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나리자 훔치기 - 왜 예술은 우리를 눈멀게 하는가 What's Up 7
다리안 리더 지음, 박소현 옮김 / 새물결 / 2010년 9월
품절


군중들이 보려고 몰려든 것은 <모나리자>가 사라지고 남은 텅 빈 공간이었다. 즉 예술작품이 거기 있기 때문이 아니라 거꾸로 거기 없기 때문에 보러 간 것이다. -20쪽

일단 잃어버리고 나서야 비로소 어떤 것을 찾기 시작하는 게 사실이라면 그것안 우리가 시각 예술을 보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어떤 실마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거기서 이전에 잃어버린 어떤 것을 찾고 있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무엇이 이 '어떤 것'이 될 수 있을까? 정신분석은 그러한 질문들에 대해 상당히 많은 것 - 종종 <모나리자> 자체와 관련해 - 을 이야기해왔다.-26쪽

미학을 둘러싼 대중적인 논쟁에서 상투적으로 등장하는 큰 쟁점 중 하나는 모던 아트 작품을 아이들의 그림과 비교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그림은 애라도 그리겠다"라는 말을 어떤 작품이 예술작품이 아니라는 말, 즉 '임금님은 벌거숭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말로 받아들인다. 실제로 아이의 작품이 공모전에 출품되기도 하는데, 만약 화가의 나이가 밝혀진다면 미술계의 자만심은 무너지고 말 것이다. -33쪽

"이런 그림은 애라도 그리겠다"는 말을 무지의 표시로 해석하거나 이해의 표시로 해석할 때,사람들은 어떤 작품과 그(33)것이 놓여 있는 장소 사이의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간과한다. 소년 화가 따윈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약 어떤 소년의 그림이 적시적소에 놓인다면 그것을 그림이 아니라고 잽싸게 부인할 수 있을까? -33,34쪽

'문화'는 시각적 장이 이미지로부터 무언가를 배제시키면서 구성되어야 한다고 요구한다.
따라서 배제된 요소가 돌아오면 우리는 세계를 현실적인 것으로 만들어주는 좌표를 상실하게 된다. -36쪽

정신분석의 시각 이론은,(중략)우리는 보기 전에 보여지며, 우리의 시선은 소위 시선들의 동력학속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 라캉의 생각이었다. 이것이, 시각적 미적 반응을 연구하려면 관찰자가 어떤 대상을 바라볼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연구해야 한다는 통념과 얼마나 다른지 주목하라. 우리는 보는 사람과 대상이라는 2항이 아니라 적어도 3항을, 즉 보는 사람과 대상,그리고 보는 사람을 보고 있는 제3의 인물이라는 3항을 가정해야만 한다.-40쪽

(오스트리아 예술가 아니타 비텍의 작품에 대하여) / 결국 카메라들은 그것들이 기록하는 대상들은 안중에도 없다. 엄밀히 말해서 카메라들은 아무 것도 보고 있지 않다. 그와 반대로 자기 자신의 모습이 담긴 필름을 하나하나 확보해 하나로 편집하는 비텍의 작업이 카메라들에게 본다는 기능을 되돌려준다. -42쪽

엄밀히 말해 다른 많은 미술 형식들과 다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옵아트 - 이처럼 방향 감각을 혼란시키는 기하학적 양식의 작품에 주어진 이름-는 어떻게 그림이 바라보는 사람의 위치에 영향을 줄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우리는 시선을 그림에 두고 이미지를 포착하려고 애쓰지만 이미지는 각기 다른 방향으로 우리를 밀어내거나 끌어당기면서 저항한다. 초기 라캉의 흥미를 끌었던 것이 바로 이런 보는 사람과 시각적 이미지 사이의 비대칭성이었다. -54쪽

오늘날에는 카메라에 워낙 친숙해져 누군가가 사진을 한 두장 찍는다고 해서 걱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누군가가 한두 장이 아니라 수백 장을 찍겠다고 고집한다면 그가 우리를 죽이고 싶어 한다고 생각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81쪽

예술적 창조는 종종 희생을 통해 우리들 대다수의 삶을 꿰뚫고 들어오는 힘들을 진정시키는 방법이 된다. 거기서 희생은 즐거움을 주는 수단이 아니라 어떤 것을 방지하기 위한 수단이다. 이는 예술가들이 작품의 생산을 중단한다면 수많은 나쁜 일들이 일어날 수 있음을 말해 준다. 최근 일군의 예술가들에게 예술 생산은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이냐는 질문이 주어졌을 때 대부분은 평범한 대답을 내놨지만 쇼니바레 만큼은 예술 생산이 병원에 가지 않게 해주는 수단이라는 독특한 대답을 들려주었(109)다. -109,110쪽

원초적인 성적 본능 같은 것이 아예 존재조차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승화를 원초적인 성적 본능을 다른 방향으로 돌리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이것이 승화의 역설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한다. 원초적인 성적 본능이라는 개념은 어디에서 처음 나오게 되었을까? 왜 그것이 그토록 매력적인 생각일까? 그에 대한 답은 충동이라는 정신분석적(119)개념에 있다. -119,120쪽

인간이 될 때 우리는 무언가를 잃어버린다. 우리의 욕구는 양육자의 언어 체계 속에서 소외당한다. 우리는 쾌락을 얻기 위해 신체 표면을 자극하는 일을 멈추고, 도덕과 품행과 청결의 규칙들을 배우며, 법과 금지들로부터 가득 찬 기호의 세계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하여 하나의 빈 공간, 텅 빈 곳이 생겨난다. 그러면 쾌락은 국부 기관들에서, 잔여 또는 남은 부분과 같은 성감대에서 피난처를 구할 것이다.(중략) 섹스는 우리가 인간 세계에 진입하면서 잃어버린 모든 것을 대신한다.바로 여기에 사람들이 항상 모든 사람이 쉼 없이 섹스에 몰두하고 있는 사회 이전의 세계, 문명화되기 이전의 세계를 상상하는 이유가 있다. 섹스는 더 이상 접근할 수 없는 쾌락을 대신할 적절한 이미지를 제공해주는 것이다. -120쪽

라캉의 개념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초기 경험에는 재현이나 의미 부여라는 관점에서 직접 포착할 수 없는 트라우마적 측면이 있다는 생각이 하나이고, 재현과 의미 부여라는 차원에서 일어나는 그러한 실패에 의해 텅 빈 공간이 만들어진다는 생각이 다른 하나다. 전자의 측면이 우리가 그러한 공간에 다가가고 싶지 않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후자(124)의 측면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러한 공간에 끌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텅 빈 공간은 우리가 분리되어 나오게 된 것, 유아기와 아동기를 거치면서 잃어버린 것을 구체화하게 된다. 우리의 욕망은 그것 주변을 맴돌며, 그것을 포착하지 못할수록 그것이 끌어당기는 힘은 한층 더 강력해진다. -124,125쪽

라캉은 우리 욕망의 그러한 지평을 가리키기 위해 가능한 한 최소한의 용어를 선택한 듯하다. 라캉은 그것을 '물'[일종의 부재하는 원인]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승화에 대한 연구에서 핵심은 사고와 언어 차원에서 이 물이 공백, 텅 빈 공간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126) 듯한 근접성(괴물들)또는 더 없는 고적감(텅 빈 공간에 빠지는 것)의 이미지들로 그것을 재현하려고 부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사고와 언어는 어디까지나 근사치들, 즉 자체의 경계선에 가장 가깝게 보이는 것을 불러내려는 우리 상상력의 노력일 뿐이다. 물은 항상 그러한 경계선을 넘어서 있으며, 우리가 공포나 부재의 이미지를 투사할 뿐 접근 불가능한 영역이다. 그것은 실증적이고 경험적인 대상으로 재현될 수 없다. 재현의 차원에서 그것은 대상이라기보다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장소 안으로 들어갈 때 대상들은 새롭고 독특한 속성을 갖게 된다. -126,127 쪽

라캉의 주장에 따른다면 <모나리자>가 도난당한 뒤 루브르에 몰려든 군중들은 미술작품의 진정한 기능을 입증해주었다. 미술작품의 진정한 기능이란 물이라는 텅 빈 장소, 다시 말해 미술작품과 그것이 점하고 있는 장소 사이의 틈새를 환기시켜주는 것이었다. 텅 빈 공간을 보러 몰려든 군중들에 대해 한 신문에서 말한 것처럼, "어떤 사람들은(134) 미술작품 자체를 좋아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미술 작품이 차지하고 있는 장소 때문에 미술 작품을 좋아한다."-134,135쪽

요소와 장소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사유를 전개하면서 지젝은 쓰레기나 마찬가지인 또는 배설물로 된 오브제를 미술의 지위로 격상시키는 논리를 발견했다. 쓰레기나 배설물을 화랑에서 보게 되면 사람들의 첫 번째 반응은 "이것도 미술이야?"이다. 따라서 지젝이 보기에 그러한 미술은 작품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관심을 그것이 점하고 있는 장소로 이끈다. -156쪽

욕망에 우선권이 주어지면 그로 인한 고유한 문제들이 생겨날 수 있다. 화가들은 '순수 욕망'을 보여주고 특별히 선택된 인종일 수 있으나 고맙게도 그들의 실천은 그렇게 순수하지 않다. 그들의 실천은 안티고네가 거부한 모든 것에 포획되어 있다. 그래서 성공한 화가들이 자신들에게는 실용적이고 금권적인 문제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이 보도되면 불쾌감을 느끼곤 한다. 화가들도 다른 우리처럼 그러한 문제에 관심이 있다는 사실은 이 책의 관심사가 아니다. 반대로 중요한 것은 화가가 다른 사람들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이 드러났을 때 대중매체가 보여주는 놀라움이나 분노이다.-181쪽

많은 화가들이 공인이라는 정체성을 추구하는 것이 사실이라 해도, 그들의 파격적 행위와 광대 짓은 계속 각광받으려는 시도라기보다는 각광받는 것에 대한 파멸적인 반응인 경우가 더 많다. 만약 어떤 화가가 성공을 거두자마자 기행을 일삼기 시작한다면 공인인 그가 벌이는 코미디는 공인이 되어버린 상황을 대처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지속되는 것이다. 과연 누가 어떻게 다른 사람들이 부여한 정체성에 맞춰 살 수 있겠는가? 특히 그러한 정체성이 이제 꼬리표나 상(294)표가 된 예술가들의 고유한 이름이라면? 이런 종류의 딱지 붙이기가 초래하는 분리 효과는 결코 화가가 감당하기 쉬운 것이 아니다. 화가들이 그것에 대해 어떻게 말하든 말이다. -294,2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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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2-12 0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관함에 담아두었다가 시사인북에서 낸 <사라진 미소>를 보고
더 미룰 수 없다 싶어서 책을 구입했는데
짬을 못 내고 있네요ㅠㅠ 빨리 봐야겠군요.

바뀐 이미지 말인데요...
친구분이 그려주신 거라면...
얼그레이님을 그린 건가요 ㅋㅋ
미남이시네요^^

얼그레이효과 2011-02-12 18:34   좋아요 0 | URL
친구가 아이폰으로 제 얼굴 그려준거랍니다.^^;

수양 2011-02-12 1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뀐 이미지 말인데요(2)... 저 뜨거운 불길은 아마도 향학열인가 보아요^^ 다리안 리더가 쓴 <라캉>(하룻밤의 지식여행 시리즈)은 개인적으로 영 실망스러웠는데 이 책은 어떤지 궁금허네요...

얼그레이효과 2011-02-12 19:21   좋아요 0 | URL
앗 반갑습니다. 향학열의 의지이면 좋으련만, 불만 머리에 잔뜩 붙었습니다. 크크. 이 책을 읽는 느낌을 뭐라고 할까요? 지젝식 대중문화 비평서를 보는 느낌 고대로였어요. 책 내용이 그렇게 막 신선하다거나 그런 건 아니구요. 베이직하더군요. 번역은 나름 깔끔해보였는데, 또 관련 연구를 하고, 원서를 읽으신 분들은 어떻게 받아들이셨는지 궁금하긴 합니다. 나중에 리뷰를 한 번 써 볼 생각입니다.^^;

2011-02-15 21: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2-16 03: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2-16 12: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2-16 22:0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