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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암 ㅣ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14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6년 6월
평점 :
삶이 힘든 이유는 기본적인 의식주를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지만, 사람들 간의 관계에서 오는 복잡성도 무시할 수 없다. 나와 타인 사이의 연결에 가장 필요한 것은 이해와 사랑이다. 그러나 오히려 그것은 구속의 결과로 나타나기가 쉽다. 부모는 부모로서, 은혜를 베푼 자는 그것을 받는 자를 소유하고 지배하려 한다. ‘자신만만한 현재의 위치(P157)’는 누군가를 조종하고 파괴시킨다. 남이 잘되기를 바라지 않는 마음, 우유부단, 미련, 아무것도 아닌, 중요하지 않은, 무시해도 좋은 것에 자신의 자존심과 명예를 거는 인간의 나약함과 아이러니 역시 관계를 극단적으로 만드는 요소이다.
나쓰메 소세키의 마지막, 미완의 소설인 ‘명암’은 인간의 관계에서 오는 미묘함과 복잡성을 집요하게 파헤친 작품이다. 어떤 배경이나 서사의 구조보다 사람의 말(대화)을 통해 인간의 본성과 이기심을 나타낸다. 거기엔 온통 허위와 위선 뿐이다. 동정과 이해는 찾아볼 수 없다. 소세키가 여러 작품을 통해 추구해온 것들이 ‘명암’에서 절정을 이룬다. 적나라한 모습보다 숨겨지고 음흉하게 인간의 이기심과 질투가 그려지는 이 소설을 소세키는 어떤 모습으로 끝을 맺으려 했는지 궁금하다. 그러나 한편으로 미완의 이 소설이 오히려 열린 결말로 읽혀지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명암’에는 끊임없이 두 세계가 펼쳐진다.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 올케와 시누이, 여유와 가난, 과거와 현재, 과거를 공유하는 자와 거기서 소외된 자등이 서로를 견제하고 눈치를 보며 쓸데없고 가치 없는 경주를 한다. 숨겨지지 않는 경멸과 혐오를 드러낸다. 인간관계의 복잡함을 싫어해서 외로움을 선택하고, 그 무엇보다 합리적인 것을 원하는 내가 이 소설을 읽어내기는 쉽지 않았다. 번역자 ‘송태욱’의 말처럼 인물들 사이의 긴장 관계에 나 역시 숨이 막혔다.
[그렇다면 『명암』은 대체 어떤 소설일까? 단적으로 말해 ‘나’가 ‘나’이면서 동시에 ‘타자’를 그 ‘타자성’에서 받아들이고, 게다가 각자가 자신을 ‘개아(個我)’로서 확립하면서 자신을, 타자를 살려나가는 것은 가능할까? 가능하다면 어떻게 가능할까? 이 실험적인 시도야말로 『명암』의 라이트모티프(주제적 동기)다. -P590, 강상중의 해설에서]
타고난 자존심이 있고 상황판단이 빠르고 영리한 오노부는 ‘자기가 이 사람이다 싶은 사람을 사랑하고 꼭 그 사람이 자기를 사랑하게(p232)’ 만들고 싶어 하는 여자이다. 그녀에게는 다른 여자와는 달리 과감한 면이 있다. 남편이 병원에 입원하는 날에도 가부키를 보러 간다. 남편이 은혜를 입고 있는 오시카와 부인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이런 오노부에게 사람들은 우호적이지 않다. 남편인 ‘쓰다’에게조차 사랑받는다는 확신이 없다.
허세가 심하고 서른 살이 되었는데도 부모의 도움을 받는 쓰다는 우유부단하다. 과거에 사랑했던 여자를 잊지 못하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을 경멸하고, 세상일에 관심이 없다. 아내인 오노부를 대하는 태도도 미적지근하다. 아내보다는 오시카와 부인의 말을 더 잘 듣는다. 쓰다의 이런 태도가 ‘세상 사람들’이라는 타인의 부류에게 오노부를 더 위태롭게 한다. 그는 아직 완전한 성인이 되지 못한 듯 하다. 쓰다와 오노부는 ‘사랑의 전쟁(p454)’이라는 가시밭길의 한가운데에서 서로를 정복하는 데서만 만족을 느낄 뿐이다.
‘명암’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은 ‘오시카와 부인’이다. 관계의 어둠을 만드는 핵심 인물이며 타인을 지배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악의적인 여자이다. 특히 마음에 들지 않는 오노부의 개성과 내면까지 개조시키려 한다.
[내가 오노부 씨를 반드시 좀 더 부인다운 부인으로 만들어놓을 테니까요. -p427
단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을 근거로 적을 따끔하게 혼내주는 방법을 강구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다행히 스스로 그것을 인정해야 할 정도로 세상 사람들로부터도, 자신으로부터도 반성을 강요받지 않는 처지에 있는 그녀는 마음 편한 사람이었다. 오노부의 교육. 이 말이 넉살 좋게 그녀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p428]
가난하고 직업이 없이 팔리지도 않은 잡지를 편집하는 일을 하고 있는 쓰다의 친구 ‘고바야시’는 ‘죄와 벌’의 라스꼴리니코프가 연상되는 인물이다. 일본에서 더 이상의 희망을 찾지 못한 그는 조선으로 가고자 한다. 쓰다에게 헌 외투를 얻고 조선으로 갈 여비를 갈취하다시피 하는 고바야시는 소세키의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사회적인 모순의 부산물이다. 처음부터 가진 것이 없었던 그는 ‘만족하는 사람을 불만족스럽게 바라보며(p291)’, 특히 쓰다를 못마땅해 한다. 패배주의에 젖어 있는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쓰다와 오노부의 관계에 비겁하게 개입하며 그들 사이를 불안하게 만든다. 스스로 자유로운 영혼을 가졌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는 굴곡진 인생에서 진부하게만 살고 또 다른 허세를 부리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 소세키는 항상 동정심을 불러일으킨다. 급격하게 변화하는 사회에서 어쩔 수 없이 피폐해지고 모순된 행동을 하는 정신쇠약증에 걸린 사람은 존재할 수밖에 없다.
옛 연인, ‘기요코’를 만나러 쓰다는 온천장으로 떠나고 거기에서 그가 그녀를 만나는데서 이 소설은 끝난다. 해설에서 강상중은 이 소설을 ‘이니시에이션 소설’로 분류시킨다. 유년이나 사춘기에서 성인 사회로 진입하기 위해 주인공이 고통스런 의식을 치러야 한다는 것인데, 쓰다에게 그 뒤에 어떤 고통이 따를지는 아무도 모른다. ‘나’를 확립하면서도 ‘타자’의 ‘타자성’을 존중하는 좋은 관계로 끝을 맺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쓰다’의 행동을 통해 난 희망보다는 더 암울한 결말이 예상된다. 인간은 쉽게 변하지 않으며 설사 변한다고 해도 그 변화로 기인된 모든 우연과 결말이 사람들에게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밝고 어둠은 어쩌면 종이 한 장 차이일 정도로 그 경계가 얇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종이 한 장의 차이가 모든 것을 결정하고 운명을 나누고, 죽음으로까지 치닫게 한다.
나쓰메 소세키의 미완의 소설, ‘명암’은 이때까지 읽었던 소세키의 소설 중 가장 읽기가 어려웠다. 분량이 많은 탓도 있지만 어떤 특별한 사건보다는 계속되는 사람들의 대화에서 인간의 심리와 거기에서 오는 변화를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 소설이 나의 개인적인 취향과도 조금 맞지 않았는데 소세키의 소설을 계속 읽어왔기 때문에 그나마 작가가 얘기하고자 하는 것을 알 수 있었고 더 깊이 들어갈 수 있었던 것 같다. 작가가 죽기 전에 집요하고도 깊게 생각한 ‘인간성’에 대해 지금의 나 역시 계속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살아가는 동안 내내 그것에 부딪힐 것도 확실하다. 다만 ‘명암‘이라는 뚜렷한 경계에 함몰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니까 푸앵카레의 주장에 따르면 보통 사람들이 우연, 우연, 하는 이른바 우연한 사건이라는 건 원인이 너무 복잡해서 도무지 짐작이 안 될 때 쓰는 말이네. -p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