함께 사회를 고민하는 것이 의미 있을 것 같아 이번 비평집을 묶으며 함께 작업했다. 드로잉과 사진 등 이미지들은 주제를 더 선명하게 만들어 주었다"고 말했다.

2009년 지식인, 어떻게 변하고 있나?

용산을 구심점으로 목소리를 내지만, 젊은 문화예술인들의 사회참여는 촛불시위, 잇따른 사회지도자들의 죽음, 미디어법 처리 등 한국사회 일련의 정치 지형 변화와 맥락을 함께 하고 있다.

주목할 점은 이들이 '작가선언 6.9', '행동하는 라디오 언론재개발'처럼 이전 세대와는 다른 방식의 소통을 시도한다는 것이다. '작가선언 6.9'에 참여한 이영광 시인은 "수평적 의사공동체로 오랜 논의를 거쳐 활동 방향을 결정했다. 작가들이 갖고 있는 생각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었고, 그 차이를 딛고 하나가 되는 경험을 하면서, 때로 멀어 보이고 낯설어 보였던 사람들이 동질성을 회복할 수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활동에 참여한 젊은 작가들은 사회를 보는 감각도 이전과 달라졌다고 입을 모은다.

심보선 시인은 "작가와 시민의 정체성이 어떻게 만나는지에 대해 고민을 하게 됐다. 작가들이 현실과 정치문제에 접속하는 것이 곧 문제를 해결했다는 건 아니다. '문학과 정치'는 여전히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이지만, 우리가 변해가면서 그 문제를 직시하고 부딪치고 계속 젊은 작가들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영광 시인 역시 "그 동안 작가 개인의 문학적 추구에만 매몰된 점이 많았다는 자각과 반성이 있었다. 작가가 특별히 힘 있는 일을 할 수는 없겠지만, 본업에 충실하면서도 몸으로도 조금씩 움직이고, 작가들의 목소리가 퍼져나갈 수 있게끔 노력해야겠다고 생각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진은영 시인은 "(활동을 통해) 미약하지만, 뭔가 할 수 있다는 느낌이 많이 든다. 작가로서 작품을 통해서도 세상과 만날 수 있다는 구체적으로 만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생겼고, 그런 작품에 쓰고 싶다는 욕구가 생긴다"고 말했다.

사회에 대한 젊은 지식인의 감성이 새로운 담론으로 발전할지, 주목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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