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영화를 보다가, 혹은 읽은 책의 인상깊은 구절을 메모하다가, 혹은 떡국을 끓여먹으려고 멸치똥을 빼다가, 혹은 화장실에서 응가가 안 나와 이상한 노래를 부르다가, 갑자기 기억하기 싫은 옛 풍경들이 떠오를 때가 있다. 중학교 2학년 때, 반장이어서 선생님의 지시를 받고 친구들의 자율학습용 노트를 거두어, 교무실로 가던 길이었다. 문을 열었다. 교무실 안에 있는 선생님 모두 교실에서 우리가 당신들을 쳐다보듯, 일렬로 교감선생님을 쳐다보고 있었다. 담임선생님은 놀래서, 나에게 눈으로 나가라고 눈치를 주고, 나는 그 상황이 민망해서 황급히 나와버렸다. 땀이 나고, 화장실에서 오줌이 오랫동안 나왔다. 오줌이 나오고 또 나와도 그치질 않았다. 약 15년전의 일인데. 아직도 기억난다. 그러면 나도 모르게 정체불명의 욕이 입에서 나온다. 혹은 화장실에서 큰 소리로 아이 18하고 웃고 넘긴다.
혹은 고등학교 2학년 때 일이 기억난다. 남녀공학이었는데, 한 여자를 좋아했었다. 그런데, 나는 어린 마음에 연애 편지에 모든 걸 담아 그 친구에게 주었고, 나는 그것만으로 내가 한 단계 성장하리라. 좋은 쪽으로, 그렇게 믿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나에게 돌아온 것은 여자들의 뒷담화였다. 그리고 나를 조롱하는 듯한, 앙케트를 벌이며, 나는 그것에 분개하여 교실 문을 세게 닫은 후, 씩씩거리며 하루 수업을 넘겨버렸다. 분식 집에서 날 위로해달라고 친구들에게 팅팅 불은 라면과 야끼만두를 대접하고, 나는 그 친구들에게 싼 위로를 받았다. 진부한 이야기들. 밤이면 다 지나갈 이야기들. 전혀 뜬금없는 현재 속에서, 그런 기억들이 잠입한다. 영화 <박쥐>를 보다가, 이 기억이 떠오르다니. 이건 어떤 무의식적 연유가 있는 걸까.
찾아오는 기억들이 있다. 차마 밝히지 못한 거짓말들, 꼭 전달해야 할 말이지만 몇 년 째 가슴에만 담아둔 단어와 문장들, 정말 싫어하는데도 더 크게 미소지으며 대해주었던 이들에게 하고싶은 일침들.
그러다가 머리를 감으려고 고개를 숙이니, 가슴이 아려온다. 그리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기분. 눈을 뜨니, 새벽에 일어나 화장이 잘 먹지 않은 여성 앵커의 정돈된 멘트, 곧 시작될 복수를 예고하는 아침 드라마, 어제 했던 야구 경기의 재탕, 밀가루 냄새가 나는 아침, 과일쥬스 하나 사놓았겠지 기대했다가 하얀 생수만 발견하곤 실망한 채 세게 닫아버린 냉장고 문, 피곤한 채 기계적으로 손이 가는 너저분한 논문 뭉치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