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과의 씨름을 어느 정도 끝냈다. 꿀맛 같은 휴식이란, 표현을 나에게 쓰고 싶었지만, 오랫동안 씨름한 영향인지, 밖에 나가서 차 한 잔을 마셔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원래 마음이 안정되면 외출할 때 들고 다니는 책도, 뭔가 안정된 상태에서 골랐는데, 이번엔 들쑥날쑥이었다. 그러다가 다행히 손에 안착한 것은 목수정 선생의 [야성의 사랑학]이었다. 그리고 덤으로 오랜만에 극장에 가서 류승완 감독의 [부당거래]를 보았다.
사람이 뭔가를 늦게 경험하게 되면, 참조가 되는 '평가의 소리'들이 있다. 내가 최근에 잡은 책 한 권, 본 영화 한 편. 둘 다 어느 정도 출시일과 개봉일이 좀 지난 후 였기 때문에, 난 자연스레 '평가의 소리'를 꽤 빽빽하게 듣고 '본-경험'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사람이란 게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원래 앞에서 좋은 소리를 해놓으면, 나의 본 경험이 실망스럽더라도, 어느 정도 좋은 경험을 했다는 식으로 정당화하려는 습성이 있는 듯하다. 책을 평가하고, 영화를 평가하는 사람도 물론 예외는 아니라고 본다. 그랬을 때, "생각보다...(난 별로던데..) ..생각보다...(난 괜찮던데).."란 말을 쉽게 꺼내고, 그것에 대한 '입바른' 근거를 대기보다는, 일단 남이 해 놓은 소리에 자신의 것을 겹치기가 일쑤인 것이 우리네 삶. 그러면서도, 그러한 평평한 면을 울퉁불퉁만들고 싶은 것도 우리네 삶이리라. 결론부터 말하자면, 목수정 선생의 [야성의 사랑학]은 생각보다 야성적이지 않았고, 류승완 감독의 [부당거래]는 생각보다 부당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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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성의 사랑학]이 가진 메시지는 당연히 우리 사회가 귀기울여할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책 속의 모습이 지나치게 산만한 아이의 모습과 같다는 생각이 들어, 그 메시지를 상쇄시키지는 않았나하는 생각을 가져보게 되었다. 비록 이 책은 사랑에 대한 연구서도, 그렇다고 경수필도 아닌, 자율적인 글의 공간 안에서 도출된 저자의 '야성적인 기지'의 공간이라 칭할 수 있지만, 한국 사회의 가장 '핫'했던 혹은 트렌디한 사례들의 수집을 정리하고, 그것을 점검하는 저자의 '풍성한 열정'이, 보다 집중적이고 신선한 사유를 동반하지 못했다는 것은 아쉬웠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읽을 때 저자가 챙겨본 한국 사회에 대한 열의는 인정하면서도, 그 열의의 수집 속에 나오는 결어들이 수집 과정에서 보여준 만큼의 열의를 보여주지 못했다는 쪽으로 계속 마음이 쏠리고 있었다. 오히려 목수정 선생이 사랑과 경제의 측면에 더 중심점을 잡고, 그것에 대해 자신의 생각들을 가지런히 정리해봤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하지만, 예전에 내 블로그 이웃분들과 함께 이야기 나누었던 요즘 남자들의 섹스리스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 지점. 그것을 오늘날 경제적 삶과 연관시켜 볼 때 나타나는 한 사회상이라고 더 확실하게 그리고 뚜렷하게 '문제화'시켜볼 수 있던 것. 이 지점은 이 책의 좋은 점이었다. 많은 이들이 케이블 tv에 나오는 [러브 스위치]나 드라마들을 보고, 여전히 '원 나잇 스탠드'에 불을 키고 달려들어 여자를 꼬시고, 섹스로 점수를 매기는 남자들을 두고, "남자는 다 그렇구나.."라는 식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나는 다른 한 켠에서, '성공불감증'과 동반되게 자라나는 '자지불감증'('자지'라는 표현은 어릴 적 내가 잘 보던 뉴에이스 국어사전에 엄연히 나오는 표현이니 부끄러워할 것이 아니라 본다. 그래서 쓰겠다) 에 걸린 20대 후반 남성들의 모습도 유심히 사회적으로 분석해 볼 필요가 있음을 느낀다.
저자의 책 속 내용에도 언급이 되는 부분이지만, 자신의 경제적 기반이 안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연애'의 과정 속에 다가오는 육체 간의 접속은 마냥 즐겁진 않은 것이고, 남성 또한 이런 불행의 영역에 속해있을 수 있다는 점은 비단 남/녀 구분에서 오는 불행과 행복이 누구에게 더 많은가의 차원이 아닌, 거시적인 맥락의 통찰을 필요로 한다. 특히, 이러한 불감증이 나는 비단 중년의 비애만이 아닌 점점 나이가 내려가는 상황. 특히 20대들의 '섹스리스' 또한 우리 사회가 '혈기왕성한 세대인 데 무슨..."이라고 단정짓지 말고, 그 깊은 속내를 들추어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거친 표현이긴 하지만, 결국 목수정 선생이 '야성의 사랑'을 위해 권유하는 것은 '문화적 연인관계'를 위한 노력의 구축이다.문화라는 영역 안에서 서로의 사고를 공유하고, 거기서 나오는 언어들에 감화를 받을 수 있는 감성과 이성의 준비를 하는 것. 그것이 일상에 뿌리내릴 때, 저자는 이 시대가 '야만적 사랑'이 아닌 '야성의 사랑'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덧붙임) 남자들이 군대 안 가는 연예인 비난할 시간에, 자신을 위한 문화적 수양을 더 쌓아 여자에게 매력적으로 보이도록 하는 시간을 더 갖는게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나는 동의한다. 솔직히 말해서, 그런 '모자란 남자'도 좋아하는 것이 사랑아니에요?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나, 그건 좀 냉정하게 말해서 '희생'을 낭만적으로 포장한 것이 아닐까. 남자들의 이런 문화적 수양과 에로스에 대한 간접경험을 더 하고 싶다면, 옴니버스 영화 [오감도]의 장혁 파트를 볼 것. 평가는 각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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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有)
지난 주말에 본 [부당거래]는 이런 장르에 잘 나오는 대사식으로 말하자면, '잘 빠진'작품이었다. 그러나, [슈퍼스타 k]의 이승철처럼 평가를 내려본다면, 뭐 "감동은 주었지만, 감탄을 주지 않았다.."와 같은 기분이라고 할까. '씨네21' 기자들, 평론가들은 다 높은 점수를 주었던데, 개인적으로 너무 후한 점수를 준 게 아니었나 싶었다. 이제 이렇게 사회가 '정의롭지 않다'라는 메시지.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나타나는 정의롭다고 '가정된' 영역의 혼탁함이 사회적 술수이자 장르영화의 술수가 되면서, 그 술수가 많이 눈에 익고, 그만큼 지겹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이 장르 영화의 장점이자 한계가 아닐까 싶다. 장르는 우리에게 늘 기대치라는 것으로 소통하고자 하는 영화의 사회적 언어이지만, 그만큼 이 사회나 영화나 '진부한 장르의 틀'에서 놀고 있구나,라는 생각 또한 쉽게 들도록 하니 말이다.
영화가 중반부까지 황정민 - 류승범 - 유해진의 3각구도 안에서 팽팽한 끈을 만들었다가, 갑자기 유해진의 죽음부터 발생되는 반전과 설정들은 오히려 이런 장르 영화 자체가 지나치게 추구하는 '정당한 재미'를 위해 사회적으로 감독이 말하고 싶은 메시지의 부당함만을 키운 것으로 귀결된 것 같아 아쉬웠다.
하지만, 사회학자 로익 바캉이 [가난을 엄벌하다]에서 제시했던 '기업화된 경찰'이란 대목을 이 영화에서 어느 정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좋았다. 경찰 또한 '공권력'이란 영역 안에, 그 어떤 이윤 추구의 지배도 받지 않는 순수한 집단으로 간주되지만, 이 영화는 그러한 측면을 극복하고, 경찰 내부의 '기업화된' 모습들, 경찰의 '집행'이 아닌, '경제 행위'로서의 측면을 부각시키려 했다.
덧붙임) 영화를 보고 난 후, 주양 검사 역할을 맡은 류승범이 일부러 실제 검사들의 생활상을 공부하지 않고, 자신만의 캐릭터로 녹여내려 했다는 이야기를 같이 본 친구에게 들었다. 이것은 '현명한' 판단인 것 같다. '황정민'의 캐릭터가 영화 중반부 이후 쳐지는 게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