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와 위험 현대문화론선 15
메리 더글라스 지음, 유제분.이훈상 옮김 / 현대미학사 / 1997년 10월
품절


메리 더글라스의 한국어판 서문 중 일부를 옮겨본다 / <순수와 위험>은 원시인들의 이성적 행위를 옹호하였다. 다시 말해서,금기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파괴하는 행위로부터 사회를 보호하려는 관심으로 판명되었다. 이단자가 날씨를 망치고 번개로 죽이거나 바다에 폭풍을 일으킨다고 비난받을 때,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논리 절차에 있어서의 결함이 아니라 책임을 묻는 것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유감스럽게도 이 책에서 나는 공동체의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자연의 위험을 사용하는 금기의 사고와 우리 현대의 접근방법 사이의 어떤 연관을 맺지 못하였다.-8쪽

이 책의 주제는 모든 장소에서,어디에서나,세계는 도덕화되고 정치화되었다는 것이다. 공기와 흙을 더럽히고 물을 더럽히는 재앙들은 일반적으로 정치적 설명으로 돌려진다.다시 말해서 이미 인기를 잃은 누군가가 그것 때문에 문책을 당할 것이라 것이다. 이처럼 변론적인 위험 이론은 내가 옥스퍼드에서 훈련받은 1940년대의 인류학에서 나왔다.그것은 너무나 잘 인정받고 있는 것이어서 내가 이것에 썼을 때, 내 동료들은 그것이 이미 너무 잘 알려진 것이라고 논평해싸.그렇기 때문에 더 확신을 갖고 나는 그 의미를 전개해 나갔다.-9쪽

질문은 사람들이 불운을 설명하는 방법에서 시작한다. 예를 들어, 한 여인이 죽는다. 장례식 참석자들은 그녀가 죽은 이유를 묻는다. 인류학자는 일련의 사례를 목격한 후, 모든 불운에는 고정된 종목의 가능한 이유(9)가 있고 그 가운데 그럴듯한 설명이 선택되며 고정된 종목의 의무 행위가 뒤따른다는 것을 주목한다. 공동체는 어떤 지배적 설명 형태 위에 구성되는 경향이 있다.-9~10쪽

한 유형의 설명은 도덕적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녀는 조상을 화를 나게 했거나, 금기를 깼거나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죽었다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설명을 따르면, 행위는 속죄적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어떤 정화 제의가 요구되는 것이다. 같은 운명을 피하기 위해 공동체는 법을 따르도록 권고된다. 만약 이것이 지배적 형태의 설명이라면, 그것을 받아들이는 공동체는 희생자를 탓하지 않는 공동체와는 매우 다르게 구성된 것이다.-10쪽

불운을 설명하는 다른 방식은 불운을 개인의 적수에게로 돌리는 것이다.도덕적으로 말하자면,생존자는 그녀의 적수보다 우수할 필요가 있다.다시 말해서 그들은 그녀가 죽은 이유가 그녀가 자신의 이익을 돌볼 수 있을 정도로 빠르거나 똑똑치 못했다는 데에 있다고 말할 것이다.경쟁자의 마술이 그녀의 것보다 강렬했다고 할 것이다.그녀를 죽인 경쟁자는 의혹의 손가락이 그들을 향할 때라도 거의 비난을 받지 않는다. 왜냐하면 죽음이 정치화되었어도 도덕적 관심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사후에 일어나는 결정은 한 공동체를 이룬다. 다시 말해 각 구성원이 경쟁자에 의해 시달릴 것을 예상하고 최소한의 보상과 보복을 위한 행위까지 요구하는 공동체,다시 말해서 개인의 경쟁 상대에 대한 보복으로 구성되는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다.-10쪽

공동체에 미치는 영향에 있어서 또 다른 것은,불운을 초래한 책임을 외부의 적에게로 돌리는 것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이 경우에 대답은 그녀는 집단의 적대자 때문에 죽었는데, 이 적은 반드시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속에 감추어진 불충한 반역자라는 것이다. 이 같은 집단에 따르는 행위는 반역자를 찾아서 그에게 집단 처벌을 받아내고 보상을 받아내는 것이다. 이렇듯 책임을 돌리는 세 가지 유형의 방식은 처벌 체계에 영향을 /미친다. 아니 차라리, 영향은 양쪽 모두에게 미친다고 할 수 있는데, 책임을 돌리는 것과 처벌체계는 모두 사회가 형성되는 방식의 징후이다.-10~11쪽

이름도 없이 전혀 조직화되어 있지 않은 공동체도 있다. 여기에서 책임은 모든 방향으로 예측할 수 없이 돌려진다.비행접시와 화성의 침입자,마술,도덕적 실패,기술적 실패,다시 말해서,그 어떤 것도 그럴싸하게 모든 불운의 이유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기준이 되는 처방이 없다면,요구되는 기준 행위도 없다는 말이 된다. 요컨대,한 공동체의 유대감이 강하면 강할수록,자연의 재앙은 더욱더 비난받아야 할 행위의 징표로 의미되는 것이다. 모든 죽음과 대부분의 병은 책임을 전가시킬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위험은 공공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정의되고, 책임의 발생은 구성원들이 공공의 이익에 기여하도록 설득하려고 조정하는 하나의 부산물이다. 이 관점에서 볼 때 오염은 강력한 변론적인 공급원이 된다.책임을 공동체의 구성원에게 곧장 돌리는 것으로 그만한 것이 없다.공동의 위험이 구성원들에게 조작하게 만들며 공동체 규모의 오염의 위협은 상호간의 위협의 무기가 된다. 공동체의 존속을 생각하는 사람이면 누가 그것을 사용하는 것을 마다할 수 있겠는가? 이 관점에서 책임을 묻지 않는 희귀한 공동체는, 단지 타협이라는 영웅적 프로그램에-11쪽

의해서만 생존할 수 있다.(11) 지난 1950년대 후반에 '순수와 위험'을 위한 연구를 시작했을 때에는 원자력이 세계에 영구한 번영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환희의 분위기가 일반적으로 깔려 있었다.과학이 정말로 사물을 다르게 만들었다고 생각되었다. 타당한 실험과 이론의 권위에 의해 이유가 객관적으로 밝혀지는 실재의 위험을 우리는 인지할 수 있다고 생각되었다. 우연과 신비와 악의는 과학이 아직 밝히지 않은 작은 모퉁이에 잠적해 있지만, 일반적으로 말해 세상에 대한 명확한 지식과 강력한 기술공학 덕분에, 책임을 묻는 행위는 조직을 지원하는 기능으로 굴절하는 대신 실재 이유를 물었다. 이른바 '진짜 책임묻기'가 가능했던 것이다.진짜 책임은 지식의 객관적인 기초로 보장받아서 이데올로기의 탄탄한 작업에 매일 수 없었다.-11,12쪽

오염에 대한 원시인들의 태도와 우리 현대인들의 태도의 차이를 설명하자면, 한때 모든 곳에서 있었던 도덕과 위험 간의 관계가 서구의 진보된 지식으로 인해 해체되었다는 것이 지배적 사고였다.즉,현대에 있어서 도덕은 도덕적 설득에 의해 진지하게 강화되며,위험은 과학 기술에 의해 알려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전에는 과학기술의 부족으로 인해 무모한 책임묻기가 행해졌으며 그럴듯하게 만들기 위해 영적 대리인이 고안되었어야 하며, 마술이나 금기는 무지에 기인했다는 것이다.이러한 가정의 자기 만족은,영혼의 자기 실현이라는 헤겔 철학으로부터 온 유산이었고 이 가정은 막스 베버를 통해 헤겔을 보다 가깝게 계승함으로써 사회학자들에게로 이어졌다. 자아 인식을 높이고(15) 인지를 넓히는 것은 과학기술의 통제가 증가하는 것과 함께한다고 생각되었다. 그와 같은 물질주의적 역사개념은 내가 사전에 오염에 관한 항목을 썼던 1968년에도 여전히 지배했었다.-14,15쪽

보다 높은 지식과 보다 나은 의사소통이 우리와 종족사회 사이에 간극을 만들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 있어서는 나도 그들과 같았다. 암묵적으로 아직도 많은 동료들은 이와 같은 도덕적 진보이론을 지지한다.(중략)그런데 갑자기 과학기술 그 자체가 위험의 원천으로 공격 대상이 되었다. 모든 것이 변해 버렸다. 원시 위험과 도덕 사이의 오랜 관계가 지식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 명백해졌다.(중략)과학은,서로를 지배하기를 원하지 않은 종류의 사람을 만들어내지는 않았다. 또한 산업화는,위험을 공공의 이익으로 보호하는 수사학으로 이용하지 않은 종류의 사람을 만들어내지는 않았던 것이다.차이는 지식의 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기를 원하는 종류의 공동체나 만들 수 있는 공동체 혹은 과학기술이 가능하게 해준 공동체에 있는 것이다.-15쪽

동시대의 위험분석은 위험을 변론적으로 사용하던 것을 꾸려서 시야 밖으로 던져버리는 것으로 시작했다. 내가 기존의 위험 분석자들을 대화에 참여시키려고 했을 때, 나는 곧 이러한 의심스러운 위험의 용도들을 강조하는 것이 그릇된 것이고 정결한 과학적 주제에 대해 말하는 더러운 방식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들은 정치학의 검댕과 열기가 위험의 주제에 내포된다는 것을 인식하지만, 끈덕지게 분리시킨다.이들의 직업적인 목표는 관심과 이데올로기에 의해 오염되기 이전의 위험인지의 본질을 얻는 것이다.-17쪽

위험연구는 많은 수수께끼와 역설을 들추어왔다. 대중은 결정적으로 전문가가 보는 방식과 같이 위험을 보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대중과 전문가 간의 의견 차이는 위험심리학의 아주 새로운 소분파와 성인 교육의 아주 새로운 전문화된 영역과 위험을 전하고 이름을 붙이는 아주 새로운 학문과 위험의 목록을 만드는 기업을 일으켰다.그러나 범람원을 매입하는 것을 거절하거나 지진보험을 드는 것을 거절하고 위험한 도로를 건너거나 몰고 다닐 가치가 없는 차를 몰거나 사고를 내는 가전제품을 사들이고 위험에 관한 교육을 듣지 않는 일반 대중의 좌절스러운 행위는 모두 예전과 같이 계속된다.-17쪽

인류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이데올로기적 지배를 위한 투쟁에 사용하기 위해 그다지도 많은 무기가 필요한 것만큼이나, 육체의 위험과 어린아이들의 위험과 자연의 위험이 쓸모가 있을 것이라는 데에 동의할 것이다. 이 사실은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위험에 대한 담론이 정치화되지 않은 사회를 상상한다는 것은 요즈음 너무 순진한 일일 것이다. 그 같은 사회에서는 가치에 대한 자유 논쟁이 없을 것이다.공유된 이(18)/데올로기를 만들기 위한 공개토론의 장도 없을 것이다. 그 같은 사회에서는 소외된 개인들만의 위험 인지의 심리학이론에 나타나는 인간의 이상을 충족시킬 것이다. 다행히도 그 같은 인간은 매우 비현실적인 것이다.-18,19쪽

인간은 기본적으로 위험을 피하지만, 정보를 다루는 데 너무 비효과적이어서 무심결에 엄청난 위험을 택한다고 말해진다. 기본적으로 우리는 바보라는 것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나는 우리가 직업적인 위험심리학자들에 의해 설명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의심한다. 나는 위험이 우리와 함께 하며 매우 현실적이라는 사실을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우리의 사고가 그다지도 선천적으로 잘못된 것이라면,어떻게 우리가 이 지구 위에서 생존할 수 있었을까? '순수'와 '위험'은 모든 공(19)동체가 그 자신의 구조에 관한 모든 대화 속에서 상대에게 열정적으로 던지는 압축된 논의인 것이다.-19,20쪽

본판 서문 중 일부 / 위생법은 우리가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갖고 연구할 수만 있다면, 훌륭한 방법임이 입증되었다. 알다시피,오염은 기본적으로 무질서이다.절대적인 오물이란 것은 없다.오물은 보는 이의 눈 속에 존재한다.우리가 오물을 피한다면, 그것은 비겁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며, 더욱이 무서움이나 성스러운 공포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질병에 걸리지 모른다는 생각만으로는 부정을 청결하게 하거나 기피하는 우리의 행동을 설명해 내지 못한다. 부정은 질서에 반대하여 감정을 상하게 한다. 따라서 오물을 배제하는 것은,소극적인 행위가 아니라 환경을 조직하는 적극적인 노력이다.(중략)우리가 병을 피하려는 불안에 지배되어 오물을 제거하고,벽을 도배한다거나 장식한다든가 또는 정리 정돈하는 것은 아니다.환경을 적극적으로 재조정하려는 것은 우리 이념에 따르기 위한 것이다. 우리들이 오물을 기피하는 데에는 두렵거나 비합리적인 요소가 일체/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창조적 행동이며 형식을 기능에 연결시키고 경험을 통일시키려는 시도이다. 우리들이 격리하고,정돈하고,청결히 하는 행동이 그러하듯이,원시인들이 행하는 청결법과 -23,24쪽

예방법도 같은 시각에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이 책에서 필자는 순수(purity)와 부정(impurity)의 제의들이 경험의 통일을 창조한다는 것을 보이려 한다. 그 같은 종류의 제의는 결코 종교의 중심 과제에서 일탈한 것이 아니고, 속죄에 적극 공헌하는 것이다. 그 같은 수단에 의하여 상징적 형식은 완성되고 공식적으로 표시된다. 이들 유형 속에서 공통점이 있는 요소들이 연결되고, 공통점이 없는 경험도 의미가 부여된다.-24쪽

오염의 관념(pollution ideas)은 사회생활에는 두 차원에 걸쳐 작용한다. 그 하나는 주로 수단으로서의 차원이고 또 하나는 표현의 차원이다. 보다 명백한 첫 차원에서 우리는 오염의 관념으로 사람들이 상호 행동에 영향을 주려고 애쓰는 것을 발견한다. 신앙은 사회 압력을 강화한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죽어가는 한 노인의 마지막 희망을 보증하고 어머니의 권위를 지키며 그리고 약하고 순진한 사람들의 권리를 옹호하기위하여 우주의 모든 힘을 불러들인다. 정치 권력을 장악한 이는 대개 불안정한 상태에 있으며, 이것은 원시사회의 지배자들도 예외는 아니다.그리하여 지배자의 정통적인 권위는, 자신의 인격에서,직무의 표정에서 그리고 자신이 하는 말로부터 발산되어 나오는 거대한 능력에 의하여 뒷받침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상적인 사회 질서는 이를 침해하는 자들을 위협함으로써 위험을 방지한다. 이와 같은 위험에 대한 신앙은 자신이 정의에서 벗어남으로써 초래할까 두려워하는 위험만큼이나, 타인을 위압하는 데도 이용되는 위협이다. 이것은 상호간에 경계하는 강력한 언어이다. 이 차원에서 도덕률에 권위를 부여하기 위하여 자-24쪽

연 법칙을 끌어들인다. 다시 말해서, 이런 종류의 병은 간음이 원인이고, 저런 종류의 병은 근친상간이 원인이며, 이러한 천재지변은 정치적 배신의 결과이고(24) 저러한 천재지변은 불경의 결과라는 식이다. 모든 우주가 상호 좋은 주민을 만들려는 시도에 이용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간통자의 시선이나 접촉이 이웃이나 아이들에게 병을 가져온다고 믿어지는 것처럼, 위험한 접촉에 대한 신앙에 따라 어떠한 도덕 가치가 지지되고, 어떠한 사회 규범이 결정되는 것이다.-24,25쪽

신분에 대한 주장과 이에 대하여 역으로 요구하는 것에 있어서 오염이 어떻게 이용되는가를 이해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오염의 신앙을 조사할 때, 재화를 가져온다고 생각되는 종류의 접촉들이 상징적인 의미도 지니고 있음이 판명된다. 이것은 오염의 신앙이 사회생활에 연결되는 보다 흥미로운 차원이다. 나는 어떤 종류의 오염은 사회질서에 관한 일반적 견해를 표현하는 비유로서 이용되었다고 믿는다.-25쪽

사회는 외부 압력에 노출되어 있다. 사회와 일체화되지 않고,사회의 일부가 되지 않고,사회의 규범에 따르지 않는 것은,잠재적으로 사회에 반역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사회의 경계와 주변부에 대한 그 같은 압력을 기술하는 데 있어서, 내가 사회를 실제 이상으로 체계적으로 묘사한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당면한 문제의 신앙들을 설명하는 데 그와 같이 지나치게 체계화된 표현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격리와 정화, 경계의 설정,침해에 대한 징벌 등에 관한 관념은 본래 무질서한 경험에 체계를 부여하는 것이 주요한 기능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오로지 내부와 외부,위와 아래,남성과 여성,찬성과 반대와의 차이를 확대하고 강조해야만 질서와 유사한 것이 창출되는 것이다.-26쪽

어느 문화에 살더라도,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우주의 힘과 위험에 관한 관념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자연스럽게 생각하여, 자신이 기여했을 수도 있는 작은 부분적인 수정은 무시해 버린다.같은 방식으로 우리는 자신이 모국어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생각하며,일생 동안 모국어가 겪는 변화에 대한 우리의 책임은 무시한다. 인류학자도 만약 그가 연구 대상으로 삼은 문화가 오랫동안 고정된 가치의 양식이라고 생각한다면 같은 함정에 빠지게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나는 청결과 접촉 감염에 대한 관념의 발생이 경직된 정신적 시야나 경직된 사회제도를 의미하는 것을 강력하게 부정한다. 아마 그 반대가 진실일 것이다.-27쪽

접촉 감염과 정화의 관념들에 의해 풍부하게 이루어진 문화에서, 개인은,기피의 규범과 형벌 등에 의하여 엄격하게 보호되는, 강철과도 같이 단단한 사상의 범주 안에 사로잡혀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 같은 개인이 자신의 관념을 자신의 문화의 보호된 습관과 관례에서 독자적으로 자유로운 사색으로 나아가는 것은 불가능하게 보일지 모른다.어떻게 그가 그 자신의 사고 과정을 비판하고 그 한계를 살펴볼 수 있겠는가?그러나 또한 그가 이것을 할 수 없다면 어떻게 그의 종교를 세상의 위대한 종교들과 비교할 수 있을까?-28쪽

제1장 제의의 부정 - 오염에 관한 우리들의 관념은, 위생에 대한 배려와 관습에 대한 존중, 이 둘로 혼합되어 있다. 물론 위생 규범은 우리 지식이 변화하면서 변한다. 오염을 기피하는 관습적 측면에 대해 말할 것 같으면, 오염의 규범을 무시하는 것으로 오히려 그 반대로 우정을 표시할 수 있다. -29쪽

우리에게 성스러운 물건과 장소는 오염으로부터 보호되어야 한다. 신성과 부정은 대극되는 위치에 놓여 있다. 굶주림을 포만과, 잠자는 것을 깨어 있는 것과 혼동하는 편이 차라리 나을 것이다. 그러나 원시종교의 특징은 성성과 부정을 명백하게 구분하지 않는 것이라고 여전히 생각되고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우리 자신과 우리 선조 사이에, 우리와 동시대의 원시인들 사이에 거대한 심연을 노출시키는 것이다. 이는 매우 광범위하게 주장되어 왔고 오늘날까지 은밀한 형태로 가르쳐지고 있다. -30쪽

다윈 이후 세대에 속하는 로버트슨 스미스는, 현대 문명인이 오랜 진화 과정을 표상한다는 관념을 계승하였다. 그는 우리가 아직도 행하고 믿는 것 중 어떤 것은 화석과 같아서, 일상생활의 업무에 부착된 무의미한 화석화된 부속물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용인하였다.그러나 로버트슨 스미스는 사멸된 잔존물에는 관심이 없었다. 인간 역사의 성장점에 양분을 주지 못하는 관습은, 불합리하고 원시적이라고 기술하면서 이것이 그에게는 흥미가 없다고 얘기했다. 그에게 중요한 문제는 현대에 존재하는 원시 문화들에 달라붙은 자갈과 먼지를 긁어내여 현대 사회에서 그들의 살아 있는 기능으로 진화 상태를 입증할, 생명을 전할 경로를 드러내는 것이었다.-39쪽

로버트슨 스미스의 학술 관심에 일층 밀접한 관계가 있는 또 다른 거대한 사상의 조류가 있다. 이것은 과학의 발전과 전통 기독교의 계시를 양립시킬 수 없는 사상가들에게 닥친 신앙의 위기였다.종교에 대한 어떤 새로운 공식을 발견하지 않으면 신앙과 이성의 모순은 절망적인 것 같이 보였다. 더이상 계시 종교를 받아들일 수 없고, 그렇다고 초월적 신앙 없이는 살 수도 없는 일단의 철학자들은 새 공식을 제시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기독교 교리의 계시적 요소들을 조금씩 줄이고 그 자리에 참다운 종교의 주요 핵심으로서 윤리 원칙을 강조하는 작업을 시작하였으며, 이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40쪽

그는(얼그레이효과 :뒤르켐은) 특히 스펜서로 대표되는 영국 정치철학의 결함이 그에게 제기한, 사회 융합과 같은 특정한 문제에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개인의 심리가 사회 발전을 설명한다는 공리주의 이론에 동의할 수 없었다. 뒤르케임은 사회의 본질이 옳게 이해되려면 일련의 공통 가치, 즉 한 집단적 양상에 공통된 책임인, 뭔가 다른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기를 원했다.바로 같은 시기에 또 다른 프랑스인 르 봉 역시 만연된 벤담의 전통을 수정하는 동일한 작업에 종사하고 있었다.그는 뒤르케임과 마찬가리조 집단 심리 이론을 전개했다.-48쪽

성스러움과 세속의 영역, 비종교적 행위와 종교적 행위 사이의 완전한 단절을 주장하는 뒤르케임은, 로버트슨 스미스의 자취를 따라가지 않는다. 로버트슨은 반대되는 관점을 취하여 종교 영역과 일상 생활 사이에는 분리가 없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성스러움과 세속 사이를 대조하는 것은 뒤르케임의 사회 통합 이론에서는 필요한 단계인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개인과 사회와의 대립을 표현했다. 사회적 양심은 사회의 개인 구성원을 넘어서 그 위에 뭔가 전혀 다른, 외적이며 엄청나게 강력한 그 무엇으로 투사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뒤르케임이 분리의 규율은 성스러움의 뚜렷한 표식이며, 세속과는 상극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뒤르케임은 어째서 성스러운 것이 전염성인가를 묻는 논쟁에 개입하게 된다. 이것에 대하여 뒤르케임은 종교 실체들의 허구적이고 추상적인 본질을 언급하면서 대답한다. 종교란 사회 경험에 의해 각성되는 단순한 사고들이고 외부로 투사된 집단의 사고이며 윤리의 단순한 표현일 뿐이라는 것이다.-50쪽

2장 세속의 오염 중 / 의학 물질주의란 윌리암 제임스가 종교 경험을 설명하려는 경향, 예를 들면 비전이나 꿈을 약물이나 소화 불량에 기인한 것으로 설명하려는 경향을 위해 만든 말이다.이러한 접근이 다른 해석을 배제시키지(63)만 않는다면 반대할 이유는 없다.의례를 소홀히 하면 닥칠 통증이나 고통으로 환산하여 그들의 제의 행의를 정당화하려는 경향이 있는 한,대부분의 원시인들은 넓은 의미에서의 의학적 물질주의자이다.필자는 여러 가지 제의의 규범이,이것을 파괴하는 특정의 위험을 초래하는 신앙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 무슨 이유에서인지를 밝혀 보겠다. 나 자신이 제의에 있어서 재화의 문제를 해결하기 이전에는 어느 누구도 그 같은 믿음을 액면 그대로의 가치로 받아들여서는 안될 것이다. 의학 물질주의와 대립되는 견해에 있어서는,다시 말해서 원시적 제의는 청결에 관한 우리들의 관념과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는 것,이것 역시 제의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마찬가지로 해롭다는 것을 필자는 개탄한다. 이 견해에 따른다면 우리들이 씻고,문지르고,분리시키고,소독하는 것은 제의에 있어서 정화와는 단지 피상적인 유사성만을 지닌다.-63,64쪽

우리들의 관습은 위생법에 절대적으로 기초하는 반면 이들의 그것은 상징적이다.우리들이 병균을 죽이는 데 대하여 그들은 악령을 막는다.이것은 한결같이 대조되며 매우 분명하게 들린다. 그러나 그들의 상징적 의례와 우리들의 위생법은 때때로 기분 나쁠 정도로 밀접하다.(64) 오물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체계가 존재한다. 질서가 부적절한 요소를 거부하는 의미가 있는 한,오물은 사물의 체계적 질서와 분류들의 부산물이다.이러한 오물에 대한 사고는 우리를 곧바로 상징 체계의 영역으로 이끌어 가서 오물과 청결의 상징 체계와의 관련을 한층 더 분명하게 할 것으로 예상된다.-64,69쪽

이례적인 사건에는 위험하다는 명칭이 붙는다. 의심할 여지없이 이례적인 것과 직면한 개인은 불안을 느낀다. 그러나 사회제도의(74)경우,이것이 마치 개인의 자연발생적인 반응과 완전히 같은 방식으로 발전한 것으로 취급한다면 잘못된 것이다.이례를 위험한 것으로 간주하는 사회적 신념은 개인의 해석과 공동체의 해석 사이의 불일치를 해소하는 과정에서 나왔음직 하다.(중략)만약 부정이 부적절한 물질이라면, 우리는 질서의 관념을 통하여 부정의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어떠한 체계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부정이나 오물은 포함되지 말아야 할 것으로 일컬어진다.이것을 인식하는 것이 불결에 대한 통찰의 첫걸음이다.-74,75쪽

제3장 레위기에 있어서 기피 중 일부 / 오염(defilement)은 결코 동떨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제관념의 체계적 질서와 연관될 때 생겨난다. 따라서 다른 문화에 있어서 오염의 법칙에 대한 해석을 부여할 때,이것이 단편적인 것이면 반드시 실패하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오염 관념의 의미를 이해하는 유일한 길은,그 근본 원리와 외적 경계,변경 및 내적 경계 등등이 격리의 제의(rituals of seperation)에 의해 상호 관련되는 사고의 전체 구조를 참작할 때이다.-77쪽

우리가 어째서 원시 문화는 오염-성향(pollution prone)이며 우리 것은 그렇지 않은가에 대한 의문에 직면할 수 없다면 제의상의 오염에 대한 연구에 있어서 어떠한 진전도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우리에게 있어서 오염은 미학,위생학,그리고 교양의 문제이며 이것이 사회 혼란을 초래할 수 있는 한,의미를 갖게 될 뿐이다. 오염에 대한 우리들의 제재는 사회 제재이다.다시 말해서 경멸,사회 추방,뒷소문 심지어 경찰의 조치이다.그러나 인간 사회의 또 다른 집단, 다시 말해서 거대한 집단인 원시인들에게 있어서는,오염의 영향은 훨씬 더 광범위하다.중대한 오염은 종교적 죄악이다.무엇이 이 차이의 근원인가?이 질문을 피할 수 없으므로 반드시 원시 문화와 현대 문화,이 두 문화 사이의 객관적이고 입증할 수 있는 차이를 말로 표현해야 할 것이다.-124쪽

마침내 우리는 경제적 상호 의존이 현재까지 인류가 도달한 것 중 가장 최고점에 와 있는 현대 세계에 살고 있다. 사회적 분화 작용의 필요 불가결한 부산물은,사회적 제의의 발생인데,이는 곧 공동체 생활에 있어서 갖가지 과정을 대상으로 한 자의식의 발생이다. 다시 말해서 분화 자굥은 특수한 형식의 사회적 강제를 수반한다. 그리하여 이것은 구성원을 사회에 동조하도록 하는 특수한 금전적 유인과 특별한 형태의 형벌이며,또한 구성원의 행동을 조사하기 위한 특별한 경찰과 감독과 진행계 등이며,요컨대 소규모이며 미분화된 경제적 조건 아래 결코 상상할 수 없는 사회적 통제 장치의 전체인 것이다.이것은 유기적 연대의 경험이며, 그 경험으로 인하여 우리는 원시적 사회 기구의 약점을 극복하려 한 사람들의 노력을 이해하기 어렵다.-150쪽

무질서가 형식을 파괴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무질서는 또한 형식의 소재를 제공하기도 한다. 질서는 제약을 의미한다. 실현 가능한 모든 소재로부터 일정한 선택이 이루어졌고 가능한 모든 관계로부터 일정한 조합이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무질서는 무한한 의미를 지니고 어떤 형식도 무질서 가운데 실현되지는 않지만 형식을 창출할 수 있는 잠재력은 무한하다. 이것이 우리가 질서를 창조하고자 하지만 단순히 무질서를 부정하지 않은 이유이다. 우리는 무질서가 현존하는 형식에 파괴적인 것을 인정하지만, 또한 잠재력도 지니고 있음을 인정한다.무질서는 위험과 능력 양쪽 모두를 상징한다. 제의는 무질서의 잠재적 능력을 인정한다.-153쪽

이제 오염을 정의할 때가 되었다. 모든 영적 능력이 사회 체계의 일부라는 것이 이미 확인되었다.모든 영적 능력은 사회 체제를 표현하며 사회 체계를 조직하는 제도를 만들어 낸다.이는 우주에 속하는 능력이 결국 인간 사회와 결합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운명의 갖가지 변화가 어떠한 형태의 사회 지위를 가진 사람들에 의하여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것과는 다른 종류의 위험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있는데,이것은 사람들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일으킬지 모르는 것이며,이는 정령의 일부에 속하지 않지만, 성인의 제의와 수련 등에 의하여 구입하거나 배울 수 없는 것이다. 이들이 오염의 능력들이며, 이들은 관념의 구조 그 자체에 내재하여 결합하여야 할 것을 격리하고 격리하여야 할 것을 결합하는 상징적 행위를 벌하는 것이다.그러므로 오염은 우주 구조이든 사회 구조이든 구조의 윤곽이 명확하지 않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발생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위험이다.-182쪽

어떠한 문화도,사회 형태,가치관,우주관,그리고 일체의 지식을 포함하며 그것을 통해 모든 경험을 결합하는 일련의 상관적 체계이다.어떠한 종류의 문화 주제는,육체를 교묘히 조작하는 제의에 의하여 표현된다. 이러한 매우 일반적 의미에서 원시 문화는 자기 순응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제의의 목적은,현실로부터의 소극적 도피는 아니다.그들의 제의의 목적은 유아들이 현실을 도피하여 손가락을 빨거나 자위하는 것과 비유되어서는 유익한 성과를 얻을 수 없다.제의는 사회 관계의 형식을 제정하고 사회 관계에 가시적 표현을 부여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사회를 숙지하게 한다.바꾸어 말하자면 제의는 육체로 표명되는 상징적 매체를 통하여 정치적 공동체에 작용하는 것이다.-204쪽

오염의 신앙이 잘못된 행위에 대하여 일종의 비인격적 처벌을 가져올 것이라는 사실은,일반적으로 인정되는 도덕 체계를 뒷받침하는 수단이다.-210쪽

정화 의식만이 도덕적 잘못을 처리할 수 있는 적절한 방법으로서 여겨질 때,오염과 도덕 간에 새로운 종류의 관계가 출현한다.그러면 오염과 정화를 포함한 복잡하게 얽힌 전체 관념은,사회구조의 시점에서 보면,일종의 안전망과 같은 것이 된다.(216) 우리는 오염과 도덕을 연결하는 마지막 문제점에 이끌리게 된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모든 복잡하게 얽힌 상징 체계들은 그 자체가 독자적인 문화적 생명을 가질 수 있고 사회제도의 전개를 선도할 수도 있다.-216,217쪽

델리아 콤플렉스 : 요부 공포감. 삼손을 유혹하여 그의 막대한 힘이 머리칼에서 나오는 것을 알고는 머리칼을 잘라 버린 구약성서의 여인.-240쪽

오염의 공포는 성을 포함하지 않는 모순 주위에는 모이는 것 같지 않다. 이 같은 의문에 대한 회답은 아마도 성관계를 규제하는 사회적 압력보다 강력한 폭발력을 가진 것은 없을 것이라는 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우리는 새로운 기독교 사회에는 남성도 여성도 없어야 할 것이라는,성 바울의 비상한 주장에 공감할 수 있다.-244쪽

오염은 정신의 식별 작용에 의하여 창조되어,질서 창출의 부산물이 된다. 따라서 이것은 식별 작용의 이전 상태에서 단서를 출발하여 식별 작용을 통하여,어떠한 질서를 위협하는 임무를 맡으며 마침내 그것은 그의 진정코 구별할 수 없는 본래의 특성으로 돌아간다.그러므로 무정형의 혼돈은,붕괴의 시작이 되면서(250) 이와 함께 발단과 성장과의 적절한 상징인 것이다.-249쪽

역자 유제분의 <메리 더글라스의 오염론과 문화이론>중 일부 - 이 저서는 종교적 오염의 기본 개념, 다시 말해서 순수와 불결이라는 이원론적 사고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하여 상징과 문화의 체계로 논의를 확장시킨다. 더글라스에게 있어서 종교적 오염은 인간 문화의 특성이 된다. 요컨대,어떤 특정한 종교에 있어서 오염과 순결의 개념은 총체적인 인지구조의 맥락 밖에서는 이해될 수 없다는 것이다. (중략)더글라스는 원시의 오염 관념이 사회의 상징체계를 표현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현대의 오염 관념도 단지 위생학적인 관점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모든 사회의 복잡한 상징체계와 연결된다는 것이다. 그녀에 의하면 문화적 분류와 사회 질서의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은,영역의 경계를 상징하는 존재들이다. 이들이 한 집단을 다른 집단으로부터 구별되는 방식이 되는 것이다.이는 이 저작의 중요한 논의의 하나로,종교 질서와 사회 질서 간의 상관관계를 강조한다.-286쪽

그리하여 무엇이 더럽게 또는 깨끗하게 만드는가를 이해하는 것은,사회의 도덕 질서의 가장 깊은 비밀을 이해하기 위한 기초가 된다.오염으로 간주되는 비정상적인 것들과 오물은,사회의 분류체계와 규율을 나타나기 때문이다. 질서와 실재의 감각을 이해하고 귀속시키기 위해 인간은 종교적 체계에 의하여 사회 범주를 개발하고, 이 범주들에서 빠지는 것은 무엇이든지 간에 불결한 것으로 간주한다는 것이다.-286쪽

따라서 불결이나 오물은 분리된 문제가 결코 아니며 순전히 인식론만의 문제도 아니다. 분류의 문제와 옳고 그름을 정하는 도덕적 영역은 공존한다. 도덕률은 사회의 현실과 완전히 겹치는 것으로,사물은 사실의 영역과 도덕의 영역에 공존하는 것이다.도덕 질서는 우리가 현실을 구성하는 데 스며들어 있다.다시 말해서,분류하거나 정화하거나 또는 정돈함으로써,사회현실의 구조뿐 아니라 도덕 감정도 강화되는 것이다.현실을 다른 범주에 배정하는 행위에 내재한 도덕 요소는 사물이 제자리에서 벗어날 때 특히 명백해진다.(286)그 지점에서 우리는 사물의 구조를 재조정할 의무를 느끼며 그것으로 인해 사회와 도덕 질서의 구조는 강화되는 것이다.-286,287쪽

더글라스에 의하면, 사람들이 법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 법이 사람들을 일탈자나 전복자,또한 깨끗하지 못하다고 재분류하도록 움직인다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집단은 사실상 일탈을 제조할 수 있다는 것이다.집단 사회는 개개인들이 도덕적 범주를 넘어서는 것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개인을 경계 밖에 있는 것으로 재규정하기 위해 경계를 옮기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집단 정체성을 추구할 때, 사회 내에서 적을 찾는 것이다.-288쪽

더글라스가 언어적 기호와 제의,사회의 연대를 연결시킨 것은 두 가지 명제로 요약해 볼 수 있다.첫째는 집단의 연대나 공동성의 수준이 높으면 높을수록,언어 기호는 더욱 제한될 것이라는 것,둘째는 집단의 연대나 공동성이 낮으면 낮을수록,언어 기호는 더욱 정교(복잡)할 것이라는 것이다.-291쪽

더글라스는 한 개인이 사회생활에 참여하는 다양성은 그룹과 그리드라는 사회성의 두 영역으로 적절히 설명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룹은 한 개인이 결합된 구성 단위에 통합된 정도를 의미한다.통합이 강하면 강할수록, 개인의 선택은 보다 그룹의 결정에 달려 있다.(중략)그리드는 한 개인의 삶이 외적으로 부과된 규범에 의하여 제한되는 정도를 의미한다. 규범의 범주가 넓고 구속력이 높을수록,개인이 협상할 수 있는 삶의 여지는 더욱 적어지는 것이다.-2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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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를 하면서 순간순간 긴장감이라는 놈이 찾아올 때가 있다. '어제' 학교에서 밤을 새고, '다음날' '참참'을 만났는데, 혹시 밤샐 때 신발을 신은 채 꼬박 시간을 보낸 터라,  남은 발 냄새 때문에 신경이 쓰일라고 하면, 그 날은 유난히 신발을 벗는 식당에 가게 되는 상황. 그럴 때 긴장감 말이다. 사실 그것보다 더한 긴장감. 나는 예전부터 '굽기'에 대한 일종의 트라우마 같은 것이 있었다.  (우리 아버지는 어릴적에 내 밥그릇에 딱 하고 얹어주셨다구!로 시작하는 그 ㄷㄷㄷ한 도입부!)

아마도 '외동아들 = 마마보이'의 등식이 강한 한국 사회에서, 나는  그 편견의 틀에 대체로 갇히지 않은 편에 속하는 것 같다. 또 정말 그렇게 살아온 것 같다. 그래도 최근까지 벗어나지 못하는 어떤 순간이 있었으니, 그건 식당에서 친구들 여럿을 만나거나, 교수님을 비롯한 윗사람을 만날 때 내가 집게와 가위를 들고 고기를 구워야 하는 때다. 하루는 내가 고기를 어설프게 굽는 모습을 보던 어느 교수님은 "아이그, 태어나서 이런 걸 구워본 적이 없으니..."하면서, 내가 조각낸 고기 부분을 째려 보시며 본인이 직접 집게를 집으셨다. 그런 순간이 여러 번 닥치다보니, 최대한 약속 자리에 늦게 들어가거나, 어렴풋이 눈치로 '나잇밥'순으로 내가 나이가 좀 윗축에 속한 곳에 끼어, 남의 고기 굽기 실력을 평가하는 '꾀'를 써보기도 했다.  

그런데, 정작 사랑하는 사람과 고기를 먹으러 갈 때면, 그런 꾀는 통하지 않았다. 뭔가 점수를 따고 싶은 생각도 있었던 것이 사실. 나는 '삼겹살 굽기'의 진리인 "삼겹살을 잘 굽는 사람은 한 번에 딱 뒤집어야 해'라는 말을 얼른 체득하고 싶었다. 그러나 생각만큼 잘 되지 않았다. 결국 (미안하게도) '참참'은 늘 나의 연습 대상이 되어 주었고, 그녀는 군말 없이 나의 성장을 바라봐주는 사람으로 남아 있다. 요즘은 다행히 "고기 잘 굽네"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결국 잘 굽기 위해서는 어떤 술수나 법칙이란 없다. 그냥 열심히 굽고, 여러번 구워 그것을 나름대로 자신감으로 삼으면 된다.  

하지만, 여전히 고기를 구워 먹는 시간이 오면, 손목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사실이다. (왼손잡이인)나의 집게 든 모습을 보고, "야, 너 왼손 쓰냐"하며, "그럼 그렇지"하는 판에 박힌 물음과 대답도 들어오고, 고기 굽느라 신경 못써 검은 옷 입혀버릴까 걱정되는 마늘놈 생각도 나고, 그러다보면 나는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삼겹살집에 가면 당신은 늘 굽느라 정신없는 모습에 같이 나오는 된장찌개로 배를 채우는 아버지의 그 마음은 어떨까, 생각해보게 된다.  

어머니는 더군다나 채식주의자라 연습도 제대로 못하셨을텐데. 아버지는 자신을 연습 대상으로? 

아버지와 정겹게 같이 고기 먹은지가 참 오래다. 

가끔씩 장 보러가는 길, 슈퍼 옆에 붙은 갈비집 투명창에서 서로 고기를 먹여주는 연인들의 모습이 보일 때면,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난다.  

바쁘게 손을 움직이는 남자분의 모습과 고기와 남자를 번갈아가며 흐뭇하게 쳐다보는 여자분의 모습을 볼 때면, 그 고기는 타도 맛있을 것 같다.

좋을 때다..하며 나도 모르게 영감 소리를 하고 나서, 예비군 홈페이지를 들어갔는데, 나 이제 예비군 훈련 받는 것 올해가 

마지막이라는 것을 확인. 

어머나. '씨망' ㅡ.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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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26 00: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3-04 17:49   좋아요 0 | URL
결국 그 집은 씨망 ㅡ.ㅜ
 

이틀 전, 문화연구 세미나에 참석하면서 느꼈던 것은 교수나 학생이나 똑같은 유령에 홀려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유령은 한 때 나도 홀려있던 것이기도 했다. 2008년 수업 시간과 연구실에서 나는 동기들에게 '민속지학의 강령'을 외쳤다. 그것은 한때 나의 확신에 찬 신념으로 자리잡았다. 그 신념, 그 강령은 무엇이었던가. "아, 우리는 삶과 동떨어진 연구를 하고 있어. 이론의 틀에 우리 너무 얽매여있는 것 아냐? 우리 삶에 더 신경을 쓰자. 우리 더 현장에 가까이 가자구!" 그런 외침이 한때나마 행복감을 준 건 사실이다. 그러나, 갈수록 그 강령은 내 지성의 힘을 소모시켰다. 2009년 그때 나는 슬럼프였던 것 같다. 다들 질적연구방법론 시간에 "선생님, 우리가 기자와 다른 것이 무엇이죠?"라고 하며, 연구자 스스로의 정체성에 회의감을 표출할 때 쯤이었다. 나 또한 그 회의감 표출을 거들었지만,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편치 않은 것이 남아 있었던 것 같다. '이론에 대한 갈구'. 그러한 갈구가 바로 찾아오지 않은 것은, 상식적인 문제였다. 즉, 이론은 늘 삶과 괴리되어 있다는 것. 하지만, 이것만한 오류적 신화는 없을 것이라는 게 현재 내 입장이다. 그리고 앞으로 이 입장에는 변화가 없을 것 같다. 

세미나에서 교수들은 모두 미셸 드 셰르토의 강령에 취한 듯 했고, 너무나 상식적인 분위기에서 상식적인 멘트를 즐기며, '이론의 부정'을 쉽게 내뱉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현장에 대한 눈치가 강했다. 그들은 촌스럽게 '거리(distance)'로 이론을 부정하며, 기술(description)친화적인 발언을 해댔다. 그러나 과연 이론과 기술이라는 것, 특히 민속지학자들이 늘 강조하는 그 '거리감'의 문제가 이론의 거리와 기술의 거리를 조정해야 하는 것일까. 아니다. 시각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  

이론이 삶과 멀리 있다는 신화는 깨져야 한다. 오히려 더 깨져야 할 신화는  삶의 '기술'이 더 그들의 삶을 가깝게 조망할 수 있다는 신화다. 그런 맥락에서 나는 민속지학자들이 늘 반복적으로 되뇌이는 문구들이 다시 나오자 발끈한 것이다. "이론적 개입, 해석의 틀이 연구대상자들의 생동성을 죽이는 것 같습니다"라는 지적 말이다. 그것만한 진부한 문제제기는 없다. 더 나아가 이러한 이론적 개입에 눈치를 봄으로써, 민속지학자들이 결정적으로 범하는 오류가 있다.  

그것은 '기술'과 '이론'을 통해 채워진 그 현장성에 대하여, 연구자들이 자신이 세워 본 가설과 이론의 '엇나감'을 초래한, 현장 내 우연성을 마치 연구자 스스로의 성찰성으로 지나치게 신념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럼으로써 이론은 논문의 구색을 맞추기 위한 도구적 대용물로 전락하고, 수사적 전략이 되어 버린다. 그러면서 결국 문화연구의 성찰게임을 즐기는 자들은 문화연구의 이론이 부재하다는 관행적 지적을 즐기고 있다니. 

한국 문화연구자들, 특히 민속지학을 하는 사람들은 이론을 설정하는 부분, 개입하는 부분에 있어 그 이론적 깊이에 대한 지점들을 더욱 심도있고 강력하게 추구해야 한다.  그러한 추구가 이루어지 않으면, 민속지학은 '인본주의적 소비'에 갇혀, 연구대상자에 대한 연애편지만을 쓰는 사태를 계속 범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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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논문 작업을 5등분으로 하면, 2/5정도까지 온 듯하다. 내 논문의 큰 줄기를 정하고 있는 중이다. 물론 자신을 어떤 '주의'에 함몰시키는 것은 좋은 것은 아니라고 하나, 내 스스로의 '경향'에 대해서 자리 잡기를 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문화연구의 두 패러다임 중, '문화주의'가 갖는 시선과 연구의 방식이 구조주의보다 더 인간미가 있으며, 인간 해방의 기획과 문화 민주주의에 더 가까이 가고 있다는 시선에 반대한다. 내 논문은 그래서 '진화된 구조주의'라는 입장에 서 있다. 1980년대와 1990년대를 가르는 '문화적 전환'이라는 개념이 있다. 그러나, 나는 이런 전환이 주는 긍정적으로 포장된 문화적 현상들에 염증을 느끼고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런 현상들을 긍정적으로 보는 평가에 염증을 느낀다. 오히려 1990년대는 1980년대의 '연장'이다. 그리하여, 내 역사 연구의 중점은 1980년대라고 해서 1990년대보다 '더 억압적'인 부분이 많았다는 인식, 1990년대라고 해서 1980년대보다 '더 개방적'이었다는 시선에 반대한다. 오히려 각 시대는 각각의 개방과 억압의 '중층성'이 반복적으로 작용하는 시대였으며, 그런 점에서 국가- 기업(자본)- 시민 간의 관계에서 작동하는 '진화하는 구조주의'가 우리 시대의 문화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가에 초점을 맞출 예정이다. 

고로 이러한 맥락 속에서 국가의 '통치 전술'은 진화한다. 그리고 이런 진화적 과정 안에서, 국가와 기업 그리고 시민들이 만들어내는 순응과 저항의 동학은 더욱 복잡해진다.  

나는 과연 여기서 미디어 테크놀로지와 그것을 사회적으로 전유하는 대중에 대한 일상을 어떻게 풀어나가려고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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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경희대학교 네오 르네상스관에서 한국방송학회 문화연구분과 주최로, 문화연구 내 생산자 연구에 대한 세미나가 열렸다. 나도 어제 참여를 하였는데, 생각하는 바가 몇 개 있어 잊기 전에 기록해둔다. 

발표는 두 개 였다. 

하나는, "한국 방송산업의 계급구성과 디지털 테크놀로지:6mm 디지털 카메라의 정치학" 

다른 하나는, "지식 저널리즘과 텔레비전 문화:<지식채널 e를 중심으로>"이다. 

 

1

나는 개인적으로 어제 자리가 불만이었다. 그것은 뭔가 뛰어넘지 못하는 적당히 소프트한 분위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과연 문화연구 내에서 '생산'이라는 개념은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가, 그 개념 안에서 어떤 갈등들이 있는가의 문제인데, 다들 아티클 안에서의 논의를 통해, 세세한 사례에 기반한 접근을 할 뿐, 큰 문맥을 잡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아 아쉬웠다. (좀 열이 받아서, 엄청 깐 것 같은데, 다음부터는 흥분모드를 최대한 자제해야겠다) 

한국에서 2000년대 이후, 문화연구 진영 내에서 '생산자 연구', 특히 미디어,문화연구 진영 내에서는 '방송 종사자'들 간의 권력 관계가 어떻게 형성되고 그 안의 동학(dynamics)가 발생되는가에 주요한 성과들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이오현 교수의 kbs <인물현대사> 제작진 연구, kbs <개그콘서트>스탭과 출연진 연구, 김영찬 교수의 kbs <연예가중계>제작진 연구, 좀 논의를 확장시켜, 김예란 교수의 90년대 이후 급속하게 증가한 소위 '문화백수'등을 포괄하는 문화예술가들의 삶 연구, 임영호교수의 <에로 영화 감독의 생애사>연구 등등이 있었다. 

이러한 '생산자 연구'의 성과들 아래서, 김동원 박사가 발표한 <6mm 디지털 카메라의 정치학>은 기존의 논의들보다 비판적 정치경제학적 틀이 상당히 강한 축에 속하다고 볼 수 있고, 이영주 교수가 발표한 <지식 저널리즘과 텔레비전 문화>는 자크 랑시에르의 '감성의 분할'을 통해 지식정보사회에서 미디어가 추구하는 '지식의 구성과 배치'그것에 관련된 인간의 감각 구조를 문제화하고 있다.  

하지만, 어제 발표와 토론을 들으면서 느꼈던 것은, 이 사이에 개입되어야 할 '문화연구의 전유 전략'이 논의가 되어야 했다는 점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문화연구에서 '생산'을 둘러싸고 어떻게 이야기 되어 왔는가는 이미 90년대 중반 니콜라스 간햄과 로렌스 그로스버그 간의 논쟁이 있었다. '문화연구'의 소위 '능동적 수용자 이론'에 기반한 '미국적'문화연구와 그것에서 내재된 포스트모더니즘과 소비사회에 대한 누적된 성과들이 지나치게 '탈정치적'이 아니냐는 비판론이 대두되었고, 니콜라스 간햄은 그래서 문화연구가 '하드한' 정치경제학적 패러다임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로렌스 그로스버그는 간햄에게 "간햄 자네는 문화연구가 아예 정치경제학적 패러다임이 부재한 것으로 생각하는데, 아니다. 문화연구는 예전부터 정치경제학적 패러다임을 생각하고 있었다. 다만 우리는 '문화적인 것'의 개입을 통해 어떤 급진적인 '정치경제학'을 모색해야 하지 않을까?"라며, 기원적 정치경제학으로 돌아가는 것에 대한 반론과 문화연구의 탈정치성에 대한 반론을 동시에 제시했다.  

- 레이먼드 윌리엄스의 생각으로 돌아가 

그렇다, 레이먼드 윌리엄스를 비롯하여 문화연구의 원로들이 아예 '정치경제학적 패러다임'을 버렸다고 보긴 어렵다는 게 내 생각이기도 하다. 그들은 일단 알튀세르를 비롯하여 이른바 '경제 결정주의'에 관한 사고들을 처음부터 배제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그들에게 중요한 논의의 참조점이었고, 그 참조점 안에서 경제 결정주의를 넘어서는 문화적인 것의 중요성을 인식했던 것이다. 그로스버그는 결국 간햄에게 잊혀진 역사를 다시 한 번 상식선에서 상기시켜줬던 것 뿐이나, 과연 그로스버그가 주장한 '문화연구적' 정치경제학적 패러다임은 무엇인가에 대해 속시원하게 생각을 털어놓은 사람은 없다.  

그러나, 어제 세미나에서는 그런 이야기들이 나오지 않았고, 이론적 논의들을 회피했다. 나는 이 점이 불만이었다. 

6MM 디지털 카메라의 정치학은 하드한 정치경제학적 패러다임의 원류로 돌아가, 에쓰노그래피 형식을 통해 디지털 카메라가 그것이 방송 조직 내 계급 구성과 노동의 분할과 그 인식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를 보여줬다. 그러나 이 아티클은 경제결정주의와 기술결정주의의 모호한 딜레마에 빠져있었다. 특히 내가 묻고자 했던 건 이 아티클이 기술결정주의를 저자 스스로 정작 배격한다고 하면서도, 논리적으로 기술결정론적으로 6MM카메라의 '효과와 영향'이 사회의 임팩트보다 더 있다는 것에 지나치게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저자가 강조하는 미디어 테크놀로지의 사회적 전유에 대한 측면이 이상하게 고리가 연결이 잘 안되는 느낌이 들었다.  

플로어에서는 이 논문이 너무 지나치게 이론적 해석틀에 연구참여자들의 디스크립션을 끼워맞춘 것이 아닌가라고 반론을 제기했는데, 나는 사실 그 입장에는 찬성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 한국의 문화연구자들, 특히 민속지학을 하는 사람들은 이론적 개입에 너무 눈치를 많이 보고 있다. 그리하여 결국 연구 가설은 이렇게 세웠는데, 알고보니 이게 아니더라고 하는, '우연적 효과'를 이른바 연구자의 성찰성이라는 개념으로 치환시켜 '자위'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럼 뭔가, 이론은 결국 '수사'로 전락하라는 말인가. 한국의 문화연구자들은 오히려 이론적 개입을 통한 적극적 해석을 좀 해보고 나서 그런 말을 하자. (다들 민속지학에 있어 지나치게 타인의존적이다.) 

그렇지만, 내 반론 자체가 에쓰노그래피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또 아니었는데, 아마 전달의 오류가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소유, 계급구조 이런 것에 너무 천착하여 보는 이론적 해석틀 자체가 생산자 내부의 생동성을 죽이는 게 아닌가라는 몇몇 반론에 대해, 거부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그동안 '민속지학'연구를 통해서 가장 많은 문제제기가 되었던 것은 소위 권력의 힘 자체가 간과된, '그들만의 하위문화를 인정하자'는 수평적 차원의 연구가 범람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도 이 생각에 동의를 하는 차원에서, 지금 '비판적 패러다임'이 죽은 미디어 연구 내에서 미디어문화연구가 갖는 '정치성'의 기획을 살리기 위한 외부적 요청 하에서 생산자 연구의 정치성은 국가-기업-개인의 모순을 파헤치는 작업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런 '수평적 차원'의 연구를 위한 이론적 접근의 지나친 겸양을 갖다댄다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또 다른 맥락의 '(탈정치적)능동적 생산자 연구'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능동적 수용자 이론'이 공격받아온 부분을 살짝 벗어나기 위한 교묘한 술책으로 치부될 수 있는 것이다. 고로 생산자연구 안에 들어가 있는 '권력 관계'의 배치와 구성은 보다 급진적인 사유를 동원해야 함은 물론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민속지학이라는 방식 자체에 문제를 제기한 것은 아니나, 그 안에서 이론적 개입의 눈치를 너무 많이 보는 것은 아니라는 입장을 밝힌 것이다. 

다만, 이런 '강한'정치경제학적 패러다임 자체를 비롯해, 이런 이론적 개입이 인본주의적으로 전유되고, 도덕적으로 소비되는 것, 엘리트적 온정주의로 갈수 있다는 점도 명심해야 한다. 

자크 랑시에르의 '감성의 분할' 개념을 통해 정치 미학으로서 매체와 그것을 다루는 생산자의 기획 안에서 발생하는 새로운 정치적 잠재태를 제안하는 아티클은 '소프트한 수사'아래 가장 급진적인 해방의 기획을 제시하고 있다. 다만, 자크 랑시에르의 개념을 좀 더 신중하게 썼어야 할 것 같고, 이것이 빌렘 플루서, 키틀러, 맥루언 같은 사람들의 매체 철학 기획과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의 접점 찾기도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이 글을 포함하여 두 아티클이 준 소중한 교훈은 후기 자본주의 사회가 우리 내부의 기술과 지식을 어떻게 재구성하고 재배치하는가의 문제는 계속되는 관건이라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술은 처음엔 '혁명'적 의미로 그 숭고의 대상이 되었다가, 사회적 전유를 통해 '탈기능화'의 과정을 겼고, 지식은 '비지식화'의 위치로 내려간다는 요지가 두 아티클의 맥락에서 읽힐 수 있는 지점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결국 이 사회적 전유를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바로 그게 문화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자하는 문화연구의 쟁점 그리고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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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21 00: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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