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2026년) 여름은 정말 더웠다. 집에서도 바깥에서도 웬만하면 에어컨 밑으로 가야만 했다. 평소 에어컨 바람을 싫어해 지하철을 탈 땐 약냉방 칸으로, 버스를 탈 땐 좌석 위쪽에 달린 조절기의 방향을 다른 쪽으로 돌렸는데, 올해는 그럴 수 없었다. 뒤늦게 온 갱년기 증상도 뜨거움을 넘어 타버릴 것 같은 몸 상태를 만드는데 일조했다.
더웠지만 건강을 위해, 지병인 허리 통증의 완화를 위해 걷기를 포기할 순 없었다. 햇볕이 강한 낮에는 엄두가 안나 주로 밤에 걸었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거나, 반납할 때도 해가 지고 어둑할 때 집을 나서야만 했다. 밤에도 더위가 없어지는 건 아니어서 도서관에 도착할 즘이면 땀이 줄줄 흘렀다. 그 상태로 바로 집에 돌아가기가 싫어 시원한 도서관에서 책을 읽었다. 편하게 땀을 식히고 싶어 열람실의 갖춰진 곳보다 소파석에 앉아 주로 한국소설을 읽었다.
문지혁 장편소설 『초급 한국어』는 제목 때문에 읽고 싶었다. ‘한국어’가 들어 간 여러 제목의 소설을 연달아 출간하고 있기에 내용이 궁금했다. 에세이처럼 읽히는 이 소설은 땀을 식히는 나의 목적을 충족시켜 주었다. 읽는 자리에서 바로 완독할 수 있을 정도로 애써 고민하지 않아도 쉽게 읽히는 소설이었다. 책을 다 읽고 별다른 느낌이 들지 않았지만, 작가가 힘들게 쓴 작품을 바로 평가하기 싫어 대출해 집으로 가져왔다.
집에서 재독했지만 역시 나에겐 좋은 느낌을 주지 못했다. 이 소설은 내가 싫어하는 소설의 요소를 많이 갖추고 있었다. 단편으로 압축시켰다면 더 좋았을 작품을 장편으로 만든 점, 다른 작가의 작품과 문장을 인용한 점, 소설의 의미를 독자가 애써 찾아야 한다는 점,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것과 작가의 처지와 성장, 회고를 억지로 연결시킨 점, 오히려 작가 스스로 소설에 의미를 너무 많이 둔 점이다. 쉽게 읽히는 소설은 무조건 환영이다. 다만 거기에 ‘어떤 것’이 있어야만 한다.
본문 중, 예술학교 문예창작과 대학원 졸업 학기에 과 전체가 참여하는 창작 워크숍에 대한 에피소드가 있다(p.148). 거기서 백일장을 했는데 지혁의 작품은 “너무 반듯한 게 탈이라”는 평을 듣는다.
[나는 몹시 부끄럽고 수치스러웠다. 상을 못 받아서라기보다는 그 ‘반듯하다’는 말 때문이었다. 그건 마치 너는 결코 진짜 예술가가 될 수 없다는 비아냥처럼 들렸다. 내 딴에는 남들이 정해 놓은 길을 말 그대로 ‘반듯하게’ 가다가 큰 일탈을 결심하고 여기까지 왔는데, 그 자리에서 그런 얘기를 들으니까 속이 뒤집어졌다. 그럼 어떡할까? 그냥 그만둘까? 죽을까? ‘순진하고 찌질하며 뻔하다’는 평가, 날 미치게 만들었던 그동안의 이야기들이 어지럽게 겹쳤다.
웃음이 잦아들자 그녀는 정색하며 말했다.
“지혁 씨가 그렇게 대답하면 안 되죠.”
소설가는 덧붙였다.
“반듯한 게 어때서요, 라고 해야지.” -p.149]
반듯한 게 어때서? 반듯한 게 나쁜 건 아닐 것이다. 소설에 반듯함만 있는 게 나쁠 뿐이다. 내가 헤밍웨이의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의 소설이 ‘반듯하다’는 것이다. 물론 찌질함도 있다. 하지만 그의 소설은 읽어갈수록, 머리 뒤쪽에서 시작해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전율이 느껴진다. 반듯함이 보편적이고도 특별함으로 변하는 순간이다.
다음은 『중급 한국어』를 읽을 것이다.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