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집은 등장하는 인물과 그들의 이야기가 각기 다른데도, 읽다보면 그 단편들이 연결되어 마치 장편소설을 읽고 있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김연수 작가의 소설집인 『이토록 평범한 미래』가 그랬다. 작가가 시종일관 말하려는 것이 같았고,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이야기의 형식도 비슷해 그랬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사는 세계가 디스토피아에 가깝고 미래는 점점 더 비관적이지만 역설적이게도 김연수의 소설에는 끊임없이 ‘희망’이 있었다. 굳이 각 소설을 나누고 분리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희망, 미래, 낙관-
김연수는 우리의 삶이 결코 현재에만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황사영의 아내 정난주(난주의 바다 앞에서), 과거와 미래의 바르바라(다시, 2100년의 바르바라에게)처럼 우리는 과거와 미래에 철저히 연결되어 있다. 그 시간적 흐름에 긁히고 매몰되며 무수한 선택을 강요받는다. 작가는 거기에 희망이 우선되어야 하고 미래를 먼저 기억하라고 강조한다. “모든 글 ’쓰기‘는 글 ‘짓기’(P.84)”라고 말한 대로 작가는 작정하고 우리들에게 그것이 옳다고, 그렇게 하자고 손을 내민다.
물론 맞다. 그렇지만 계속되는 작가의 타령에 조금 피곤했다. 요즘은 왠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힘들어졌다. 도대체 희망이라는 게 있기나 한 건지....세상 사람들이 바라보는 달의 크기와 희망의 방향이 너무 달라 혼란스럽고, 세상 어디에 나를 두어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이 소설을 읽으며 지인에게 추천받은 드라마, ‘어쩌다 마주친, 그대‘를 정주행했다. 드라마를 보면서 계속 기시감이 들었는데, 그건 김연수의 소설과 이 드라마의 분위기가 많이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현재와 미래를 바꾸기 위해 자신들이 태어나기 전의 과거로 간 해준과 윤영은 그곳에서 만난 인물들의 삶을 바꾸려고 한다. 그러나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 뭔가를 바꿈으로 예상하지 못한 다른 불행한 일이 생긴다. 우여곡절 끝에 과거에서 결정적인 몇 가지를 바꾸고 다시 현재로 돌아 온 그들은 행복한 삶을 만나지만 더 완벽한 과거를 위해 다시 그곳으로 떠난다.
누군가가 과거로 돌아간다고 해서 모든 것을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과거를 바꿀 수 있는 사람은 미래를 아는 사람이어야만 한다. 드라마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할 때 김연수 작가의 소설이 계속 생각났다. 연수씨가 ‘자기 말이 맞지 않냐’고 하는 것 같았다. 희망을 위해 사람은 과거를 뒤돌아보고 미래를 먼저 정함으로 그렇게 갈 수 있지 않겠냐고....
유제프 차프스키의 『무너지지 않기 위하여』를 재독했다. 가을에 있을 도서관 북큐레이션에 동아리 회원들이 참여해야 한다고 해서 난 이 책을 선택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완독한 후에 다시 읽은 이 책의 느낌은 단지 기억만으로도 차프스키가 프루스트와 그의 글에 대한 완벽한 해석과 이해를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너지지 않기 위하여』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꼭 연결되지 않아도 된다. 이유를 모르는 죽음 앞에서, 혹한에도 불구하고 하루 종일 노역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 저녁에 지친 몸으로 다닥다닥 붙어 앉아있다. 그들은 ’우리를 잠식하는 쇠약과 불안을 극복하고 뇌에 녹이 스는 것을 막기(P.10)’위해 강의를 듣는다. 군사학, 역사학, 문학 강의를 맡은 이들은 아무런 자료도 없이 오직 기억만으로 강의를 한다.
[우리는 지적 노동을 해서라도 무너지지 않아야 했다.
영하 45도까지 떨어지는 추위 속 노역으로 완전히 녹초가 된 채 마르크스와 엥겔스, 레닌의 초상화 밑에 다닥다닥 붙어 앉아, 당시 우리의 현실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주제에 대한 강의를 열중해 듣던 동료들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당시 나는 감동에 젖어 프루스트를 생각하곤 했다.
-P. 10, 12]
춥고 좁은 곳에서 지친 몸을 이끌고 눈을 반짝이며 강의를 듣고, 오직 기억으로만 강의를 하는 어느 포로수용소에서의 사람들....그것만으로도 숭고하다. 비관이 지배하는 곳에서도 희망과 미래를 포기하지 않는 그들이 대단해 보인다. 정말 희망이 맞을까? 김연수 작가가 다시 내게 다가온다. ‘자신의 말이 맞지 않냐’고 웃으며 얘기한다.
비관과 희망 사이에 왔다 갔다 하다, 맥주를 두 캔이나 마셔버렸다.
그리고 밤 산책을 나섰다. 휘영청 밝기도 한 달이 떠 있다.
[우리가 달까지 갈 수는 없지만 갈 수 있다는 듯이 걸어갈 수는 있다. 달이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만 있다면. 마찬가지로 우리는 달까지 걸어가는 것처럼 살아갈 수 있다. 희망의 방향만 찾을 수 있다면.....
선생님, 저도 달을 향해 서 있고, 선생님도 또 저의 이웃들도 달을 향해 서 있어요. 모두가 각자의 달을 향해 서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달은 몇 개인가요? 저마다 각자의 달을 보고 있는 거라면 그건 아마도 달이 아닐 거예요.
-P.73~74, ‘진주의 결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