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서점을 들렸다. 우석훈 선생의 『직선들의 대한민국』을 흉내낸 듯한 제목의 책이 보였다. 그 책이 무슨 내용일까 궁금하기보단, "~콘서트", "~연습", "~란 무엇인가"와 같은 제목의 책을 보고 약간 속이 메쓱거리는 그런 기분으로 몇 초간 책의 제목만 봤다. 꼭 '직선'을 저렇게 부정적으로 처리할 필요가 있을까. 직선이란 단어를 통해 한국 사회의 어둠을 비유한다는 진부함만큼이나 진부한 생각. 그렇지만 직선의 반대말인 '곡선'이 놓여있다보니 오히려 밉상인 쪽은 '곡선'이 되버렸다. 그 기분을 갖고 집으로 돌아와 짧게 잠을 청했다. 일어나서 책이 여기저기 쌓여 있는 꼴을 주말만 되면 복도를 채우는 총각들의 호르몬 냄새를 맡은 기분으로 쳐다봤다. 오늘도 읽은 책, 읽지 않은 책대로 조금씩 구분해 놓는다. 그러다가 '가볍게' 읽은 책은 다시 '읽지 않은' 책 쪽에 갖다 둔다.  

언젠가부터 소설을 잘 읽지 않게 되었다. 대학원을 다니면서 소설을 읽는다는 것이 자신이 '그래도 인간적인' 사회과학도임을 보여주는 '전략'같은 냄새가 나서, 소설과의 사이는 더 멀어지게 되었다. 학자라는 어른들을 만나는 자리에서 나오는 책 수다. 그 속에서 어김없이 나오는 소설에 대한 고백들도 불편했다. '대학로용'이나 '홍대용'대화의 구색에 맞추기 위해 간혹 읽은 티를 내야 할 때는 그냥 '사두기만' 한 작품을 이리저리 뒤적인다,라는 것은 거짓말이고. 차라리 그 작품의 뒷면에 있는 비평을 읽고 자리에 나갔다. 난 작품보단 차라리 비평이 좋았다. 영화를 보진 않아도 비평은 챙겨 본다는 '진부한 영화평론가 당선소감 같은 멘트는 나의 삶에도 해당되는 것이었다. 

화살표를 재조정하여 보면 소설을 읽는 지인, 친구들 중에는 내게 '읽을 만한' 인문/사회 쪽 책을 추천해달라는 경우가 많다. 사실 그냥 생각나는 대로 권해주지만 "와 이 옷 완전 네껀데.."라는 말처럼 책 재단을 해준다. 그러다가 간혹 또 진부한 질문이 나를 향해 다가온다. 이런 책 무슨 재미로 읽냐는 같은. 글쎄, 난 무슨 재미로 '이런' 책을 읽을까. 요즘 내 독서를 '독서법'으로 정리해보는 가운데, 난 인문/사회 영역의 책들을 에세이를 읽는 기분으로 매번 읽었던 것 같다. 어떤 확실한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대학원 첫 수업 때 스튜어트 홀을 소개하는 책의 발제를 맡았는데 뭔가 직선적이고 따갑고 까칠하게 채워질 줄 알았던 발제문이, 스튜어트 홀의 인물론으로 채워지자 발제 시간은 미술관에서 그림 한 점, 한 점을 쳐다보며 감성을 교환하는 분위기가 가득 했다.  

치밀한 논리의 이론서들을 에세이를 읽는 기분으로 읽다 보니 주장- 근거 - 반론 검토 - 재주장 등의 논리 회로는 개인의 짠한 삶을 보여주는 무엇으로 느껴졌다. 하버마스의 『의사소통행위이론』을 읽을 때 그런 기분이었다. 나는 이 할아버지가 열심히 기존 사회학 이론들을 검토하고 진중하게 의견을 제시할 때, 그것을 빼곡하게 외우고 또 흠은 없나 논리적인 회로를 세우기보단 짠한 감정을 갖고 한 장, 한 장을 넘겼다.  

다시 화살표를 재조정하기. 소설은 내게 '무서운 곡선'같은 느낌이다. 그렇다고 촌스럽게 '남성적'이니, '여성적'이니 이런 분류의 관점을 갖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런 식으로 '소설 읽기'를 치부하는 사회학도들, 문화연구자들이 "아..소설을 읽어야겠다.."라고 운을 띄우며 '문학적 상상력'이란 말을 쉽게 꺼낼 때 참 재수없다라는 생각을 갖는다. 너무나 당연하겠지만 내가 소설을 잘 읽지 않는 이유는 '무서운 곡선'. 작가들이 독자들을 휘감는 것이 어쩌면 과학적인 논리보다 더 치밀하다는 그런 무서움 때문인지 모르겠다. 앞으로 소설을 계속 무서워할 것 같다. 한 작품, 한 작품을 정성스럽게 열거해가며 맨날 '사회과학적'인 싸움을 하던 사람이 이런 재주가 있었단 말이야?라는 타인의 반응을 예상하게 만드는 열의도 체력도 없다. 그냥 계속 이론서들에서 '감성을' 찾고 싶다. 어색하지만 사회과학 이론서들을 읽는다는 것에서 나는 '감수성'을 찾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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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1-05-13 15: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소설에서 사회과학적인 이론을 찾을 때 희열을 느끼기에 주로 소설을 많이 읽거든요. 얼그레이효과님과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찾아내고 있는 것 같아요. 전 사회과학 이론서들이 너무 딱딱하다고 느껴져서 소설을 통해 그런 짓을 하거든요. 근데 얼그레이효과님의 글처럼 대충 쓰인 소설에서는 그런 재미를 못 느끼고 사람들은 이름은 익숙히 알고 있지만 읽지 않는 그런 책 속에서 전 그런 사회과학적 이론을 찾아 내는 것 같아요. ^^
그래도 사회과학 이론서에 대한 갈망은 포기하지 않고 있기에 앞으로 좋은 책 리뷰 많이 부탁드려요. 헤헤

얼그레이효과 2011-05-14 00:07   좋아요 0 | URL
요즘 벌이는 일이 있어 책 소화력이 떨어져 큰일입니다..그래도 또 읽고 또 읽을려구요. '살려면'^^

루쉰P 2011-05-15 07:36   좋아요 0 | URL
^^ 책 소화력은 원래 뭔 일 있을 때 광폭적인 힘을 낸다고 스스로 느끼고 있거든요. 살기 위해 읽는 것이 진정한 독서인 듯 ㅋㅋ 화이팅!!

게슴츠레 2011-05-15 0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젠가 어떤 개념을 말할 때 거기에는 내가 생각하고 사랑하고 나름 싸워온 그런 모든 과정이 들어있구나 싶더군요. 공감도장찍고 갑니다.

얼그레이효과 2011-05-15 22:56   좋아요 0 | URL
쉽게 말하면 뭔가 짠해서 이론서가 끌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