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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신 안부
백수린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5월
평점 :
등단 12년 만에 처음 세상에 내 놓은 백수린 작가의 장편 소설 『눈부신 안부』는 작가가 이 소설을 얼마나 고심해서 썼는지가 한 눈에 보였다. 여러 에피소드가 교차되는 다양한 이야기가 흥미로웠고, 거기에 관련된 인물 각자의 삶 모두가 의미 있었다.
그러나 너무 많은 것을 보여주려고 한 작가의 노력이 한편으로 종합 선물 세트에 들어 있는 과자를 먹는 듯한, 여러 맛의 과자를 먹어 결국 내가 먹은 것이 어떤 맛인가를 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을 것 같은 느낌도 들게 했다. 소설가가 한번은 넘어야 할 산이 장편 소설을 쓰는 것이라면 백수린은 잘 통과했다고 봐도 좋지만, 압축적인 뭔가가 없어 아쉬웠다. 아마 작가는 소설의 마지막에 배치한 반전이 결정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나에겐 그 부분이 가장 아쉽고 식상했다. 차라리 그냥 평범했으면 훨씬 좋았을 거라는 생각도 해 본다.
살다가 갑자기 눈앞에 없어진 가족이 있다면 남아있는 사람의 삶은 피폐해질 수밖에 없다. 맘대로 웃지도 못하고, 즐거움을 느끼는 것조차 죄가 될 수 있다. 주변 사람들의 수군거림과 그들을 향한 평가도 항상 의식하며 살아야 한다. 해미에게 갑자기 사라진 언니는 해미에게 늘 그늘을 주었고 사랑에 대한 감정도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해미와 우재의 사랑을 소설을 읽으면서 계속 응원했다.
1960년대 대한민국의 실업난과 외화 부족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인력수출의 일환으로(p.44) 독일에 파견된 간호사와 간호조무사에 대한, 그들의 독일에서의 삶도 이 소설에서 중요한 부분이다. 대다수 집안의 가난을 구제하기 위한 희생양으로 독일행을 택한 경우가 많았지만 그곳에서 그들의 젊음과 청춘은 빛났고, 각자의 꿈과 신념을 좇아 사는 모습이 멋졌다. 1973년 국제 석유파동의 여파로 재독 간호사들이 강제송환될 위기에 처했을 때 빨갱이라는 오해를 받아도 앞장서서 서명을 받고 독일과 공개 토론회를 열게 하는 그들의 모습도 너무 좋았다.
K.H를 찾기 위해 선자이모의 일기를 읽고 열심히 추리해나가는 해미, 레나, 한수의 우정도 재미있었다. 중간쯤 선자 이모와 K.H의 관계에 대해 예상했지만 ‘근호’라는 이름이 나왔을 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며 크게 납득되었다.
[“Alles ist noch unentschieden. Man kann werden, was man will]
‘아무것도 아직 결정되지 않았어.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 될 수 있어.’
선자 이모의 여러 권의 일기장 첫 페이지에 적혀 있는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에서 나오는 이 구절은 선자 이모의 간절함이 얼마나 큰 가를 알 수 있다. 내가 이 소설의 끝이 식상하다고 얘기했지만 이 세상을 살아가는 각자의 삶에 식상함이 있는 것은 아니다. 선자 이모와 K.H의 삶은 존중되어야 하며 그럼에도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견디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들의 삶은 불행했을 것이다.
[“정말 어찌할 바를 모르겠을 정도의 아름다움이지?”.....
“내년에도 이렇게 아름다운 걸 볼 수 있을 테니 살아야지 하는 마음이 들 정도로 아름답지?”
-p.74]
『눈부신 안부』를 읽다 이 문장이 너무 좋아 캐나다를 여행 중인, 자신이 매번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지인에게 사진 찍어 보내줬다. 더 행복하고 기쁜 마음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런데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나의 지인이 한 번쯤은 자신보다 더 아래를 바라봐줬으면 하는 바램도 있다. 어렵겠지만 자신에게 탈출해 누군가에게 먼저 안부도 물어줄 수 있는 용기를 내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 소설의 시작과 끝은 제주도의 야자수에 대한 이야기다. 본래 제주에는 야자수가 없었는데, 남국의 경관을 연출하기 위해 심어진 야자수(p.307)가 이제 제주의 일부가 되었다. 야자수 스스로도 힘을 내고, 그 야자수를 잘 키우기 위해 누군가도 노력했을 것이다. 어딘가에 필요하고 잘 살 수 있는 것은 본래 최적의 조건을 갖추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 사실을 나의 지인이 알게 되기를.
『눈부신 안부』는 삶의 아득함을 많이 느끼는 길 잃은 사람에게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소설이다. ‘이 책이 누구든 필요한 사람에게 잘 가닿아 눈부신 세상 쪽으로 한 걸음 나아갈 힘을 줄 수 있었으면(p.315)’라는 작가의 말은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