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홋타 요시에 지음, 박현덕 옮김 / 글항아리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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홋타 요시에시간은 일본인 작가가 난징 대학살을 소재로 1955년에 출간한 소설이다. 그 정도로만 알고 이 소설을 읽기 시작했는데 글의 첫부분에 등장한 화자가 중국인이어서 의아했다. 난 당연히 이 소설의 주인공이 일본인일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다시 책표지로 넘어가 작가를 확인했다. 역시나 작가는 일본인이었다. 전쟁이 끝난지 얼마되지도 않은 시기에 피해자의 입장에서 일본인 작가가 글을 썼다는 것에 많은 용기가 필요했던 것은 아니었을까를 생각했다. 이 책의 끝부분에 실린 헨미 요의 해설에서 극동국제군사재판이 열리던 1940년대 후반의 시대 상황이 별다른 제약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문학을 집필할 수 있었던 시기라고 한다. 오히려 1990년대에 들어서 일본은 난징 대학살은 없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국내외 반일 세력의 음모라고까지 주장하는 세력의 움직임이 시작되었다는 설명을 듣고 어느정도 납득이 되었다. 시대의 상황이 자유로웠다고 해서 작가의 의도를 폄하할 생각은 없다. 작가의 국적을 떠나 피해자의 입장에서 서술한 이 소설은 뛰어나다.

 

시간(時間)19371130일에서 1938103일까지, 중국 지식인인 천앙디의 일기 형식으로 서술된 소설이다. 일본군이 중화민국의 수도, 난징으로 점점 전진해올 때 정부와 유력 인사들은 한커우로 떠나고 나, 천앙디는 비밀리에 난징의 동향을 알려야하는 임무를 맡고 난징에 남는다. 임신 9개월의 만삭인 아내, 5살된 아들 잉우, 일본군을 피해 난징으로 들어온 사촌 여동생 양양과 함께 였다. 1937,1213, 마침내 일본군이 난징으로 입성하고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살인, 방화, 강간, 약탈이 시작된다.

 

일기 형식으로 서술된 이 소설은 관념적이고 철학적이다. 사실적이고 연속적인 사건과 더불어 사람의 심리와 배경, 생각을 잘 묘사했다. ‘일기라는 연대기적인 형식에 바탕을 두면서도 시간의 흐름보다 순간적인 느낌과 감상에 더 몰입하게 만든다. 그런 까닭에 이 소설은 빨리 읽히지 않았다. 한 페이지마다 멈춰 화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 상황과 마음을 함께 느껴야했다.

 

일본군이 입성하기 전의 상황을 나타낸 이 소설의 초반부에서 일기는 6개월을 훌쩍 넘어 다시 서술된다. 가족들의 생사를 모른 채 천앙디는 기리노라는 일본군 중위의 집사로-노예로-일하며, 집의 지하실에 설치된 무전기로 비밀 요원의 임무를 수행한다. 이 시점에서 지난 6개월을 회상하며, 동시에 시간은 앞으로 나아간다. 예상했던대로 아내와 아들의 죽음을 확인하고, 사촌 동생 양양은 매독에 걸렸으며 아편중독자가 되었고, 그 사이에 임신을 했으며, 아이를 지웠다는 사실도 안다. 6개월 동안에 그런 엄청난 일들이 일어난다. 일본의 폭력은 직접적으로 사람을 능욕하며, 그것도 모자라 아편이나 헤로인까지 유통시켜 피폐하게 만든다.

 

양양은 뼈만 남은 손가락으로 종이를 접어 코를 풀었다. 얇은 종이에는 피가 묻어 나왔다....

정말로 고독하고 완전히 말라비틀어진 병든 나무, 그렇게 보였다. 불쌍하다고도 말하지 못했다. 눈은 가뭄에 드러난 호수 바닥처럼 말라 있었다.-p223

 

어수선한 시국엔 꼭 부정적인 예언자가 나타난다. 그들은 우리가 나약하고 허둥지둥 우왕좌왕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다..“고 말한다.

 

이 논리를 따르자면 일본군의 폭력을 야기한 것은 우리 자신이라는 것이 되고 만다.

이런 숙명론자가 민중 속에서 끊이지 않고 생겨나는 이상, 전쟁은 사라지지 않으며 그 어떤 평화도 결코 평화가 아니다.-p109

 

부정적인 예언자는 이 시대에도 존재해 일본군 위안부를 만든 것은 우리들의 잘못이라고 말한다.

 

자살시도까지 한 양양은 결국 자신이 처음 강간당한 진링 대학의 병원으로 가 치료받기로 한다. 괜찮아지기 위해 도망가지 않고 그 현장으로 돌아가 뿌리를 움직이겠다고 한다. 작가는 전쟁에서 가장 고통받는 여자, 양양을 통해 치유와 희망을 얘기한다. 현장을 떠나지 않고 그곳에서 다시 일어서는 것이 투쟁의 첫걸음인 것이다. 하지만 그 시대의 중국은 일본이 떠난 그 다음도 녹록지 않다. 정부냐 공산당이냐의 선택이 그들에게 남아있다.

 

홋타 요시에의 시간은 길지 않은 소설이다. 그러나 이 소설을 읽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거의 모든 페이지의 문장에 밑줄을 그었으며, 작가가 묘사한 순간의 배경과 에피소드에 감탄했다. 여러 가지 생각들의 확장(가령 중국인들은? 무수한 그들의 역사는 죽음으로 점철되었고, 또 그들은 우리에게 어떠했나? 그렇게 생각한다면 태평 천국의 난을 운운한 그 일본인 중위와 내가 뭐가 다를까?)을 애써 막으며 그냥 소설로서 이 책을 읽었다. 중일 전쟁중의 난징에만 집중해 그곳에서의 사람들의 죽음과 치유, 희망을 생각했다. 우리는 누구나 내가 겪는 시간의 한복판에 있다. 그 시간은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다. 인간이 인간다워야 그 시간은 존재한다.

 

수백 명의 사람이 죽었다.-하지만 얼마나 무의미한 말인가. 숫자는 관념을 지워버리는 건지도 모른다. 이 사실을 색안경을 끼고 봐서는 안 된다. 그리고 사람이 이만큼이나 죽어야만 하는 수단을 사용해야 하는 목적이 불가피하게 존재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죽은 사람은, 그리고 앞으로 계속해서 죽을 사람은, 수만 명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이 죽는 것이다.-p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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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3-30 17:1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홋타 요시 작가가 학살에 대현장에 목소리를 담은 책이네요 난징 그리고 미얀마,, 끊임없이 반복되는 끔찍한 죽음 앞에 침묵하고 있는 대다수의 우리들 [ 우리는 누구나 내가 겪는 시간의 한복판에 있다. 그 시간은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다. 인간이 인간다워야 그 시간은 존재한다.]페넬로페님에 이 구절에 깊이 공감합니다. 코로나로 전세계가 이동의 제한이 되는 시기에 어디서 누가 누구에게 무고한 죽음을 맞게 되는지,,, 페넬로페님 리뷰 읽으며 죽음-치유- 희망, 생명의 소중함에 대해 생각하게 되네요 ,

페넬로페 2021-03-30 20:35   좋아요 3 | URL
이 책 읽으며 난징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전쟁과 죽음을 생각했어요. 어디 난징만 그렇게 아수라장이었을까요?
지금 현재도 여전히 학살이 자행되니 세상은 그다지도 변하지 않는건지 허탈해져요^^

청아 2021-03-30 18:0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꼭 읽어볼래요♡ 제가 모르는 부분이 참 많다는 걸 또 느낍니다. 빨리 읽기
힘든 책들이 많이 있더라구요.
표지도 인상적이예요! 머리 맞죠?😳

페넬로페 2021-03-30 20:37   좋아요 3 | URL
문장이 일기형식이라 굉장히 관념적이예요.그것을 하나하나 생각해야하기에 읽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것 같아요. 표지의 그림이 굉장히 여러 모양으로 보이는데 머리 맞는것 같아요^^

새파랑 2021-03-30 19:2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모든 페이지에 밑줄이라니~리뷰 보니 읽어 보고 싶어집니다~!

페넬로페 2021-03-30 20:38   좋아요 3 | URL
저는 좋게 읽었는데 새파랑님도 이 책에 대해 좋은 감동 받으시면 좋겠어요^^

감은빛 2021-03-30 23: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 일본인이 중국인 화자의 입장에서 쓴 소설이라니!
정말 독특학 작품이네요.
덕분에 또 새로운 작가와 책을 알아가네요. 고맙습니다!

페넬로페 2021-03-31 00:34   좋아요 1 | URL
네, 저도 이 부분이 흥미로웠어요~~
생각해보니 감은빛님께서 한번씩 올려주시는 일기같은 글과 홋타 요시에의 문장이 무척이나 닮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레삭매냐 2021-03-31 15:4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책의 뒷부분 갈수록 감당이 되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었는데... 역시나
였습니다.

홋타 요시에 작가의 책들이 좀 더 많이
소개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페넬로페 2021-03-31 17:54   좋아요 1 | URL
네, 이 책 읽으며 너무 많은 생각을 했어요^^
저 역시 이 작가의 다른책을 읽고 싶어서 도서관에 가보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