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관찰하는 대상이 

자연 그 자체가 아니라

과학 방법론에 노출된 자연 일부라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 하이젠베르크







‘진리는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 ‘모르겠다’로 답한다면, 그 믿음은 회의주의(상대주의)다. 인간 한계로 진리가 있는지 알 수 없다는 주장이다. 회의주의는 진리가 존재한다고 믿는 절대주의(객관주의)와는 다르다. 대표적인 회의주의자는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인 프로타고라스다. 그는 호모 멘수라(homo mensura), 즉 “인간이 만물의 척도다”라고 회의주의를 명쾌하게 정의했다. 프로타고라스는 유일무이한 진리를 발견할 수 없으며, 특정 조건에서 특정인에게 주어지는 진리만 있다고 말했다. 상반되는 주장이라도 다른 사람이나 다른 시기에  모두 똑같이 진실일 수 있다는 말이다. 모든 진리와 선, 아름다움은 상대적이고 주관적이다. 따라서 모든 것의 기준이나 척도는 인간 자신일 수밖에 없다. 프로타고라스는 아테네 민회에서 자신 회의론을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나는 신들이 존재하는지 안하는지, 그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른다. 많은 것이 우리 인식을 혼란하게 한다. 대상은 모호하고 우리 인생은 너무 짧다.” 아테네 민회는 신에 대한 프로타고라스의 부정적 견해에 당황해하며, 그를 추방하고 모든 아테네인에게 그의 책을 불태워 버릴 것을 명령했다. 

















과학 이외에 다른 분야라면 시대나 문화 변천에 따라 서로 다른 ‘진리’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도 있다. 과학은 회의주의(상대주의)를 거부한다. 과학은 객관적이다. 공정하고 객관적인 탐구방법과 증거에 기초한다. 과학자들은 가설을 세우고, 실험을 통해 검증한다. 같은 결과가 반복해서 나오고 방법상 어떠한 오류도 없다면 가설은 이론으로 살아남는다. 이 규칙은 엄격하게 적용된다. 과학에서 진리를 찾는 데는 특별한 변명거리가 필요하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어떤 진리를 말하는 것일까? 같은 진리일지라도 시대마다 서로 달라 보였다. 고전역학에서 뉴턴은 중력을 ‘서로 당김[만유인력]’이라고 보았고, 근대역학에서 아인슈타인은 같은 중력을 ‘공간의 휘어짐’이라고 보았다. 과학자는 외부 대상을 연구하지만, 그들이 다루는 것은 자연 그 자체가 아니라 인간 지식과 경험이 반영된 것이다. 자연의 법칙은 가설, 곧 과학자의 직관과 마음에서 태어났기에 우리는 과학자들 마음을 살펴보는 것으로 자연법칙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다. 닐스 보어는 “물리학은 객관적인 자연에 대한 연구가 아니라 인간의 경험을 정리하고 조사하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눈이 아니라 뇌가 물체를 인식한다. 실재를 알기 위해서는 뇌 안에 이미 세계를 바라보는 형식이 존재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눈을 통해 뇌에 들어온 신호는 어떤 의미도 갖지 못한다. 뇌는 무질서한 신호를 분류하고 재배열하고, 때론 무시하며 의미를 부여한다. 실재는 뇌가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렇기에 간혹 착시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비트겐슈타인 말을 인용하면, “당신은 보고자 하는 것만 보는 것”이다. 그렇지만, 과학자들은 자연에 수학 형태의 법칙이 실제 존재하기에 자연에 객관적인 법칙이 존재한다고 한다고 항변한다. 하지만, 예를 들어, 케플러의 제1 법칙도 행성 궤도가 타원에 가까울 뿐이다. 실제 자연을 아주 비슷하게 기술한 자연에 대한 근사일 뿐이다. 과학자들은 실제 복잡한 자연 세계의 여러 조건 중 특정 조건에만 초점을 맞춘 뒤 과학법칙을 얻어낸다. 그래서 많은 과학법칙이 수학적 형태를 띠고 있다. 자연이 ‘수학이라는 언어’로 쓰였기 때문이 아니다. 자연에서 수학적 관계를 만족하는 특정 변수에만 초점을 맞춰서 변수 사이에 연관 관계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과학은 법칙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낸다.


















그러므로 외부 세계를 관찰하는 행위는 항상 기존 지식과 경험에 바탕을 둔 ‘이론 부가’(theory-burdened)적이다. 결국 우리 지식이나 경험은 그 지식이나 경험이 예상되는 기대 범위 내에서 관찰자에게 인식된다. 그렇지 않은 것은 의미가 없거나 부적절한 것으로 거부된다. 이것은 구조, 즉 게슈탈트가 모든 인식과 모든 행동을 조절한다는 의미다. 구조는 모든 인간 활동이 일어나는 모든 상황을 이해할 수 있도록 견해를 제시한다. 구조는 가치를 결정하고 의미를 부여하며, 도덕과 윤리, 목표, 목적을 결정한다. 따라서 ‘과학이 찾는 진리란 어떤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진리는 현대 구조에 의해 정의된다’라는 답변밖에는 구할 수 없다.



구조는 연구 과정과 절차를 제공한다. 연구자들은 증거를 수집하지만, 증거가 받아들여지거나 거부되는 판단은 이미 구조에 의해 부여된 가치들에 좌우된다. 사건과 관계없다고 여겨지는 어떤 데이터도 무시될 것이다. 따라서 과학은 무엇보다도 대상이 어떻게 보이느냐에 관한 학문이 아니다. 과학은 객관적인 것도 아니며 편견이 없는 것도 아니다. 자연에 관한 모든 관찰은 이론이 스며들기 때문이다. 자연은 너무나 복잡하고 너무 임의적이기에, 자연에 관한 특정 사실을 예상하는 체계적인 도구를 이용해서만이 접근할 수 있다. 이러한 패턴이 없다면, 심지어 ‘내가 무엇을 보고 있는가’라는 단순한 물음에조차 답할 수가 없다. 미지 세계는 구조 용어로 먼저 정의되어야만 조사가 가능하다. 이것이 함축하는 바는 과학은 오직 동시대 용어로 정의되고 동시대 도구로 연구된 동시대 문제에만 답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진리는 인위적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모든 시기의 모든 견해는 마찬가지로 타당성을 지니고 있다. 절대적인 실재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론이 변하면 우주도 변한다. 진리는 상대적이다.



물리학자이자 심리학자, 생리학자, 역사학자인 에른스트 마흐는 어떠한 형태의 절대주의도 반대했다. 마흐는 모든 이론과 법칙이 현상을 묘사하고 예측하기 위해 고안된 계산상 장치에 불과하다는 조지 버클리의 자연에 대한 도구주의 견해에 동의했다. 이론과 법칙은 실재를 설명하지 않는다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시간과 공간이라고 부르는 것은 오직 특정한 현상을 통해서만 인식된다. 공간과 시간 결정은 다른 현상을 결정하는 방식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우리는 별 위치를 시간 견지에서 정의 내리는데, 그것은 실제로는 지구 위치에서 본 견지에서다. 공간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다른 현상과 견주어진 결정에 비추어 눈앞에서 벌어지는 것으로부터 위치를 인식한다. 질량과 속도, 그에 따르는 힘은 모두 상대적인 것이다. 절대적으로 결정될 수 있는 것은 없다. 우리가 마주치는 것, 우리가 받는 힘 모두 상대적이다. 프톨레마이오스 또는 코페르니쿠스 설은 하나의 해석일 뿐이다. 하지만 둘 다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아인슈타인은 마흐에게 크게 영향을 받고 상대성원리를 내놓았다. 더욱이 하이젠베르크가 주장했듯이 실재를 묘사할 때는 언제나 근원적이고도 불확실성이 동반되고 관찰자는 관찰하는 동안 그 현상을 변하게 할 수밖에 없다.
















철학자 이사야 벌린은 진리는 영원하지 않다며 이렇게 말한다. “글로 썼건 또박또박 명시했건 냉철한 시간에 분별 있는 인간들이 얻어낸 것일지라도 뭐든지 얄팍한 피상적인 것에 불과하며, 똑같이 건전하고 똑같이 이성적인 다른 사람들이 논박하고 나서면 붕괴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그런 것은 실재에 참된 기반을 두고 있지 않다.” 근대 회의주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도 우리가 궁극적 실재의 본질을 결코 알 수 없다고 주장한다. 궁극적 실재의 본질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하는 철학자은 무뢰한이거나 바보이다. 바보라 함은, 우리 인간이 감각 지각으로만 지식을 얻을 수 있으므로 궁극 실재에 대한 지식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그들이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를 무뢰한이라고 하는 것은 지식 한계를 알면서 자신의 그릇된 철학을 따르라고 우리를 설득하기 때문이다. 

















흄에 따르면 우리 정신은 오히려 일종의 신체 반응으로, 이성은 개인 생존과 욕망 실현을 위해 필요한 분석적, 계산적 기능에 지나지 않는다. 도덕률 또한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사회적 묵계 산물로 인간 본성 산물이지 객관적 진리와 무관하다. 근대 유럽철학은 흄에 이르러 비로소 진리라는 몽상과 이 몽상에 바탕을 둔 독단의 잠에서 깨어났다. 불완전한 이성 한계를 자각해야 한다. 이성 한계는 경험이다. 이성이 경험을 넘어서면 필요 없는 사변에 빠질 수밖에 없고, 이것은 독단과 몽상으로 이어진다는 것이 흄 철학의 기초다. 그렇다고 해서 경험을 논거로 삼을 수도 없다. 경험을 논거로 삼을 수 없는 이유는 경험 자체가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흄은 독단에 대해 비판하고, 상식에 맹종하는 일상 태도에 경종을 울린다. 그리고 우리가 언제나 상식을 비판하고 교정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한다. 흄에 따르면, 나의 손가락 생채기보다 전 세계 파멸을 선택하는 것이 이성과 상충되지 않으며, 낯선 사람 편의를 위해 나 자신 파산을 선택하더라도 이성과 상충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이성은 정념의 노예일 뿐이다. 즉 이성은 진리를 인식하고 자신 자유의지에 따라 정념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정념의 실현을 위해 이후에 이성을 사용한다.  
















그런데 진리가 있는지 알 수 없다고 말하는 회의주의자들은 자신 주장을 증명할 수 없다는 문제가 있다. 진리가 있는지 ‘모르겠다’라는 주장 자체가 그러한 진리를 인정한 것이기에 자기모순에 빠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회의주의자들은 종종 웃음거리가 된다. “세계는 환상에 불과하다”(아낙사르코스)라고 말한다면 그렇게 말하는 아낙사르코스 자신도 환상에 불과하고, 따라서 그의 말을 신뢰할 수 없다. 누군가가 “모든 진리 주장은 알고 보면 권력욕의 표출에 불과하다”라고 말한다면, 이 명제 자체도 그 사람의 권력욕의 표출에 불과하게 된다. 사실 이러한 ‘자기지시’(self-reference)의 모순은 흔한 일이다. 이해하고자 하는 대상이 이해의 주체인 ‘내’ 자신이 될 때는 필연적으로 풀기 어려운 자기지시 문제를 만들어낸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거짓말쟁이의 역설’이나 러셀의 ‘이발사의 역설’이다. ‘지금 내가 하는 말은 거짓이다’ 혹은 ‘이 이발사는 스스로 머리를 깍지 않는 마을 모든 사람만의 머리를 깍아준다’라는 참과 거짓을 말할 수 없는 역설이 존재한다. 참도 거짓도 될 수 없는 이유는 이 같은 문제가 자기 스스로를 가리키는 자기지시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역설을 언급하는 이유는 우리가 진리라고 인식하는 것을 잘못 이해하고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거짓말쟁이 역설은 참과 거짓을 구별하는 것이 생각보다 까다로울 수도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발사의 역설은 사물을 속성에 따라 서로 다른 집단으로 분류하는 것이 얼마나 복잡한 일인지 보여준다. 이처럼 진리를 아는 것 자체가 논리적으로 불가능할 수 있다.
















철학자 섹시투스 엠피리쿠스는 회의주의가 함축하는 이런 자기지시 문제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그것을 좀 더 유연한 형태로 변환시켰다. 엠피리쿠스는 진정한 회의주의자라면 ‘어떤 것도 알 수 없다’라는 식의 모순된 주장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회의주의자는 판단을 유보할 뿐이다. 회의주의 목적은 진리가 존재한다는 독단주의를 치유하여 마음의 평온을 얻는 것이다. 회의주의 핵심은 다음 구절에 담겨 있다. “회의주의란 어떤 방식으로든 감각된 것들과 생각된 것들을 대립시키는 능력이다. 이때 서로 대립하는 대상과 생각이 팽팽히 맞서기에, 우리는 판단중지(epoche)에 이르게 되며, 그로써 평온함(ataraxia)에 도달하게 된다.” 회의주의는 일종의 치유다. 독단주의자를 치유함으로써 독단이 가져올 문제점을 풀고자 하는 것이다. 회의주의 목적은 독단주의자들, 즉 확고한 의견을 가진 자들의 자만과 경솔을 치유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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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진화는 

헤겔주의자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어떤 목표를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떠한 방향도, 

어떠한 최종단계도, 

어떠한 완성도 있을 수 없는 

맹목적인 누적적 인과관계의 체계다.” 

- 쇼스타인 베블런







인간이 진보를 이룩해 낸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중단되지 않고 멈추지 말아야 할 ‘진보’에 대한 믿음은 이 시대에 진정한 종교와도 같은 힘을 갖고 있다. 사람들은 가난했던 옛날을 경멸하고 비웃는다. 오늘날 우리 각자는 고대 로마의 어떤 황제보다도 더 큰 힘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진보는 나날이 발전하는 새로운 과학과 기계문명의 기적에 의해 명백하게 입증된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우리가 지금까지 성취한 수십 년을 앞으로 더 나은 진보와 발전의 예비 단계로 여긴다. 철학자 프란시스 베이컨도 진보라는 개념을 믿었다. “세상은 점점 나이를 먹어가므로 지난 시대는 언제나 고대다. 지금 우리 시대도 지나고 나면 곧 고대가 된다.” 그는 어른이 아이보다 더 지혜롭듯이 후세 사람들이 과거보다 더 많은 지식을 축적한다고 보았다.



하지만 고대 문명은 주로 정적이거나 순환적인 우주관을 믿었다. 초기 히브리인들 철학을 엿볼 수 있는 성경 <전도서>를 보면 그들의 순환관을 알 수 있다. “우주는 어떠한 목적도 없이 영원히 떠도는 하나의 기계다. 일출과 일몰, 탄생과 죽음은 단지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순환일 뿐이다. 그리고 ‘태양 아래에서 새 것이란 없다.”(<전도서> 1:9)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등 고대 그리스인들도 문명이 황금시대를 지나면 몰락한다는 순환론을 믿었다. 군주정은 참주정을 낳고, 참주정은 귀족정, 과두정, 민주정, 무정부주의를 거쳐 다시 군주정으로 돌아간다는 식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름지기 ‘사회적 생명’은 순환적인데도 사람들이 그걸 도무지 깨닫지 못하는 까닭은 사이클 국면이 인간 수명보다 길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유럽 중세 사상가들에게도 완전한 지식은 과거에 속했다. 최초 인간인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모든 것을 알고 있었지만 아담의 지혜는 이브와 함께 금단의 열매를 먹고 낙원에서 쫓겨난 후 점차 잊혀졌다. 따라서 중세 사상가들은 진보에 대한 의식이 없었으며, 지식이란 과거 사람들이 알았던 것을 찾아내어 복원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앞선 시기 사상가일수록 아담과 더 가깝기에 아담 지혜를 더 많이 기억할 것이라고 여긴 것이다. 그러므로 중세 사상가들은 스스로 새로운 지식을 발견할 수 있다고 여기지 않고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과거 사상가들을 연구했다. 과거 중국인들도 사람이 희망할 수 있는 최상의 것은 고대에 있었던 황금시대를 재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공자는 자신이 당시 지혜에 아무런 보탬이 되지 못했다고 믿었다. 어떻게 보면, 자신 사상이 새로운 것이라는 사실을 부정한 그의 태도는 전적으로 옳았다. 공자는 깊은 향수에 잠겨 주나라 초기시대, 그보다 오래된 은과 하의 시대, 전설적인 삼황오제 시대를 되돌아보았다. 과거를 바라보는 그런 눈으로, 공자는 당대 핵심문제와 씨름했다. 묵자도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이 자기에게 이익을 안겨 줄 도구를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국가는 더욱더 무질서해진다. 교활하고 빈틈없는 행동이 많아질수록 이상한 간계도 많아진다. 법을 내세우면 내세울수록 도둑과 강도도 많아진다. 사람들이 옛날로 돌아가면 거친 음식도 맛나게 생각하고, 검소한 옷도 아름답게, 누추한 처소도 안식처로, 평범한 일도 즐거움의 원천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러다 18세기 유럽 계몽주의 시대에 이성 중심의 합리주의적 사고로 역사가 진보한다는 진보 사상이 형성되었다. 계몽 사상가들은 각 시대가 새로운 지식을 첨가함으로써 인간 지식과 경험이 더 풍부해진다고 확신했다. 그들에게 역사 진행 속 지식과 경험 축적은 진보를 의미했다. 따라서 그들은 인간이 이성에 근거해서 고대시기에 대한 숭배와 교회의 도그마적 신앙에서 벗어나 진보한다고 생각했다. 계몽주의 철학자 칸트는 역사에는 우주적 목적이 있으며, 인간은 자연법에 따르는 과정에서 자신도 모르게 그 목적의 인도를 받는다고 생각했다. 칸트는 뉴턴이 행성 법칙을 밝힌 것처럼 역사와 진보의 자연법도 원칙적으로 발견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인간 내부에는 언제나 이웃 이익을 돌보는 사회적 존재와 자기 자신만 돌보고 성공과 독립을 실현하려는 이기적 존재의 갈등이 있다. 이 항구적인 갈등이 시대에 따라 변하면서 사회적 영역과 개인적 영역에서 모두 진보를 이끌어낸다. 이 창조적 갈등이 최고조에 달하려면 강력한 국가로 사회생활을 규제하면서 개인적 자유를 최대한 허용해 개성이 살아나도록 해야 한다. 칸트는 진보의 도덕적 개념을 명확히 규정했다. 그 목적은 최대 다수가 자유로이 자신 개성을 구현하면서 이웃을 돌보는 데 있다.

















초기 사회학자인 생시몽도 진보 이론을 내세웠다. 당시 신흥 사회과학이었던 사회학에서는 진보의 개념이 주요한 초점이었다. 그는 진보를 단지 이론화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실현하는 데 관심이 많았다. (이런 의미에서 사회학 탄생은 그 자체로 진보의 일환이었다.) 다음은 잘 알려진 그의 글이다. “시인의 상상력은 황금시대를 인류의 요람에서 찾았다. 하지만 그들이 정작 찾은 것은 철의 시대였다. 황금시대는 우리 과거에 있지 않고 우리 미래에 있다. 사회 질서가 완성되는 것이 곧 황금시대다. 우리 조상들은 그것을 보지 못했고 장차 우리 후손들은 거기에 도달할 것이다. 그 길을 닦는 게 우리 임무다.” 프랑스 혁명의 폭력과 비합리성에 환멸을 느낀 생시몽은 산업화만이 유일한 전진의 길이라는 믿음에서 기계를 옹호하는 데 앞장섰다.



계몽주의 시대인 18세기 특징은 자연과학의 방법과 방식을 처음으로 인간에게 적용하려 한 데 있었다. 물리학이나 화학, 생물학 등 자연과학은 커다란 진보를 이루었다. 그 반면에 심리학이나 사회학, 경제학 등 인문과학은 대폭적인 합의를 이루지 못했고, 예측의 힘도 발휘하지 못했다. 당시 사회과학자들은 지리적 혹은 문화적 성격을 가졌던 ‘지역’에 관한 연구를 법칙정립적 학문들과 융화시키기 위해 천재적인 지적 대안을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발전’(development) 개념이었다. 독립적인 단위의 사회가 모두 동일한 기본방식으로 하지만 서로 다른 속도로 발전한다는 가정이었다. 사실 이 요술에는 실용적인 측면이 있었다. ‘가장 발전한’ 국가는 자신을 ‘덜 발전한’ 국가들에게 모델로서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하였고, 덜 발전한 국가들로 하여금 자신 모델을 모방하도록 부추겼고, 그 무지개 끝에는 보다 높은 수준과 보다 자유로운 정부구조(정치적 발전)가 놓여 있다는 약속을 제시했다.” 















우리에게 연 경제 성장률 2퍼센트나 3퍼센트는 낮아 보이지만, 분석에 따르면 경제 성장을 우선시하는 사회의 붕괴와 종말은 2030년부터 2070년 사이로 잡고 있다. 부의 축적이라는 꿈은 그때가 되면 악몽으로 뒤바뀔 것이다. 양적인 망상은 ‘복리(複利)의 위압적인 효력’ 하에 우리를 견딜 수 없는 상황으로 전락시킬 것이다. 일인당 국민 총생산이 연 3.5퍼센트 증대하면 경제 규모는 100년 후 31배가 된다. 중국의 현재 경제 성장률(연 10퍼센트)를 가정할 경우 경제 규모는 7년 후 2배가 되고, 100년 후에는 736배가 될 것이다. 중국 경제 성장은 또 다른 의미도 갖고 있다. 중국 환경부에 따르면 중국 경제 성장이 유발하는 생태계 파괴의 연간 비용은 그 국내 총생산의 10퍼센트 또는 12퍼센트에 해당한다. 즉 국가 경제 성장률과 똑같은 수준이다. 시간 경과에 따라 경제 성장이 만족스러운 삶을 자동으로 만들어낸다면 지금쯤 우리는 진정한 낙원 속에서 생활하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 눈앞에는 지옥이 기다리고 있다. 이 아찔할 정도의 경제 성장은 생태계 파괴의 증가를 의미한다. 국민 총생산이 마치 ‘국민 삶의 질의 총계’ ‘국민 쾌락의 총계’ ‘국민 행복도의 총계’ 혹은 ‘국민 완성도의 총계’를 의미하는 것처럼 취급되는 경향이 있지만, ‘국민 총생산 = 국민 오염 생산의 총계’라는 방정식은 여전히 유효하다. 















하지만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유럽 일부 ‘진보된’ 지역에서조차 대부분 사람이 가졌던 최고 희망은 그저 육체를 보존하고, 식구들이 한데 모여 살고, 머리에 지붕이 있는 집이 있고, 충분한 옷을 가지기에 충분할 정도만큼 버는 것이었다. 따라서 당시에는 역사가 진보한다는 주장은 ‘발전된’ 나라에서도 그다지 동의를 얻지 못했다. 후진지역에서도 진보라는 개념은 환영받지 못한 개념이었다는 점 또한 분명한 사실이었다. 후진지역 사람들에게 진보란 침략이나 기껏해야 착취, 억압, 고향으로부터의 박탈, 떠돌이 생활 등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것이란 특히 도시 사람들과 외국인들이 외부에서 수입했던 까닭에, 뭔가 개선을 가져다주는 것이라기보다는 옛날의 정착된 방식을 방해하는 그 무엇으로 간주되었다. 그것이 거추장스러움을 가져왔다는 증거는 엄청나게 많다. 새로운 것이 개선을 가져온다는 증거는 확실하지도 않았고 불투명했다. 세계는 진보하지도 않았고, 진보한다고 생각되지도 않았다. 어떤 경우이든 옛날의 지혜와 방식이 최고였으며, 진보란 젊은이가 늙은이를 가르칠 수도 있다는 식의 의미를 함의했다. 
















사실 인류는 전진하거나 후퇴할 수 없다. 인류는 행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집합적 실체는 의도나 목적을 지닐 수 없다. 스피노자는 인류를 포함한 모든 것을 목적론으로 결부시키는 시도를 거부했다. “사람들 편견은 모든 자연물도 어떤 목적을 위해 작용한다고 추측하며, 게다가 신이 모든 만물을 어떤 목적에 따라 이끈다고 확신한다. 사람들은 신이 인간을 위해 모든 만물을 만들었으며 신을 숭배하도록 인간을 만들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자연은 자신에게 아무런 목적도 설정하지 않으며, 모든 목적인(目的因)은 인간이 만들어낸 허구에 불과하다.” 정치철학자 존 그레이도 인류 진보는 열정과 환상일 뿐이라고 말한다. “과학 지식 발전도 이러한 사실을 바꾸지 못한다. 진보를 믿는 사회민주주의자나 신자유주의자, 마르크스주의자, 무정부주의자나 과학기술을 믿는 실증주의자는 윤리와 정치를 과학과 동일하다고 생각하기에 지금 내딛는 한 걸음이 미래 진보를 가져온다고 믿으며 사회 발전은 누적된다고 믿는다. 즉 하나의 악을 제거하고 나면 그 다음 악을 제거할 수 있고 이 과정이 영원히 반복된다. 하지만 인간사는 그렇게 누적되지 않는다. 이미 성취한 것이라도 눈 깜박할 사이에 잃어버릴 수 있다. 인간 지식은 증가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 결과 인간 문명 수준이 더 높아지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모든 형태의 야만에 빠질 수 있다. 지식 성장은 인간의 물적 조건을 향상시키지만, 인간 사이에 빚어지는 갈등의 야만성 또한 증폭시켰다.” 















문명 수준이 더 높고 진보했다고 믿는 현대인이 윤리 측면에서 원시인보다 더 나은 것도 아니다. 역사학자 윌 듀런트는 설득력있는 한 가지 사례를 제시한다. 한번은 영국인이 ‘원시인’ 사모아인에게 런던 빈민에 관해 이야기 해 주자 그 ‘야만인’은 깜짝 놀라 이렇게 물었다. “도대체 어떻게요? 음식이 없다고요? 친구도 없어요? 살 집이 없다고요? 그 사람이 자란 곳이 어디인데요? 그의 친구가 가진 집도 없어요?” 그들에게는 마을 어딘가에 옥수수가 자라는 한 음식이 모자라는 사람이 있을 수 없다. ‘원시인’ 호텐토트족 경우, 다른 사람보다 많이 가진 자가 있으면 모두 똑같아질 때까지 잉여분을 나누는 것이 관례다. 이들은 배고픈 자를 돌보지 않았다고 비난받느니 차라리 자기 배가 고프고 마는 편을 택한다. 그들은 스스로를 하나의 커다란 가족으로 생각한다. 
















‘진보’라는 목적론이 그럴듯해 보이는 것은 설명이 가능한 건 필연이고 설명이 불가능한 것은 우연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진보가 필연적이라는 것은 역사가 우연한 사건들의 연속이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역사에 어떤 법칙이 내재한다는 것을, 그렇게 내재하는 법칙에 의해 역사 흐름이 필연성을 띠고 발전해간다는 것을 말한다. 근대 역사철학은 그런 진보의 필연성에 대한 이론적 증명이다. 원래 목적론은 모든 것을 쉽게 설명하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모든 사물과 현상을 목적에 비추어 설명하면 결과가 원인이 되는 순환론, 동어반복 성격을 탈피할 수 없다. 현상에서 목적을 빼면 생성만이 남는다. 현상은 목적을 향해 접근하는 과정이 아니라 우연으로 점철된 변화의 과정이며, 무한한 생성의 흐름이다. 생성이 연속적이라는 사실은 너무도 당연한 상식이어서 어떤 면에서는 강조하는 것 자체가 새삼스러워 보인다. 하지만 베르그송은 실증주의자들이 그런 상식을 잊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연속성이란 시간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살아 있는 것은 생명의 흔적을 시간에 남긴다.’ 그런데 실증주의는 시간 차원을 완전히 배제하고 주체가 대상을 관찰하는 것이 언제나 똑같은 결과를 가져다주는 것으로 착각한다.” 
















목적론적 관점(그리스어로 텔로스, 영어로는 끝과 종말을 의미)에서 역사를 파악하는 기독교들은 역사에 예정된 목적이 있고, 그 목적이 달성되면 역사가 끝나 천년왕국이 도래한다는 역사의 종말을 믿었다. 마르크스와 후쿠야마 같은 사상가들은 기독교의 목적론을 이어받아 '역사의 종말(천년왕국)'이라는 주장의 바탕으로 삼았다. 전문가라는 사람들은 순환의 통일성을 거부하도록 일반인을 부추기고 ‘우리’와 ‘그들’의 대립구도로 여론을 몰아간다. 서양 전문가들이 의도적으로 잇따라 쏟아내는 경고의 메아리는 언론과 출판을 통해 전 세계로 퍼져나간다. 후쿠야마가 역사의 종말을 떠들더니 버나드 바버가 지하드(성전) 대 ‘맥월드’(맥도날드적 세계)의 대결을 외친다. 로버트 카플란은 임박한 ‘무정부’ 상태를 우려하고 새뮤얼 헌팅턴은 문명의 ‘충돌’을 논한다. ‘악의 제국’ 소련이 붕괴하자 서양 전문가들은 입을 모아 이슬람과 중국을 새로운 위협세력으로 거론한다. 악이 파괴될 수 있다는 신념은 예수의 추종자들이 속한 종말론 분파에서는 핵심적인 신념이었다. 이런 천년왕국 신념이 미국 아들 조지 부시 정부에서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다. 선이 승리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역사에 악이 극복될 종착점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역사를 진보적 운동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그런데 진보했다고 믿어지는 금세기 들어 생산력이 엄청나게 증가했고 또 지금도 빠르게 증가하고 있는데도, 극심한 빈곤이 퇴치되거나 고통받는 노동자 짐은 가벼워지지 않는다. 오히려 빈부 격차는 더 심화되고 생존경쟁은 더 치열해지고 있다. 한편에서는 거대한 부를 축적하고 있는데 여전히 굶주리는 사람들이 있다. 이른바 물질적 진보라고 하는 추세는 건강하고 행복한 인생의 필수 요소를 기준으로 볼 때, 최하층 상태를 개선해 주지 못한다. 아니 실제로 최하층 상태를 오히려 압박한다. 물질적 진보는 오랫동안 품어온 희망이나 믿음과 달리 상층에 있는 사람들에게 삶이 향상되었지만, 하층 사람들은 무너지고 있다.



“현실에서 빈곤이 진보와 함께 나타나는 진정한 원인은 생산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는 지주가 지대(地代)를 차지하는 것을 합법화하는 토지 사유제 때문이다. 진보하는 지역에서 생산력이 증대하는데도 임금과 이자가 상승하지 않는 이유는 지대가 상승하기 때문이다. 향상된 생산력은 지대로 흡수되어 버리고 임금과 이자는 전과 달라지지 않는다.” 그 이유를 자세히 설명하자면, “생산요소는 토지, 노동, 자본이다. 생산물인 부(富)는 이 세 가지 요소에 대한 대가로 모두 분배된다. 즉 지대, 임금, 이자로 분배된다(부=지대+임금+이자). 이중 “지대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부-지대=임금+이자’가 된다. 이처럼 임금과 이자는 노동과 자본의 생산물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물 중 지대를 공제하고 난 뒤 잔여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산력이 아무리 높아지더라도 지대가 같은 정도로 높아진다면 임금과 이자는 상승할 수 없다. 지대가 지나치게 오르면 노동과 자본은 적은 대가로 만족하거나 생산을 중단할 수밖에 없다. 생산 중단은 수요 중단으로 나타나고, 다시 또 다른 부문의 생산을 제약한다. 지대 또는 토지가치의 투기적 상승은 토지 소유자가 노동과 자본을 배척하는 효과를 낸다. 노동자가 물자 부족을 겪으면서도 실업이 발생한다. 부의 분배가 불평등한 가장 큰 원인은 지대를 전유할 수 있는 토지소유의 불평등 때문이다.” 
















헤겔 역사철학의 가장 중요한 논제는 역사를 자유의식의 진보 과정으로 보는 것이다. “세계사란 자유의식에 있어서의 진보 과정이며, 우리는 그 과정의 필연성을 인식해야 한다.” 우리는 이 진보 이념이 근대 역사철학 전체에 대해 갖는 의미를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근대 역사철학 자체는 진보 이념과 더불어 탄생하고 진보 이념과 더불어 소멸할 것이다. 진보나 경제 발전으로 너무나 큰 부가 극소수 사람에게 집중되는 바람에 연간 소득 분배는 엄청나게 불평등해졌다. 자본가들이 그 어마어마한 부의 보유에서 얻는 연간 소득은 너무나 커서, 아무리 낭비적이고 사치스럽게 소비를 하더라도 여전히 엄청난 양의 과잉 소득 –또는 저축 –이 남게 되어, 이들은 이를 어쩔 수 없이 더 많은 자본축적에 투자하는 것밖에 다른 도리가 없게 된다. 소득 분배는 너무나 불평등하여 심지어 노동자 소비 지출 모두에다 자본가가 실제로 소비할 수 있는 (이들이 아무리 사치를 부린다고 해도 상품을 사와서 소비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라는 궁극적 제약 요소가 있기에 그 양에는 한계가 있다) 모든 돈을 다 합친다고 해도, 자본가가 강제로 저축하게 되는 양은 여전히 엄청나다. 그리고 만약 이 저축을 모두 생산 설비를 늘리는 데 썼다가는 소비재를 생산할 수 있는 생산 능력의 성장 속도가 그 수요(이는 노동자 소득과 자본가가 실제로 소비할 수 있는 최대 능력으로 제한된다)의 성장 속도를 훌쩍 뛰어넘게 된다. 생산 능력이 소비자 수요보다 빠르게 늘어나면 금방 생산 능력의 과잉 상태(소비자 수요에 비추어)가 나타나며, 따라서 국내에는 이윤이 나올 만한 투자처를 찾기가 거의 불가능해진다. 
















해외 투자가 그 유일한 대안이다. 하지만 모든 공업화된 자본주의 나라에서 이와 똑같은 문제가 존재하므로, 그러한 해외 투자는 오직 비자본주의 나라들이 ‘문명화’되고 ‘기독교화’되며 ‘고상해질’ 때만, 즉 그들의 전통적 제도를 강제로 파괴하고 사람들을 시장 자본주의의 보이지 않는 손의 지배 아래로 강제로 끌고올 때만 가능하다. 이제 자본은 국내시장을 넘어서는 더 넒은 경제영역을 개척하기 위해 해외시장에 진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경제학자 루돌프 힐퍼딩은 자본의 해외수출에서 상품들을 수출하거나 대부자본(화폐자본)을 수출하는 것보다는 해외에서 철도나 공장을 짓는 직접투자가 훨씬 더 경제영역 확대에 기여한다고 주장한다. 해외직접투자는 본국으로부터 화폐자본뿐 아니라 생산재 등 상품들을 수입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해외직접투자의 안전을 보호하기 위해 본국 정부의 정치적, 외교적, 군사적 지원이 필수불가결하게 되며, 자본주의 열강 사이에 식민지와 종속국 등 경제영역을 둘러싼 투쟁과 전쟁이 불가피하게 된다고 힐퍼딩은 전망한다. 그리고 힐퍼딩은 금융자본의 경제정책인 제국주의에 대해 프롤레타리아가 “자본주의 타도를 통해 경쟁을 완전히 지양”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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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개인은 시대사상인 문화 속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현대 사회는 개인이 문화를 넘어서 자율적으로 행동하길 요구한다.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개인은 자신 생각을 바꾸어 해결할 수 있다고 믿어지기에, 그렇게 하지 못한 사람은 비난을 받는다. 하지만 문화는 집단이나 사회 구조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므로 개인 노력만으로는 문화를 완전히 극복하기 어렵다. 예를 들면, 사회는 개인에게 ‘관용’이라는 미덕을 요구한다. 다른 사람이나 집단의 다양성과 차이를 이해하며, 이에 대해 편견 없이 존중하라고 흔히 말한다. 이성애자는 동성애자를 관용하고, 기독교인은 무슬림을 관용하고, 지배 인종은 소수 인종을 관용하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관용은 사회 구조적인 문제를 개인적인 문제로 돌려버리는 일이다. 관용 담론은 불평등이나 사회적 억압과 같은 문제를 개인이나 집단 편견에서 비롯되는 문제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나라 똘레랑스[관용] 전도사로 알려진 사회운동가 홍세화는 타인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프랑스 사회의 유연성을 높게 평가하며, 이렇게 말한다. “똘레랑스는 역사의 교훈입니다. 똘레랑스는 극단주의를 외면하며, 비타협보다 양보를, 처벌이나 축출보다 설득과 포용을, 홀로서기보다 연대를 지지하며, 힘의 투쟁보다 대화의 장으로 인도합니다. 그리고 권력의 강제에서 개인 자유와 권리를 보호합니다." 홍세화는 사회 문제를 똘레랑스라는 당시 새로운 문화로 해결하자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런 문화적인 접근은 한계가 있다. ‘모든 사회 문제에 정치·경제적 맥락을 도외시하고 우리 생활 방식과 생각을 바꾸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도록 한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포함된 자와 배제된 자 사이의 틈이 급격히 커지고 있는데도 관용 주장은 이런 진짜 모순을 덮으면서 시스템 문제를 개인 문제로 돌려버린다. 겉으로 진보적이고 의식 있게 보이는 관용 담론이야말로 오히려 현 체제를 유지하는 데 더할 나위 없이 효과적인 수단으로 기능하고 있다.’ 게다가 문화는 개인이  자신 의지력으로 혹은 교육과 교화로 간단하게 극복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유발 하라리도 관용의 한계를 제시하기 위해 ‘인종주의’와 ‘문화주의’를 서로 대비하여 설명한다. “사람들은 전통적인 인종주의에 대해서는 영웅적인 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그사이 전쟁터가 ‘문화주의’로 이동했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한다. 그 결과 전통적인 인종주의는 줄어들고 있는 반면, 오늘날 세계는 ‘문화주의자’로 가득하다. 현재 흑인이 열등한 유전자를 가졌기에 범죄율이 높다는 주장은 사회에서 퇴출된 반면, 흑인이 문제가 있는 하위문화에 속해있기에 범죄율이 높다는 말은 흔하게 오간다. 우리는 생물학적 모욕에는 민감하지만 사회학적 모욕에는 둔감하다.



생물학에서 문화로 전선이 이동한 것은 단순히 의미 없는 용어 변경 차원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실로 심오한 이동이며, 현실적인 여파는 아주 넓다. 우선 문화는 생물학보다 유연하다. 이 말은 한편으로는 오늘날 문화주의자가 전통적인 인종주의자보다는 ‘관용’적일 수 있다는 뜻이다. 다만 다른 사람들이 우리 문화를 채택하는 한에서 우리는 그들을 우리와 동등하게 받아들이겠다는 말이다. 그 결과, 다른 한편으로는 이것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훨씬 큰 동화 압력으로 느껴질 수 있다. 동화에 실패하면 훨씬 가혹한 비판에 직면할 수 있다는 뜻이다. 피부색이 짙은 사람에게 피부를 희게 하지 않았다고 비난할 근거는 거의 없지만, 사람들은 아프리카계나 무슬림이 서구 문화의 규범과 가치를 택하지 않는 것은 문제 삼을 수 있다. 그렇지만 많은 경우에는 그렇게 하려고 해도 불가능에 가깝다. 결국에는 노력이 부족했다는 말만 듣게 되고 잘못은 자신이 뒤집어쓰고 만다. 관용이라는 자유주의적 가치는 세계의 문화적 갈등을 해결하고 인류를 결집하는 데는 역부족이다.” 
















사회 문제를 개인들에게 일임하여 문화 문제로 해결하려고 했던 유명 인사가 있었다. 그가 바로 인도 ‘성자’ 간디다. 간디는 ‘자기통제와 자기 정화, 고통 등 수년간 금욕을 실천하여 비폭력 저항에 필요한 용기가 다져진다고 믿었다. 간디 추종자들은 모두 공식적으로 순결과 가난, 봉사의 서약을 했으며, 단식과 운동, 노동과 기도를 수행해야 했다. 자기완성의 실천은 그 자체로 목적인 동시에 사회정의를 수호하는 용감한 전사를 양육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개인적 자기완성을 통해 세상을 치유하는데 꼭 필요한 기반이 형성된다. 이와 관련하여 간디는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나부터 바꾸기 시작해야 한다”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간디는 자신의 비폭력 저항 신념이 보편적으로 적용 가능하며 도덕적으로 무결하다고 주장했다. 비폭력 저항은 박해자가 저지른 범죄에 대해 상대가 양심의 가책을 느끼도록 한다는 논리를 따른다. 그런데 만약 박해자가 양심이 없다면 양심을 향한 비폭력적 호소는 실패하게 된다. 예를 들어 국가는 양심이 없다. 이렇게 인간적 양심에 호소가 불가능한 곳에서 비폭력 저항은 악을 상대로 힘을 쓸 수가 없다. 간디 사상에 감동받은 사람들이 있다고 해도, 나치 정권의 하인리히 같은 사람에게는 소용없다는 의미다. 나치 독일의 유대인에게 간디의 비폭력 저항은 집단 자살을 권유하는 것과 다름없다.



간디의 비폭력 저항 신념이 보편적이지 않다면, 도덕적으로는 무결할까? 안타깝게도 간디가 자신을 벌하며 단행한 채식주의 식사 때문에 그 자신과 아내, 자녀들은 아사할 뻔했고, 그 밖에 여러 가지 규율을 엄격하게 적용하여 가족들과 불화를 일으켰다. 간디 가족 중 그 누구도 간디주의를 온전히 실천할 수 없었다. 추종자들 또한 많은 이가 간디를 따라 운동을 진행하다 이를 거부하거나 지키지 못한 자들에게 충격적인 폭력을 행사하곤 했다. 간디는 통일된 인도에서 힌두교와 이슬람교 간의 친선을 위해 생의 마지막 30년을 바쳤는데, 그 끝은 결국 공동체 간 잔인한 폭력과, 인도와 파키스탄 간 전쟁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간디는 말년의 충격적 결말로 인해 자신의 필생 사업이 완전한 실패로 돌아갔다고 여겼다.‘ 
















간디는 인간이 모두 똑같고, 각 개인 영혼은 우주적인 영혼의 일부라고 말했다. 그에게는 모든 사람에 대한 관용이 당연했다. 하지만, 간디 삶에서 우리는 관용의 한계를 볼 수 있다. ‘간디는 진정으로 이 세계를 변화시켜 완전히 다른 세계를 창조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이상주의자였다는 점이 간디의 궁극적인 약점이었다. 가난을 영적인 정화라고 찬양하고 도시를 비도덕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굶주리고 직장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설득력이 없었다. 그는 너무나 많은 영웅주의를 요구했다. 다른 사람 생각도 똑같으리라고 가정한 것은 그의 잘못이었다. 성인은 어떤 영감의 대상이 될 수는 있겠지만 본받을 모델이 될 수는 없다. 사람들에게 장기간에 걸쳐 관용을 보이라고 가르치고 설득하고 강요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인도 독립 후 그는 자신 성취를 가장 큰 실패로 보았다. 독립 후 인도가 너그러움으로 순화되고 영적인 자기 발전에 매진하고 폭력을 거부하는, 그가 꿈꾸었던 그런 나라와 너무 달랐기 때문이었다. 이슬람교도가 갈라져 나와 파키스탄이라는 별도 나라를 세운 것을 그는 참을 수 없었다. 그것은 명백하게 양립할 수 없는 것을 끌어안는 인도의 다원적인 재능과 상치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피하기 위해 간디는 자신 적인 이슬람교도 지나를 힌두교 인도의 대통령으로 추대하고자 제안했다. 하지만 오직 간디만이 이런 교묘한 해결책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추종자들 사이에는 대단한 반감이 생겨났다. 이슬람교에게 너무 관대한 것처럼 보였기에 간디는 힌두교 광신자에 의해 암살되었다. 힌두교조차 이런 옹졸함을 잉태할 수 있다. 간디 삶을 보면 전통적으로 관용을 옹호하는 나라에서 지극히 뛰어난 인물에 의해 관용이 실천될 때도, 결국 불충분한 처방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프랑스 혁명은 자유와 평등, 박애라는 세 가지 가치를 중심으로 한다. 프랑스가 의도했던 박애는 관용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그 후 이 이상(理想)에 대해 해결되지 않은 문제는 이 가치 세 개가 서로 모순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즉 지나친 자유 혹은 특정 형태의 자유가 너무 지나치면 평등을 침해할 수 있다. 혹은 지나친 평등 혹은 특정 형태의 평등이 너무 지나치면 자유를 침해할 수 있다는 문제였다. 이에 못지않게 대단히 중대한 문제는 세 번째 가치에 해당하는 박애와 자유, 평등의 이율배반적 관계다. 즉 지나친 관용은 자유와 평등에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1990년대의 미국은 50년대 심지어는 70년대의 미국에 비해 훨씬 더 관용적이었다. 그런데 미국인은 해가 갈수록 더 관용적이 되었지만 동시에 더욱 불평등해졌다. 관용과 평등 사이에는 일종의 철칙이 있어서, 관용적 개인주의 성장에 따른 평등 가치 쇠퇴는 필연적 현상으로 보인다.‘
















‘오늘날 우리는 모든 곳에서 ‘차이가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다. 차이는 적어도 쉽게 변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차이가 교정 불가능하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관용이 요구되는 것이다. 쉽게 변하거나 혹은 교정 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차이는 관용의 대상이 아니다. 관용 담론은 차이의 문제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주기는커녕, 차이의 문제에 영원성을 부여하고 있다. 그렇기에 관용은 실질적인 평등과 자유의 추구를 노골적으로 방해한다. 관용은 연대나 공동체가치 문제마저도 포기하게 만든다. 대신에 관용은 우리를 분리시키고 갈라놓으려 하며, 이러한 사회적 고립을 차이로 인한 필연적인 것으로 둔갑시키고 그 차이를 관용하라고 우리를 설득한다. 게다가 관용의 비대칭성은 대체로 간과된다. 관용받는 이들은 종종 관용의 능력을 결여한 이들로 간주된다. 관용 담론의 이러한 이분법적 구조는, 지배와 종속의 문제까지 정당화 한다. 관용은 관용의 대상이 되는 이들을 관용을 베푸는 이들에 비해 열등하고 주변적이며 비정상적인 이들로 표지(mark)하는 일인 동시에, 상대가 관용의 한계를 넘어섰다고 판단될 경우 부과할 수 있는 폭력 행위를 사전에 정당화한다.‘ 
















‘불교에서 자비는 관용이나 연민, 동정과는 거리가 멀다. 관용이나 동정 연민에는 주는 자와 받는 자의 비대칭성이, 제거할 수 없는 지위 차이가 전제되어 있다. 이방인에 대한 환대 또한 그렇다. 갈 곳 없는 이주자, 쫒기는 이방인에게 내미는 환대 손길은 그를 손님으로 맞이하는 주인 행세다. 부자들이 자신에 대한 빈민의 동정을 감사하게 받아들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화를 내지 않으면 다행이다. 따라서 동정이나 환대는 평등성과는 거리가 멀다.



달라이 라마는 인간 아닌 것을 포함하여 ‘모든 중생이 나와 마찬가지로 기쁨을 얻고자 하고 고통을 피하고자 함을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평등한 자비심이 나온다고 말한다. 연민의 감정이 아니라 중생에 대한 인식이 오히려 강조되어 있다. 평등한 자비심은 모든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는 잠재적 능력을 갖고 있다는 평등 인식에서 나온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모든 중생은 ‘부처’라는 점에서 평등하다. 부처에 높고 낮음과 멀고 가까움이 어디 있으랴! 자비 평등심은 부처 간의 평등성에서 나오는 것이다. 자비란 모든 중생에 대해서 부처로서 평등하게 대하는 것이다. 친하든 낯설든, 멀든 가깝든, 심지어 친구든 적이든 모두가 부처라면, 모두를 부처로서 평등하게 존중하고 도와주는 것이 바로 잠재적으로 부처인 내가 마땅히 행할 바이다. 자비란 스스로가 부처로서, 자신과 만나는 모든 잠재적 부처들에 대해 갖는 마음이고, 그들에 대해 행하는 바다.‘ 
















세상의 거의 모든 철학과 종교가 사랑과 관용이라는 비이기성을 가르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이 구원되어야 할 영원한 자아(혹은 영혼)를 갖고 있다고 가르친다. 자아를 갖는 한 이기성은 필연적이기에 관용이라는 비이기성을 우리가 실천하기란 쉽지 않다. 4세기 불교학자 세친에 따르면, 어떠한 유형의 유아론(有我論)을 믿던지, 즉 무아(無我)를 받아들이지 않는 한 결코 해탈에 이를 수 없다고 단언했다. 무아(無我)인 개인은 문화를 토대로 자신 정체성을 형성한다. 이러한 문화적인 정체성은 개인의 심리적 안정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에, 개인에게 그저 관용으로 문화를 극복하라는 요구한다면, 우리는 계속해서 마음이 불편할 수밖에 없으며, 진짜 평등에서 멀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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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강연 ‘플랑크의 양자론과 그리고 원자물리학의 철학적 문제점들’에서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양자물리학의 가장 심오한 의미 중 하나를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여기서 우리는 자연과학이 자연 그 자체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설명하고 이해하는 자연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의 중요성을 깨닫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주관성의 한 요소가 자연과학에 도입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 세계에서 일어나는 과정과 현상이 우리 관찰에 따라 달라진다고는 누구도 주장하지 못합니다 – 자연과학이 인간과 자연 사이에 서 있으며 아울러 우리가 인간 본성에 내재된 인식 개념 또는 기타 다른 개념들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하이젠베르크가 암시했듯이 이 점은 단지 양자론에 국한되지 않고 보편적으로 적용된다. 지난 역사에서 명백히 드러났듯이 자연철학 또는 자연과학은 언제나 인간과 자연 사이에 서 있었다. 어떤 시대의 과학사상이든 그 시대 사람들에게 물리적 세계의 진리를 드러내지는 않는다. 다만 사람들이 역사상 그 시기에 세계를 어떻게 설명하고 이해하였는지를 드러낼 뿐이다.



우리는 세계 그 차제에 관한 궁극적인 진리를 향해 나아간다고 곧잘 여긴다. 하지만 수학적 예측치가 관찰된 실험 결과와 아무리 가깝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자연 자체의 실재보다는 자연에 대한 해석에 의존한다.”<서양과학사상사>
















“일반적으로 대상이 존재하고 주체가 그것을 인식한다고 본다. 하지만 유심론인 유식학파는 식(識)이 있기에 경(境, 외부에 존재하는 대상)이 존재한다고 본다. 따라서 경을 객관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꿈을 실재로 착각하는 것과도 같다. 경은 허망한 성격, 즉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 주관의 눈으로 대상을 바르게 보지 못하고, 항상 잘못 분별하는 것)’을 띠는 것이다. 이 허망함을 깨달아야만 ‘객관세계’에 대한 집착에서 해방될 수 있다..“<세계 철학사 2>
















“하이데거에게 현존재는 삶의 지향성인 존재를 망각한다. 그야말로 객관적인 대상 세계가 있다고 믿는다. 말하자면 현존재는 자기가 만든 산물을 산물인지 모르고 자연적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다 현존재에서 객관적인 대상 세계가 사라지는 어떤 체험이 발생한다. 바로 불안 체험이다. 불안은 어떤 것의 부정이 아니라 전반적인 무(無)에서 나온다. 하이데거는 불안 경험에서 우리가 자연 과학의 객관적인 세계로부터 해방되는 계기를 본다. 객관적인 세계가 무너지면 이 세계가 지향적인 삶의 세계임이 드러나면서 도구의 세계가 드러난다.”<현대 철학 아는 척하기>

















“자연에 보편법칙이 있다고 생각하면 이와 같이 왜 그런 법칙이 존재하는지, 혹은 누가 그런 법칙을 만들었는지에 대한 답을 해야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또 다른 문제도 생긴다. 인간이라는 생물종이 어떻게 우주에 존재하는 보편적 법칙을 이해할 수 있을까? 감각과 이성 모두 완벽하지 않은 인간이라는 생물종이 대체 어떻게, 왜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우주의 보편법칙을 이해하고 발견할 수 있을까? ‘우주의 보편법칙을 이해하는 인간’이라는 관념은 우연히 진화한 인간 존재에게 너무 많은 능력을 부여할 때에만 가능하다.



이런 반론에 다른 논박도 있다. 자연의 법칙을 믿는 과학자들은 자연에 수학적 형태의 법칙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항변한다. 하지만, 예를 들어, 케플러의 제1 법칙도 행성 궤도가 타원에 가까울 뿐이다. 실제 자연을 아주 비슷하게 기술한 자연에 대한 근사일 뿐이다. 과학자들은 실제 복잡한 자연 세계의 여러 조건 중 특정한 조건에만 초점을 맞춘 뒤 과학법칙을 얻어낸다. 그래서 많은 과학법칙이 수학적 형태를 띠고 이다. 자연이 ‘수학이라는 언어’로 쓰였기 때문이 아니라, 자연에서 수학적 관계를 만족하는 특정한 변수들에게만 초점을 맞춰서 변수 사이에 연관 관계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과학은 법칙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낸다.’ 이런 의미에서 과학은 예술과 같이 창조적 활동이다.”<홍성욱의 STS, 과학을 경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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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를 돌이켜 보면 매 시기마다 문화가 같지 않았다. 이러한 문화적 차이는 개인 관심사와 행동을 서로 다르게 구성했다. 만약 특정 시기, 특정 문화가 개인감정을 중요하게 여기고 그 감정을 표현하는 어휘를 풍부하게 제공하면, 사람들은 자신 감정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이며, 더 자유롭고 적극적으로 자신 감정을 표현했다. 이처럼 시대마다 문화가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우리가 이해한다면, 현대인이 중요하게 여기는 경험과 감정 역시 역사 산물임을 알 수 있다. 예컨대, "경험해 보지 않았거나 당해보지 않았다면, 말조차 꺼내지 마세요!"라는 우리 표현은 어느 시대에서나 항상 옳았던 말이 아니다.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현대인의 전형적인 특징이 '개인 경험을 소중히 여기는 습성'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경험해 보려고 새로운 땅과 풍경, 음식을 찾아 나서며, 집에서 억지로 지켜야 할 금기에서 벗어나고자 휴양지로 떠난다. 배낭 여행자는 맛있는 음식과 아름다운 풍경뿐 아니라 낯선 곳에서의 위험과 어려움, 불편함을 즐기고자 지구 반 바퀴나 돌아 여행하고, 그 고난을 소중히 간직한 채 집으로 돌아온다.” 우리는 이러한 우리 성향이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고대 로마인들은 분명 이러한 생각을 떠올릴 수 없었다.
















‘로마인들은 다채로운 삶을 체험하지 않기 위해 의식적으로 몹시 노력했다. 이들이 보기에 모험을 즐기는 사람이나 좋아할만한 이러한 욕구는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실제로 미지를 탐구하려는 '호기심'은 사악한 유혹으로 여겨졌기에 두려워하고 삼가 할 일로 간주되었다. 마술에 홀린 사람이나 이러한 악덕에 빠지며, 결국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 것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어떠한 고대인도, 심지어 어떠한 고대 시인도 자신 느낌을 표현하지 않았다. 그리스-로마의 시(詩)에는 ‘나’라는 단어가 사용되지 않았다. 고대 시인은 ‘나의’ 사랑이나 슬픔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질투나 사랑 그 자체를 노래했다. 시인은 누구에게나 공통으로 적용되는 감정을 말한 것이지, 독자가 자신 개인감정 상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요구한 일이 아니었다. 고대인들은 개인 자신 감정을 표현할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고대 로마 시대 사람들만 이렇게 생각한 것이 아니라, 18세기 후반 낭만주의 ‘혁명’ 이전까지는 대부분 사람이 개인 경험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다. 근대 일본도 수많은 서양 책을 가져다가 번역하는 과정에서 가장 옮기기 힘든 단어 중 하나가 ‘individual’이었을 정도였다. 그렇다면, 인간은 수천 년 동안 전쟁을 벌였는데, 인간 경험의 정점인 개인 참전(參戰)도 나의 ‘진짜’ 감정이 아닌 단지 다수가 옳다고 믿는 상호 주관일 수 있을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치열한 전투에 참전한 미군 병사 중 약 50퍼센트는 바지에 오줌을 쌌으며, 약 25퍼센트는 똥을 쌌다고 인정했다. 제1,2차 세계대전과 한국 전쟁 같은 대규모 전투에서는 싸움 중 사망한 병사보다 정신 이상으로 후송된 병사가 더 많았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벌어진 이러한 현상을 ‘잃어버린 사단’이라고 부른 한 연구에서는 미군의 정신적 붕괴로 병력 50만 4천 명을 잃었다고 결론 내렸다. 이 인원이면 50개 사단을 편성할 수 있었다. 게다가, 전형적인 할리우드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과는 달리 현실은 전투에 온전히 교전하는 군인이 소수에 불과하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참전 소총병 85퍼센트가 너무 두려운 나머지 총을 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러한 연구들의 한계는 데이터가 주로 현대 전쟁 사례에 한정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전투에서 살인 시 정신적인 충격이나 감정적 손상을 입는 일은 대개 현재 우리 시대에 나타난 과장된 태도이며, 자신 스스로 초래한,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시대 문화에 영향받은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일 뿐이다. 18세기 이전에는 전쟁에 참전하여 살인을 하거나 심한 부상을 당해도 심리적 충격을 거의 받지 않았다.‘ 낭만주의 혁명 이전 병사들은 자신이 참여한 전투 경험에서 특별한 감정이나 교훈을 얻지 못했다. ‘병사들은 전투 경험을 아주 하찮은 일로 여겼으며, 고통의 시련을 감정적이거나 감각적으로 묘사하지 않았다. 또한, 고통에서 무언가를 배웠다는 기록이나 고통으로 인해 무언가 변했다는 말도 없다. 대신 “우리는 동지와 친구들 시신이 땅바닥에 똥처럼 널려 있는 것을 보아도 아무런 감흥이나 감화를 받지 못한다”와 같은 기록만 남아있을 뿐이다. 



당시 회고록을 남긴 사람들은 전투에서 얻은 경험을 개인적으로 특별히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첫 출정이나 적과의 첫 대치, 첫 대규모 전투, 처음으로 들은 포성, 처음으로 죽인 적군, 처음 목격한 전우 죽음, 첫 부상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이 자신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거의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당시 병사들은 적을 죽이는 것, 특히 최초 살인조차 아주 무심하게 다뤘으며, 때로는 농담처럼 회고하기도 했다. 부상으로 얻은 장애도 삶의 전환점이나 자아 발견의 관문으로 보지 않았다. 이 모든 일은 그저 또 한 차례 겪은 사고에 지나지 않았다. 포로 생활에서 겪은 고통이나 전우애 역시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았다. 더욱이 전쟁에 대한 환멸도 표현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한마디로 당시 병사들은 전쟁 경험에서 그 어떠한 깨달음이나 지식을 얻지 못했다. 그들은 몇 년 동안 직접 겪은 일보다는 전쟁에 대해 독서하고 담론을 나누는 일로 더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당시에는 "거기에 가보지 못한 사람은 이해하지 못한다"와 같은 상투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자신이 묘사한 사건을 독자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가정 하에 정반대의 상투어를 종종 사용했다. 예를 들어 포탄에 팔이 잘렸을 때 자신이 겪은 고통은 누구나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고 기록했다.‘

















그러다가 18세기 후반 낭만주의의 ‘개인 경험을 소중히 여기는 습성’이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을 휩쓸며 대중화되었고, 오늘날까지도 우리 감수성을 형성하고 있다. 철학자 이사야 벌린은 낭만주의를 서구 세계의 가치관과 역사 흐름을 근본적으로 바꾼 “가장 강력한 표현이자 증상”으로 평가했다. “낭만주의 중요성은 서구 세계에서 삶과 사유를 변모시킨 가장 거대한 최근 운동으로, 서구에서 가장 큰 의식 전환의 단일 사례이다. 이에 비해 19세기와 20세기 발생한 다른 모든 전환은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며, 그래 봤자 낭만주의 운동의 영향을 깊게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낭만주의는 모든 생각과 지식이 육체의 감각 산물이라고 보는 철학적 입장이다. 이에 따라 인간 정신과 영혼은 육체에 종속되어 있다고 여겨진다. 우리가 느끼고 생각한 것은 단지 외부 대상이 감각에 비추어진 일에 불과하다. 따라서 낭만주의는 개인 각자가 경험을 내세워 기득권에 도전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모든 사람이 동일한 육체적 감수성을 소유하고 있기에 경험만으로도 동등한 자질을 얻을 수 있다. 예컨대, 박사가 책으로만 읽는 내용을 문맹인 군인은 직접 경험하면 훌륭한 권위자가 될 수 있었다.‘
















인간은 낭만주의 철학과 같은 그 어떤 원대한 시대사상이 없더라고 ‘그냥’ 살수도 있다. 그냥 산다는 것이 잘못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그냥 살아본 적이 없다. 어떠한 사상이 뿌리채 뽑아버릴 수 없을 정도로 우리 안에 깊숙이 심어져 있기에 그냥 산다는 일은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국가가 전부라고 생각하여 국가를 위해 자신 인생 모든 것을 다 바친 사람들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러시아 일반 시민들이 그랬다. 그들이 경험했던 전쟁터는 몹시 참혹했다. "어느 날 백병전이 시작됐어...... 뭐가 기억나느냐고? '오도독오도독' 소리. 그 소리가 기억나......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사방에서 오도독오도독하는데, 사람들 연골이 으슬어지고 뼈마디가 뚝뚝 부러져나가는 소리였지. 그리고 짐승의 울음 같은 처절한 비명들...... 서로를 찔러 죽이고, 숨통을 끊어놓고, 뼈를 부러뜨렸어. 총검으로 입이고 눈이고 닥치는 대로 찔렀지...... 심장을 찌르고 배를 찌르고......" "독일군에게 잡혀간 우리 여성 간호병을 찾아냈지. 세상에, 눈알이 도려내지고 가슴이 잘려나가서는...... 놈들이 말뚝에 박아놓았더라고. 몸에 살을 에는 추위에 꽁꽁 얼어 새하얗고 머리는 완전히 백발이 되어 있었어. 그 아이는 겨우 열아홉 살이었어." 



그들이 경험한 전쟁터는 이토록 참혹한데 그들은 기꺼이 스스로 지원에서 전장으로 갔다. “그저 전선으로 가고 싶다는 마음, 그게 다였어. 어떻게 히틀러가 모스크바를 차지하도록 보고만 있겠어?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지! 나만 그런 게 아니었어...... 내 또래 소녀들은 너나없이 모두 전선으로 가겠다고 나섰지. 우리는 우리만 애국심에 불타는 줄 알았어...... 우리만 특별한 경우라고...... 하지만 웬걸, 모병 사무소에 갔더니 글쎄 우리 같은 여자애들이 한가득인 거야. 세상에, 얼마나 놀랐던지! 심장이 뛰고 피가 끓어오르더라고. 나는 선발이 안 될까봐 가슴을 졸였어." "어머니한테 하나밖에 없는 외동딸이었는데도 어머니는 딸을 안쓰러워하기는커녕 오히려 딸이 전선에서 돌아온 일을 모욕으로 생각하셨지. 적과 싸우지 않는 것을.” 



전쟁은 이처럼 끔찍한데도 사람들은 왜 기꺼이 그 지옥에 갔을까? "우린 어렸을 때부터 '조국은 우리의 모든 것이다. 우리는 조국을 지켜야 한다'는 소리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자랐어. 그래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전선으로 가기로 결정한 거야. 내가 안 가면 대체 누가 가겠어? 나는 반드시 가야 했지....." "나는 '전선으로 갈 거예요, 전선으로 보내줘요! 전선으로!'라고 날마다 '전선, 전선' 노래를 부르며 고집을 꺾지 않았어. 실은, 포스터 글귀들의 영향이 컸어. '모국이 그대들을 부른다!' '전선을 위해 당신은 무엇을 했는가?' 눈만 뜨면 사방에 보이는 게 그 글귀들이었으니까. 노래는 또 어떤 줄 알아? '일어나라, 위대한 나라여...... 일어나서 죽기까지 싸우라......“
















상호주관인 시대사상은 낭만주의처럼 오랜 기간 서서히 형성될 수 있지만, 특정 권력의 선전과 선동으로 아주 단기간 내에 '세뇌'될 수도 있다. 철학자 죄르지 루카치는 선전과 선동이 인간을 '도취'시켜 비인간화하고, 이는 비윤리적이라고 말합니다. "도취는 하나의 기만이며 사기이다. 감정이입을 핵심으로 삼는 일은 일상적인 삶을 격하시킨다. 니체의 '디오니스적 도취'는 감정이입 반응의 극단적 형태이며, 개인 인격을 균열시키고 불안정하게 만든다. 이는 세계와 인간관계를 공허하게 만든다. 선전과 선동은 인간을 기만하는 위장된 오만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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