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책들 창립 35주년 기념 세계문학 중단편 NOON 세트 - 전10권 열린책들 창립 35주년 기념 세계문학 중단편 세트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외 지음, 황현산 외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8월
평점 :
품절


《국외자이지만, '삶'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사랑》


예술, 또는 창작을 하는 사람은 처음부터 남들과 다른 기질을 타고 났는지도 모른다. 독일의 한 소도시에 사는 유력인사들의 자제들이 모여, 사교 예법과 춤을 배우는 곳에서도 <토니오 크뢰거>는 그들과 어울리지 못한다. 무엇 때문에 자신이 이 곳에 와 있어야 하는지 납득할 수 없고, 자기 방 창가에 앉아 슈토름의 이멘 호를 읽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한다. 그가 사랑하는 것은 분수와 오래된 호두나무, 자신의 바이올린과 저 멀리 있는 발트해이다. 그리고 시를 짓는다. 그것이 남들에게는 좋지 않은 인상을 심어주는 것이지만 그러한 사실이 그가 시를 짓는 일을 그만두도록 하지는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토니오가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그는 항상 남들을 의식하고 그가 좋아하는 것들을 남들도 좋아해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시를 쓴다는 것이 얼토당토않은 짓이고 사실 온당치 못한 짓임을 그 자신도 느끼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이를 생뚱맞은 짓거리로 여기는 모든 사람들의 견해를 어느 정도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사실이 그가 시를 짓는 일을 그만두도록 하지는 못했다. -p13]

 

<토니오 크뢰거>는 언제나 경쾌하고 당당한 친구인 한스 한젠을 좋아하고, 열여섯 살이 되었을 땐 명랑한 금발의 잉에보르크 홀름을 짝사랑하게 된다. 그들은 토니오와 다르게 누구나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것들과 큰 소리로 말할 수 있는 것들만 생각한다. 모든 세상사와 충돌하는 토니오와 다르게 그들은 세상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들은 당연히 실러의 돈 카를로스를 읽지 않고, ‘왕이 우는 이유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다. 그런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고 토니오는 질투심이 섞인 동경을 한다.

 

너처럼 되면 좋으련만이라고 생각하지만 <토니오 크뢰거>는 결코 그렇게 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는 그들과 쓰는 언어가 달랐고 그들이 행복을 얻는 것들은 그에게 낯설고 서먹서먹한 것이 된다.

 

[슈토름의 그지없이 아름다운 시 한 편이 불현듯 떠올랐다. <난 자고 싶은데 넌 춤을 추겠다는구나.> 사랑하고 있는데 춤을 춰야 한다는 이 굴욕적인 모순이 그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p32]

 

[유희적이고 놀랄 만하지만 우울한 창조력이 자신의 내부에서 꿈틀거리는 것을 느끼면서, 동시에 자신이 동경하는 명랑한 사람들은 그 창조력이 닿지 않는 저 반대편에서 마주 보고 서 있음을 안다는 것이 말할 수 없이 가슴 아팠다. 하지만 비록 그가 홀로 국외자의 신세가 되어 아무런 희망도 없이, 닫힌 블라인드 앞에 서서 비탄에 잠긴 채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척하고 있지만 그래도 그는 행복했다. 그의 심장이 살아 숨 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p36]

 

열린책들 창립 35주년 기념 세계문학 중단편 세트 ‘NOON'시리즈 10권 중에서 제일 첫 번째로 읽은 토마스 만의 토니오 크뢰거20대 때 읽었던 마의 산이 어렴풋이 연상된다. 지금 마의 산의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지만 워낙 그 책이 어려워 어렴풋이 읽고 이해했다는 느낌이 아직까지 남아있다. 그런데 그 어렴풋이남아있는 느낌의 여운이 워낙 강렬해 완전히 이해를 하지 못했어도 그 작품과 토마스 만을 좋아하게 되었다. 어쩌면 그 느낌이 그리워 이 시리즈 중에서 망설임 없이 작가 토마스 만을 제일 먼저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토니오 크뢰거>마의 산만큼 어렴풋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쉽지는 않다. 작가 토마스 만이 나타내는 특유의 공감되고 울림 있는 내용도 많지만, 역시나 토마스 만답게 거창하고 거침없는 몇 페이지에 걸친 장황한 표현들은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그 어렴풋한 것이 또 이 작가의 매력이다. 어렴풋하지만 이해되고 뭔가 알 수 있는 그 내용들이 내가 토마스 만을 읽는 이유이기도 하다. <토니오 크뢰거>라는 이 중편 소설에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이 다 들어있어 내가 리뷰를 써야 할 필요도 못 느낄 정도다. 사전정보 없이 읽은 이 소설에서 <토니오 크뢰거>는 작가 토마스 만자신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다. 작가로서, 창작자로서 가야하는 자신의 길에서 무수히 고뇌하고 뒤돌아보는 한 인간의 모습이 이 작품에 고스란히 들어있다. 국외자처럼 살아야하지만 심장이 살아 숨 쉬는 듯한 삶의 한가운데로 뛰어들고도 싶은 두 세계에 걸친 예술가의 고뇌와 회한도 있다. 두 세계는 공존이 쉽지 않아 같이 갈 수 없지만 그곳을 동경하고 질투하기도 하는 것은 당연하다. 다만 그 두 세계 중 <토니오 크뢰거>만이 고뇌하고 그들을 들여다보지만, ‘한스잉에보르크로 대표되는 다른 세계는 <토니오 크뢰거>와 함께 할 생각이 전혀 없다. 그들은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영원히 타자로서만 치부되는 그런 것들은 예술가의 삶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에 있어 슬프다.

 

[그는 이 지상에서 가장 숭고하다고 생각되는 힘, 그것에 봉사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느낀 그 힘에 완전히 몸 바쳤다. 그에게 고귀함과 명예를 약속해 주는 힘, 아무런 의식도 말도 없는 삶에 미소를 머금고 군림하는 정신과 언어의 힘에 완전히 몸 바쳤다. 젊은 날의 열정을 품고 그는 그 힘에 몸을 바쳤던 것이다. 그리고 그 힘은 자신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선물함으로써 그에게 보답했고, 그 대가로 앗아 가곤 하는 모든 것을 그에게서 가차 없이 앗아갔다. -41]

 

이마에 찍힌 그의 표지에 의해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토니오 크뢰거>는 작가가 된다. 그에게는 인식이 주는 고통과 교만함과 더불어 외로움이 찾아온다. 언어와 형식이 주는 쾌감에도 매료되지만, 길을 잘못 든 것은 아닌가를 고민한다. 화가 리자베타 이바노브나를 찾아가 한 말들에 예술과 예술가에 대한 고민이 고스란히 담겨있다.(이 부분이 무척 어려운데 그것을 잘 알아듣는 이바노브나가 대단하다) 그리고 삶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당신은 <길을 잘못 든 시민>입니다. 토니오 크뢰거_<길을 잃고 헤매는 시민>이지요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그러다가 그는 단호한 태도로 일어서더니 모자와 지팡이를 집어 들었다. 고맙습니다, 리자베타 이바노브나. 이젠 안심하고 집에 갈 수 있겠습니다. 난 처리되었으니까요.-P68]

 

토니오는 예술을 대변하고 크뢰거는 시민을 대변하는 이름을 가진 길을 잃고 헤매는 시민, ‘토니오 크뢰거는 여행을 떠난다. 자신이 떠나온 고향에 들렀다가 북쪽으로 계속 가서 발트해의 어느 호텔에 기거한다. 그곳에서 우연히 그가 짝사랑했던 한스잉에보르크를 다시 만난다. 종족과 유형이 비슷한 그들은 서로 친하게 보였고 역시 변함이 없다. 밝은 유형의 그들은 순수하고 맑으며 명랑한 이미지와 아울러 오만하고 소박하며 건드릴 수 없을 정도로 냉정한 이미지를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토니오는 그들을 잊은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한다. 여전히 토니오는 그들을 동경하고 질투한다. 그 어떤 곳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하는 토니오 크뢰거가 안쓰럽기도 하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토니오의 그런 모습이 어리석어 보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인간인지라 내가 제어할 수 없는 욕망과 소속감이 필요할 수도 있다. 예술가의 삶을 살아내는 많은 예술가들이 얼마나 많이 저런 고민에 빠질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한스 한젠, 넌 너의 정원 문에서 나에게 약속했던 대로 돈 카를로스를 읽었느냐? 읽지 말거라! 네가 그걸 읽기를 더는 요구하지 않아. 외로워서 우는 왕이 너하고 무슨 상관이 있겠니? 넌 우울한 시 따위를 보느라 밝은 눈을 흐리게 하거나 어리석은 꿈에 잠겨서는 안돼...너처럼 되고 싶구나! -p115]

 

난 자고 싶은데, 넌 춤을 추겠다는 사람과는 서로 말을 잘 알아들을 수 없다. 언어가 다르고 생각이 다르니 서로 공감할 수 없다. 그래도 한 번쯤은, 아니 영원히 내가 가지 못하는 그 길을 흠모하고 들여다보고 싶은 것은 우리 모두 삶의 여러 모습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외로운 예술가의 길을 걸으며 참가하지도 않은 축제에 도취될 수 있다. 환심을 사려고 할 수 있으며 질투를 할 수도 있는 것이다. <토니오 크뢰거>에게 그것은 향수이자 회한인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예술의 길로 잘못 들어선 시민, 훌륭한 가정교육에 대한 향수를 지닌 보헤미안,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는 예술가라 표현한다.

 

오래 전 찍은 빛바랜 사진 중에 내가 좋아하는 사진이 있다. 중학교 때였는데 친구들과 어디를 가기위해 기차역 대합실에서 기차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찍은 것이다. 다른 친구들은 모여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난 혼자 긴 의자 끄트머리에서 책을 읽고 있다. 그 모습들이 다 들어간 사진인데 누가 그런 구도로 찍은 건지는 모르겠다. 그때 내가 들고 읽은 책의 제목은 기억이 나지 않는데 그 책이 삼중당 문고에서 나온 문고판 책이었다는 것은 기억난다. 열린책들 35주년 기념 ‘NOON'세트는 문고판 판형으로 가볍고 얇게 되어있는데 오래간만에 읽은 문고판 형식이라 옛날 생각이 났다. 나 역시 그때부터 내 이마에 표지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난 지금도 책을 읽고 있고, 그때 그 친구들이 지금 가장 좋아하는 것은 무엇일지 궁금하다. 이마에 표지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은 <토니오 크뢰거>를 잘 이해할 수 있고 그들 역시 토니오와 똑같은 고민을 하고 살 것이다.

 

크기가 작게 구성되었는데도 126페이지밖에 되지 않는 이 소설의 리뷰를 쓰면서 난 많은 인용을 했고 내가 쓴 글들 역시 토마스 만의 단어를 그대로 사용한 것이 많다. 이 소설 통째로 옮기고 싶을 정도로 이 소설을 읽으며 많은 공감을 했고, 삶과 예술가, 나에 대해 뒤돌아볼 수 있었다. 예술가는 나에게 외로워서 우는 왕을 들여다볼 수 있는 힘을 준다.

 

[난 두 세계 사이에 서 있어서, 어느 세계에도 안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살아가는 게 좀 힘이 듭니다. -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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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8-12 15:49   좋아요 7 | 댓글달기 | URL
1등~!! 페넬로페님도 읽기 시작이시군요. 주 1권씩 같이 읽어요 ^^ 전 오늘 두번째로 <도둑맞은 편지> 읽고 있어요. 전 이책 세번째로 읽어야 겠어요 😆

페넬로페 2021-08-12 16:03   좋아요 7 | URL
저는 일단 noon시리즈 샀는데 미드나잇은 살지 아직 고민중이예요 ㅎㅎ
아무튼 열심히 읽어보겠습니다^^

coolcat329 2021-08-12 16:13   좋아요 7 | 댓글달기 | URL
토마스 만 한 권도 안 읽어봤는데 알듯 모를듯 어렴풋한 느낌이 좋으시다니 저도 그런 모호한 작품이 읽고나서 더 생각이 나고 좋더라구요. 토니오 크뢰거 요 이쁜 책으로 읽고싶지만...민음사로 갖고 있으니 대리만족하고 갑니다.
근데 저는 예술가가 주인공인 소설은 참 부담스럽더라구요 ㅋ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제가 워낙 고지식해서요😟

페넬로페 2021-08-12 16:47   좋아요 7 | URL
네, 그 어렴풋하고 모호한 느낌의 매력에 빠져 자꾸 문학작품을 읽는것 같아요~~이 작품은 예술가가 주인공이지만 절대 부담스럽지 않아요. 저는 토니오 크뢰거에 공감하고 이해했어요. 가슴 절절한 뭉클함도 있구요^^

Falstaff 2021-08-12 16:26   좋아요 7 | 댓글달기 | URL
전 토마스 만을 무척 좋아해서 번역해서 나온 그이 소설 작품은, 단편 몇 개 빼고는 다 읽었습니다.
전 만의 경우에 단편 읽기가 제일 힘들었어요. 그래서 지금 전에 읽은 단편집을 다시 읽어볼까, 아님 다른 책으로 읽을까 생각 중입니다.
힘들었던 단편 가운데 당연히 <토니오 크뢰거>도 들어 있습니다. 새삼 관심이 팍팍 생기네요.

페넬로페 2021-08-12 16:51   좋아요 8 | URL
역시 폴스타프님,
그 어렵다는 토마스 만의 작품을 많이 읽으셨네요.
제가 다른 단편은 읽지 않았는데 이 책은 그나마 이해가 좀 쉬웠어요^^저도 다른 단편 읽어 보겠습니다**

mini74 2021-08-12 16:58   좋아요 7 | 댓글달기 | URL
앗 눈 시리즈!!! 아직도 고민중인데 ㅎㅎ페넬로페님 글 읽으니 막 사고 싶어집니다 ㅎㅎ. 통째로옮기고 싶으시다니 !! 전 안똔 체호프. 안똔. ㅠㅠ 영 적응이 안돼요 ㅎㅎ 읽고 있습니다 *^^*

페넬로페 2021-08-12 17:09   좋아요 6 | URL
미니님은 눈 시리즈를 살까말까를 고민하고 계시는군요. ㅋㅋ
안똔??? 쳬홉도 워낙에 좋아서리~~
왜이리 읽고 싶은 책이 많은지 저의 아바타가 필요한 순간입니다^^

새파랑 2021-08-12 17:11   좋아요 6 | URL
무주건 사시고 알라디너 티비에 소개하실거라 확신 합니다 😆

scott 2021-08-12 17:21   좋아요 7 | 댓글달기 | URL
페넬로페님은 눈 세트 [토마스만]의 토니오 크뢰거로 시작 하셨네요

전 , 토마스만 단편 좋아 하는데 중편 토니오 크뢰거는 여러번 재독
토마스만의 자전적인 모습이 많이 투영 되어 있습니다
[부덴브로크가의 사람들]에 자신의 집안의 흥망 성쇠가 상세하게 나온 대작!
이 작품 읽고 나면 [토니오 크뢰거] 쑥쑥 책장 넘어 감요!

단편 중에 [어릿 광대] 좋아 합니다

페넬로페 2021-08-12 19:29   좋아요 5 | URL
네, 저도 읽으며 토마스 만의 자전적인 내용이 많은것 같더라고요. 부덴브로크가의 사람들 꼭 읽어봐야겠어요~~

미미 2021-08-12 17:59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페넬로페님도 NOON시리즈~♡♡
얇은 책인데 이 페이퍼를 보니 토마스만 명성대로 묵직한 내용을 담고 있나봐요! 발췌문들이 인상적이예요. 보헤미안은 늘 어감이 좋네요ㅎㅎ😙

페넬로페 2021-08-12 19:31   좋아요 5 | URL
발췌문을 더 쓰고 싶었는데 많이 줄였어요~~토니오 크뢰거에 나온 다른 책도 읽고 싶었어요. 우리 모두는 약간씩 보헤미안의 기질이 있는듯 해요^^

레삭매냐 2021-08-15 00:4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더부럽~

이거 아무래도 땡겨야 하나요...

페넬로페 2021-08-15 10:00   좋아요 2 | URL
참 애매합니다.
매력적이기는 하지만 구성이 우리가 거의 읽은 책이 많이 들어 있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