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계 15주기에 받은 리영희 선생의 유산'

<나와 리영희>


리영희재단 기획 [창비] (2025)





오늘(2025년 12월 05일)은 고 리영희 선생의 15주기라 한다. 마침 오늘 리영희 선생과 만나고 시간을 함께 했던 인연들이 기억하는 선생에 대한 글을 모은 <나와 리영희>가 도착했다.



내가 선생에 대해 알게 된 시기는 몇 년 되지 않았다. 선생이 남긴 글들을 우연히 접하면서 많은 지식인들이 그를 기억할 때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전환시대의 논리>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내게 '리영희 선생'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있다면, 바로 '진실'이라는 단어다. 그가 생전에 아마도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던 표현이, '나는 오로지 진실만을 쫓겠다'라는 말이다. 지금의 관점에서 이 단어만큼 왜곡도 많고, 논란이 많으며 때로는 과소평가되는 단어가 있을까 싶다. 그런 개념이 바로 '진실'이라는 것인데, 선생이 오직 이 '진실'만을 위해 살았고, 또 그렇게 하겠다고 천명했던 선생의 신념을 되새겨보는 날이다.



이 책은 리영희 선생의 동료/지인/후학들을 비롯한 인연 32명이 기억하는 리영희 선생의 면모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듯하다. 선생이 평생 추구했던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또 얼마만큼의 무게감을 지녔던 것일까 궁금해진다. 책을 읽으면서 내가 찾아야할 답이겠다. 



한 가지 실마리, 혹은 출발점으로 오랫동안 뉴욕 타임즈에서 서평가로 활동했던 일본계 미국인 미치고 가쿠타니를 소환해본다. 그는 자신의 글에서도 종종 '진실'을 추구하고자 했다. 내가 이해하는 가쿠타니의 '진실'은 절대적인 기준으로서의 '진실'은 물론 아니다. 오히려 일종의 균형추로 작용하는 '무게중심'에 가깝게 느껴진다. 한편 이 무게중심의 한 가운데에는 '인간'이 자리잡고 있었다. 



현대의 많은 저술가, 사상가들이 '진실이란 없다'는 입장을 취하며, 가쿠타니를 비판하기도 하고 때로는 그를 조롱하기도 한다. 하지만 바로 그가 줄곧 추구하던 진실이 내게는 리영희 선생이 생전에 말씀하시던 진실과 닿아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진실'이라는 지향점을 향해 가는 여정에서 우리는 늘 흔들리고 방황하는 존재일 테다. 진실을 향한 길 한가운데에서 늘 길을 잃고마는 우리 인간을 다시 붙들어주고 다시 이를 향하게 해주는 평형추와도 같은 것이 바로 인간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 지점은 앞으로 <나와 리영희>를 읽거나, 그의 저작을 읽게될 때 내가 염두에 두고 들여다볼 지점이기도 하다. 내게 주어진 과제와도 같다. 앞으로 나는 '어떤 진실'을 쫓을 것인가 하는 물음과도 같다. 



리영희 선생의 15주기 되는 날에, 그리고 암담했던 계엄의 밤이 이제 막 1년 지난 시점에, 꽤나 오래 책장에 놓여 있던 선생의 평전과 책 몇 권도 함께 꺼내어 본다. 우리는 지금 어떤 순간을 지나고 있는지하는 생각과 더불어 감회가 남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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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의 시대 - 진단은 어떻게 우리를 병들게 하는가
수잰 오설리번 지음, 이한음 옮김 / 까치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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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잉 진단의 문제와 당사자에 대한 새로운 시선이 필요하다

- 진단의 시대

: 진단은 어떻게 우리를 병들게 하는가


 

수잰 오설리번(Suzanne O'Sullivan) 지음

이한음 옮김 [까치] (2025)




 

최근 집안 어르신 한 분이 임플란트 시술을 받으셨다. 여기까지는 어르신의 연세를 고려할 때 부실해진 치아를 보완하는 의료 행위로서 수긍할 수 있는 팩트일 수 있다. 다만, 나의 의문은 어르신의 연세가 95세라는 점이었다. 비전문가인 내가 보기에도 임플란트는 모든 이에게 적용할 수 있는 치료 시술은 아니라고 알고 있었던 까닭이다. 게다가 아무리 치아가 불편하다고 해도 이를 보완할 수 있는 방법이 임플란트 밖에 없었을까. 다행히 큰 문제는 없어 보였으나 95세가 된 노인에게 임플란트를 권한 의사는 어떤 근거로 시술을 제안하고 시행했는지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또 다른 기억도 떠오른다. 이미 몇 년 전의 이야기인데, 어느 날 뉴스에서 OECD국가 중 유독 우리나라 산모들에게 적용되는 제왕절개 비율이 월등히 높다는 통계를 보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왕절개는 개복 절차로 전신 마취까지 해야 하는 상당히 큰 의료 시술이다. 자연 분만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의료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제왕절개 수술로 인한 출산은 산모의 회복도 자연 분만보다 몇 배 느리기도 하고, 따라서 산모의 회복에 필요한 의료 절차나 비용도 그만큼 더 많이 들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출산 과정에서 유독 한국인만 산모가 제왕절개를 해야만 할 정도로 위험한 것이 아닐 텐데, 왜 이런 차이가 발생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제왕절개는 누구를 위한 의료 행위인가를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18세기 풍자 문학의 대가라고 불리기도 했던 조너선 스위프트가 신랄한 독설과 문제의식을 드러낸 자신의 소설 걸리버 여행기에서 이렇게 말하는 대목을 만났다. “의사에게 있어서 가장 탁월한 능력은 진단하는 기술이다.”(신현철 옮김, 문학수첩, 325) 풍자의 대가인 그가 이 문장을 쓴 맥락은, 일부 의사들이 자신의 무지를 가리고자 의사의 권위를 내세우는 위선을 비판하려는 것이었다. 나아가 정치가나 국왕 역시 이 비판의 대상에 넣고자 했다. 과거에 환자의 질병이 악화되면, 사기꾼 의사는 환자가 곧 사망할 것이라는 예언을 함으로써 그 예언이 이루어지거나, 예상 외로 환자가 회복하면 자신이 병을 치료하는 약품을 적절히 사용했다고 말하는 행태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


 

신경과 전문의이자 작가인 수잰 오설리번의 진단의 시대를 읽으며 진단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를, 앞의 두 사례와 더불어 다시 생각해 볼 기회가 되었다. 물론 저자 수잰이 스위프트과 같은 독설과 풍자로 이 책을 쓴 것은 아니지만, 두 저자 모두 자신이 속한 공동체가 안고 있는 제도적, 구조적 문제를 비판적인 시각에서 들여다보았다는 점에 주목해 본다. 게다가 공교롭게도 수잰 오설리번과 조너선 스위프트는 모두 아일랜드의 더블린 출신이라는 사실도 이 책을 읽는 동안 나의 흥미를 잃지 않게 해주었다.


 

진단이란 무엇인가? 사전적인 의미로는, 환자가 지닌 병의 상태를 의사가 판단하는 일이다. 하지만 오늘날 현대 의학에서 진단이 갖는 의미는 좀 더 복잡해 보인다. 저자가 말하는 진단은 병의 정체를 밝히고 이름을 지어주는 행위를 넘어선다. 의사가 내리는 진단 행위는, 환자 개인의 정체성뿐만 아니라 사회적 시선이나 삶의 의미에까지도 영향을 주는 행위라고 보기 때문이다. 곧 오늘날 자격을 갖춘 의사의 진단이란, 사회적 의미를 부여하고 영향을 미치는 행위라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진단이 사회적 영향력을 지닌 행위라는 점을 한 가지 사례로 따져보자. 자폐증의 경우다. 지구상의 모든 자폐증을 지닌 사람들이 같은 정도의 증상을 보이지 않는다. 자폐 진단을 받은 이들은 사람 수만큼이나 다양한 양상을 보이는데 반하여, 사회는 명확한 기준으로 이들을 범주화하길 요구한다. 여기에서 문제가 생겨나기 시작한다. 과연 누가, 어떻게 이 기준을 정할 것인가, 그리고 그 기준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의 문제가 남기 때문이다. 나아가 의학의 발달로 이 기준이 매우 합리적으로 규정되었다고 가정해보자. 그럼에도 다른 문제가 발생한다. 뿐만아니라 자폐로 진단을 받은 이와 그렇지 않은 이의 구별 짓기, 바로 낙인 효과도 의도치 않게 발생할 수 있다. 이는 학교 현장에서 어렵지 않게 관찰할 수 있다. ‘자폐 경계성아이들에 대한 주변인의 시선을 떠올려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테다. 진단 범주에 포함된 아이의 정체성과 심리적 상태, 자존감, 행복감 등에 오래 지속되는 영향을 남길 수 있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ADHD 진단이나 우울증 진단에도 이와 같은 장면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이 사례 모두 진단 행위와 무관하지 않다.


 

저자는 진단자체를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다. 책 전체를 통해 유지되는 관점은, 진단 행위에 좀 더 신중해야한다는 입장에 가깝다. 그는 현대 의료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진단 행위가 정도를 벗어남, 곧 과잉 진단, 과잉 의료 행위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빈번히 일어나고 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나는 앞서 언급한 집안 어르신의 임플란트 시술 행위나 우리나라 제왕절개 시술의 유독 높은 비율이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저자가 지적하듯이 자폐증 진단이나 ADHD 진단에서 해당 진단 범주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현상은, 바로 이 기준 정하기, 혹은 경계 짓기의 모호함과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전문가들은 이 문제를 보완하고자 스펙트럼이라는 아이디어를 도입했을지 모르나, 사람 수만큼이나 다양한 증상을 가진 이들을 몇 가지 범주로 단순화할 수 없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물론 현대 사회에서 과학 기술의 발달로 인한 오염 물질이나 공해의 증가, 스트레스의 증가 등이 자폐나 ADHD 진단 결과의 증가에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거의 폭발적인 증가라고 여겨질 정도의 즉각적인 큰 변동을 초래하는 현상을 설명하기에는 설득력이 부족하다. 저자는 오히려 진단 기준, 혹은 경계 위치의 변화에 기인한다고 보는 듯하다. 현대 사회에서 자폐증 진단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는 통계는, 새로운 진단 기준/범위의 설정으로 인해 폭넓은 증상의 차이가 단순화되고 새로운 진단 범주로 편입되면서 발생하는 결과라고 해석될 수 있겠다. 저자는 이 지점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들여다본 셈이다.


 

진단은 이처럼 판단의 기준을 어디에 두는지에 달려 있다. 전문가라도 결국 사람의 판단과 결정에 의존하는 까닭이다. 특히 과잉 의료, 과잉 진단의 결과는 간단하지 않다는 데 문제가 있다. 누군가가 과잉 진단으로 우울증 진단을 받게 되었다고 해보자. 저자에 따르면 여기에는 추가 과정, 곧 한 개인에게는 추가 검사와 우울증 진단에 따른 약물 처방과 치료 과정이 개입하게 된다. 당사자의 입장에선 어떤가. 진단을 받은 당사자는 우울증 환자라는 낙인을 얻게 될 수 있고, 기존에는 의식하지 못하거나 심하지 않았던 불안 증세로 더 고통을 받을 수도 있다. 사회적으로도 우울증 환자에게 적용되는 의료 행위에 대한 보험 처리, 약물에 대한 보험 사항이 추가로 검토되고 시행될 것이다. 다시 말해 한 개인이 우울증이라는 진단을 받지 않았다면, 진단에 따라오는 일련의 의료 행위나 당사자 혹은 사회에 미칠 수 있는 영향이 불필요했을 것이란 의미다. 따라서 저자가 반대로과소 진단으로도 진단을 받은 이의 고통과 불편감을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진단하는 행위 그 자체는 의사의 전문 행위이면서도 주관적인 성격을 내포하는, 복잡하고 책임감을 요하는 행위라는 점이 분명해진다.


 

저자는 의료계의 과잉 진단을 주로 이야기하지만, 의료계의 노력과 진단에 대한 새로운 시선도 필요해 보인다. 진단을 받은 당사자에 대한 대중의 인식도 달라질 필요가 있다. 책을 읽으면서 자주 눈길이 갔던 지점은, 당사자 입장의 관점이었다. 구체적으로는 진단이 가져오는 낙인효과에 대한 점이다. 최근 어느 유명 과학커뮤니케이터가 방송에서 인간의 유전 형질과 관련한 지식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논란이 된 사례가 있다. 그는 쌍커풀이 대립 형질 가운데 우성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한 모양인데, 여기에 생물학자들의 거센 비판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 쌍커풀이 우성이라는 지식은 현재 중학교 3학년 과학 교과서에 나오는 대목이라 틀린 정보는 아니라 할 수 있다. 다만 나의 짧은 지식을 동원하여 이해한 바로는, 이 문제에 몇 가지 사회·문화적 파장을 가져올 수 있는 지점이 있다. 하나는 인간의 몇 가지 특정 대립 형질이 비교적 뚜렷하여 우성과 열성으로 구분할 수 있다고 언급된 교과서적 지식이 지니는 맥락이 조금 미묘하기 때문이다. 이는 순수하게 생물학적 관점에서 겉으로 드러나는 유전자의 형질을 지시하는 개념이지만, 이 표현이 자칫하면 왜곡되어 소비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하다. 생물학적 관점에서 우성과 열성이 대중의 인식으로는 우월함과 열등함으로 소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방송 매체도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미 전 연령을 대상으로 하는 공영 방송에서 우월한 유전자라는 표현을 거리낌 없이 쓰고 있지 않은가. 이 표현은 사회 속에서 혐오와 차별에 이용되고 소비될 여지가 충분하다. 개인적으로 이 인식이 우생학적 사고와 그리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또 다른 문제는 쌍커풀과 같은 인간의 대립 형질이 비교적 뚜렷하다고 해도, 멘델이 완두콩으로 한 실험 사례처럼 특정 형질의 발현 기작이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멘델이 완두콩에서 비교한 대립 형질은 하나의 유전자가 특정 형질을 발현할 정도로 단순한 사례다. 반면 인간의 대립 형질의 경우, 어느 유전자 하나가 쌍커풀을 만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차이는 매우 크다. 인간의 형질은 대개 수많은 유전자가 개입하여 발현되는, 꽤나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드러난다는 점이다. 쌍커풀이 우성과 열성이라는 매끄럽고 단정적인 판결을 내리기에 여전히 모호한 지점이 있다. 그러므로 생물학자들의 비판을 받은 과학 커뮤니케이터의 발언이 현재 중학교 과학 교과서에 나오는 지식이기에 완전히 틀린 지식은 아닐더라도, 이러한 유전자 발현의 우열의 문제, 경계 짓기의 문제가 언제나 매끄럽고 분명하게 결정되는 것이 아님을 염두에 두어야 할 일이다. 쌍커풀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한 사람의 존재가 열등하게 인식되어서는 결코 안될 일이다. 이렇게 사회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지식은, 특히 교과서 저자들이 주의를 기울여 앞으로 다듬어가야 할 일이다.


 

마찬가지로 쌍커풀의 생물학적우성/열성 판단은 인류 사회의 오랜 이분법적 논리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이른바 정상/비정상의 문제와도 잘 결합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저자가 사례를 든 자폐증’, ‘ADHD', '우울증’, ‘진단 같은 문제 역시 의사/전문가의 진단 선언에 그치지 않는다. 진단 범주에 포함된 당사자의 경우, 이들은 진단 이후 사회적인 영향을 받을 수 있기에, 조심스럽게 수행되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입장이다. 저자는 우리 인류의 문명이 고도로 발전함으로써 진단의 범주에 들어간 병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이라기보다는, 의료의 발달, 진단 도구의 발달과 고도화로 이전에 규정된 정상 범주가 협소해지며 상대적으로 과잉 진단이 증가하게 되었음을 말한다. 여기에 이 당사자를 바라보는 비-당사자의 인식과 태도가 중요해진다. 나와 다른 특징을 가진 인간에 대한 이해 역시 관용과 배려의 시선에서 더 깊어져야 할 일이다. 또한 어느 진단 범주에 포함된 당사자는 더 이상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진단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존재로서 관심을 갖고 존재 자체를 인정하는 일도 필요하겠다. 이 당사자들은 의사의 진단 선언에 수동적으로 종속되는 존재가 아니라, 불안하고 어려운 순간을 직접 경험하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사회와 공동체는 진단 당사자들의 곁에서 이들의 경험과 존재를 인정하고, 이들의 말을 경청하고 혼자가 아님을 알도록 응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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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각의 현상학
모리스 메를로-퐁티 지음, 주성호 옮김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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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는 못하겠지만 또 샀군요. 꾸준히 다시 번역되고 재평가되며 재해석되는 책들이 나오겠지요. 또 살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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궤도 - 2024 부커상 수상작
서맨사 하비 지음, 송예슬 옮김 / 서해문집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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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인형: 구슬 @kooseul23]


 


문명의 죽음을 생각하는 인간의 '우주 고딕' 소설


궤도

 


서맨사 하비(Samantha Harvey) 지음

송예슬 옮김 [서해문집] (2025)

 



서맨사 하비의 소설 궤도(Orbital) 2023년에 처음 출간되었다. 이어서 2024년에는 곧바로 부커상을 수상하고, 국내에는 2025년 여름에 출간되었다. 말하자면 이 번역서는 하비의 따끈따끈한 작품이다. 소설이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들려주기 전에 실려 있는 한 그림에는 세계 지형의 윤곽이 그려져 있다. 자세히 보면 지도 위에 1에서 16까지 숫자가 적힌 곡선이 이어져 있고, ‘북반구가 낮일 때 지구 궤도의 24시간이라는 캡션이 붙어 있다.


 

처음 책을 펼쳐보았을 때 이 책은 은유로서가 아니라 정말 우주선의 궤도를 그린 지도구나라는 점을 알게 된다. 나아가 소설을 어느 정도 읽고 나서야 이 무질서해보이는 번호들은 지구를 도는 우주선 혹은 여러 국가가 참여하는 우주정거장이 매90분마다 지구를 한 바퀴 도는 동안, 지구가 자전하기 때문에 일정한 간격으로 인공위성/우주정거장의 궤도가 한쪽 방향으로 조금씩 밀려나는 듯한 선들이 보인다. 게다가 이 선들이 순차적으로 이동해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무언가 규칙적인 운동을 암시한다. 그러면 또 궤도는 왜 16개일까 싶은데, 이는 지구주위를 도는 우주정거장이 약 90분 동안 지구 상공을 한 바퀴 돌며 이동하는 궤도를 의미한다고 이해하면 된다.

 





소설은 처음부터 다음과 같이 시작하며 낯선 느낌을 만들어 낸다.

 


우주선을 타고 지구를 돌다 보면 너무 함께이고 또 너무 혼자여서 생각과 내면의 신화조차 이따금 한데로 모인다.”(7, [궤도 1])

 


이제 독자는 우주에서 벌어질 스펙터클이 조만간 시작되는 건가, 기대해보다가도 책의 절반을 넘어서까지 아무런 사건이 보이지 않으면 당황하기 시작한다. 소설이 그만큼 점점 더 낯설어지기 때문이다. 아마도 다른 소설에서 체감되는 플롯이 이 작품에서는 거의 느껴지지 않아서 일 테다. 이 소설의 목소리는 한편으로 칼 세이건이 태양계 탐사선 보이저호가 태양계 밖을 나가기 전에 카메라의 방향을 반대로 돌려 지구를 바라보았던 시선에서 창백한 푸른 점을 발견하던 시선을 떠올리게 한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고, 보이지 않는 암흑의 고립감 속에서 독자로 하여금 무언가를 느끼게 하는 시선이 바로 이 작품에서 제일 먼저 드러난다.

 


이 소설은 과감하면서도 실험적인 문체, 시와 같은 잔잔한 리듬과 분위기에서 진행된다. 하지만 보다 흥미로운 지점은 지구 표면를 벗어나 자신이 떠나온 지점을 바라보는 우주적 존재로서 자신에 대한 자각, 우주 속의 작은 점과 같은 존재가 자기 자신과 지구의 운명에 대해 명상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소설 속의 인물들에 대해서는 제한적인 정보만 주어지기에 캐릭터 혹은 서사에 대한 몰입이 약하게 다가올 수 있다. 이 점은 기존의 소설 문법에 익숙한 독자에게는 생소하고 밋밋하게 다가올 수도 있겠다. 반면, 캐릭터들이 지구를 바라볼 때 느끼는 독특한 정서를 담은 표현들은 매우 인상적이고 아름답다. 특히 화자가 독백하듯 들려주는 이야기는 거대한 에코 체임버(반향실) 속에 있는 한 지구인의 목소리가 배경 소음처럼 이어지는 반향같이 들린다.

 


화자는 자신이 타고 있는 우주선 혹은 우주정거장을 거대한 금속 알바트로스라고 비유한다. 이 말이 꽤 그럴듯하게 느껴졌던 것은, 1년 넘게 땅을 밟지 않을 정도로 오랜 시간 하늘에 떠 있는 태평양의 알바트로스처럼 그의 우주선이 지구 주위를 도는 동안 끈임 없이 추락하고 있는 까닭이다. “이곳은 지구와 가깝고 중력이 충분히 존재한다. 하지만 이들은 계속해서 자유 낙하 상태다. 그러니까, 나는 게 아니라 추락하고 있었다.”(191, [궤도11]) 이는 놀라운 관점의 전환이다. 점처럼 무한히 작아 어떤 존재로도 느껴지지도 않는 존재, 하지만 사유하는 존재의 자기 발견의 순간이 아닌가. 고립된 우주정거장에서 우주인들끼리 서로 부대끼면서도 이들 사이의 대화는 작품에서 결정적인 것은 아니라 여겨진다. 독자는 이 금속 알바트로스에 타고 있는 우주인들의 생과 사 이 경계에 자리 잡고 자신과 문명을 사유하는 존재 에 더 주목하게 된다.

 


수많은 소설의 형식과 달리, 이 이야기에서 화자는 역동적인 체험이나 사건이 보이지 않는다. 대신 우주인 각자의 인간적인 문제, 가족과의 관계에 대한 고민이나 회상이 의식에 따라 두서 없이 자리를 잡는다. 뿐만아니라 인간 존재 자체에 대한 생각, 인류의 오만과 지나친 자기애, 그리고 멈추지 못하는 인간의 욕망, 젠더 갈등과 서로에 대한 몰이해의 문제 등으로 사유를 넓혀 간다. 더 나아가면 인간과 지구라는 행성과의 관계에 대해 관조하기도 한다. 이른바 인간이 야기한 환경 문제와 지구 온난화의 문제를 인상적이고 아름다운 시적 언어로 독자에게 들려준다. 물론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태양도 수명이 있듯이 지구와 인류에게도 종말은 불가피하다. 지금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보다 중요한 문제는 인류의 종말이 인류에게 다가 온다는 자각, 또는속도에 따라 다라 옮아 대신 덮는다. 바로 이것이 중요한 건 속도의 문제인 것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우주의 한 가운데에 금속 알바트로스인 우주선 혹은 우주정거장이라는 고립된 공간에서 자신과 인류를 사유하고, 나아가 문명의 죽음을 상상하는 시선을 담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문학 속의 고딕과 관련한 전통을 떠올려 보았다. 중세 유럽의 문학에서는 어떤 기준으로부터 이탈하여 이질적이고 괴이한 이름부터, 공포스러운 정서에 이르기까지. 여기 에 주목한 유럽적 고딕 양식이 있었다면, 이 정서가 아메리카 대륙으로 넘어 오면서 황량하고 거대한 육지의 깊은 내륙에서 지독히 고립된 인간들의 군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미국 남부의 고딕이 있다. 이쯤되면 미국 사회에서 이 모습을 산업화의 여파로 이어진 농촌 공동체의 붕괴와 맞물려 독특한 정서를 전달한다. 이를테면 이 분야에 대한 에드거 앨런 포를 위시하여 플래너리 오코너, 셔우드 앤더슨, 팀 오브라이언, 존 윌리엄스 등의 작가들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궤도 에서도 미국 남부의 고딕에서와 같은 다른 듯 같은정서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지구에 발을 딛고 있는 것이 아니라 무한히 추락하고 있는존재의 절대적인 고립감, 금속벽을 경계로 삶과 죽음의 두려움과 문제들을 직시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점, 화자 혹은 작품 속 캐릭터 개인의 서사가 강하게 개입되면서도, 지구인 대부분이 경험해보지 못한 환경(이를테면 하루에 16번 해가 뜨고 지는 것을 지금껏 누가 경험해 보았겠는가?)은 인간의 문제를 좀 더 먼 거리에서 지켜보고 고찰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극적인 플롯이 없음에도 매우 인상적인 메시지를 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우주정거장에 머무는 우주인, 인간은 결국 이런 존재론적인 이질감을 느낄 수밖에 없을 테다. 장소뿐만 아니라 인간이 모든 시간대에 존재하지만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117)는 경험을, 인류가 지구를 벗어나 처음 사용하는 감각인 까닭이다.

 


하비의 작품은 우리에게 익숙한 유럽의 고딕이나 미국 남부의 고딕 문학이 주는 정서의 연장에서, 한편으로는 이전의 고딕 문학과 달리 지구를 벗어나 있는 인간의 시선과 그 인간이 느끼는 내면에 주목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별화된 고딕양식을 새롭게 선보이고 있다. 물론 처음 읽을 때는 이게 소설인지 아니면 우주인 남긴 실제 보고서에 메모를 해둔 글인지 혼란스러웠던 것도 사실이다. 달리 말해 이 글의 정체성에 대해 의문이 많이 생기기도 했다. 나아가 이 소설처럼 뚜렷한 플롯이 부재하면, 독자들은 몰입을 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소설이 중반 이후 넘어가면 비로소 아무 플롯도 없어 보이는 고요한 작품이 비로소 조금씩 익숙해지고 눈에 들어온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서맨사 하비의 소설을 우주 고딕’(Cosmic Gothic)이라 새롭게 부를만하지 않을까 제안해본다. 이와 유사한 표현이라도 이미 사용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과학기술의 발달로 우주인들의 경험도 점차 확대되면서, 우주인들이 개인적으로 경험하는 사건들을 반영한 문학이 본격적으로 나온 현상에 새롭게 주목해 보는 것이다. 지구 중력에 속박된 우주선 혹은 우주정거장에 고립된 채, 지구라는 행성이 직면한 위기와 문제를 직관하고 두려움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 시도야말로 기존에서 보았던 고딕 양식과는 차별점을 갖는다. 나아가 인류의 멈출 줄 모르는 정치 행위와 인류가 서서히 맞이하게 될 문명의 죽음을 마주하고 명상하는 일은 결국 앞서 언급한 우주 고딕으로서 어울리지 않은가.

 


저자가 주목한 바와 같이 인류가 현재 마주한 큰 문제들에 대해 구성원 개개인이 인간 스스로 가속화한문명의 몰락을 중단 시킬 수 있는 이는 거의 없어 보인다. 다시 말해, 인류의 문명이 쇠락해가고 종말을 맞이할 것이란 사실 앞에서 이를 중단시킬 수 있는 존재는 없다는 말이다. ‘우주 고딕에는 이런 압도적인 운명, 하지만 어느 누구도 회피할 없는 흐름에 대한 두려움의 정서가 있다. 이는 기존의 고전적인 고딕양식의 정서를 계승하면서도 지구 밖에서 인류가 처음 경험하는 일탈과 두려움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우주 고딕이란 표현은 나름의 자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 본다. 혹은 이 소설이 우주라는 절대 고립 속에서 지구를, 인류를, 그리고 자기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며 동시에 인류가 마주한 슬픔과 두려움을 느끼는 지구인의 아포리즘이라 말할 수도 있겠다





[책속으로]

[1] "가끔은 놀라운 생각을 한다. 자신들이 진공 심연을 홀로 지나는 잠수함을 타고 있다는 생각. 밖으로 나가면 안전할 것 같지 않다. 지구 표면에 다시 떨어졌을 때 이들은 생경한 존재들이리라. 미쳐 버린 낯선 세상을 배우러 온 외계인들."(39, [궤도3, 상행]) - P39

[2] "지구가 하찮고 작은 행성임을 깨닫고 우주 속 지구의 자리를 비로소 이해하려면, 지금보다 훨씬 더 멀리 지구와 떨어져야 한다."(51, [궤도4, 상행]) - P51

[3] "왜 이러고 있지? 절대 번영할 수 없는 세상에서 바득바득 살아 보려고 하는 이유는 대체? 완벽한 지구가 저기 있는데 굳이 우주가 원치 않는 곳에 가려고 하는 이유는? 우주를 향한 인류의 갈망은 호기심일까 아니면 배은망덕함일까."(89, [궤도 5, 상행]) - P89

[4] "신경질적으로 지구를 파괴하는 인류를 어떻게 아름답게 봐줄 수 있겠는가? 인간의 오만함은 실로 어마어마해서 그에 필적할 것은 인간의 어리석음뿐이다. 남근을 닮은 우주선을 우주로 쏘아 보내는 것만큼 오만한 행동은 또 없다. 우주선은 자기애로 미쳐 버린 종족의 토템이다."(96, [궤도 5, 상행]) - P96

[5] "눈 모자를 쓰고 양옆에 구름을 끼고 있는 안데스산맥 너머 북쪽으로 향하자 연한 빛이 보인다. 구름이 듬성듬성해지면서 저 아래 화재로 물러터지고 맨살이 훤히 드러난 아마존이 나온다."(99, [궤도 5, 상행]) - P99

"이게 세상이야. 남자들의 놀이터, 남자들의 실험실. 경쟁할 생각은 하지 마. 그래 봤자 결국 사기만 떨어지고 열등감과 열패감을 느끼게 되니까. 왜 절대 못 이기는 경주를 시작하고, 기를 쓰고 지려고 달려드니. 그러니 딸, 꼭 기억하렴. 너는 열등하지 않아. 그걸 굳게 명심하고서 존엄한 존재로 보잘것없는 삶을 살아가렴. 엄마를 위해 그렇게 해 주겠니?"(108, [궤도5, 하행]) - P108

[7] "달을 걷는 사람들을 경이롭게 생각해도 되지만 그 영광의 순간을 위해 인류가 치른 대가를 절대 잊지 말거라. 인류는 언제 멈춰야 하는지를 몰라."(109, [궤도5, 하행]) - P109

"우리(우주비행사들)에게 단 하나 공통점이 있다면,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어디에서든 지낼 수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가상의 공간 같은 이곳 우주선까지 오기 위해서 말이다. (...) 국가도 국경도 없는 이 최후의 전초 기지는 생명체의 한계를 밀어낸다."(112, [궤도 6]) - P112

[9] "그렇게 유럽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당신 참 안쓰럽네요, 음성은 여전히 따스하게 말을 건넨다. 모든 시간대에 존재하지만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요. 이 거대한 금속 알바트로스를 타고 경도를 넘나들면서 두뇌가 할 수 있는 것 이상의 일을 요구받는다니요."(117, [궤도 6]) - P117

[10] "오염되고 온난화되고 남획되는 대서양에서 아찔한 네온색 또는 붉은색 조류가 대발생하는 현상은 대부분 정치와 인간의 선택으로 만들어졌다. (...) "이들이 있는 자리에서 정치의 영향력은 너무나 자명하게 보인다. (...) 인간의 욕망이라는 실로 놀라운 힘이 지구를 형성한다."(130-132, [궤도 7]) - P130

[11] "빛나는 서구 자본주의가 꿈꾸는 우주 같은 건 여기 없다. 이곳은 불굴의 공학 기술과 천재적인 실용주의를 숭배하는, 칙칙하고 효용을 중시하는 육중한 사원이다."(170, [궤도 10]) - P170

[12] "우리는 다른 존재들보다 부싯돌 몇 번 부딪친 것만큼 앞서 있을 뿐이다."(187, [궤도11]) - P187

[13] "이들은 지구의 낮이나 밤 풍경이 펼쳐진 창가에 떠 있다가 새삼 자신들이 추락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 이곳은 지구와 가깝고 중력이 충분히 존재한다. 하지만 이들은 계속해서 자유 낙하 상태다. 그러니까, 나는 게 아니라 추락하고 있었다."(191, [궤도11], 관점의 전환) - P191

[14] "지금 우리는 무상하게 피어난 삶을 살고 있다. 광란의 존재가 딱 한 번 손가락을 튕기면 모두 끝나리란 것도 안다. 여름에 터져 나오는 이 생명은 새싹보다 폭탄에 가깝다. 이 풍요의 시간이 빠르게 지나가고 있다."(201, [궤도13]) - P201

[15]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지구는 물질성이 희미해지고 환영이나 성령에 가까워진다. 전 지구가 발아래를 지나갔다."(225, [궤도13]) - P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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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 자렛 - 즉흥의 상태
이기준 지음 / 시간의흐름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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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격이 부담되지만 책이 정성스럽게 제작된 것을 알겠네요. 과거에 찰리 헤이든의 공연을 놓친 것, 잭 드 조넷의 부고가 더 아쉽게 다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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