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때문에 파주에 이사온 지 일 년이 조금 지났다. 종종 동료들이나 지인들이 "파주 어때요?" 하고 물어보면 "좀 심심하긴 해요"와 "그래도 조용해서 집에서 책보기 좋더라구요"라는 준비된 멘트 가운데 하나를 고른다. 사실 파주는 참 심심한 동네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 이 심심함이 재미로 바뀌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리 많이 보이지 않지만 그래서 나의 눈에 들어오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동작과 말투가 소중하고 재미있다. 아래는 요즘 파주에서 내가 하는 일이다. 조금 즐거우니 놀이라고 바꿔 부르겠다.


1.녹색 신호등이 켜지면 몇 초 후에 건너면 될까 세어보기


부천에 살 때만 해도 녹색불로 바뀌면 바로 횡단보도를 건너가도 되었지만 파주는 달랐다. 파주에선 녹색불이 켜지면 최소한 하나, 둘, 셋, 넷, 다섯 정도는 세어야 내가 하늘나라로 가지 않겠다는 안심이 들었다. 간혹 이어폰을 깊게 끼고 고개숙여 가는 학생들이 신호등을 둔감하게 대하면 걱정하는 눈빛으로 쳐다본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차가 오든 말든 내 갈 길 간다는 녀석들을 사실 부러워하는 뜻이 더 크지만 말이다.


2. 앞사람 백팩이 열려 있으면 "이봐요" 하고 알려주기


서울로 향해야 하는 사람들이 많은지라 파주는 좀 더 일찍 아침이 부산한 듯하다. 이 풍경 속에는 숄더백도 있고 백팩도 보이지만 백팩을 오랫동안 고집하는 나에게 백팩 동지들은 핫식스 광고에 나오는 "정신차려~" 이 모드일 때가 많다. 지퍼가 안 좋아서 가방이 채 안 닫힌 것일 수도 있지만, 대부분 내가 어떤 행동을 했는지 잠시 잊었을 때 다가온 흔적들이 큰 것 같다. 처음엔 무척 오지랖이 넓은 행동이 아닌가 싶어 그냥 지나쳤는데 요즘엔 항상 "이봐요"를 외친다.  내 가방이 정작 같이 열려 있을땐 민망하지만 말이다.


3. 늦은 시각 김밥천국 가서 사람 구경하기


난 이삭토스트에서 파는 핫치킨MVP토스트를 아침으로 즐겨먹고, 야식으로 김밥천국에 가서 철판김치볶음밥을 먹는 편이다.

수많은 김밥천국이 있지만 은방울자매를 닮은 두 할머니가 철판김치볶음밥을 "언니 철김." 이렇게 줄여서 부르는 게 귀엽고

때론 대리운전하시는 분들이 고개를 숙인 채 늦은 저녁을 할 때 사래가 걸려서 콜록콜록하는 모습에 내 신세를 견주어보는 것도 습관이 되어버렸다. 내가 즐겨찾는 김밥천국에는 외국인 노동자와 외국에서 온 영어 강사들도 자주 온다. 그들이 밥이 적다고 더 달라고 할 때나 카레 돈까스에 카레 좀 듬뿍 달라고 할 때의 모습을 구경하는 게 하루 내내 지루했던 내 일상에 잔재미를 준다. 철판김치볶음밥이 약간 싱거웠으면 좋겠다는 바람만 지켜진다면 그 재미가 더해질 텐데 하면서.


4. 마을버스에서 편집자 얼굴 / 마케터 얼굴 유형 분석하기


출근길 마을버스를 타면 출판일을 하는 사람들이 꽤 많이 탄다. 대부분 여성인 버스 안에서 홀로 의자에 앉아 저 사람의 얼굴은

편집자 유형이구나 저 사람의 유형은 마케터이구나 같은 나만의 상상에 빠진다. 내가 즐겨쓰는 발산/수축형 얼굴 구도에서

나름의 분류가 끝나고 나면 할머니 부대가 자리를 꽉 채운다. 아마도 출판단지 건물에 청소를 담당하는 분들이거나 그 외 건물에서 고생하시는 분들일 것이다. 할머니들 특유의 친목질이 끝나고 내릴 시간이 되면 그 건물에 일찍 도착한 사람들에게 약간의 위로를 보내준다. 오늘도 "아 진짜 여기는 왜 이렇게 쓰레기를 많이 버려"로 시작하는 할머니들의 마음을 치유해줄 힐링 전문가의 역할을 그들이 해줘야 하기 때문이다.


이 놀이는 계속 추가될 예정이다.


# 중고등학교 시절. 문을 잠궈놓은 채 나는 본 조비 노래를 틀어놓고 그의 흉내를 내거나

멋있는 헐리우드 영화 속 예고편의 그 특유의 굵은 목소리나는 성우 흉내를 내며 "커밍순"을 느끼하게 외치는 것을 좋아했다. 오늘 세 번째 놀이에 등장하는 김밥천국에 가서 여전히 '철김'을 시키고 카레 돈까스를 시킨 외국인 강사를 내 앞에 둔 채 조금 집중해 커트 보네거트의 『신의 축복이 있기를, 닥터 키보키언』을 읽었다.


이 책에서 보네거트가 시도하는 '임사' 체험을 통한 가상 인터뷰를 낄낄거리며 읽으면서 한때

방송기자나 아나운서가 되고 싶어 밤에 문을 잠궈놓고 흉내를 냈던 기억을 떠올려봤다.


 ooo 뉴스 김 00 입니다."


어머니는 아직도 아들이 방송일을 하길 바라신다. 나중에 어머니가 또 그렇게 이야기하시면

이 이야길해줘야겠다. 




"엄마, 노홍철이 th 발음이 안 되잖아. 아들은 마이클 잭슨 노래를 많이 들어서 그런지. 말할 때 습하 소리를 자주 내서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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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2-11-09 16: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말할 때 습하 소리를 자주 내는거 상상하니까 너무 웃겨요. ㅎㅎ

2012-11-09 2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첨부터 죽 재밌게 읽다가, 마지막 '습하'에서 빵 터졌네요.ㅋㅋ

프레이야 2012-11-09 2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주놀이 재미있네요. 김밥천국 스케치도요. 문득 영화 파주가 생각나요. 그러다 엔딩에서 빵! 유쾌한 마무리, 오늘하루도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