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모비딕(11-15, 110-132)


허먼 멜빌 지음  | 록웰 켄트 그림  |  황유원 옮김  |  문학동네

 



오늘 읽은 부분은 뉴베드퍼드 항에서 낸터킨 섬으로 들어가는 배를 타기로 월요일 새벽부터 낸터킷 섬에 상륙한 날까지의 장면이다. 앞의 독서에서 작가 허먼 멜빌은 일종의 경계인이라고 생각했던 이유가 11(잠옷)에서 보다 분명한 사례를 통해 드러난다. 화자인 이슈미얼은 몸의 온기를 제대로 향유하려면 어딘가가 반드시 추워야만 , 그러므로 세상 모든 특성은 오로지 대조를 통해서만 드러난다라고 이야기한다. 작가의 이런 시각은 비교적 부유한 수입상인의 아들로 어린시절을 보내다가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고, 그가 일찍 사망한 가세가 몰락했던 경험에서도 찾을 있을 같다. 이런 삶의 양태를 멜빌은 어린 시절의 경험을 통해 몸소 체험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는 빛과 어둠의 대조 이야기하는 대목에서도 역시 이어진다.

 


진흙으로 빚어진 우리 육신에는 빛이 어울리지만, 실은 우리의 본질을 이루는 진정한 요소는 바로 어둠이라는 듯이 말이다.”(111)


 

이런 대목에서도 엿볼 있듯이 멜빌은 현상의 양면을 제대로 들여다보고 판단하려는 의식을 가진 인물이었으리라 생각해본다. 여기에서 과감하게덧붙이자면, 소설에서 이슈미얼에게 익숙한 기독교-단일신-일원론적인 세계와 퀴퀘그에게 익숙한 이교도적 이원론 세계가 서로 부대끼고 섞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를 가능하게 하는 상징적인 공간으로서 멜빌은 남자의 침대를 상정한 것이라 해석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다시 말해서 멜빌은 기독교적 세계와 이교도적 세계를 나란히 놓고, 이를 대등한 것으로 들여다보며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모비딕 영미문학의 유명한 비극 소설이긴 하지만, 남자의 브로맨스 통해 가지 세계가 소설 속에서 희극적이고 상징적으로 화해하고 있다라고도 생각해보았다. 어디까지나 오독은 나의 자유이자 나만의 감상이니까. 물론 이렇게 상상해보는 것은 무턱대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나만의 근거를 가질 시도해보는 일이다. 그러므로 모비딕 바다 위에 길이 있지 않은 것처럼, 나의 엉뚱한 상상을 자유롭게 이끌어주는 힘을 지닌 소설이기도 하다


 

13(외바퀴 손수레)에서 이슈미얼-퀴퀘그 부부 낸터킷 소형 정기선 모스(the Moss) 타고 바다로 나간다. 장면에서 이슈미얼의 감상이 인상적이다


 

보다 넓은 바다로 나오자 점점 상쾌한 바람이 불어왔고, 조그만 모스호는 어린 망아지가 코를 힝힝거리듯 뱃머리에서 재빠르게 물보라를 일으켰다. 야만적인 공기를 나는 얼마나 마음껏 들이쉬었던가! – 도로로 뒤덮인 땅을 나는 얼마나 경멸했던가! – 온통 노예의 뒤꿈치와 말굽에 움푹 자국들뿐인 흔해빠진 도로를 말이다. 도로가 나를 어떤 흔적도 남기길 거부하는 바다의 넓은 아량에 감탄하는 사람으로 뒤바꿔버렸다.”(121)     

 


대목에서는 노예제 반대하는 작가 허먼 멜빌의 자의식이 드러난다. 이문장에서는 일부의 자괴감도 느껴지는데, 그건 혁명을 꾀하는 이의 자의식이라기 보다는 노예제라는 불가항력에 압박감을 느끼고, 이런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을 느끼는 이로서의 모습이다. 하지만 넓은 바다로 나아가는 길은 노예와 말의 노동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바다는 멜빌의 분신인 이슈미얼에게 보다 매력적인 공간이었던 것이 아닐까. 상선과 포경선, 해군으로 젊은 시절 여러 해를 바다에서 보낸 멜빌은 자신이 속한 문명과 대양에 대해서도 충분히 숙고해볼 시간이 있었을 것이다.     

 


사실 백인의 기독교 문명과 이교도적 원시 문명 사이에서 멜빌이 설정하고 있는 대립적 요소는 소설의 곳곳에서 계속 발견된다. 낸터킷 모스호에서 퀴퀘그는 추운 겨울 바다에 떨어진 백인 촌뜨기 명을 바다에서 구해냄으로써 자신을 무시하던 선장과 놀리던 다른 백인들로부터 인정을 받게 된다. 물론 퀴퀘그는 자신이 일을 당연히 해야할 일로서 담담하게 받아들일 뿐이었다. 바다에 빠진 백인은 퀴퀘그에겐 먹이감 뿐이었는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똑같이 위험에 처한 사람으로 보였을 뿐이다. 앞선 독서에서 이슈미얼이 퀴퀘그에게서 어떤 고결함의 징후를 발견했다면, 단서는 이런 사례를 통해 입증되고 있다. 그리고 이슈미얼은 다음과 같이 이질적인 문명 세계에 대한 대조 곁들이며 위에서의 에피소드를 마무리한다.

 


마치 세상은 어느 자오선에 있든 서로의 공동 자본으로 세워진 거야. 우리 식인종도 너희 기독교인을 도와야만 라며 혼잣말을 중얼대는 듯한 모습이었다.”(123)

 


배를 타고 오래 세계를 누볐기 때문일까, 멜빌은 자신이 속한 사회, 자신이 익숙한 모든 것과의 차이 느끼기에 매우 민감한 감각기관을 지닌 작가인듯하다. 모비딕 앞부분에 인용되어 있는 발췌문 중에서 멜빌은 몽테뉴의 수상록 읽은 정황을 찾아볼 있는데, 소설을 읽어가면서 멜빌이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이 마치 몽테뉴의 그것과 닮았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우연하지 않은 필연적인 사건으로 다가온다. 나아가 생각을 밀고 나간다면, 열하일기에서 연암 박지원이 보여주는 사물 인식, 현상에 대한 접근법과도 매우 흡사하다는 점이다. 그리고 소설을 읽으며 점점 놀라게 되는 것은 모비딕 바다처럼 활짝 열린 텍스트 내게 다가온다는 점이다. 문학평론가가 보는 모비딕 문학사적 의의와 위치가 어떻든 내게 소설은 상상력의 씨앗을 소설의 전반에 걸쳐 풍요롭게 심어 놓은 소설로 다가온다.

 


그리고 14(낸터킷)에서는 대서양에 떠있는 낸터킷이라는 섬과 역사에 대한 멜빌의 애정과 찬사가 느낄 있었다. 물론 멜빌이 소설을 쓰던 1850 즈음에 낸터킷 섬은 이미 포경기지로서의 주도권을 뉴베드퍼드에 넘겨주었지만 말이다. 아니, 그렇기에 멜빌은 소설의 화자, 이슈미얼이 반드시 낸터킷에서 출발하는 포경선만을 타겠다 결심하도록 설정했던 것은 아닐까. 소설을 쓰던 당시에 낸터킷은 이미 쇠락의 징후가 뚜렷한 곳이었지만, 미국의 역사를 간직한 장소를 멜빌은 소설에서나마 기억해두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점에서 소설은 작가가 살았던 당대에 대한 기억을 저장하고 있는 타임캡슐인지도 모르겠다. 낸터킷 섬과 섬사람들의 호연지기 대한 멜빌의 애정을 보여주는 다음 대목도 흥미롭게 인상적이다.

 


육지와 물로 지구 전체의 삼분의 이는 낸터킷 사람들의 것이다. 바다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황제가 제국을 소유하듯 그들은 바다를 소유한다. 다른 선원들은 오직 그곳을 지나갈 권리만을 가질 뿐이다.”(127)      

 

 

제13장에서 이슈미얼과 퀴퀘그가 소형 정기선 '모스'호(the Moss)를 타고 뉴베드퍼드 항에서 낸터킷 섬으로 향한다. 

제14장의 제목이기도 한 '낸터킷' 섬. 화자 이슈미얼은 이 섬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그저 작은 언덕과 굽이진 모래사장만으로 이루어진 그곳을. 온통 해변뿐, 그 뒤로는 아무것도 없다."(1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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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모비딕》


허먼 멜빌 지음  | 록웰 켄트 그림  |  황유원 옮김  |  문학동네


 

 


소설은 나를 이슈미얼로 불러달라 시작한다. 실제 이름이든 아니든 간에 상관없이 이슈미얼은 번역자의 주석에  따르면, 전통적으로 아랍인의 조상으로 여겨진다.  《모비딕》 신성모독적이고 이교도적인 요소는 바로 문장부터 분위기를 느낄 있다. 오늘은 뉴욕 맨해튼에서 매사추세츠주 뉴베드퍼드 항구에 밤늦게 도착한 이슈미얼이 낸터킷 섬으로 가는 배를 놓치고 뉴베드퍼드에 머물며 벌어지는 장면들이 나온다. 소설의 중요한 조연인 식인종 작살잡이 퀴퀘그가 등장하고, 포경업의 중심지가 되어버린 뉴베드퍼드의 경제적 특수성에 대한 소개도 나온다. 오늘 읽은 부분은 주로 토요일 밤과 일요일 낮까지 벌어지는 다양한 사건들을 때론 유머스럽게, 때론 암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특히 소설의 처음에 인상적이고 재미있는 부분이 바로 퀴퀘그가 등장하는 대목이다. 남태평양 지역 출신의 작살잡이는 대머리에다, 얼굴과 전신에 문신을 식인종이다. 심지어 이슈미얼이 여인숙에 곳을 찾아 들어왔을 퀴퀘그는 방부처리된 뉴질랜드 원주민의 머리를 팔러다니는 중이었다. 주머니에는 은화 뿐이던 이슈메일에게 잠자리의 선택권이 충분히 주어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 여인숙 주인은 퀴퀘그가 머무는 방의 침대가 크니, 함께 자라고 이슈미얼에게 제안하며, 흥미로운 브로맨스 예고한다.  미리 침대에 들어간 이슈미얼이 늦게 돌아온 퀴퀘그의 행동거지를 경악하며 바라보는 장면이나, 퀴퀘그가 알게되어 놀란 이슈미얼이 어린아이처럼 집주인을 부르는 대목은 비극적인 소설의 아마도 안되는 희극적인 요소일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런 상황에서 이슈미얼은 무지는 두려움의 아버지다라는 웃픈 문장을 인용하며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는 부분이다. 이슈미얼은 술취한 기독교인이랑 자느니 정신 멀쩡한 식인종이랑 자는 낫지라며 생각을 바꾸는 것이다. 상대방도 나처럼 겁에 질려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멜빌이 소설을 통해서 보여주는 이런 인식은 당시 시대적인 배경을 떠올려볼 결코 흔하지 않다. 이러한 부분은 멜빌이 각종 허드렛일과, 상선의 선원, 포경선원, 교사 등등을 전전하며 획득하게 문제의식이 표출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부분들이 당시 진지한기독교인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았을까 상상해보게 된다


 

가지 주목해보는 점은, 허먼 멜빌이 소설의 주인공(화자) 여인숙 주인과 같은 인물들의 이름 설정에 관한 부분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화자 이슈미얼은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을 고려하면 사회에서 버려진 ’, ‘추방자 이미지를 암시한다. 귀족 신분도 아니고, 이런 저런 일을 하며 떠도는 인물, 일개 교사이기도 했던 인물로서 이슈미얼이 소설에서 맡고 있는 상징적인 역할은 9(설교) 중심적으로 언급되는 요나와도 연결된다고 보인다. 점은 독서일기를 쓰는 마지막 날에 다시 언급할 있겠다. 지금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멜빌은 여인숙 주인의 이름을 피터 코핀으로 설정해두었는데, 또한 스쳐지나가는 인물이긴 하지만 하나의 잠재되어 있는 상징과도 같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코핀 사망자들을 싣는 관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리고 피터 사실 베드로 영어식 표현이다. 성서에 등장하는 베드로는 어부로서 예수의 제자가 되는 사람이기도 하며, 예수가 유대인들의 모함을 받아 로마 집정관에게 체보될 , 예수를 부인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따라서 피터 코핀 해석에 따라 베드로의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그리고 소설의 진행 과정에서 크게 등장하는데, 또한 읽어나가면서 추후 연결지어도 같다. 오늘 읽으며 주목해본 것은 멜빌이 거대한 서사를 밀고 나가면서도 이러한 작고 세심한 디테일을 놓치지 않고 설정해두고 있다는 점이다.

 




(주목해본 구절


(42) “이런 연유로 나는 포경 항해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경이로운 세계로 가는 거대한 수문이 활짝 열렸고, 나를 결심으로 이끈 열광적인 상상 속에서 끝없는 행렬을 지은 고래들이 마리씩 짝을 지어 영혼 깊숙한 곳으로 흘러 들어왔다. 그리고 모든 고래들 한가운데, 하늘에 우뚝 솟은 설산처럼 거대한 두건을 유령 하나가 떠다니고 있었다.


: 부분이 특별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기 보다는 나중에 등장하게될 고래 이미지를 예고하는 부분인듯 하기 때문에 주목해보게 되었다. 만년설이 덮여있는 거대한 산의 모습은 먼지와 같은 인간에게 외경심을 불러일으킨다. 산의 거대함과 동시에 인간의 왜소함을 동시에 인식하게 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더하여 눈의 하얀 색이 불러일으키는 어떤 불가항력적이고 완전무결하면서도 두려운 감정들과 같은 이미지는 나중에 등장하게될 하얀 고래의 이미지와 연결되는 같다. 이슈미얼이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야하는 당위가 다소 신비주의적으로 처리되고 있다는 인상을 주지만, ‘영지주의혹은 유대교 신비주의 일부 영향을 받았다고도 하는 멜빌에게는 설득력이 있는 소설 전개 방식인지도 모르겠다.  

 



(90) “설교단이 세상을 이끌어나간다. 하느님의 성마른 노여움이 제일 먼저 발견되는 곳이 바로 그곳이니, 뱃머리는 최초의 맹공을 견뎌내야만 한다. 순풍이나 역풍의 신에게 부디 순풍을 보내달라고 처음 기원하는 곳도 바로 그곳이다. 그렇다, 세상은 출항한 배와 같고, 항해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설교단이 바로 배의 뱃머리다.


: 소설은 아마도 잠시의 예외 없이 기독교적인 배경 속에서 전개되고 있다. 예배당은 신의 말씀을 듣는 신성한 장소이면서도 기독교 국가의 국민들에게 하나의 지역적 구심점이 되는 공간이기도 하다. 뉴베드포드는 포경산업으로 미국 내에서도 예외적으로 부유한 퀘이커 교도들이 많이 사는 곳이다. 이들에게 포경산업은 신이 허락해준 소명이기도 이다. 포경업이라는 특수한 산업이 중심인 이런 지역의 예배당을 맡고있는 매플 목사 역시 젊은 시절 작살잡이를 해본 적이 있는 카리스마있는 혹은 연극적인 상황을 연출하는 인물이다. 한편 뉴베드포드라는 지역의 특수한 상황을 고려하며 기독교 문명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은 어떤 점에서는 양가적 관점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 멜빌은 기독교 안에서 있으면서도 때로는 기독교를 비판적으로 보는 일종의 경계인이란 느낌을 받는다. 설교단의 비유역시 세상사에서 차지하고 있는 기독교의 위치 혹은 역할 비중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번역오류)


(101) ‘요빠로 가는 배를 탐으로써 요빠에서 배를 탐으로써






(42면)
"이런 연유로 나는 포경 항해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경이로운 세계로 가는 거대한 수문이 활짝 열렸고, 나를 이 결심으로 이끈 열광적인 상상 속에서 끝없는 행렬을 지은 고래들이 두 마리씩 짝을 지어 내 영혼 깊숙한 곳으로 흘러 들어왔다. 그리고 그 모든 고래들 한가운데, 하늘에 우뚝 솟은 설산처럼 거대한 두건을 쓴 유령 하나가 떠다니고 있었다."

(90면)
"설교단이 이 세상을 이끌어나간다. 하느님의 성마른 노여움이 제일 먼저 발견되는 곳이 바로 그곳이니, 뱃머리는 최초의 맹공을 견뎌내야만 한다. 순풍이나 역풍의 신에게 부디 순풍을 보내달라고 처음 기원하는 곳도 바로 그곳이다. 그렇다, 세상은 출항한 배와 같고, 그 항해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설교단이 바로 그 배의 뱃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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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모비딕


허먼 멜빌 지음  | 록웰 켄트 그림  |  황유원 옮김  |  문학동네



새해를 맞아 록웰 켄트의 그림이 곁들어진 허먼 멜빌의 일러스트 모비딕 버젼을 읽기에 도전해봅니다. 짧지만 꾸준히 30개의 독서 일기가 모이길 기대하며…. 오늘은 본문이 시작하기 전에 어원편을 읽어봤습니다.  소설의 시작에 인용된 수많은 발췌문들을 보면, 멜빌이 자신의 방에서 홀로 권의 소설을 써내기 위해 읽었던 책들 일부를 짐작해볼 있습니다. 멜빌은 고래 대한 언급이 나오는 수많은 문헌들을 보고 발췌하여 모아놓았네요. 하느님이 만드신 고래와 요나의 이야기가 담긴 성경에서부터 시작하여 로마의 현인들, 몽테뉴, 셰익스피어, 밀턴, 괴테, 호손, 각종 여행기 항해기, 에드먼드 버크, 다윈, 페일리의 글이 모여있습니다. 처음 다른 출판사의 판본으로 읽어봤을 때는 그다지 주목하고 보지 않았던 부분입니다. 다윈은 대학시절 신학자 생물학자였던 페일리의 자연신학 항상 옆에 끼고 다니며 초자연적이며 지적 존재인 신이 자연을 설계했다 페일리의 주장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멜빌은 페일리와 다윈의 주장과 이들이 주장한 이론이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 바로 이런 맥락을 알고 있었다는 반증을 어원편을 통해서도 짐작해볼 있습니다.   


저는 이미 모비딕 읽었기 때문에 발췌문들 중에 어떤 점이 소설에 ·간접적으로 사용되었을지 정황이 조금 눈에 들어오는 같습니다. 그런데 이번 읽기에서는 흥미로운 점이 모비딕 출간한 해가 1851년인데, 다윈이 비글호를 타고 오랜 항해를 마치고 자신의 항해기를 출간한 것이 1839년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인류가 생물과 세계에 대한 관점을 바꾸는데 영향을 미친 종의 기원 출간한 해가 1859년이라는 점이구요. 그러니까 모비딕 다윈의 항해기와 종의 기원 세상에 나온 시기 사이에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소설을 읽어가다 보면 나오겠지만, 멜빌은 생물의 진화에 관한 아이디어가 등장하는 대목이 나올 겁니다. 물론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오류가 있는 점이 있지만 모비딕 당시 생물의 진화에 관한 최첨단 이론의 세례를 받은 소설이기도 하다는 점입니다. 물론 멜빌의 소설이 이교도적이고 신성모독적이라는 당시 신앙인들의 비판을 받기도하고 결과 인기를 누리진 못하고 잊혀지듯 했지만, 작가의 입장에서 당시에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어쨌든 오늘은 다윈의 항해기에서 발췌한 인용문으로 모비딕읽기를 시작해봅니다.


(32)

한번은 아마도 수놈과 암놈이었을 괴물(고래) 마리가 해안(티엘라델푸에고)에서 돌을 던지면 맞힐 수도 있을 만큼의 거리, 너도밤나무가 가지를 드리운 바로 아래서 교대로 천천히 헤엄치는 모습을 보았다.

- 다윈, 어느 박물학자의 항해기

 

 

록웰 켄트의 목판화가 담긴 일러스트 버전은 너무나 유명하여, 록웰 켄트의 대표작으로 인정받고 있다고 합니다. 록웰 켄트의 그림이 있는 모비딕초판은 구하기도 어렵고 가격이 상당하고 합니다. 아직 그의 그림들을 훑어 것은 아니지만, (그림을 모르는 비전문가의 관점에서 보아도) 그의 그림들은 매우 간결하면서도 강렬한 매력이 느껴집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에는 선이 분명한 멜랑콜리가 느껴진다고 해야할까요. 그의 판화그림은 비극 모비딕 너무나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그림 하나 하나가 영화의 포스터 장을 보는 같이 명료합니다. 록웰 켄트의 그림이 있는 초판본을 구할 수는 없지만, 번역본이 나온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싶고 충분히 만족스럽습니다. 특히 분권되어 있지 않고 권의 두툼한 책으로, 마치 거대한 고래와 같은 묵직함을 주고 있다는 점이 무엇보다 마음에 듭니다. 그리고 번역자의 꼼꼼한 주석작업에도 주목해보게 되네요. 다른 판본에서 언급되지 않았던 부분들에 대한 주석이 더해져서 다시 읽으면서 새롭게 보이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다시 읽기 Re-reading 기쁨을 새롭게 맛보기 시작했습니다.  이번에 다시 읽어보는 기회에는 선이 뚜렷한 록웰 켄트의 그림을 보느라 달이 금방 지나갈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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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결혼 이야기(Marriage Story)


(감독) 노아 바움벡 (Noah Baumbach)

(주연) 스칼렛 요한슨 (Scarlett Johansson) | 애덤 드라이버 (Adam Driver)



 이혼 과정을 따라가며 생각해보는 결혼의 의미


개인적으로 영화는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배우 애덤 드라이버 때문에 선택한 영화였다. 그는 대작 영화 <스타워즈> 시리즈 편과  <프란시스 >, <인사이드 르윈>등의 영화에 출연한 적이 있다. 하지만 정작 나의 눈길을 붙들었던 영화는 2016 개봉작 <패터슨>이었. 뉴저지 출신의 의사이자 이미지즘 시인이었던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의 고향이면서 동시에 시집의 이름이기도 했던 패터슨 제목으로 했던 영화였다. 영화에서 애덤은 무뚝뚝하지만 감성 충만한 시내버스 운전사이지만 그는 아마추어 시인으로 등장했다. 영화에서 주목한 그의 연기는 잔잔하지만 남자의 감성과 미묘한 심리를 드러냈던 연기로 기억하고 있다. 이번에 보게 <결혼 이야기> 역시 스칼렛 요한슨(니콜 ) 더불어 애덤 드라이버(찰리 ) 섬세하고 미묘한 부부의 심리연기는 전작들( 것은 아니지만)보다 마음에 들었다. 스칼렛 요한슨도 연기력이 있는 배우인데 <루시> 같은 영화에서 다소 어울리지 않았던 기억 때문인지 이번 영화에서는 크게 기대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주연의 연기는 아주 좋았다.


이번에 영화 <결혼 이야기> 이야기는 뉴욕에 거주하는 극단 감독과 연극배우 부부의 이혼과정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연극이나 영화에서 통속적이고 흔한 소재가 사랑과 결혼에 관한 것이다. 노아 바움벡 감독은 흔하디 흔한 주제를 가지고 어떻게 볼거리, 생각거리를 만들어내는가를 고민했을 것이다. 영화 커플은 이혼하기로 상의했지만 실제로 이혼절차에 들어가게 되자 각각 변호사를 통해 양육권 분쟁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분쟁에서 중요한 것은 아이의 양육권에 대한 사안이었다. 뉴욕에 기반을 두고 지난 10 살았던 찰리와 니콜 부부는 여전히 서로에 대해 애틋함과 존중의 마음이 자신의 강한 존재감 혹은 자의식과 충돌하고 있다. 사람이 각각 변호사를 선임하자 이혼 조정이 시작된다. 그러나 변호사에게 모든 일이 맡겨진 다음에 사건은 상대방 흠집내기와 인신공격성 난타전으로 전개되어 버린다. 사람은 상황에 대해 당혹감과 불편함을 감추지 못한다. 니콜 입장에서는 가족의 일원만이 아니라 명의 배우로서 가정에서조차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시작한 이혼이었다. 그러나 이혼 분쟁의 양상이 점점 격한 상대 공격으로 나아갔고, 부모는 사이에서 아이가 스트레스로 지쳐가는 모습을 보게 된다


LA에서 태어난 니콜에게는 이곳이 삶의 터전이었다. LA에서 TV프로그램 배역을 제안 받은 니콜은 LA 아들과 함께 와서 살기 시작한다. 찰리는 뉴욕의 극단을 운영하면서 동시에 대륙의 반대쪽 끝에 있는 LA사이를 오가며 이혼문제와 아이 문제를 감당해야 했다. 이혼과정은 부부 뿐만 아니라 아이에게도 버거운 일의 연속이었다. 영화는 상대방에 대한 가정폭력이나 불륜 등의 이유로 이혼하는 사례가 아닌 어쩌면 싱거워보이는 사유일 있다. 하지만 자아 시대에 자신의 삶과 의미 되찾고 싶어하는 니콜의 욕구는 그동안 가정에서 남편에게 모든 것을 양보하고 맞춰주는 방식과 양립할 없었다. 그럼에도 영화 중간중간 나오는, 서로에게 익숙해져버린 삶의 패턴을 니콜과 찰리가 깨닫는 장면은 인상적이었다. 중에서 내가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장면은 이혼 소송을 하는 과정에서도 사람이 이따금씩 만나 이야기하며 바라보던 눈길과 니콜이 찰리의 머리를 깎아주는 장면이었다. 연극을 하는 사람들이면서도 언어로 투명하게 자신들의 마음을 전달하지 못하는 이들이었다. 니콜에게는 남편에 대한 애틋함과 자신의 길을 가고싶어하는 욕구가 충돌하고 있었지만, 남편의 머리카락을 붙잡고 가위로 머리카락을 깎아주는 행위를 통해 서로가 상대방에 대한 감정을 확인하고 있었다


맥락은 조금 다르지만 장면은 톨스토이(1828-1910) 장편소설 안나 카레니나 마지막 부분에서 안나와 버금가는 주인공 레빈과 키티가 등장하는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소설에서 레빈과 안나는 톨스토이의 다른 자아에 대응한다. 그만큼 레빈은 소설을 떠받치고 있는 중심 축이긴 하지만 실제로 사람이 소설 내에서 만나는 장면은 거의 없다. 톨스토이는 자신의 다른 자아를 꺼내어 인생의 면모, 다양한 가능성을 실험해보려 것은 아니었을까. 한편 이런 중심인물 레빈과 키티의 가정은 행복해보인다. 영화 <결혼 이야기>에서 니콜과 찰리 부부의 이혼 과정에서 보여주는 가족의 현실적인 모습은 안나 카레니나 중에서 레빈이 아내와 키티와 대화하는 장면을 떠올리게 했다. 레빈은 소설 마지막에서 (톨스토이의 분신과도 같이) 인생의 어떤 깨달음을 얻게 되는데, 이를 사랑스러운 아내에게 말해주고 싶어한다. 참고로 소설에서 레빈은 삶의 의미를 고민하며 깨달음을 얻는다. ()이란 무엇이고, ‘나와 (하나님) 양립이 가능할까?’ 같은 종교의 문제 그리고 보편적인 가치란 무엇일까 등등을 고민했던 것이다. 레빈이 얻은 삶의 교훈, 자신이 가치있다고 믿는 무언가를 사랑하는 이와 나누고자 하는 행위는 지극히 자연스럽다. 스피노자가 에티카에서 언급하는 감정 모방 굳이 꺼내지 않아도 누구나 경험했을 법한 진행이다. 어쨌든 레빈이 아내 키티에게 전하고자 했던 자신의 깨달음을 혼자만의 비밀로 간직하기로 결심한 것은 키티가 레빈에게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부탁을 하는 장면에서였다. 키티는 아이의 엄마로서 레빈에게 아들의 잠자리가 준비되어 있는지 알아봐달라 부탁했던 것이다. 아내는 현실적인, 바로 지금의 문제에 충실할 뿐이었다. 아내의 현실적인 문제는 레빈의 형이상학적인 깨달음에 우선하는 문제였던 것이다.

 

문학평론가에게는 안나 카레니나 장면이 어떤 의미로 분석될지 모르겠다. 하지만 내게는 점이 불행할 수밖에 없는인류의 결혼 제도 속에서 그나마 가느다란 행복의 실을 붙드는 길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공상가인 남자들과 현실적인 여자들이 가정이라는 기만(서평가 로쟈 이현우의 언급에 따르면 톨스토이는 죽음이라는 인생의 진리 앞에서 가정과 예술은 기만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에서  평화롭게 있는 지점을 시사하는 것이 아닐까. 남편과 아내는 각각 다른 세계에서 사는 개별 인간들이다. 하지만 지구라는 행성에서 나아가 가정이라는 테두리 아래에서 함께 산다는 것은 바로 모든 결혼은 불행하다 톨스토이의 시각을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해야할지도 모르겠다. 서로 다른 세계에서 상대방의 세계를 침범하지 않고 지켜주는 , 그리고 각자의 세계를 상대방에게 강요하지 않는 것과 같은 방법들 말이다. 여기에서 나아가 알랭 보통이 결혼이란 주제에 대해 약간의 힌트를 남겨 놓은 것처럼, 서로가 상대방에게 배려하는 행위를 하며 노력하는 것이 가느다란 행복의 찾는 방법이 아닐까 생각해보기도 한다. 내가 믿는 진실은 상대방의 진실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이해한다는 것이라고 할까. 물론 생각은 살다 보면(?) 달라질 지도 모른다. 일단 과학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니까. 그러므로 결혼생활의 지속성은 서로가 다른 세계에 사는 커플이 만날 있는 접점을 찾기 위해 함께 탐색하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시 영화 <결혼 이야기> 돌아오면, 영화에서 묘사하는 이혼 과정의 모습은 전혀 극적이지 않다. 세상에는 영화나 소설보다 더욱 극적인 이혼 소송 사례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결혼 이야기> 상황 설정은 어떤 양극단의 사례보다 지극히 담백하게 느껴질 정도다. 오히려 영화에서 이혼하는 커플의 마음 속에 떠오를만한 다양한 심리의 양상을 담담하게 보여주는 상황은 보다 현실적이라고 생각한다. 상대방에 대한 감정이 꺼지지 않았음에도 이혼해야하는 현실에서 이들에 대한 판단은 쉽게 내릴 없을 것이지만 결국 각자의 몫이기도 하다. 길고 지난한 삶과 이혼의 과정에서 개개인이 겪을 만한 삶의 장면들이 스냅사진처럼 스쳐간다. 영화는 안나 카레니나 문장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 표현처럼 무한한 삶의 양태 중에서 단면을 담담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사랑과 결혼이라는 오래된 혹은 낡은 주제를 이렇게 다시 이야기하고 공감을 얻을 있는 것은 누구나 공유할 있는 삶의 모습들을 발견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수백 수천 세대를 거치며 반복되어온 무엇말이다. 어쩌면 톨스토이가 생각하는 삶의 진실은 톨스토이가 평생 강박적으로 천착했던 주제인 죽음 무관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톨스토이에게 죽음이란 절대 진리앞에 모든 것은 기만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인류라는 가련한 존재들에게 필요한 것은 죽음 대한 인식(메멘토 모리) 통해 서로의 세계를 침범하지 않고 지켜주는 , 그리고 현실에 충실한 삶에 집중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톨스토이나 영화는 반복되어온 삶의 진실을 보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속에서 끄집어 내는데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영화의 마지막에는 이혼 각자의 삶을 사는 찰리와 니콜이 다음 할로윈 시즌에 다시 만나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비춰준다. 어쨌거나 삶은 계속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혼 조정에서 니콜의 변호사는 양육시간 비율을 니콜에게 유리한 55: 45 확정했다고 스스로 내세우지만 니콜에겐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니콜이 아이와 놀아주게 되어있는 다음 , 니콜은 찰리에게 아이와 놀아주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아이를 안고 돌아서는 찰리의 운동화 끈이 풀어진 것을 니콜이 되돌아가 끈을 묶어주는 장면은 바로 지금 순간의 삶을 통해 서로의 존재감을 느끼는 순간이기도 하다. 결혼을 이룬 가정이란 어쩌면 서로가 다른 세계에 속한 외계인들에게 각자의 세계에 이따금씩 머물 공간이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실패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없어질 없는 투명한 벽을 마치 원래 없었던 것처럼 회피하기 때문에 모든 불행이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 인생은 가정의 커플이 영화 니콜과 찰리의 마지막 모습처럼 서로가 교감하는 접점의 순간들이 모여 이루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만약 찰리라면 언젠가 내가 세상을 떠날 니콜이 머리카락을 깍아줄 느꼈던 손길과 온기, 니콜이 자세를 낮춰 운동화끈을 묶어줄 맡았던 향수가 떠오를 같다. 톨스토이가 만약 결혼 생활의 99% 불행하다고 단언했다고 상상해본다면, 내게는 그렇지 않은 1% 있었다라고 말할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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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과 비평 186호 - 2019.겨울
창작과비평 편집부 지음 / 창비 / 2019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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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조해진 지음 | [창작과 비평 겨울호(186)]




테두리가 투명한 감옥에 사는 작은 삶들 이야기



소설의 화자는 특성화고에서 기간제 영어 교사로 일하는 최씨 성을 가진 여선생이다. 소설은 화자가 계약갱신 2개월을 남겨놓고 직장으로부터 계약해지 통보를 받은 후부터 시작한다. 기간제교사로서 매년 재계약을 해야만했던 화자는 이번에 해고되었던 것이다. 그녀는 결혼을 기대하고 있는 기현이란 이름의 남자 친구와 저녁을 먹는 중이었다. 평택에 있는 플라스틱 사출공장에 취직한 은하나라는 이름의 여학생으로부터 전화를 받는다. 하나는 공장에서 일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어두컴컴하고 외로운 시골길을 걸어가며 전화기를 통해 다짜고짜 학교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을 내뱉는다. 담임 선생인 화자는 하나에게 남의 받는 원래 쉽지 않아. 그건 남들도 똑같아라며 인내하고 견디라는 말만을 해줄 있을 뿐이었다. 우리는 흔히 이런 경우를 많이 경험하고 기억해낼 있지만, 사실 이런 대답은 타인의 삶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현대인의 선언이기도 하다. ‘너의 삶은 나와 무관하다는 ’, 우리는 이렇게 타인의 삶에 공감하지 못하는 순간을 손쉽게 기억해낼 있을 것이다.  현대 문명이 고안해낸 발명품 중에는 바로 타인의 삶에 공감을 느끼지 않으려는 개인이 있다는 생각마저 해본 적이 있다.


소설의 화자는 남자 친구의 어머니와 결혼을 염두에 두고 저녁을 함께하는데, 공장에서 다친 하나에 대해 자신이 하나에게 했던 말과 닮은 말을 예비 시어머니로부터 듣게된다. 예비 시어머니는 10 시절 성수동의 편직물 공장에서 여공(일명 시다)으로 하루 15시간 고되게 일했던 경험이 있다. 예비 시어머니는 70 대에 많았던 여공들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이들은 오야지라고 불리는 공장의 권력(주로 남자 상사)으로부터 욕설과 폭언, 폭력을 당하면서도 안오는 약을 먹으며 일해야했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이들은 현재 법정기준 근무시간의 거의 배에 달하는 강도로 일하던 시대의 희생자들이었다. 여성들의 고단한 삶은 형태를 달리해 다음 세대의 여성들에게도 지속되고 있다.  그런 그녀가 젊은 세대인 하나의 추락 사건에 대해 요새 젊은이들은 상황이 과거에 비해 좋아졌는데도 공장에서 일하기 싫어한다 평을 내리고 있다. 화자는 예비 시어머니의 말에 안의 모든 것이 출렁이는느낌과 함께 묘한 기시감 느끼게 된다. 과거의 희생자가 현재의 희생자에게 공감하지 못하는 현실. 이들 각자의 고통은 마찬가지로 지극히 개인화되고 고립되어 있다. 하나의 사고에 대해 담임 선생인 화자와 예비 시어머니 모두 일종의 방관자가 수밖에 없는 무력한 현대인들이다


화자는 사회가 부과하는 보이지 않는 굴레 속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바로 결혼이라는 굴레 때문이다. 여성의 지위가 많이 향상되었다고는 하지만 우리 사회의 체질이 근본적으로 개선된 같지는 않아 보인다. 화자가 남자 친구 예비 시어머니와 저녁을 함께한 자리에서 예비 시어머니의 일방적인 결혼 준비 이야기를 듣게된다. 결혼 당사자인 화자와 남자 친구는 결혼식의 들러리처럼 배제되어 있다. 그런데 화자는 경제적으로 준비가 안되어 있는 상황에서 결혼을 결정해야하는 기로에 놓여있다. IMF 여파를 겪어낸 대한민국호는 대다수의 탑승자 들의 삶을 불확실한 것으로 바꾸어놓았다. 전통적인 관례상 남성들이 벌어오는 수입만으로 가정과 자녀를 키우기 힘들어진 한국 사회에서는 이제 여성들의 수익창출활동이 당연시 되고 있다. 화자는 비혼주의자도 아니지만, 결혼이라는 제도에 발을 들여놓기 전에 경제적으로도 준비가 되기를 바라는 독립적이고 현실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직장으로부터 해고통지를 받은 상태다. 그대신 수원에 있는 사립고등학교의 영어 교사 자리를 알아보고 있지만, 정교사가 되려면 대가를 치루어야 한다는 암시를 실감한다. 일종의 관행으로서 이년치 연봉을 내야한다는 사회의 부조리와 마주하는 것이다. 화자는 사회가 강제하는 결혼이라는 제도와 비정상적인 경로를 통한 취업 사이에서 고민하며 선택을 요구받는다. 우리 사회는 구성원들에게 선택의 기로에서 잠시나마 머뭇거릴 여유마저 빼앗아버린 듯하다. 결국 화자의 인간적인 관계맺기 역시 삐걱거리기 시작하는 것은 낯선 풍경이 아니다. 남자 친구와의 관계 역시 흔히 보아온 결별의 모습과는 다르다. 마치 컴퓨터에 저장해둔 오래된 사진 파일처럼 사람 사이의 관계는 서서히 서로의 존재를 잊으며 헤어지게 되는 것이다.  헤어짐을 슬퍼하고 때로는 애도하는 것마저 이들에게는 사치인지도 모른다


단편 소설 하나의 에는 다양한 인물들(여성들) 겪어야만 하는 현실이 위에 새겨진 십계명처럼 공고히 드러난다. 하나가 마주한 현실은 어떤가. 하나는 공장에서 추락하기 전날 사직 의사를 밝혔다. 이에 대해 하나가 속한 부서의 팀장이 보여준 반응은 사회적 약자가 감내해야만 하는 다른 현실을 드러내준다. 팀장은 고등학생일 뿐인 하나에게 공장에서 일할 거면 미리 운동해서 길러놓지 않고 뭐했는냐, 살이 근육이면 내가 일을 안주겠냐, 가방끈 짧은 애들이 자기 관리도 못한다 으름짱을 놓고, 모욕감을 주고 있다. 이런 반응은 내가 경험했던 우리 사회의 모습과 크게 다를바 없으며 이를 매우 실감나게 묘사한다. 팀장의 말은 특히 경제적 평등이라는 미명하에 비인간화된 여성노동자들이 처한 현실을 투명하게 보여준다. 현대 산업사회에서 노동자들은 우선 인격이 거세된 불모의 구성원들이다. 하나의 팀장이 보인 반응은 경찰이나 군인들을 뽑는 과정에서 남녀 모두 동일한 체력기준을 강요해야한다는 인터뷰를 실은 뉴스를 떠올리게 했다. 이는 우리 사회가 인간으로서 남성과 여성을 바라보는 관점의 성숙도가 아직 미흡하다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한다. 하나의 추락은 어쩌면 인간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성숙도와 인식이 추락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평등이라는 명분 이전에 우리는 인간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필요하다.  


한편 하나가 사고를 당한 이후, 하나의 어머니는 공장을 방문하는 하나의 담임 선생인 화자에게 동행해줄 것을 부탁한다. 하나의 어머니는 대한민국 사회라는 굴레가 낳은 명의 사생아이다. 미혼모로 하나를 낳고 홀로 키워온 그녀는 사회의 하층부에 자리잡고 살아야만 하는 운명이다. 하나의 어머니는 하나가 다치고 의식불명으로 중환자실에 있을 , 딸을 간호하기 위해 일하던 마트를 관두고 병원 근처 모텔 방에 장기 투숙을 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의 집을 가져보지도 못하고, 안정된 직장을 가져볼 기회마저 차단된 한가운데에 있다. 그녀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소외되어 잊혀지는 작은 삶들을 대변한다. 이런 처지에 있는 많은 이들에게 사회에 대한 분노란 이미 철지난 사치일지도 모른다. 이들에게 체념 성경에 기록된 십계명의 선언과 같이 느껴진다. 하나의 어머니는 하나의 추락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못나서 하나가 저렇게 된거예요. 고등학교 중퇴에 미혼모에, 못난 맞잖아요.사회의 부조리하고 메마른 구조 속에서 이들은 고립되고 소외되어 있다. 나아가 이들이 느끼는 불편함과 고통은 등장 인물 각자의 몫으로 남겨진다. 각자가 짊어져야 하는 삶의 무게로 변형되어 존재하는 것이다. 하나 어머니의 말은 사회로부터 배제된 개별 존재로서 우울증세에 가까운 무기력증을 반영한다. 이들 각자는 부조리한 삶의 무게를 감내해야하는 현대 사회의 시시포스들이다.           


소설에는 마치 테두리가 투명한 감옥에서 살고 있는 듯한 4명의 여성들을 삶을 조명하고 있다. 이들의 삶은 너무나 투명하게 노출되어 취약하다. 한편 이들의 삶은 사회가 강제하는 굴레에 둘러싸여 있다. 사회의 굴레를 벗어나 없는 것이다. 소설의 현실은 우리 사회의 부조리한 일면들을 치밀하게 엮어두고 있다. 특히 취약한 환경에 노출되어 있는 여성들이 마주하는 현실은 녹녹한 것이란 하나도 없다. 땅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의 문제를 비롯하여 비정규직 문제와 이들의 산업재해 문제, 여공의 역사가 보여주는 노동 인권의 문제, 결혼 문제(결혼의 굴레), 미성년자 문제 우리가 보아온 묵직한 주제들이 날줄과 씨줄처럼 엮여 있다. 독자로서 우리 사회에서는 이러한 범주에 속하는 계층이 부쩍 증가했다는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다. 화자와 하나 어머니가 평택의 공장을 방문했을 입구에서부터 제지당한 것처럼, 등장 인물들은 사회에서 소외되고 사회의 관심으로부터 배제된 존재들이다. 이들은 각자 사회가 기대하는 역할이라는 속박에 허우적대면서도 생존에 취약한 계층을 대변한다고 있다. 그러므로 소설에서는 등장 인물이 여성이 주가 되지만 사회의 굴레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있기도 하다. 문제는 우리 모두의 문제다


하지만 등장인물들을 포함하여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이들에게 공평한 사실이 있다. 바로 우리 모두가 거대한 대기 속에서 사는 존재들이란 자각이다. 내가 들이 마신 공기 분자는 억년 공룡이 들이 마신 적이 있었던 공기 분자이기도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가 내쉰 숨은 대기로 퍼져 우리 모두 일부를 들이마시게 것이다. 등장 인물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는 이렇게 연결되어 있다. 소설은 사회에서 보다 취약한 여성들을 대표로 부각시키고 있지만, 남녀노소 모두 우리는 대기를 통해서도 연결되어 있다. 소설은 등장인물들처럼 취약 계층을 묘사하고, 사회가 만들어 놓은 모순적인 방식을 각자에게 강요하고 기대한다.  하지만 여기에서 나아가 소설은 인물들이 느끼는 고통 기원이 과연 무엇인지 질문을 던지고 있다. 물론 답을 명확히 알기란 쉽지 않다. 그렇기에 이들이 사는 곳은 테두리가 투명한 감옥인지도 모른다. 분명히 피해자들은 있으나 가해자는 없는 사회의 부조리는 무엇을 말해주고 있을까. 소설은 명료하게 떠오르지 않는 현대인의 삶의 양태를 밀도있게 보여준다. 과연 무엇이 우리에게 고통을 주고 있는 것일까? 소설을 읽은 후에는 내게 커다란 물음이 남았다. 분명한 사실은 우리 모두 테두리가 투명한 감옥에서 살아가며 하나의 숨을 쉬는 작은 존재들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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