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속으로 - 한국 문학사에서 지워진 이름. 평생을 방랑자로 산 작가 김사량의 작품집
김사량 지음, 김석희 옮김 / 녹색광선 / 2021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36년 동안의 일제 강점기를 경험해보지 않아도, 그 시대가 비극적이었으며 지극히 암울했다는 것을 안다. 사람들이 고통을 겪었고 불행했었다는 것도, 그들은 우리들에게, 우리들은 그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도 명백하다. 시간과 시간이, 사람과 사람이 촘촘하게 연결되어 영원히 끊어질 수 없다. 보면 볼수록, 알면 알수록 일본이 아시아인들에게 저지른 만행에 치가 떨린다. 그리고 조선과 대한 제국 사람들의 민낯도 보인다. 그 모습은 지금의 우리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우리는 우리의 민낯이 보기 싫어 그때를 애써 외면하고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려 버린다.

 

알라딘 서재 친구(새파랑님, 미미님)를 통해 작가 김사량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는 1914년 출생으로, 도쿄대에 입학하여 일본어로 소설을 썼고, 제국의 펜 부대로, 항일 운동가로, 한국 전쟁 때는 북의 종군기자로 활동하다 1950년에 사망했다(역자 해설에서). 혼란의 시대를 산 사람답게 그의 이력은 파란만장하다. 일본어로 써진 소설을 번역된 문장으로 읽었지만, 그의 소설 전반에서 식민 시대를 살아내야 하는 조선인의 슬픔과 고뇌, 무기력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람은 모두다 환경의 영향을 받는데도, 누군가는 지식인의 사명으로, 항일 운동가로, 또 누군가는 일본의 앞잡이, 밀정으로, 가난하고 불행한 사람들을 등쳐먹는 사람으로 살아간다.

 

김사량의 소설집, 빛 속으로는 도쿄, 서울, 강원도 산골, 베이징을 배경으로 하는 세 개의 단편 소설과 한 개의 기행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의 표제작인 빛 속으로는 도쿄 제국 대학에 재학 중인 미나미()’선생이 일본인 아버지와 조선인 어머니를 둔 야마다 하루오라는 소년에게 다가가는 이야기이다. S협회는 도쿄제국대학 학생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일종의 빈민구제사업 단체로, 가난한 마을 사람들에게 교육, 구매조합, 의료봉사활동을 한다(p25). (미나미)은 협회에서 노동자를 대상으로 영어를 가르친다. 그곳에서 자연스럽게 남이 아닌 미나미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조선인 이름을 고수하지 않는 것에 대해 그는 고민하지만,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굳이 말할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는 변명을 한다. 사람대접을 받지도 못하고 차림새가 지저분하며 음울한 아이, 하루오는 계속 미나미선생을 조선인으로 의심하며 주위를 맴돈다. 남은 이 아이의 처지를 이해하고 따뜻하게 대하고 하루오 역시 조금씩 그에게 마음을 내보인다.

 

[“조센징 따위 우리 엄마 아니야, 아니야, 아니라구!”....

 

나는 조센징이 아니야. 나는 조센징이 아니라고! 그렇죠, 선생님?”

 

나는 그의 몸을 꼭 안았다. 내 눈가에 뜨거운 것이 울컥 솟는 것을 느꼈다. 이 군의 시퍼렇게 독이 올라 흐트러진 모습도, 이 소년의 아픈 울부짖음도 책망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p30]

 

조선인으로 일본에 살면서 그들이 겪는 정체성의 고민이 이 소설에 담겨있다.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무조건 부정하려는 사람과 조선인의 고유성을 지키려는 사람들 틈에서 남은 고뇌한다. 머리색이 다른 터키인의 아이조차 이 곳 아이들과 놀고 있는데 단지 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은 무시당하고 차별 당한다. 자꾸 무기력해지고 지쳐가지만, 남은 하루오를 포기하지 않는다.

 

풀이 깊다는 도쿄대 의예과 유학생인 박인식이 고향인 강원도 산골의 화전민을 대상으로 그들의 생활을 조사하여 도움을 주고자 그들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고향인 그곳에는 색의 장려 운동(조선 총독부가 흰 옷이 생산력을 떨어뜨린다고 생각해 백색 옷의 착용을 금지했던 정책)’이 한창이다. 거의 대다수가 문맹인 주민들에게 군수인 작은 아버지는 통역을 대동한 채 일본어로 색의 장려를 위한 연설을 한다. 군청에서는 자기 관할에서만큼은 화전민을 살게 할 수 없다며 그들을 추방한다.

 

화전민들은 점점 깊숙한 산골로 들어갈 수밖에 없고, 그들을 도우러 간 인식을 거부한다. 세상의 제일 끝까지 내몰린 그들에게 여러 사이비 종교가 들어와 무지한 산민들의 비참한 생활에 빌붙어(p180)’ 그들의 얼마 남지 않은 것마저 뜯어낸다. 일제의 '색의 장려'와 사이비 종교의 '백의 숭배'가 맞부딪히며 민초들의 삶을 더 어렵게 한다. 그런 그들을 보며 인식은 자신의 행동이 그들을 구원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이기심을 구원받고자 하는 감상이 아니었나를 생각한다.

 

[여긴 아무래도 자신이 올만한 곳이 아니다. 정말이지 어째서 이런 여행을 나선 것인지 스스로에게 묻고 싶을 정도였다. 이거야말로 자신의 감상벽을 적당히 채우기 위한 여행이 아니었을까? 비참하다, 비참하다, 스스로 외치며 돌아다녔던 것이, 그것이 대체 이 사람들에게 어떤 도움이 되었다는 말인가? -p175]

 

작가 김사량은 박인식을 통해 성경 마태오 복음 6장의 구절을 인용한다. 하늘의 새와 들의 꽃들은 뿌리지도 거두어들이지 않고도 하느님의 은총으로 먹을 것을 얻는다. 하지만 그보다 못한 조선의 백성들이 있다. 그들의 생명과 생활조차 무도한 자들의 손에 맡겨져 있다. 신약 성경에는 4개의 공관복음서가 있다. 그 중 마태오 복음은 가장 예수의 말씀과 사랑의 실천을 강조한다. 작가는 빛 속으로의 남과 풀이 깊다의 인식을 통해 헐벗고 굶주린 자를 구원하려 한다. 그 당시 동경으로 유학 갈 정도로 선택된 지식인의 역할과 의무가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그러나 이러한 작가의 생각은 안일한 유토피아이다. 소수의 의식 있는 사람이 못 배우고 가난한, 힘없는 사람들 전체를 구원하지는 못한다. 변화될 수 있는 약간의 희망은 가질 수 있지만 민중을 구원할 수 있는 힘은 지속적이고 강해야만 한다. 이 소설 속의 지식인은 나약하고 감상적이다.

 

천마1940년 전후의 서울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이미 모든 행정 구역과 상호들이 일본어로 되어있고, 조선인 역시 내선일체 한 몸의 모습이다. 오랫동안 나라 잃은 채로 산 덕분에 뻔뻔하고 유들유들하며 교활한 소설가 현룡과 같은 사람은 얼마든지 볼 수 있다. 그 당시 문인들의 모습을 대표적으로 보여주지만 어느 조직이든 탁상공론만을 일삼으며 어떻게 하면 좀 더 일본인에 빌붙어 잘 살 수 있는가만 생각한다. 신사로 향하는 행렬은 끝이 없다. 일본인이 되고 싶고 인정받기 위해 같은 조선 사람을 헐뜯고 비굴하게 행동한다. 그런 거울 같은 모습들을 보며 조선인들은 지쳐가고 무기력해진다.

 

노마만리는 작가가 아내도 자식도 버리고 항일 전선으로 떠나는 과정을 담은 탈출기이다. 북경의 북경반점에는 온갖 사람들이 모여 있다. 다들 정체를 숨기고 있지만 그곳에는 항일 운동가, 장개석의 테러단, 아편장수, 갈보장수, 공산당원, 밀정등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시대가 하도 수상해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어쩔 수없이 하나 선택해야만 목숨이나마 부지할 수 있는 장부들의 삶이 눈물겹다.

 

뮤지컬 영웅에서 사형을 앞두고 있는 안중근은 간수에게 이런 얘기를 한다. 그가 꿈꾸고 바란 세상은 누구나 평범하고 작은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세상이다. 저녁에 가족들이 둘러앉아 같이 밥을 먹을 수 있는 세상....원대하고 거창한 것이 아닌 소박한 행복을 위해 그는 목숨까지 바친다. 왜냐하면 그 소박하고 조그만 행복도 사실 아무나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때까지 전혀 몰랐던 김사량 작가의 소설은 마음을 아프게 한다. 저 깊은 곳에서, 나의 뿌리에서부터 올라오는 묵직하고 암울한 슬픔에 마음이 무겁다. 그 시대를 통해 지금, 뭔가 딱히 달라진 것도 없는 세상과 마주한다. 우리들의 이야기로 그에게서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받은 느낌이다. 김사량이 지금 어떤 평가를 받든 그의 소설은 좋고 마음을 움직였다.




댓글(20) 먼댓글(0) 좋아요(4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미 2022-02-22 23:5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페넬로페님도 별5개~♡ㅎㅎ
각 작품이 색달라서 김사량의 천재성을 실감했던 것으로 기억해요! 해설까지 너무 좋았던 책 😄 사진은 드림캐쳐 모양이네요? 직접 그리신건가요?!!

페넬로페 2022-02-23 00:49   좋아요 4 | URL
책을 읽으며 마음이 무겁고 울적했어요. 생각보다 김사량의 문장이 좋더라고요.
미미님 덕분에 좋은 책, 잘 읽었어요.
드림캐쳐 모양에 사진을 넣었어요 ㅎㅎ
그림 그리는 재주는 1도 없어요 ㅠㅠ

scott 2022-02-23 16:32   좋아요 3 | URL
그리셨다고 믿을래요 ㅎㅎㅎ

희선 2022-02-23 01:08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일제 강점기는 누구나 살기 어려웠을 것 같아요 글쓰는 사람은 더 괴로움에 빠졌을 듯합니다 그런 게 여기 담긴 소설에 잘 나타났을 듯합니다 오래 버틴 사람도 있겠지만, 쉽게 마음을 바꾼 사람도 많겠지요 전쟁에 나가라는 글을 아무렇지 않게 쓴 문인도 있었더군요 자기 나라 말도 못 쓰면 힘들겠습니다 한글이 사라지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그때 한글을 지키려고 애쓴 사람도 많군요


희선

페넬로페 2022-02-23 08:25   좋아요 4 | URL
네, 희선님 말씀처럼 소설속에 그 고민들이 고스란히 들어 있었어요.
김사량 작가가 친일파 작가로, 저항작가로 평가가 엇갈리는데
여기 있는 소설들에서만큼은 그런 평가를 뛰어넘는 보편적인 것이 있었어요~~
한국인이면서 일본어로 작품을 쓰려면 그 고통도 만만치 않았을 것 같고요^^

2022-02-23 01: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2-23 08: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새파랑 2022-02-23 07:45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페넬로페님 리뷰에 제 닉네임이 언급되다니 영광입니다~!! 아침부터 운이 따르네요 ^^ 저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아픔이 느껴졌어요. 저도 좋았는데 페넬로페님도 좋으셨다니 기쁩니다~!!

페넬로페 2022-02-23 08:31   좋아요 4 | URL
아유,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해요 ㅎㅎ
새파랑님 덕분에 좋은 책 잘 읽었어요. 서재에 리뷰 올라오지 않았다면 제가 이 책을 읽지 않았을 것 같아요. 모처럼 그 시대의 글을 읽었고 역시나 암울했습니다^^

mini74 2022-02-23 15:0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문장들이 넘 슬픈데요 ㅠㅠ 페넬로페님도 별 다섯개라니 ~ 매번 읽어야지 하고 놔둔 책들. 읽고 싶은 책들이 왜 이리 많은지 ㅠㅠ

페넬로페 2022-02-23 17:00   좋아요 3 | URL
미니님, 저도 마찬가지예요.
올라오는 책마다 캡쳐해 두는데 한가득 입니다~~
미니님께서도 읽을 책을 증가시키는 제공자이십니다^^

책읽는나무 2022-02-23 15:5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어야지~~찜해둔 책 중 하나이긴한데...언제 읽을지??^^

페넬로페 2022-02-23 17:02   좋아요 4 | URL
저도 찜해둔 책이 넘 많아요.
그러면서 책을 사고,
도서관에서 또 빌려오고가 반복입니다.
죽을때까지 이러고 살 것 같아요 ㅋㅋ

2022-02-23 16: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2-23 16: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2-23 17: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2-23 17: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서니데이 2022-02-23 18:4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일본 성으로 미나미(南)도 희소한 건 아닌 것 같은데, 남이라고 쓰면 한국 이름 같기도 하네요.
임(林)도 하야시 라고 쓰면 일본 성 같고요.
잘읽었습니다. 페넬로페님, 저녁 맛있게 드시고 좋은 하루 보내세요.^^

페넬로페 2022-02-23 22:28   좋아요 1 | URL
전 일본어 전혀 모르는데 서니데이님께서는 잘 아시네요~~
하야시가 임이군요.
외국어도 잘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서니데이 2022-02-23 22:30   좋아요 1 | URL
저도 잘 몰라요. 그런데 일본 소설 보다보면, 비슷한 한자를 쓰는 경우가 조금 있긴 한 것 같더라구요.
그래도 일본어는 요즘 좋은 교재가 많이 나와있어서 공부하기 좋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