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비의 생각>03권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자의 죽음』출간을 기념하여 당대비평 기획위원회 주관, 웅진씽크빅 산책자 후원으로 조촐한 좌담회가 지난 2009년 12월 22일 화요일 저녁에 열렸습니다. 

패널엔  

송인혁 (연세대 국문학 석사과정) / 

한윤형(『뉴라이트 사용후기』저자) / 

엄기호 (우리신학연구소 연구위원) 이  

사회엔 한보희 당대비평 기획위원이 

정리는 저(얼그레이효과), 김신식 당대비평 책임간사가 했습니다. 

1부, 2부로 구성했는데, 

오늘은 1부'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죽음의 의미와 파장', 책에 대한 관련 소감'을 올렸습니다.   

2부 용산 참사의 의미와 2010년 한국 정치 전망은 2월 1일에 업데이트 될 예정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http://dangbi.tistory.com/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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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비디오를 위한 변명
유정서 지음 / 도서출판 동재 / 2003년 7월
품절


우리나라 비디오 소프트웨어 산업의 역사는 80년대 초중반을 기점으로 지금까지 대략 20여년의 연륜을 쌓아 왔다. 80년대 후반, 하드웨어의 급속한 보급을 배경으로 90년대 초 중반에 이르러 최고의 호황을 누렸으나 대여시스템에 편중된 시장구조의 근본적 한계와 누적된 모순의 드러남, 그리고 뉴 미디어의 거센 도전으로 90년대 후반부터 심각한 전환기를 맞게 된다. -239쪽

"영화와 비디오는 무엇이 어떻게 다른가?" 새삼스럽게 이러한 질문에 답하는 일이 왜 중요한가라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영화보다 한 수 아래의 영상매체 쯤으로 간단하게 대답하려 드는 사람도 적지 않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실제로 이 질문은 매우 중요하며 대답 또한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다. 적어도 이 질문에 정확하게 답하지 못하는 한 영화와 비디오는 항상 혼돈되는 매체이거나 아니면 영화보다 한결 뒤떨어지는 매체라는 편견에서 벗어날 길이 없기 때문이다.실제로 비디오에 대한 일반의 인식이 적지 아니 왜곡되어 있는 것도 어쩌면 비디오 산업에 종사하는 주체들이 이런 근본적인 문제들을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생각해온 탓도 없지 않다. -240쪽

비디오를 많이 보는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겠지만, 고객들은 꼭 시간을 내서 극장에서 봐야 할 영화와 시간 날 때 비디오로 감상해야 할 영화를 따로 구분할 줄 안다. 또한 와이드 스크린과 화려한 사운드가 받쳐줄 때는 더없이 감동스러웠던 영화가 비디오로 보았을 때는 도무지 뭐하는 영화인지 모르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리고 극장에사 20만 정도의 관객이 든 영화는 대단하게 생각하면서도 대여점을 통해 40~50만은 족히 보았을 B급 액션영화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한마디로 좋은 영화와 잘 나가는 비디오라는 등식은 언제나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영화를 아무런 고려사항 없이 오직 미학적인 관점에서 평하는 것은 오히려 쉬운 일일 수 있다. 그러나 비디오는 그런 식으로만 얘기되어서는 안되는 매체다. -241쪽

80년대 초부터 비디오 시장이 급격히 커지기 시작하자 한 때 영화의 사양화를 우려하는 소리가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우리가 보아왔듯이 비디오의 성장은 영화시장을 결코 잠식하지 않았으며 우리나라의 경우는 오히려 영화가 비디오 시장에 적지 않은 신세를 졌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중략) 영화가 후발 미디어의 도전을 거뜬히 극복하고 공존의 길을 성공적으로 걸어온 데 비해 비디오의 현실은 적지 아니 우려스런 느낌이다. 무엇보다도 비디오는 영화처럼 1차 저작물의 가치를 지니지 못해 상품가치가 한정되어 있는데다 시장의 주체들은 이들 뉴미디어와 구분되는 비디오만의 고유영역을 개발하고 개척하는 근본적인 문제들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이 없어보이기 때문이다. / 비디오의 고유 기능은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그건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영화가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 매스 미디어적 예술이고 인터넷이 특정 개인을 상대로 한 퍼스날 미디어라면 비디오는 '홈비디오'라는 말이 상정하듯 가정에서 온 가족이 함께 향유하는 홈미디어인 셈이다. 문제는 이런 고유영역을 가꾸려는 노력이 얼마나 경주되고 있는가-244~245쪽

비디오 감상 인구는 조금씩만 늘고 있는데도 마진을 무시하고 재벌기업 특유의 마켓 쉐어 위주의 마케팅으로 시장 규모만 늘려놓은 메이저 제작사의 전철이나, 장사가 조금 된다니까 영상소프트웨어의 상품적 특성을 무시하고 우후죽순격으로 난립했던 대여점의 마인드, 더 나아가 대여점의 사활이 제작사나 유통사의 이익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는 식의 근시안적인 영업관행은 이제 더 이상 되풀이 되어서는 안된다.-250쪽

국내제작 성인비디오는 1980년도 말 처음 선을 보인 이래 작품의 수준이 조악하고 저급하다는 주류문화권의 비판에 시달리면서도 우리나라 비디오 시장의 유일한 틈새시장을 형성해왔다. 특히 최근 몇 년간은 성인비디오에 대한 인식이 크게 달라지면서 충무로에서 활동했던 중견감독이나 재능있는 신인들이 대거 제작에 참여하고 출연배우의 수준도 대폭 높아지면서 질과 양적인 면에서 상당 수준의 성장세를 보여왔다. -252쪽

성인비디오의 숨통을 수시로 죄어버리는 당국의 명분은 대체로 추상적이기 이를데 없는 미풍양속의 저해라든가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청소년보호 정도다. 우선 오늘날과 같이 다양한 개성이 존중되는 사회에서 자의적으로 해석되기 쉬운 미풍양속과 같은 모호한 잣대를 들이대는게 과연 합리적인가 하는 의구심을 지우기 어렵다. 그러나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비디오 하나만 잡으면 마치 그 미풍양속이라는 것이 저절로 확립되는 듯이 유독 비디오에만 민감한 심의당국의 일방적 태도다.-253쪽

비디오 대여점의 수익구조는 다음 세가지 요소의 상호작용에 의해 결정된다. 테이프 구매비, 회전률, 그리고 대여료가 바로 그것이다. 예로 들어 테이프의 구매비는 저렴하고 회전률과 대여료가 높을 때, 대여점은 최고의 수익은 보장받을 수 있다. 반면 대여점이 가정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은 테이프의 구매비는 높고 회전률은 저조하며 대여료는 낮을 때이다.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아마도 이런 상황이 최근 비디오 대여점이 처한 현실일 것이다. -258쪽

현재 비디오 테이프의 가격은 한마디로 '흥행 가능성'이 얼마나 높으냐에 따라 차등 적용되고 있다. 엔터테인먼트 상품의 속성에 비춰 흥행성이란 얼핏 타당성 있는 기준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현실적으로 그 기준은 이른바 개봉작이냐 아니냐로 도식화되는 모순을 가져왔다. 관객에게 선보일 목적으로 만들어진 영상 상품이 흥행 여부를 떠나 개봉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거니와 이왕 만들어진 영화를 극장에 거는 일 또한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한마디로 개봉 여부는 영상물의 질을 결정하는 적합한 기준이 전혀 될 수 없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모순된 기준이 적용되면서 비개봉작의 출시 빈도는 점점 줄어드는 대신, 흥행 여부는 안중에도 없이 오직 비디오 가격을 높이기 위해 억지 개봉하는 무늬만 개봉작들이 늘어나 사실상 비디오 테이프의 가격이 전체적으로 인상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이런 황당한 결과는 테이프 가격에 대한 불만을 초래해 비디오 시장의 테두리 안에서 함께 공존해야 할 대여점과 출시사 간에 불신의 벽만 높여 놓는데 한몫을 했다. -259쪽

한편 대여료 문제도 현재의 비디오 대여점을 곤혹스럽게 하는 커다란 요인 중의 하나다. 테이프의 구매가와 평균 회전률에 훨씬 못미치는 대여료가 일반화된데는 일부 몰지각한 대여점의 대여료 덤핑 공세가 가장 큰 원인으로 작용했다. 사실 회전 수명이 다해 속된말로 이미 본전을 뽑은 프로는 단돈 100원을 받아도 이익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얼핏 그럴싸해 보이는 이같은 발상 역시 일반 생필품과 문화상품의 속성을 구/ 분하지 못한 어처구니 없는 단견에 지나지 않는다. 화장지나 비누처럼 사 두기만 하면 어차피 소비하게 될 생필품은 가격만 싸다면 당장 필요하지 않아도 일단 구매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영상 상품이란 재미가 없으면 싸다 못해 거저 주어도 시간이 아까워 안보게 되어있다. 결국 구프로라는 미명하에 턱없이 책정된 대여료는 비디오라는 상품에 대한 이미지를 싸구려화시켜 멀쩡한 신프로의 가격까지 덩달아 낮추어야 하는 출혈을 초래한 것이다. -259쪽

비디오 산업 침체의 원인에 관한 한 그의 해답은 의외로 명백하고 간단하다. 바로 비디오 대여점의 몰락인 것이다. 대여 위주로 형성된 우리나라 비디오 시장에서 대여점은 필연적으로 상품의 사실상 최종 소비자 간주돼 왔다. 이를테면 렌탈용 비디오를 제작, 출시하고 유통하는 제작사나 유통사가 얻는 모든 수익은 대여점이 상품을 구매하는데서 시작되고 끝나는 구조라는 이야기다. -261쪽

영상 소프트웨어 산업의 특징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절묘한 균형 속에서 성장 및 답보 상황이 결정된다는 점이다. 예컨대 최근 급속한 성장을 보이고 있는 게임산업이나 인터넷 산업은 궁극적으로 pC라는 하드웨어의 급속한 보급을 전제로 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비디오 소프트웨어 산업 역시 88올림픽을 분수령으로 한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의 급속한 하드웨어(VCR)의 보급을 배경으로 급격한 성장세를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느 누가 VCR 한 대를 구입했다면 그것은 곧 소프트웨어 소비자의 자연적 증가를 의미한다. 더욱이 하드웨어의 보급률이 소프트웨어의 보급률을 앞지르는 상황이라면 소비자들은 상품/의 질에 대해서도 거의 신경 쓸 겨를이 없다. 당연히 별다른 판촉활동이 없어도 프로를 출시만 하면 나가게 되어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외국 직배사들이 속속 상륙하고 국내 굴지의 대기업들이 너도나도 비디오 소프트웨어 산업에 뛰어들고, 비디오 대여점이 우후죽순 격으로 생겨나던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의 상황이었다. -267~268쪽

사실 비디오 산업의 초창기인 80년대 중반만 하더라도 비디오는 그 자체가 놀랍고 충격적인 뉴미디어였다. 영화의 위기론까지 거론될 만큼 그 파급력은 참으로 위력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첨단 기술을 등에 업은 미디어 산업의 눈부신 발달로 새롭고 경이로운 매체들이 속속 등장하는 동안 이제는 아무도 비디오를 놀랍거나 새로운 미디어로 생각하지 않는다. 다시말하면 매체 자체의 신선도가 많이 약화된 것이다.-268쪽

결론적으로 이제 비디오 대여점은 단순히 비디오에만 대여해 주는 소극적 의미의 '가게'라는 의식에서 스스로 벗어나 영화를 비롯한 영상 소프트웨어에 대한 전문적 지식을 바탕으로 본격적인 마케팅이 펼쳐지는 영상소프트웨어 사업 하나임을 인식하고 그 지역에서 가장 손쉽게 찾을 수 있는 종합 영상문화공간으로 변해야 한다. -272쪽

제1기(맹아기): 80년대 초 비디오라는 매체가 이땅에 처음 보급되기 시작한 시기다. 새로운 매체에 대한 기대가 매우 컸으므로 보급 속도는 비교적 빨랐으나 소프트웨어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탓에 불법 복제물들이 기승을 부렸고 포르노 테잎과 같은 유해한 영상물도 많이 나돌았다. 이런 상황에서 형성된 비디오에 대한 부정적 편견은 매우 오랜 기간동안 비디오 시장에 악영향을 미쳤다. -274쪽

제2기(정착기):80년대 중후반 우리나라 비디오 시장의 기본 구조가 형성된 시기다. 하드웨어의 보급 속도가 빨라지면서 중소기업을 중심으로 전문 소프트웨어 제작사들이 속속 생겨났고 이른바 '종합대리점'을 중심으로 한 초기 유통 시스템이 형성, 정착되었다. 비디오 대여점의 숫자도 급격히 늘어나 대여중심의 시장구조가 확립되었다. -274~275쪽

제3기(확대기):80년대 후반~90년대 초 대기업과 외국직배사의 상륙 등으로 비디오 시장의 규모가 급격하게 신장된 시기다. 특히 1998년의 서울 올림픽은 하드웨어가 급속하게 보급된 계기가 되었다. 이에 따라 소프트웨어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자 국내 대기업과 외국 직배사가 속속 소프트웨어 시장에 뛰어들어 비디오 시장의 규모가 급속도로 확대되었다. 대여점의 숫자 역시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외형적으로는 최대의 호황기였지만, 이미 이 무렵부터 시장 구조를 왜곡시킬 수 있는 여러 가지 모순들이 누적되고 있었다. -275쪽

제4기(전환기):90년대 초 중반 대기업과 직배사의 약진으로 초기의 시장구조가 일대 변화를 맞이한 시기다. 거대 자본으로 무장한 국내 재벌 기업들이 속속 시장에 진출하고 양질의 소프트웨어를 무한정으로 확보한 외국 직배사가 연이어 상륙함으로써 중소기업 중심의 출시 구조, 종합도매상 중심의 유통 구조로 구축된 초기의 시장의 구조가 심각한 변화를 맞이한다. 시장의 주축을 이루던 중소 제작사들이 몰락하고 대기업과 직배사가 약진하는 한편 유통구조는 대기업 직관 시스템과 기존의 종합 도매상 체제로 양분된다. -275쪽

제5기(과도기): 90년대 중후반~2000년 현재 90년대 초기부터 누적되기 시작한 여러 가지 모순들이 한꺼번에 드러나며 총체적인 위기를 맞은 시기다. 판권료의 급등과 판매실적의 부진으로 악전 고투하던 대기업들은 IMF 위기를 맞아 거의 와해 위기에 처한 반면, 판권료의 부담이 없는데다 자체 유통라인을 유지하지 않아도 되는 외국 직배사의 시장지배구도가 더욱 강화되었다. 이 와중에서 국내 메이저 출시사들은 사업 자체를 포기하거나 분사, 합병 등으로 활로를 모색하는 한편, 외국 직배사의 유통 대행사로 전락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불황의 골이 깊어지면서 대여점의 숫자도 기하급수적으로 감소했다. 전성기 때 4만여를 헤아리던 대여점이 이 무렵에는 1만여개 선으로 줄어든 것으로 집계 되었다.-2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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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사 공부 1980-1997 - 한국영화사 연구총서 02
유지나 외 지음, 한국영상자료원(KOFA) 엮음 / 이채 / 2005년 12월
절판


1980년대 한국영화 - 강소원의 글 일부를 옮겨 본다 / 1980년대 다수의 한국영화는 프로야구와 마찬가지로 심리적 도피처나 한풀이의 수단으로 여겨졌던 반면, 또 다른 축의 한국 영화들은 끊임없이 회의하고 저항하고 울분을 쏟아 냈다. / 1980년 한국 산업은 1970년대 전반에 걸쳐 일어났던 지속적인 하강곡선을 반전 없이 이어갔다. 극장수, 제작편수, 총관객수 모두 줄어들었고 총 91편의 영화가 만들어졌다.-10,11쪽

1981년. 이른바 체육관 선거를 통해 90.2 %의 득표율로 대통령에 취임한 전두환 정권은 서울/올림픽 유치에 성공하고 기세등등했다. 그 기세를 몰아 '유사 이래 가장 거대한 놀자판' 국풍 81로 대중 조작 이벤트를 시작한 정권은 3S정책을 1980년대 문화정책으로 내놓는다. '문화'정책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저급한 이 정책 아닌 정책은 영화를 비롯한 1980년대 문화 전반을 꿰는 용어가 되었다. -14,15쪽

(1984년) 이 해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지만 제작의 전반적인 특징은 1980년대 내내 양산된 소프트 포르노그래피 영화들이 장르의 폭을 점점 좁히고 있다는 사실이다. 멜로드라마의 외피를 쓰고 있지만 사실은 자극적인 정사 신을 어디에 몇 개나 포함시킬 것인지에 훨씬 골몰했을 듯한 영화들이 말 그대로 쏟아져 나왔다. / 흥행에서 극단적인 결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에로영화들이 그렇게 많이 만들어졌던 것은 다른 장르의 영화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적은 제작비로 흥행 결과에 대한 압박이 적었고, 완성도의 편차는 있지만 한줌의 상상력도 필요치 않은 천편일률적인 서사를 반복하는 제작의 용이성 덕분이었을 것이다. -25,26쪽

1988년. 집회시위를 규제하는 올림픽 평화구역을 선포해 가면서 서울올림픽을 치렀고 이 해 말 제5공화국 청문회를 통해 전두환을 백담사로 보냈다. 그 뜨거웠던 6월항쟁의 성과치고 / 는 그다지 달라진 게 없는 세상이었지만 한국영화계는 그 어느 해보다도 투쟁의 열기를 높여 갔다. 이 해 1월에 미국 직배 영화사 uip의 국내 영업이 허가되었기 때문이다. 한국영화인들의 uip 저지투쟁은 치열했지만 대세를 바꿀 수는 없었다. uip는 업계 관행을 무시해 가며 극장측에 특혜를 제시했고 직배 영화 확보에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서 극장주들은 극장 방화사건을 사주하는 일까지 서슴지 않았다. 이 와중에 다국적 비디오회사인 CIC까지 한국시장 공략에 나섰다. 올림픽 특수로 국내 VCR 보급률이 급상승하면서 비디오 시장이 영화 시장을 추월할 것을 예견한 것이다. -34쪽

1980년대 내내 추진되었던 소비자본주의 시대의 도래는 거의 완성된 듯이 보였다. 얼핏 보기에 한국영화계도 호황을 누리는 듯했다. 한국영화의 제작편수와 외국영화 수입편수, 그리고 / 관객수, 총매출액, 극장수 모두 증가한 것이다. 그러나 정작 호황을 누린 것은 직배회사와 영화제작 대신 외화 수입에만 열을 올린 국내 영화사와 극장주뿐 한국영화 관객은 전년도보다 오히려 줄었다. UIP 직배 저지투쟁도 계속되었다. 이 해 321편의 외국영화가 수입되었고 한국영화는 110편이 만들어졌다.역시 가장 많이 만들어진 영화는 에로티시즘을 목적으로 한 멜로드라마였지만 그것도 거의 막바지였다. VCR의 대량 보급에 힘입어 영화관에서 상영되지 않고 곧바로 비디오로 출시되는 16MM 영화들이 본격적으로 제작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수용 환경의 변화가 소프트 포르노영화의 대대적인 양산으로 이어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지만, 다르게 본다면 긍정적인 측면이 훨씬 많았다. 단순하게 반복 재생산되는 소프트 포르노영화의 제작비를 그 효용의 수준만큼 절감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충무로 안의 자본을 좀 더 효율적으로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만들어 내는 데 집-37,38쪽

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대중영화 안에서 성과 육체는 언제나 가장 잘 팔리는 소재였다. 크게는 멜로드라마라고 봐야할, 일반적으로는 성애영화, 에로영화라고 불리는 이 범주의 영화는 1980년대를 통틀어 가장 많이 만들어진 장르이다. 노출의 수위에서 하드코어 포르노그래피와 구별되는 소프트코어 포르노그래피는 주류산업의 구조 안에서는 제작이 불가능한 영화를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1980년대 성애영화들을 소프트 포르노그래피라 부르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것이겠지만 표현의 수위가 아니라 그 영화의 수용 기제와 기능, 그리고 본질의 차원에서는 포르노그래피와 다르지 않은 것이기도 했다. -38,57쪽

1982년 <애마부인>을 기점으로 거의 폭발적으로 제작된 성애영화의 히로인들은 1970년대 호스티스 영화들의 그녀들과는 달랐다. 가난 때문에, 남자 때문에, 범죄에 희생된 탓에, 하는 수 없이 몸을 팔게 되는 수동적인 입장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 때문에 사회의 도덕률을 넘어서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능동적인 욕망의 실천자들이었다. 물론 처벌의 결말을 통해 가부장제와 일부일처제는 여기서도 온전히 작동하지만 말이다. 그 영화들이 지향하는 것은 금기된 욕망을 실천하는 / 그녀들을 음습한 시선으로 훔쳐보는 것이었지 유교적 윤리관을 공격하고 넘어서는 지점에 있지 않았다. 82쪽부터는 유지나, <1990년대 한국영화>라는 글 일부를 옮긴다. -57~58쪽

한국영화는 tv대중화 이전 영화 황금기(1950년대 말과 1960년대 전반)를 구가하다가 정치적/ 상황과 미디어 환경 변화로 침체국면(1970,80년대)을 겪었지만 1990년대 중반 이후를 기점으로 예외적인 황금기를 구가하고 있다는 진단은 비록 거품론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일단 주목해 볼만한 현상이다. 1990년대 전반 20%내외에 머물던 한국영화의 국내 시장점유율이 제작편수의 감소에도 불구하고 1998년 24%대로 상승했다가 1999년에는 약38%로 성장했다.또한 1990년대 들어서 <서편제>,<장군의 아들>,<쉬리>로 이어지는 한국영화 신기록 행진은 한국영화(보기)붐으로 이어졌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한국영화라는 추상적 개념에 대한 관객 인식의 역전이다. 과거 외화가 한국영화보다 더 볼 만한 재미있는 영화(구체적으로는 할리우드영화)라는 통념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다가 1990년대 중반 이후 한국영화가 외화보다 볼 만하다는 인식의 역전을 이루어 낸 것이다. 그러나 한국영화의 부흥 속에서도 위기론과 거품론이 때때로 제기되기도 했다. 유난히 여관방 정사신이 넘쳐나는 영화들이 많이 나왔던 1997년에는 "상상력과 의식의 빈곤'이란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82~83쪽

1980년대 민주화투쟁 속에서 지지받던 민중이란 집단개념은 1990년대 대중을 대변하는 서민층까지 포괄해 내는 중산층으로 변화된다. 계급성을 봉합해 낸 중상층이란 집단의 전면적 등장, 그 존재감에 대한 적극적인 호명은 1997년 IMF 이전까지 한국사회의 (거품 낀) 풍요를 이끄는 주체이자 선망의 대상으로 작동한다. 물질적 풍요를 구가하는 중산층을 중심에 두고 신세대, 미씨족 등 대중을 지칭하는 온갖 집단들이 소비주체로 호명되고, 대중문화시장이 급팽창한다. 속칭 고급예술을 위에 두고 연예나 딴따라라고 분리되어 상대적으로 폄하되던 분야는 대중문화예술, 연예인으로 재정립된다. 즉, 고급문화의 상대 개념으로서의 대중문화, 민중문화의 대칭 개념으로의 대중문화라는 기존의 인식은 1990년대 들어 물질적 풍요와 탈정치화된 사회분위기 속에서 이전 시대보다 긍정적인 개념으로 등장하게 된다.(중략) 이런 여건 속에서 중산층적 대중추수주의가 영화를 포함한 대중문화 전반에 걸쳐 재정립(중략) 반면에 1980년대로부터 이어지는 본질적이로 거시적인 의제들, 이를테면 민주화과정에서 발생한 광주의 트라우마나 노동운동, 분단 이데올로기에 대한 진지한 -87쪽

모색은 제도권 영화 생산에서 지속성을 담보해 내지 못한 채 실종되어 버리는 현상이 영화산업의 속성이기도 한 대중추수/주의 속에 나타난다. 그것이 자본주의와 결합한 대중문화 상품으로서 제도권 영화의 속성이자 한계라면, 소위 비제도권 영화로 분류되며 1990년대 자신의 길을 개척해 가는 독립영화 속에서 한국사회의 문제적 상황에 대한 사회적 사실주의 정신이 명맥을 유지하게 된다. -87~88쪽

1992년부터 비디오 판권 선구매로 영화업에 진출한 대기업이 1990년대 중반부터 영화 제작 전액투자로 확대되다가 점차 발을 떼게 되면서 그 빈자리를 금융자본, 투자사들이 차지하게 된다. 대기업 자본의 영화업 진출 초기 충무로 토착자본의 저항과 반대가 있었지만, 비디오 판권, 유통업을 통해 이미 들어온 대기업 진출이 대세가 되어 가면서, 결국 영화 전문성 부족으로 물러날 것이란 낙관적 기대 하에 저항은 수그러든다. 삼성은 삼성영화사업단을 만들어 1994년 본격적으로 영화업에 진출하게 되고, 대우, 현대 등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대기업들이 비디오 유통과 케이블 TV에 진출하면서 영상 콘텐츠 확보 차원에서 경쟁적으로 영화산업 전반에 손을 뻗친다. 서비스업으로 분류되어 금융지원 혜택을 받지 못하던 영화업은 1995년을 기점으로 준제조업으로 분류되어 창업투자사를 비롯한 금융자본이 투자될 수 있는 법적인 여건을 마련하면서 다양한 제작사들이 다양한 자본주의 후원으로 하나둘씩 설립된다. 제작사들의 백가쟁명시대가 열린 것이다. -91쪽

그러나 영화를 교두보로 한 대기업 자본의 영상업 전반에 투자가 확대될 무렵인 1997년 IMF체제가 닥쳤다. 이에 대기업들은 영상산업 진출에 예상만큼의 수익을 거두지 못한 데다, 경제 위기의 원인 중 대기업의 문어발식 백화점 경영이 문제가 되자 발 빠르게 영화업으로부터 물러나게 되고, 그 빈자리를 금융자본과 결합한 투자사들이 충무로의 가장 강력한 자본주로 들어서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기업 자본이 빠져나간 공백은 컸으며, 한국영화 제작편수는 급감한다. 바로 이 미묘하고 위험한 시기에 등장한 대한민국 최초의 민주화정권인 김대중 정부는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 획기적인 영화 지원정책을 골자로 한 영화진흥법 개정을 하게 된다. -91쪽

한국영화산업과 정책 : 1980~1997, 조준형의 글 일부를 옮겨본다 / 1980년 이후 1990년대 후반까지 한국영화산업과 정책은 이전 어떤 시기와도 비교할 수 없는 급격한 변화를 겪어 왔다. 이와 같은 변화의 시작은 제5차 개정영화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84년 12월에 개정되어 이듬해 7월부터 시행된 제5차 개정영화법은 1962년 영화법이 제정된 이후 20여 년에 걸쳐 지속적으로 이어져 온 박정희 정권기의 영화정책을 근본적으로 바꿔 놓았다. 주지하다시피 박정희 정권기 영화정책의 근간은 제작-수입의 일원화, 제작사 허가제를 통한 메이저화 정책, 외화 수입의 통제 등이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정책의 실효성을 담보했던 것이 외화수입쿼터였다. 요컨대 박정희 정권의 영화정책 핵심은 할리우드나 일본과 같이 한국에서도 메이저 영화사를 양성하고자 하는 것이었으며, 이를 실현할 수 있는 재원 조달과 특혜의 수단으로 외화수입쿼터를 부여했던 것이다. 이는 물론 정권의 입맛에 맞는 영화 제작을 유도하고자 하는 정책적 수단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기 영화정책, 특히 산업정책은 종국적으로 실패하였다. 무엇보다 표현의 자유를 생명으로 하는 문-144쪽

화산업에서 그 입을 틀어막고 자본을 투입하지 않은 채 편의적인 외화수입쿼터 부여로 한국영화산업을 육성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모순적인 것이었다. 이와 같은 영화산업 정책의 실패와 텔레비전의 등장이 겹치면서 한국영화산업은 1970년대 이후 몰락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제5차 개정영화법은 제작과 수입업을 자유화함으로써 영화 제작과 수입을 소수의 회사들이 담당하던 독점체제를 무너뜨림과 동시에 외화 수입을 자유화하는 획기적인 조치를 담고 있었다./ 제작과 수입업의 자유화는 많은 영화인들의 바람이었지만, 외화 수입의 자유화는 오랜 불황으로 제작 능력이 감퇴되어 온 한국영화 제작 부문에 있어서는 커다란 타격을 줄 수 있는 조치이기도 하였다. 어쨌든 이와 같은 제5차 개정영화법의 자유화 조치로 인해 한국영화산업에 완전 경쟁의 풍토가 도입되었고, 이후 한국영화산업은 급격한 변화와 혼란의 시기를 겪게 된다. -144쪽

1970년대 이후 1980년대까지 영화산업 쇠퇴의 주요 원인으로 대략 세 가지가 거론될 수 있었을 것이다. 첫째는 TV의 광범위한 보급으로 인한 영화 관객의 축소였다. 이는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인 현상이었는데, 다만 한국의 경우 미국이나 유럽,일본에 비하여 TV쇼크가 다소 늦게 도착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둘째는 검열의 강화로 인한 표현의 자유의 축소 경향이었다. 1972년 유신을 정점으로 한국영화의 표현의 자유는 극도로 축소되었고, 한국영화는 현실의 어느 곳에도 발을 붙이지 못하고 현실성이 증발된 기이한 판타지 공간으로 도피하는 경향으로 나타난다. 셋째는 박정희 정권의 영화정책 실패의 후유증이었다. 소위 메이저 기업화 정책은 이미 1960년대 중후반에 그 파탄의 징후를 드러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정권은 그 정책적 기조를 1970년대까지 이어나갔다. 이에따라 제작과 수입 등 영화 공급 부문은 소수의 영화사들에 의해 독점화되었으며, 한국영화의 제작은 점점 더 외화수입쿼터를 따기 위한 들러리에 지나지 않게 된다. 1970년대 한국영화산업의 비극은 이와 같은 개별적인 요인들이 상호 상승작용을 일으키며 악순환의 고리를 만들-147쪽

어 갔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TV의 보급에 영화가 대응하는 방식은 대형화(스펙터클), 표현 강도의 강화(폭력, 섹스)등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영화산업은 대형화의 길을 택하기에는 자본력이 부족했고, 표현 강도를 강화하기에는 검열의 수위가 장애가 되었다.-147쪽

일제시대 이후 군사정권을 거치는 동안 거의 1970~80년의 기간 동안 영화는 산업이라기보다 대중적 영향력이 큰 이데올로기 통제수단으로 취급되었다. 산업적 지원책이나 정책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 정책들은 빈번하게 이데올로기 정책(검열, 제작에 대한 간섭, 광고나 상영에 대한 단속 등)과 모순을 일으켰다. 이러한 모순이 한국영화산업의 산업화 혹은 근대화를 지연시켰으며, 1970년대 한국영화산업의 몰락의 주요한 원인 중 하나였다. 하지만 김영삼 정부에 들어서면서 영화는 점점 이데올로기 통제 대상에서 부가가치 창출과 자본 재생산을 위한 본격적인 의미의 산업으로 자리매김한다. -183쪽

1990년 초를 전후한 대기업의 영화산업 진출에는 몇 가지 배경이 존재한다.첫째, 비디오 유통에서의 직배의 영향이다. 삼성,대우,엘지 등의 가전 3사는 한국에서 VCR이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1980년대 중반부터 비디오 프로그램의 확보라는 측면에서 영화산업에 간접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하지만 1991년을 기점으로 비디오 시장에까지 할리우드 영화사들의 직접배급이 시작되자 대기업들의 프로그램들은 총체적인 어려움에 직면한다. 대형 흥행작들은 직배사의 수중에 있었고, 직배를 거치지 않은 흥행작의 경우 국내 기업들 간의 경쟁으로 몇만 달러 수준이던 판권료가 몇십만 달러로 뛰어올랐다. 뿐만 아니라 대안으로 떠오른 한국영화의 판권료 또한 수억 원에 이르게 되었다(권미정,<90년대 한국영화의 제작방식 연구: 자본과 인력의 변화, 그 영향을 중심으로). 당시 한국영화의 평균 제작비가 5~6억원 선이었음을 감안한다면 제작비에 육박하는 금액을 비디오 판권료로 지불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대기업으로 하여금 직접적인 영화 제작에 참여하도록 만들었다. -184쪽

문재철- <1980년대 이후의 영화비평과 이론의 흐름> 중 일부를 옮겨본다 / 제5,6 공화국으로 대표되는 정치적 억압, 그리고 그 배후에 놓여 있던 계급과 민족모순, 그리고 무엇보다 변혁의 주체로서 민중에 대한 자각은 개인적 울분의 형태로 진행되었던 1970년대까지의 낭만적 저항에서 벗어나 영화의 사회적 기능과 역할을 강조하면서 보다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저항을 가능케 했다. 더 나아가 문화적 차원에서 볼 때, 문화적 자유화에 따라 외국영화가 범람/하고 UIP 직배 등으로 대변되는 미국의 신식민주의적 통제가 노골화된 시기이지만 동시에 탈식민지적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문화적 정체성을 본격적으로 탐색했던 때이기도 하다.-208~209쪽

1980년대 초반의 상황을 맥락화하자면 두 가지가 지적될 수 있겠다. 하나는 기존 충무로 시스템으로 대변되는 한국영화의 상업주의와 값싼 대중영합주의에 대한 비평적 개입의 문제다. 물론 영화비평계에서 이에 대한 문제제기는 1950년대 후반 이래 지속되어 왔었는데 1980년대를 시작하는 시기에도 여전히 유효한 문제였다. 다시 말해 한국영화의 전근대성을 어떻게 비평적으로 극복할 것인가의 문제는 한국영화비평의 오랜 숙원이었고 1980년대 영화비평이 해결해야 할 역사적 유산이었다. 또 하나의 문제는 영화의 사회적 역할과 관련된 것이었다. 물론 이 역시 기존 리얼리즘 비평의 문제의식이긴 했다. 하지만 이영일을 위시한 우파 민족주의 비평계열이/보여 주던 관념적 리얼리즘을 어떻게 극복할 것이냐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고 어떤 식으로든 한국영화의 변화를 위해선 해결해야 할 시급한 당면 과제였다. -209~210쪽

김종원이 말한 '이제부터'가 1980년대라면 그 주역은 기존의 학자나 평론가가 아닌 새로운 세대들이었다. 이 새로운 세대는 대학 내 영화서클을 중심으로 한 젊은 시네필들로 영화에 대한 순수한 애정에서 출발하였다는 점에서 기존 충무로를 중심으로 한 영화계가 지니지 못한 열정과 에너지를 지니고 있었다. 물론 시네필의 활동은 이미 유신 말기 때부터 프랑스문화원과 독일문화원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오고 있었는데, 1977년 프랑스문화원에서 만들어진 '씨네클럽'이 그 대표적인 사례라 할 것이다. 영화예술의 공간을 조성한다는 취지로 만들어진 '시네클럽'은 매주 영화감상과 토론의 시간을 열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대학 내 소모임으로 동호회가 결성되고 영화감상과 토론은 물론 초보적이기는 하나 8MM단편영화를 제작하면서 영화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 나갔다. 이 시기 씨네필들이 지니는 한국영화사적 의미는 각별하다. 열혈 영화광은 늘 존재했지만, 본격적인 의미에서 씨네필들이 왕성한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80년대에 이르러서였다. 특히 이들은 집단을 이루고 나름의 통일된 목소리는 내는 등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과거의 씨네-212쪽

필들과는 달랐다. 이러한 씨네필들의 활동은 향후 1990년대를 거치면서 예컨대 문화학교 서울과 같은 형태의 예술영화 보기 운동으로 이어지면서 오늘날 시네마테크의 뿌리를 형성했다.-212쪽

가령, 1990년대 중반을 거치면서 시작된 대기업 자본과 그 이후 금융자본의 유입, 기획영화의 등장, 마케팅의 부각 등은 영화를 보다 산업적 틀 속에서 정의하게 했다. 더군다나 감독들 역시 서사적 상상력보다는 이미지의 매력에 집착하고 리얼리즘 영화보다는 장르영화에 치중하는 등 이전 세대와 확연히 구분되는 영화적 상상력을 보여 주었다. 게다가 수용문화 또한 변화했다. 관객들의 시각적 해독 능력은 과거에 비해 탁월해졌고, 여기에다 비디오, 텔레비전, 컴퓨터 등등의 시각적 매체는 영화 이미지에 대한 그들의 태도를 바꿔 놓았다. 소위 영상세대의 관객이 출현한 것이다. 그리고 1995년 부산영화제의 시작은 이후의 시기를 영화제의 시대라 할 정도로 영화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보다 강력하게 이끌어 내면서 한국영화를 글로벌 프레임 속에서 사고하게 해 주었다.-235쪽

이전까지의 시대가 전문적 소수가 주도하면서 비평의 공간을 채워 갔다면 이 시기에 이르러 가장 큰 변화는 관객들의 참여와 목소리가 커졌다는 것이다. 관객들이 영화를 수동적으로 소비하는 존재에서 영화적 의미 생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주체로 거듭나게 된 것은 물론 영화를 비롯한 영상예술에 대한 사회문화적 관심이 증가한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이른바 영상시대의 도래로, 영화를 일종의 차세대 중요산업으로 보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이제 영화는 단순히 보고 즐기는 것이 아닌, 새로운 문화적 자본으로서 기능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 '백두대간'과 같은 영화수입사의 예술영화 상영, '하이퍼텍 나다'등의 예술영화전용관, 문화학교 서울 등을 중심으로 시작된 예술영화 감상과 수용자 운동, 그리고 급기야는 시네마테크 설립('서울 시네마테크')에 힘입어 전문 비평가들만의 전유물에 가깝던 고급 예술영화가 대중들과 만나기 시작했다. 이는 관객 대중들의 영화 독해능력을 향상시킴과 아울러 영화에 대한 대중적 관심의 질적 변화를 이끌어 냈다. 기존의 영화비평이 지식과 정보의 소유를 통해 자신들을 대중과 차별화하고 있었다면 이제 비평의 영-238쪽

역은, 특히 저널비평의 영역은 대중들이 영화에 대한 정보를 많이 소유하게 되고 여러 가지 공간을 통해 적극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펼칠 수 있게 됨에 따라 질적인 변화를 갖게 되었다./이 당시 주간평론지 출간 붐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들이다. 물론 이는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1990년대 이후 소위 문화의 폭발과 연관해 이해할 수 있는 사안이기도 하다. 문화담론의 확산은 대중성의 확대에 편승했다. 1993년을 전후로 각 신문의 문화면이 양적으로 증가하였으며, 특히 한겨레신문의 문화 관련 칼럼 등이 저널리즘이라는 한계 속에서 영화비평의 대중화를 선도하였다. 특히 한겨레신문의 영화평은 신세대 젊은이들에 어필함으로써 문화적 담론의 대중적 헤게모니를 장악하게 된다.이는 씨네21의 창가으로 이어지면서 한국영화 저널지평담론의 큰 흐름을 주도하게 된다.-238쪽

이미 1980년대를 거치면서 다양한 형태의 대중문화가 자리잡아 가고 있었고 특히 소비문화와 결합된 문화산업은 상당한 대중적 기반을 획득하고있었다. 이와 같은 흐름이 사회과학의 몰락과 더불어 급상승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 속에서 영화 연구는 자의든 타의든 문화 연구라는 보다 넓은 장 속에 자리매김 되기에 이른다. 이제 영화가 하나의 문화적 현상으로 여겨지게 됨에 따라 영화는 질문의 최종적 목표가 아니라 재현과정의 일부로 간주되게 되었다. 그리고 영화를 하나의 문화적 과정으로 보게 됨에 따라 영화는 자기 완결적이고 동질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계급, 인종, 성, 민족 등과 같은 사회적 분할에 따라 일상적 가치와 의미가 충돌하고 상호 작용하는 장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 결과 작가영화 대 대중영화, 대안영화 대 주류영화, 예술영화 대 할리우드 영화라는 이분법적 대당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이전의 영화비평이 보여 주던 정치적으로 경직된 측면도 완화되었다. 뿐만 아니라 대중영화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터전과 대안적인 독법이 적극 논의되게 되었다.-242쪽

하지만 문화 연구의 도입이 영화 연구의 이론적 사유 방식이나 방법론과 관련하여 꼭 긍정적/인 영향만을 준 것은 아니었다. 개별 텍스트의 미학적 특징보다는 의사소통의 과정과 맥락에 더 집착한다는 점에서 영화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질문이라 할 수 있는 영화적 특수성의 문제를 간과하는 한계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다시 말해 의미화, 약호, 위치, 무의식, 이데올로기, 권력 등을 강조함에 따라 상대적으로 미학을 불신하는 경향이 나타났다.-242~2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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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1980년대편 3 - 광주학살과 서울올림픽 한국 현대사 산책 14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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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아시안 게임은 군사독재정권의 선전 내용대로 한국이 종합 2위를 하고 끝났다. 그리고 정권은 이번 아시안 게임을 자신들의 통치논리에 뜯어맞추어 대중조작을 서슴지 않고 있다. 관중 매너도 금메달감이라든가, 4천만이 11억의 중공을 이겼다 라든가 등의 경기 결과를 공동체 전체의 승리인 양 선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 아시안 게임은 한마디로 권력의 획일적인 조직동원 능력이 만들어낸 타율적 잔치일 뿐이다. 비인기종목이 인기종목과 마찬가지로 관중이 많다고 하는데, 경기 중에 울려퍼지는 소리를 듣다 보면 낯익은 괴성들이 들린다. 그 소리는 마치 조용필이 노래 부를 때 들리는 환성인데 그 목소리들의 주인공이 전부 동원된 초, 중학생들이다."(고광헌, <스포츠와 정치>에서 재인용)-78쪽

"나는 지금도 내가 뉴스를 진행하던 그때, 스튜디오 한쪽에 잉크를 풀어놓은,(그래야 실감이 났으므로) 수돗물로 찰랑대던 여의도 일대의 모형이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당연히 거기엔 63 빌딩이 있었고 파란 잉크물은 그 빌딩의 허리께까지 차올라 넘실대고 있었다. 그것은 장난이 아/니었다. 아니 장난처럼 하면 안 되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우리는 63빌딩의 중간까지 물이 찬다는 건 좀 너무 하지 않느냐, 2층 정도까지로 줄이자 어쩌자 하면서 제멋대로들 기준을 정하다가 누군가 '겁을 주려면 확실하게 줘야지'하는 말에 훅훅거리며 웃기까지 하였다. 그 광란의 시기에 과학적 사고는 오히려 장애물이었다. 우리나 내뱉은 웃음에는 무기력한 자조도 섞여 있었겠지만 그 한구석엔 또 어떤 광기도 있었던 게 아닐까. 거짓말도 계속하면 그 자신은 참말로 느껴지는 것처럼 우리는 그때 이미 자기 제어 능력을 상실하고 있었는지 모른다."(손석희, <부끄러운 언론의 얼굴>; 평화의 댐 사건을 말하면서)-98~99쪽

"잉여자본이 흘러 들어간 곳은 부동산업과 유통업 등의 서비스 산업이었다. 서비스 산업의 확충은 3저 호황으로 얻은 소득 증대를 소비로 연결하는 노릇을 한다. 신세대 담론이 등장하고, 소비 시대가 온 것처럼 적극적으로 논의되던 것도 이 즈음이다. 광고시장이 커지자 언론은 전에 없던 호황을 누리며 방송 시간을 늘리고 증면하는 등 광고를 유치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인다. 소비를 향한 새로운 욕망을 언론이 내용을 통해서, 즉 광고를 통해서 주도하고 배치하기 시작한 것이다."(원용진,<한국 언론민주화의 진단:1987~1997을 중심으로)-117쪽

올림픽이 한국인들의 일상적 삶에도 큰 영향을 미친 건 분명했다. 예컨대 최진섭은 올림픽이 한국민의 반미의식을 키우는 데에 기여했다고 말한다. 대학가에서는 80년대 중반부터 반미구호가 많이 외쳐졌지만 상당수 일반 시민들은 88 올림픽을 계기로 '반미의식'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념적, 정치적 반미가 아니라 정서적 반미라는 것이다. (중략)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더욱 중요한 변화들이 많았다. 무엇보다도 올림픽 전후로 오락, 문화산업, 음식, 숙박업, 관광산업, 스포츠 및 여행장비산업 등의 여가산업이 급격하게 팽창했다. -296쪽

비디오시장도 호황을 누렸다. 88년 4월 당시 국내의 vcr 공급대수는 180만 대였는데 올림픽 특수에 힘입어 연말엔 220만~250만 대에 이르러 비디오시장의 규모는 영화시장을 추월해버렸다.(강한섭, <비디오때문에 터지는 분통>)-2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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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100118103034&Section=07 

-> 카이에 뒤 시네마와 필름 코멘트에서 2000년대 최고의 영화를 선정했다. 

 다음은 두 잡지가 영화평론가들에게 의뢰해 선정한 2000년대 최고 영화 순위이다. 

(본 것 표시해 봐야지. 본 게 별로 없다..아 게을러진 나..ㅜ.ㅜ 반성하자)

<카이에 뒤 시네마 >

1. 멀홀랜드 드라이브 /데이빗 린치/미국/2001년
2. 엘레펀트 /구스 반 산트/ 미국 /2003년
3. 열대병 /아핏차퐁 위라세타쿤/태국/2004년
4. 괴물 /봉준호/한국/2006년
5. 폭력의 역사 /데이빗 크로넨버그/캐나다/2005년
6. 종자와 노새 /압델라티프 케시케 /튜니지아/2007년
7. 철서구(鐵西區) /왕빙/ 중국/2003년
8. 우주전쟁 /스티븐 스필버그/미국/2005년
9. 뉴 월드 /테렌스 맬릭/미국/2005년
10. 텐 /아바스 키아로스타미/이란/2002년

<필름코멘트>

1. 멀홀랜드 드라이브 /데이빗 린치
2. 화양영화 /왕자웨이/홍콩/2000년
3. 하나 그리고 둘 / 에드워드 양/대만 일본/2000년
4. 징후와 세기 /아핏차퐁 위라세타쿤/태국 오스트리아 프랑스/2006년
5. 데어 윌 비 블러드 /폴 토머스 앤더슨/미국/2007년
6. 라자레스쿠의 죽음 /트리스티 푸이우/루마니아/2005년
7. 폭력의 역사 /데이빗 크로넨버그
8. 열대병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9. 4개월, 3주, 그리고... 2일 /크리스티앙 문주/루마니아/2007년
10. 뉴 월드 /테렌스 맬릭
11. 플랫폼 /지아장커/홍콩 일본 프랑스/2000년
12. 조디악 /데이비드 핀처/미국/2007년
13. 침입자 /클레르 드니/프랑스/2004년
14. 아들 /장 피에르 &뤽 다르덴형제/벨기에 프랑스/2002년
15. 도그빌 /라스 폰 트리에/덴마크 스웨덴 프랑스 영국 독일 네덜란드/2003년
16. 히든 /미카엘 하네케/프랑스 오스트리아 독일 이탈리아/2005년
17. 킹스 앤드 퀸 /아르노 데스플레셍/프랑스/2005년
18. 엘레펀트 /구스 반 산트
19. 로얄 타넨바움 /웨스 앤더슨/미국/2001년
20. 비포 선셋 /리처드 링클레이터/미국/2005년
21.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미야자키 하야오 /일본 /2001년
22.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 /아녜스 바르다/프랑스/2000년
23. 안녕 용문객잔 /차이밍량/대만/2003년
24. 세계 /지아장커/중국 일본 프랑스 /2003년
25. 그녀에게 /페드로 알모도바르/스페인/2002년
26. 인랜드 엠파이어 /데이비드 린치/미국 프랑스 폴란드/2006년
27. 스틸라이프 /지아장커/중국 홍콩/2006년
28. 행진하는 청춘 /페드로 코스타/프랑스 포르투갈 스위스/2006년
29. 러시아 방주 /알렉산데르 소쿠로프/러시아 독일 /2002년
30. A.I. /스티븐 스필버그/미국/2001년
31. 사랑의 찬가 /장 뤽 고다르/프랑스 스위스 /2001년
32. 이터널 선샤인 / 미셸 공드리/미국/2004년
33.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조엘&에단 코엔/미국 /2007년
34. 베크마이스터 하모니즈 /벨라 타르/헝가리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 /2000년
35. 그리즐리 맨 /베르너 헤어조크/미국 캐나다/2005년
36. 쓰리 타임스 /허우샤오셴/대만/2005년
37. 카페 뤼미에르 /허우샤오셴/대만/2003년
38. 평범한 연인들 /필립 가렐/프랑스/2005년
39. 친애하는 당신 /아핏차퐁 위라세타쿤/태국/2002년
40. 아임 낫 데어 /토드 헤인스/미국 독일 /2007년
41. 2046 /왕자웨이/중국 홍콩 프랑스/2005년
42. 바르다의 방 /페드로 코스타/포르투갈 독일 스위스 /2000년
43. 로스앤젤레스 플레이스 잇셀프 /톰 앤더슨/미국/2003년
44. 밀레니엄 맘보 /허우샤오셴 /프랑스 미국 스페인 그리스 /2001년
45. 라 코뮌(파리 1871) /피터 왓킨스 /프랑스 /2000년
46. 허트로커 /캐슬린 비글로/미국/2009년
47. 밀리언 달러 베이비 /클린트 이스트우드/미국/2004년
48. 거기는 몇 시인가요 /차이밍량/대만 프랑스 /2001년
49. 데몬러버 /올리비에 아사야스/프랑스 /2002년
50. 머리없는 여인 /루크레시아 마르텔/아르헨티나 스페인 프랑스 이탈리아/2009년
51. 갇힌 여인 /샹탈 애커만/프랑스 벨기에 /2000년
52. 에스더 칸 /아르노 데스플레솅/프랑스 영국 /2000년
53. 아워 뮤직 /장 뤽 고다르/ 프랑스 스위스/2004년
54. 디스탄트 / 누리 빌게 세일란/터키/2002년
55. 사라반드 /잉그마르 베리만 /스웨덴/2003년
56. 홀리걸 /루크레시아 마르텔 /아르헨티나 이탈리아 네덜란드 스페인/2004년
57. 이 투 마마 /알폰소 쿠아론/ 멕시코 /2001년
58. 브로크백 마운틴 /이안/미국/2005년
59. 칠드런 오브 맨 /알폰소 쿠아론/일본 영국 미국/2006년
60. 텐 /아바스 키아로스타미/이란 프랑스 미국 /2002년
61. 사일런트 라이트 /카를로스 레이가다스 /멕시코 프랑스 네덜란드/2007년
62. 높 /루크레시아 마르텔/아르헨티나 스페인/2001년
63. 더 차일드 /다르덴 /벨기에 프랑스 /2005년
64. 스타 스프랭글드 투 데스 /켄 제이콥스/미국/2004년
65. 붉은 풍선 /허우샤오셴 / 대만 프랑스 /2008년
66. RR /제임스 베닝/미국/2007년
67. 하우스 오브 머스 /테렌스 데이비스/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2000년
68. 25시 /스파이스 리/미국/2002년
69. 35럼 샷 /클레르 드니/프랑스 독일 /2008년
70. 서머 아워스 /올리비에 아사야스/프랑스/2009년
71. 괴물 / 봉준호/한국/2007년
72. 어댑테이션 /스파이크 존스 /미국 /2002년
73.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소피아 코폴라/미국 일본 /2003년
74. 게리 /구스 반 산트/미국/2002년
75. 공공장소에서의 개인적 공포 / 알렝 레네/프랑스 이탈리아/2006년
76. 마이 위니펙 /가이 매든 /캐나다/2007년
77. 펀치 드렁크 러브 / 폴 토머스 앤더슨/ 미국/2002년
78. 팻 걸 /캐서린 브레이야/프랑스 이탈리아 /2001년
79. 디파티드 / 마틴 스코세즈/미국 홍콩/2006년
80. 파 프롬 헤븐 /토드 헤인스/미국 프랑스/2002년
81. 도니 다코 /리처드 켈리/미국/2001년
82. 무라데 /우스만 셈베네/ 부르키나 파소 모코코 튜니지아 카메룬 프랑스 /2004년
83. 해변의 여인 /홍상수 /한국/2006년
84. 살인의 추억 / 봉준호/한국/2003년

85. 철서구 /왕빙/중국/2003년
86. 웬디와 루시 /켈리 레이처드/미국/2008년
87. 트러블 에브리데이 / 클레르 드니/프랑스 독일 일본 /2001년
88. 팜므파탈 /브라이언 드 팔마/미국 프랑스 /2002년
89. 2층의 노래들 /로이 안데르손/스웨덴 /2000년
90.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 /클린트 이스트우드/ 미국 /2006년
92. 겁쟁이 로버트 포드에 의한 제시 제임스의 암살 /앤드류 도미닉 /미국/2007년
93. 라스트 데이스 /구스 반 산트/미국/2005년
94. 과거가 없는 사나이 / 아키 카우리스마키/핀란드 독일 프랑스 /2002년
95. 둑이 무너졌을 때 /스파이크 리 /미국/2006년
96. 베스트 오브 유스 /마르코 튤리오 지오다나/이탈리아/2003년
97. 생활의 발견 /홍상수/한국/2002년
98. 24 시티 /지아장커/중국 홍콩 일본 /2008년
99. 인 더 시티 오브 실비아 /호세 루이 게린/스페인 프랑스 /2007년
100. 하얀 리본 /미카엘 하네케/오스트리아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2009년 

 + <아바타>가 결국 골든글로브 작품상과 감독상을 가져갔구만. 카메롱 형님이 다시 킹 오브 더 월드를 외칠려나, 오스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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