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10년 전쯤, 성북동의 간송미술관 개방 전시에 간 적이 있다. 봄인지 가을인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데, 그 날 다섯 시간동안 줄을 서서 기다린 후에야 들어갈 수 있었다. 문화재 보호차원에서 전시기간이 딱 2주간만이라 관람객이 엄청 많이 왔었다. 그때 중학생인 딸과 언니, 조카와 함께 갔는데, 카페에 자리를 잡고 서로 번갈아가며 줄을 섰었다. 줄 선 사람을 대상으로 김밥을 팔러온 상인에게 김밥을 사서 길에서 맛있게 먹었다. 그 사이 언니와 조카는 근처에 있는 ‘길상사’에 다녀오기도 했다.
오래 기다려 들어갔지만, 사람이 워낙 많아 한 작품 앞에 오래 머물 수 없었고 그냥 물 흐르듯 지나가며 보는 정도로 그쳐야했다. 미술관 안에는 엄청난 작품들이 포진해 있었다. 혼잡함과 작품을 자세히 감상할 수 없는 아쉬움 속에서도, 여러 작품이 뿜어내는 아우라와 위압감에 압도당했다. 그날 본 작품 중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는 건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와 단원 김홍도의 새로운 발견이었다.
어떤 위대한 작품과 맞닥뜨릴 때, 머릿속에서 생성되는 단어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말보다는 눈과 가슴에 그 이미지가 바로 새겨진다. 정선의 산수화가 그랬다. 웅장하고 정제된, 조화롭고도 고요한 그림에 마음이 뭉클해지고 벅찼다. 풍속화가로만 알고 있던 김홍도는 다재다능한 예술가였다. 그날 김홍도의 글과 산수화, 풍속화를 보며 옛 화가에겐 ‘이 정도가 기본이구나!’를 생각했다.
1906년에 태어난 전형필(1906~1962)의 친가와 외가는 미곡상을 운영했다. 그의 나이 24세에 친부가 저세상으로 가며 엄청난 재산을 물려주었다. 기와집 2천 채 상당의 가치가 있는 논을 상속받아 백만장자가 되었다.(p.70). ‘간송’이라는 호는 위창 오세창 선생이 지어준 것이다. 추사 김정희가 제자 이상적에게 <세한도>를 주면서 인용한 논어 자한편의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에 들어있는 소나무 송(松)자를 넣어 준 것이다. 전형필은 오세창과 여러 지식인을 만나며 우리나라의 문화재를 한 곳에 모을 결심을 한다. 간송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박물관인 ‘보화각’을 설립한다.
2024년 9월 3일 대구간송미술관이 개관되어 10월에 남편과 대구 간송미술관에 다녀왔다. 개관기념으로 간송미술관이 소장한 국보. 보물전(여세동보(與世同寶)-세상 함께 보배 삼아)이 열렸다. 국보와 보물 40건 97점이 전시되었다. 이 모두가 간송 전형필 선생이 거금을 들여 수집한 작품들이다. ‘여세동보’는 보화각 머릿돌에 새겨진 오세창의 글귀다. 간송미술관은 대구미술관과 나란히 있었다. 예약제로 운영되어 10년 전보다는 여유 있었지만, 평일이었는데도 관람객은 많았다. 특히 신윤복의 그림에 관람객의 관심이 쏠려 있었다.
-<미인도>-신윤복
사진에 사각형의 빛이 들어가 아쉽다.
관람객이 혜원 신윤복의 그림에 몰린 이유는 당연했다. 이번 대구 간송미술관 전시에서 나에게 가장 좋았던 작품은 단연 신윤복의 <미인도>였다. 가까이에서 직접 보니 이 여인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기생인지 어느 부잣집의 첩인지는 모르지만, 제목이 왜 미인도인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이 여인은 미인이었다. 지나가던 남자들이 이 여인을 보면 바로 사랑에 빠질 정도로 단아하고 예뻤다. 특히 눈이 매력적이었다. 그림 왼쪽 위의 제화시(題畫詩)도 감동이었다.
[화가의 가슴속에 만 가지 봄기운이 일어나니
붓끝은 능히 만물의 초상화를 그려내준다 –혜원]
혹시 이 여인은 혜원이 사랑한 사람이 아닌지? 혜원 신윤복은 대대로 화원 출신의 집안에서 태어난 중인으로 그가 본 주위의 환경이 곧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그 유명한 신윤복의 <단오풍정>이다. ‘혜원전신첩’의 그림 모두 좋았다. 혜원전신첩은 한량들의 주막 풍경부터 양반의 풍류놀이와 남녀의 밀회, 여인의 생활풍속 등이 담겨 있다. 그림에 사용된 색채가 여전히 선명했고, 특히 화가가 사용한 빨강이 너무 매력적이었다.
김득신의 ‘긍재전신첩’의 풍속화도 좋았다. 처음엔 김득신이 우리가 아는 그 책 많이 읽은 조선의 선비인줄 알았다. ‘아! 이 사람이 그림도 잘 그렸구나!‘고 생각했는데, 두 사람은 동명이인으로 다른 사람이었다. 김득신은 조선 3대 풍속화가중의 한 사람으로, 조선 후기 도화서를 대표하는 화가이다.
-<훈민정음 해례본>
추사 김정희의 <대팽고회>와 <난맹첩>도 멋있어 그 앞에서 오래 머물렀다. 김정희의 글씨는 그냥 바로 ‘추사체’였다. 김정희만이 가지고 있는 개성이 보였다. 《오래된 서체인 예서를 사용하여 예스러움을 풍기며 기교를 버린 마른 필획은 천진한 자연의 상태로 들어선 듯한 느낌을 준다. 두부나 오이처럼 흔한 반찬과 가족들이 모여앉은 자리가 최고의 음식이며 최고의 모임이라는 내용은 두 번의 유배를 겪은 뒤 김정희가 터득한 삶의 진리처럼 여겨진다.》
‘난맹첩’은 김정희의 유일한 묵란화첩으로 16폭의 묵란화와 7편의 글이 실려 있다. 《묵란은 ‘추사체’라는 독특한 글씨 못지않게 김정희의 예술적 지향과 성취를 구체적으로 담고 있는 분야다. 붓을 세 번 굴려 난잎의 굵기를 조절하는 삼전법(三轉法)이나 점과 삐침으로 단순하게 꽃을 표현하는 점 등은 난맹첩에 적용된 서예적 법식이다.》
[추사에게 그림은 하나의 학문이었다. 그는 학문의 최고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연구했다. 그것은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한 최적의 루트, 즉 문경(門經)을 찾는 것이었다. 이것은 경학뿐만 아니라 시서화를 비롯한 추사 학문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가장 중요한 방법론이다.…문경을 따라가면서 제대로 공부하지 않으면 두보를 뛰어넘는 시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글씨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누군가의 아류가 아니라 새로운 세계의 창조를 꿈꾸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중요한 것은 그 자신의 ‘추사체’가 바로 그런 과정을 거쳐 완성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림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묵란화와 산수화가 그것이다.
-p.107~110, ‘세한도’, 박철상, 문학동네]
-청자 상감 운학문 매병(고려시대(13세기) 중기)
일본의 도굴꾼 야마모토에 에 의해 도굴된 ‘청자 상감 운학문 매병’은 고려청자 거간 스즈키 다케오에게 팔렸고, 간송은 당시 돈 2만원, 기와집 20채의 가격으로 두말없이 다시 사들였다. (p.16~26)
-<청자모자원숭이형연적>, 12세기 중기
새끼를 품고 있는 어미 원숭이의 모습을 상형한 연적이다. 고려 시대에 원숭이가 우리나라에 들어왔을까? 아니면 불교의 승려들이 인도 등으로 가서 보고 온 것일까? 중국에서 들어온 것 일수도 있다. 새끼를 안고 있는 원숭이의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이밖에도 김홍도의 ‘고사인물도’, 이징의 ‘산수화조도첩’ , 이정의 '삼청첩', 정선의 ‘청풍계’, ‘동국정운’, ‘청자상감포도동자문매병’, ‘분청사기상감모란문합’, ‘백자청화철채동채초충난국문병’ ‘청자상감국모란당초문모자함’, 등 위대한 작품들이 넘쳤다.
미술관을 나와 대구미술관과 간송미술관 사이에 있는 ‘핸즈커피’에서 우리는 커피를 마셨다. 미술관에 있는 카페라서 그런지 내부 구조와 인테리어가 예술적이었다. 혜원의 그림 앞에서 남자 큐레이터(학예사?)분이 관람객의 질문에 하나하나 친절히 대답해주셨다. 그러면서 이 작품들은 자주 볼 수 없으니 ‘눈에 많이 담아 가시라고’했다. ‘눈에 담다!‘ 이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날 좋은 날, 아름다운 미술 작품을 눈에 담아 갈 수 있게 해준 간송 전형필 선생이 고마웠다. 선생은 정말 대단한 분이다. 이 말 말고 더 어떤 말을 덧붙일 수 있을까?
작금의 대한민국에 나라와 후세를 위해 전형필 같은 분이 많이 나와 주면 좋겠다.
지금이야말로 그런 위인이 가장 절실히 필요한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