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 비평 186호 - 2019.겨울
창작과비평 편집부 지음 / 창비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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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과비평 – 186(겨울)

문학초점



문학계간지를 처음 읽어보고 있다. 지난 주는 문학초점이라고 하여 최근에 출간한 또는 소설에 대해 대담형식으로 소개하는 코너다. 이번 겨울호 문학초점에서는 시인 박연준, 문학평론가 김나영, 문학평론가 노태훈 세명이 소설 또는 소설집 종류와 시집 권에 대해 소감을 나누고 정리했다


     우선 명의 대담을 따라가면서 시나 소설에 대해 이렇게 다양하고 예민하게 읽어내고 자신의 언어로 정리할 있다는 사실이 내겐 충격이었다. 시를 읽지는 않았지만, 평론가나 시인이 인용하는 싯구를 따라가면서도 행간을 읽으며 시의 의미를 파악하는 일이 가능하다는 점이 놀라웠던 것이다. 소설 또한 내가 소설을 읽을 하는 습관대로 소설 전체를 요약해야한다는 압박에서 사람은 자유로운 같다. 무엇보다 대담자들에게는 화제에 대해 동일한 출발선 상에서 이야기를 나눌 있는 공통의 기반이 있는 것으로 보였다. 물론 나도 소설이나 시를 읽지 않았기에 어려워 보이는 것일 수도 있다. 이를 감안하고 대담자의 대화를 따라가 보았다.


     사실 가지 소설과 가지 모두 흥미로웠지만, 아직 소설과 시의 독법에 익숙하지 않은 초보자로서 내게 무리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가장 먼저읽어보고 싶은 소설은 정소현 작가의 소설집 품위 있는 이었다.   이유는 박연준 시인이 편안하게 읽은소설이기도 하고, ‘좋은 문장들이기에 독자를 피로하게 하지 않는다 언급 때문이었다. 나머지 명의 소설집도 모두 흥미로웠지만, 내게는 소설을 소설읽기를 시작하기에 좋은 출발점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사실 계간지 창작과비평 이번에 처음 읽게 되었고, ‘문학초점 소개된 소설가와 시인들 모두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문학잡지를 통해 나처럼 어떤 작가들을 처음 알게되면 여기에서 시작하여 관심있는 작가의 이전 작품들을 찾아 읽어보면 좋은 시작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마침 박연준 시인도 소설가 정소현의 글을 처음 접하게 되었고, 기대이상으로 좋았기에 소설집도 찾아 읽어야겠다고 한다. 문학과 친근하지 않은 같은 독자들에겐 소설의 의미를 본격적으로 짚어주는 사항 이외에 읽기 관한 방법을 간접적으로나마 배울 있는 기회였다.


     특히 품위 있는 대해 시인은 작가가 이야기에서 진실 드러내는 방법이 흥미로웠다고 말한다. 소설에서의 진실이란 어떤 것인가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점은 소설을 읽고 익숙해지면 생각해볼 있는 부분일 듯하다. 아울러 소설에는 이미 죽은 사람이 등장한다고 하는데 이미 죽은 사람이 이야기를 시작하는 오르한 파묵의 내이름은 빨강 비교해서 읽어보면 재미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파묵의 소설에서는 다양한 시점에서 화자가 주기적으로 바뀌며 사건을 바라보는 방식을 취하는데, 정소현 작가의 글에서는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는지도 궁금해진다


     내게 시는 소설보다 읽기 어려운 상대이지만, 먼저 읽어보고 싶은 시집을 선택하라면 성동혁 시인의 아네모네 선택해보겠다. 이유로는 노태훈 평론가가 시집에 대해 만약 한편만 읽는다면 감동이나 감각의 폭이 제한될 같다는 생각이 정도로 한권으로서의 의미가 시집입니다라고 대목 때문이었다. , 편이 모여 이루어진 전체를 통해 시인에 대해 이해하는 실마리를 얻을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았다. 물론 평론가와 시인의 명료한 언어와 사고로 이해하고 표현할 수는 없겠지만, 시집 전체를 통해 단어를 고르고 자신을 형상화해내는 시도가 내게는 시에 접근하는데 보다 정통적인 방식이 아닐까 생각했다.  


     문학초점에서는 문학평론가와 시인이 소설의 어느 대목, 시의 어느 구절에 대해 상반된 감상을 내놓은 경우가 있었는데, 대담에서 이러한 부분이 상당히 인상깊었다. 정답이 있는 읽기와 공부에 익숙해져있던 내게 열린 텍스트로서 문학이 사실은 아직도 낯설다. 하지만 시인과 평론가가 상반된 감상을 드러내면서도 상대방의 이해에 수긍하고 공감하기도 있는 점이 문학의 매력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해보게 되었다. 마치 우리가 삶에서 직면하는 숱한 문제들이 항상 결말이 명확하거나 행복한 결말, 혹은 슬픈 결말로만 일관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이번 문학초점 통해 작가들은 편의 소설이나 시를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으리라는 점을 새삼 깨닫게 되기도 했다. 그런 질문들이 독자의 읽기행위를 통해 다른 질문으로 혹은 응답으로 이어지는 것이 문학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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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과 비평 186호 - 2019.겨울
창작과비평 편집부 지음 / 창비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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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 모리슨의 현재성


김미현 지음 | [창작과 비평 겨울호(186)]



토니 모리슨이 우리에게 남긴 유산들

 

 

이번 주에 창작과비평 겨울호 특집에서 관심있게 읽었던 글은 편이 있다. 하나는 문학평론가 복도훈의 한국 SF 새로운 리얼리티에 관한 논의가 담긴 글이고, 다른 하나는 김미현 교수가 미국 소설가 토니 모리슨의 타계를 계기로 그녀의 문학적 유산에 대해 글이다. 나는 아직 SF장르에 대해 다소 낯선 느낌에서 벗어나지 못한데다, 영화 <칼라 퍼플> 통해 토니 모리슨에 대해 들어본 바가 있었기에 김미현 교수의 글이 친근하게 다가왔다. 게다가 토니 모리슨은 미국 여성 흑인으로서 처음 노벨 문학상을 받은 작가라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기에 관심이 갔다. 이번에 실린 글을 통해 나중에 그녀의 작품을 읽게 맥락을 짚는데 도움을 받을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도 있었다.

 


지난해 여름, 토니 모리슨이 사망했다는 기사를 적이 있다. 나는 젊은 오프라 윈프리가 노예 소녀를 연기했던 <칼라 퍼플> 어렴풋이 떠올렸다. 영화를 것은 오래전의 일이었다. 학창시절에 이러한 영화를 보는 것은 때에 따라서는 상당한 충격을 주는 사건이기도 하다. 영화는 내게도 그러한 충격을 전달했던 영화로 기억한다. 미국의 노예제라고 하는 표현의 이면에 어떤 구체적인 삶들이 있었을지를 그나마정제된 수준에서 보여주었고, 상상할 있게 되었던 같다.

 


나는 토니 모리슨의 작품 중에서 가장 푸른 읽었던 기억만 난다. 내용의 상당 부분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흑인과 백인 사이의 넘을 없는 근본적인 편견의 벽과 흑인들에게 내재화되어버린 자기혐오와 같은 정서들을 갑갑한 마음으로 느꼈던 기억만 남아있다. 김미현 교수의 토니 모리슨의 현재성 읽으면서 모리슨이 일생동안 일구었던 작품 세계와 노력들이 하나의 단단하고 통합된 덩어리로 다가왔다. 특히 작가에게 문학 인생은 본인이 직면한 근본적인 문제와 한시도 떨어질 없는 것이었을 테다. 그녀에게 좋은 , 좋은 예술은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의식은 소속감과 정체성 확립의 문제로 이어졌을 것이다.

 


토니 모리슨의 삶과 작품을 관통하는 문제의식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인종주의/식민주의라는데 많은 이들이 동의할 같다. 김미현 교수는 11권의 소설을 남긴 토니 모리슨의 문학적 인생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그의 소설은 미국 흑인의 정체성, 기억과 역사, 가족과 공동체 관계에 대한 심리적이고 철학적인 탐구이자 인종주의에 물들지 않은 언어와 비전을 찾는 과정이라 있다.”(72)

 


여기에 더하여 모리슨의 글쓰기는 과거를 되살리는 작업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단지 과거에 대한 사실관계를 파악하여 이를 복원하거나 재해석하고 정리하는 작업이란 역사가의 일일 같다. 하지만 과거를 되살리는 소설가란 의지가 가해진 창조 통해 과거의 현재적 의미를 찾는 작업이라고 의미를 살피고 있다. 소설가로서 모리슨은 지금 여기 삶에 우리의 과거가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를 끊임없이 되물었던 같다. 그렇기에 속에서의 정치성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음을 그녀의 문학 인생을 통해 알게 되었다.  

 


이해하기 쉽지는 않았지만 주목하게 다른 내용은 인종주의가 가져온 심리적 분열 대한 부분이었다. 과거부터 미국인들이 경험했던 노예제의 가운데에는 흑인들의 자기 혐오나 흑인 내부의 심리적 갈등과 상처뿐만 아니라 백인을 포함한 모든 미국인들에게 역사의 모순과 분열의 경험이 있다는 점이었다. 일명 백인들의 죄의식 white guilty라는 단어가 시사하는 백인들의 분열적 심리는 전체의 제목과 같이 인종주의/식민주의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는 점이다. 그리고 문제는 여전히 유효한 상태라고 이해된다. 모리슨이 이런 문제에 대해 철저하게 자기 성찰을 했다고 평가한 윌리엄 포크너 같은 작가들 외에 대다수의 미국인들은 인종과 상관없이 인종주의/식민주의문제를 정면으로 대면하기를 불편해할 같다.

 


 나는 김미현 교수의 논평을 읽으면서 토니 모리슨이 일생을 통해 보여준 문학적 유산의 현재성은 미국 사회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닐 있겠단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인종주의/식민주의 식민지의 기억을 갖고 있는 우리의 문제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모리슨은 작품을 나는 흑인 말고 다른 이들은 염두에 두지 않는다”(78)라고 언급했지만, 말은 흑인만이 중요하다는 의미는 결코 아닐것이다. 작가로서 모리슨은 본인이 가장 알고 본인에게 가장 중요한 대상이 흑인/흑인문제 였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모리슨은 인종주의 문제의 관점에서 천착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나는 모리슨이 지니고 있던 문제의식이 바로 우리의 상황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모리슨이 남기고 유산을 우리의 문제에 대입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예를 들면 재일한국인 서경식 교수가 여전히 일본사회에 강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 식민주의 문제삼는 일은 모리슨의 문제의식과 결코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모리슨의 현재성은 한일 무역분쟁의 이면에 분명하게 존재하는 식민주의 잔재를 이야기할 여전히 유효하다고 본다.


 

역사적으로 미국인이든 한국인이든 이러한 인종주의/식민주의 대한 기억은 보다 분명한 소속감 정체성 범주에 있었다고 있다. 그런데 문제를 세계화 문제와 결부시켜보면, 다소 혼란스럽다. 세계화과정에는 국경과 국제법 전통적인 영역의 경계 약화시키는 과정이 수반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하여 세계가 다양성의 측면 보다는 문화적, 언어적 차이와 정체성을 무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점은 새롭게 유발되는 타자(혹은 낯선 ) 대한 공포와 배제기작이 더욱 강화되지 않을지 우려가 되는 사항이다. 난민 문제를 떠올려보면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되지 않을까. 많은 철학자, 사상가들이 현대의 난민 문제는 세계화의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내게 문제는 고민과 판단이 필요할 같다.     

 


이번 특집을 통해  궁금했던 토니 모리슨의 작품과 삶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리고 현장 학자가 이해하는 소설가의 문학 인생이 남긴 유산이 오늘날 미국 사회에서 어떤 위치와 의의를 지니는지 엿볼 있었다. 김미현 교수가 조명한 모리슨의 삶과 작품 세계에 대한 소개를 통해 나는 넓은 의미에서 예술가의 역할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해보았다. 모리슨에게 문학이란 삶과 결코 분리될 없는 기억하기이므로 정치적일 수밖에 없으며, 그의 글쓰기는 이러한 과거를 되살리는 작업이었다. 이렇게 예술가는 과거의 기억과 당대의 부조리한 현실에 무던히 되돌아가고 바라봄으로써 끊임없이 의미를 묻고 이에 응답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다. 모리슨이 언어를 통해 우리에게 남겨준 성찰은 행동과 변화에 대한 기대도 품고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모리슨은 이러한 노력들이 바로 우리에게 달려 있다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안에 놓인 언어라는 새의 운명은 우리의 결정에 달려있다. 앞으로 모리슨의 작품들을 만나게 되면, 그가 남기고간 문학적 유산을 떠올리며 읽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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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모비딕(11-15, 110-132)


허먼 멜빌 지음  | 록웰 켄트 그림  |  황유원 옮김  |  문학동네

 



오늘 읽은 부분은 뉴베드퍼드 항에서 낸터킨 섬으로 들어가는 배를 타기로 월요일 새벽부터 낸터킷 섬에 상륙한 날까지의 장면이다. 앞의 독서에서 작가 허먼 멜빌은 일종의 경계인이라고 생각했던 이유가 11(잠옷)에서 보다 분명한 사례를 통해 드러난다. 화자인 이슈미얼은 몸의 온기를 제대로 향유하려면 어딘가가 반드시 추워야만 , 그러므로 세상 모든 특성은 오로지 대조를 통해서만 드러난다라고 이야기한다. 작가의 이런 시각은 비교적 부유한 수입상인의 아들로 어린시절을 보내다가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고, 그가 일찍 사망한 가세가 몰락했던 경험에서도 찾을 있을 같다. 이런 삶의 양태를 멜빌은 어린 시절의 경험을 통해 몸소 체험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는 빛과 어둠의 대조 이야기하는 대목에서도 역시 이어진다.

 


진흙으로 빚어진 우리 육신에는 빛이 어울리지만, 실은 우리의 본질을 이루는 진정한 요소는 바로 어둠이라는 듯이 말이다.”(111)


 

이런 대목에서도 엿볼 있듯이 멜빌은 현상의 양면을 제대로 들여다보고 판단하려는 의식을 가진 인물이었으리라 생각해본다. 여기에서 과감하게덧붙이자면, 소설에서 이슈미얼에게 익숙한 기독교-단일신-일원론적인 세계와 퀴퀘그에게 익숙한 이교도적 이원론 세계가 서로 부대끼고 섞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를 가능하게 하는 상징적인 공간으로서 멜빌은 남자의 침대를 상정한 것이라 해석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다시 말해서 멜빌은 기독교적 세계와 이교도적 세계를 나란히 놓고, 이를 대등한 것으로 들여다보며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모비딕 영미문학의 유명한 비극 소설이긴 하지만, 남자의 브로맨스 통해 가지 세계가 소설 속에서 희극적이고 상징적으로 화해하고 있다라고도 생각해보았다. 어디까지나 오독은 나의 자유이자 나만의 감상이니까. 물론 이렇게 상상해보는 것은 무턱대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나만의 근거를 가질 시도해보는 일이다. 그러므로 모비딕 바다 위에 길이 있지 않은 것처럼, 나의 엉뚱한 상상을 자유롭게 이끌어주는 힘을 지닌 소설이기도 하다


 

13(외바퀴 손수레)에서 이슈미얼-퀴퀘그 부부 낸터킷 소형 정기선 모스(the Moss) 타고 바다로 나간다. 장면에서 이슈미얼의 감상이 인상적이다


 

보다 넓은 바다로 나오자 점점 상쾌한 바람이 불어왔고, 조그만 모스호는 어린 망아지가 코를 힝힝거리듯 뱃머리에서 재빠르게 물보라를 일으켰다. 야만적인 공기를 나는 얼마나 마음껏 들이쉬었던가! – 도로로 뒤덮인 땅을 나는 얼마나 경멸했던가! – 온통 노예의 뒤꿈치와 말굽에 움푹 자국들뿐인 흔해빠진 도로를 말이다. 도로가 나를 어떤 흔적도 남기길 거부하는 바다의 넓은 아량에 감탄하는 사람으로 뒤바꿔버렸다.”(121)     

 


대목에서는 노예제 반대하는 작가 허먼 멜빌의 자의식이 드러난다. 이문장에서는 일부의 자괴감도 느껴지는데, 그건 혁명을 꾀하는 이의 자의식이라기 보다는 노예제라는 불가항력에 압박감을 느끼고, 이런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을 느끼는 이로서의 모습이다. 하지만 넓은 바다로 나아가는 길은 노예와 말의 노동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바다는 멜빌의 분신인 이슈미얼에게 보다 매력적인 공간이었던 것이 아닐까. 상선과 포경선, 해군으로 젊은 시절 여러 해를 바다에서 보낸 멜빌은 자신이 속한 문명과 대양에 대해서도 충분히 숙고해볼 시간이 있었을 것이다.     

 


사실 백인의 기독교 문명과 이교도적 원시 문명 사이에서 멜빌이 설정하고 있는 대립적 요소는 소설의 곳곳에서 계속 발견된다. 낸터킷 모스호에서 퀴퀘그는 추운 겨울 바다에 떨어진 백인 촌뜨기 명을 바다에서 구해냄으로써 자신을 무시하던 선장과 놀리던 다른 백인들로부터 인정을 받게 된다. 물론 퀴퀘그는 자신이 일을 당연히 해야할 일로서 담담하게 받아들일 뿐이었다. 바다에 빠진 백인은 퀴퀘그에겐 먹이감 뿐이었는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똑같이 위험에 처한 사람으로 보였을 뿐이다. 앞선 독서에서 이슈미얼이 퀴퀘그에게서 어떤 고결함의 징후를 발견했다면, 단서는 이런 사례를 통해 입증되고 있다. 그리고 이슈미얼은 다음과 같이 이질적인 문명 세계에 대한 대조 곁들이며 위에서의 에피소드를 마무리한다.

 


마치 세상은 어느 자오선에 있든 서로의 공동 자본으로 세워진 거야. 우리 식인종도 너희 기독교인을 도와야만 라며 혼잣말을 중얼대는 듯한 모습이었다.”(123)

 


배를 타고 오래 세계를 누볐기 때문일까, 멜빌은 자신이 속한 사회, 자신이 익숙한 모든 것과의 차이 느끼기에 매우 민감한 감각기관을 지닌 작가인듯하다. 모비딕 앞부분에 인용되어 있는 발췌문 중에서 멜빌은 몽테뉴의 수상록 읽은 정황을 찾아볼 있는데, 소설을 읽어가면서 멜빌이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이 마치 몽테뉴의 그것과 닮았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우연하지 않은 필연적인 사건으로 다가온다. 나아가 생각을 밀고 나간다면, 열하일기에서 연암 박지원이 보여주는 사물 인식, 현상에 대한 접근법과도 매우 흡사하다는 점이다. 그리고 소설을 읽으며 점점 놀라게 되는 것은 모비딕 바다처럼 활짝 열린 텍스트 내게 다가온다는 점이다. 문학평론가가 보는 모비딕 문학사적 의의와 위치가 어떻든 내게 소설은 상상력의 씨앗을 소설의 전반에 걸쳐 풍요롭게 심어 놓은 소설로 다가온다.

 


그리고 14(낸터킷)에서는 대서양에 떠있는 낸터킷이라는 섬과 역사에 대한 멜빌의 애정과 찬사가 느낄 있었다. 물론 멜빌이 소설을 쓰던 1850 즈음에 낸터킷 섬은 이미 포경기지로서의 주도권을 뉴베드퍼드에 넘겨주었지만 말이다. 아니, 그렇기에 멜빌은 소설의 화자, 이슈미얼이 반드시 낸터킷에서 출발하는 포경선만을 타겠다 결심하도록 설정했던 것은 아닐까. 소설을 쓰던 당시에 낸터킷은 이미 쇠락의 징후가 뚜렷한 곳이었지만, 미국의 역사를 간직한 장소를 멜빌은 소설에서나마 기억해두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점에서 소설은 작가가 살았던 당대에 대한 기억을 저장하고 있는 타임캡슐인지도 모르겠다. 낸터킷 섬과 섬사람들의 호연지기 대한 멜빌의 애정을 보여주는 다음 대목도 흥미롭게 인상적이다.

 


육지와 물로 지구 전체의 삼분의 이는 낸터킷 사람들의 것이다. 바다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황제가 제국을 소유하듯 그들은 바다를 소유한다. 다른 선원들은 오직 그곳을 지나갈 권리만을 가질 뿐이다.”(127)      

 

 

제13장에서 이슈미얼과 퀴퀘그가 소형 정기선 '모스'호(the Moss)를 타고 뉴베드퍼드 항에서 낸터킷 섬으로 향한다. 

제14장의 제목이기도 한 '낸터킷' 섬. 화자 이슈미얼은 이 섬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그저 작은 언덕과 굽이진 모래사장만으로 이루어진 그곳을. 온통 해변뿐, 그 뒤로는 아무것도 없다."(1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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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모비딕》


허먼 멜빌 지음  | 록웰 켄트 그림  |  황유원 옮김  |  문학동네


 

 


소설은 나를 이슈미얼로 불러달라 시작한다. 실제 이름이든 아니든 간에 상관없이 이슈미얼은 번역자의 주석에  따르면, 전통적으로 아랍인의 조상으로 여겨진다.  《모비딕》 신성모독적이고 이교도적인 요소는 바로 문장부터 분위기를 느낄 있다. 오늘은 뉴욕 맨해튼에서 매사추세츠주 뉴베드퍼드 항구에 밤늦게 도착한 이슈미얼이 낸터킷 섬으로 가는 배를 놓치고 뉴베드퍼드에 머물며 벌어지는 장면들이 나온다. 소설의 중요한 조연인 식인종 작살잡이 퀴퀘그가 등장하고, 포경업의 중심지가 되어버린 뉴베드퍼드의 경제적 특수성에 대한 소개도 나온다. 오늘 읽은 부분은 주로 토요일 밤과 일요일 낮까지 벌어지는 다양한 사건들을 때론 유머스럽게, 때론 암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특히 소설의 처음에 인상적이고 재미있는 부분이 바로 퀴퀘그가 등장하는 대목이다. 남태평양 지역 출신의 작살잡이는 대머리에다, 얼굴과 전신에 문신을 식인종이다. 심지어 이슈미얼이 여인숙에 곳을 찾아 들어왔을 퀴퀘그는 방부처리된 뉴질랜드 원주민의 머리를 팔러다니는 중이었다. 주머니에는 은화 뿐이던 이슈메일에게 잠자리의 선택권이 충분히 주어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 여인숙 주인은 퀴퀘그가 머무는 방의 침대가 크니, 함께 자라고 이슈미얼에게 제안하며, 흥미로운 브로맨스 예고한다.  미리 침대에 들어간 이슈미얼이 늦게 돌아온 퀴퀘그의 행동거지를 경악하며 바라보는 장면이나, 퀴퀘그가 알게되어 놀란 이슈미얼이 어린아이처럼 집주인을 부르는 대목은 비극적인 소설의 아마도 안되는 희극적인 요소일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런 상황에서 이슈미얼은 무지는 두려움의 아버지다라는 웃픈 문장을 인용하며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는 부분이다. 이슈미얼은 술취한 기독교인이랑 자느니 정신 멀쩡한 식인종이랑 자는 낫지라며 생각을 바꾸는 것이다. 상대방도 나처럼 겁에 질려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멜빌이 소설을 통해서 보여주는 이런 인식은 당시 시대적인 배경을 떠올려볼 결코 흔하지 않다. 이러한 부분은 멜빌이 각종 허드렛일과, 상선의 선원, 포경선원, 교사 등등을 전전하며 획득하게 문제의식이 표출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부분들이 당시 진지한기독교인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았을까 상상해보게 된다


 

가지 주목해보는 점은, 허먼 멜빌이 소설의 주인공(화자) 여인숙 주인과 같은 인물들의 이름 설정에 관한 부분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화자 이슈미얼은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을 고려하면 사회에서 버려진 ’, ‘추방자 이미지를 암시한다. 귀족 신분도 아니고, 이런 저런 일을 하며 떠도는 인물, 일개 교사이기도 했던 인물로서 이슈미얼이 소설에서 맡고 있는 상징적인 역할은 9(설교) 중심적으로 언급되는 요나와도 연결된다고 보인다. 점은 독서일기를 쓰는 마지막 날에 다시 언급할 있겠다. 지금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멜빌은 여인숙 주인의 이름을 피터 코핀으로 설정해두었는데, 또한 스쳐지나가는 인물이긴 하지만 하나의 잠재되어 있는 상징과도 같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코핀 사망자들을 싣는 관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리고 피터 사실 베드로 영어식 표현이다. 성서에 등장하는 베드로는 어부로서 예수의 제자가 되는 사람이기도 하며, 예수가 유대인들의 모함을 받아 로마 집정관에게 체보될 , 예수를 부인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따라서 피터 코핀 해석에 따라 베드로의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그리고 소설의 진행 과정에서 크게 등장하는데, 또한 읽어나가면서 추후 연결지어도 같다. 오늘 읽으며 주목해본 것은 멜빌이 거대한 서사를 밀고 나가면서도 이러한 작고 세심한 디테일을 놓치지 않고 설정해두고 있다는 점이다.

 




(주목해본 구절


(42) “이런 연유로 나는 포경 항해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경이로운 세계로 가는 거대한 수문이 활짝 열렸고, 나를 결심으로 이끈 열광적인 상상 속에서 끝없는 행렬을 지은 고래들이 마리씩 짝을 지어 영혼 깊숙한 곳으로 흘러 들어왔다. 그리고 모든 고래들 한가운데, 하늘에 우뚝 솟은 설산처럼 거대한 두건을 유령 하나가 떠다니고 있었다.


: 부분이 특별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기 보다는 나중에 등장하게될 고래 이미지를 예고하는 부분인듯 하기 때문에 주목해보게 되었다. 만년설이 덮여있는 거대한 산의 모습은 먼지와 같은 인간에게 외경심을 불러일으킨다. 산의 거대함과 동시에 인간의 왜소함을 동시에 인식하게 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더하여 눈의 하얀 색이 불러일으키는 어떤 불가항력적이고 완전무결하면서도 두려운 감정들과 같은 이미지는 나중에 등장하게될 하얀 고래의 이미지와 연결되는 같다. 이슈미얼이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야하는 당위가 다소 신비주의적으로 처리되고 있다는 인상을 주지만, ‘영지주의혹은 유대교 신비주의 일부 영향을 받았다고도 하는 멜빌에게는 설득력이 있는 소설 전개 방식인지도 모르겠다.  

 



(90) “설교단이 세상을 이끌어나간다. 하느님의 성마른 노여움이 제일 먼저 발견되는 곳이 바로 그곳이니, 뱃머리는 최초의 맹공을 견뎌내야만 한다. 순풍이나 역풍의 신에게 부디 순풍을 보내달라고 처음 기원하는 곳도 바로 그곳이다. 그렇다, 세상은 출항한 배와 같고, 항해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설교단이 바로 배의 뱃머리다.


: 소설은 아마도 잠시의 예외 없이 기독교적인 배경 속에서 전개되고 있다. 예배당은 신의 말씀을 듣는 신성한 장소이면서도 기독교 국가의 국민들에게 하나의 지역적 구심점이 되는 공간이기도 하다. 뉴베드포드는 포경산업으로 미국 내에서도 예외적으로 부유한 퀘이커 교도들이 많이 사는 곳이다. 이들에게 포경산업은 신이 허락해준 소명이기도 이다. 포경업이라는 특수한 산업이 중심인 이런 지역의 예배당을 맡고있는 매플 목사 역시 젊은 시절 작살잡이를 해본 적이 있는 카리스마있는 혹은 연극적인 상황을 연출하는 인물이다. 한편 뉴베드포드라는 지역의 특수한 상황을 고려하며 기독교 문명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은 어떤 점에서는 양가적 관점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 멜빌은 기독교 안에서 있으면서도 때로는 기독교를 비판적으로 보는 일종의 경계인이란 느낌을 받는다. 설교단의 비유역시 세상사에서 차지하고 있는 기독교의 위치 혹은 역할 비중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번역오류)


(101) ‘요빠로 가는 배를 탐으로써 요빠에서 배를 탐으로써






(42면)
"이런 연유로 나는 포경 항해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경이로운 세계로 가는 거대한 수문이 활짝 열렸고, 나를 이 결심으로 이끈 열광적인 상상 속에서 끝없는 행렬을 지은 고래들이 두 마리씩 짝을 지어 내 영혼 깊숙한 곳으로 흘러 들어왔다. 그리고 그 모든 고래들 한가운데, 하늘에 우뚝 솟은 설산처럼 거대한 두건을 쓴 유령 하나가 떠다니고 있었다."

(90면)
"설교단이 이 세상을 이끌어나간다. 하느님의 성마른 노여움이 제일 먼저 발견되는 곳이 바로 그곳이니, 뱃머리는 최초의 맹공을 견뎌내야만 한다. 순풍이나 역풍의 신에게 부디 순풍을 보내달라고 처음 기원하는 곳도 바로 그곳이다. 그렇다, 세상은 출항한 배와 같고, 그 항해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설교단이 바로 그 배의 뱃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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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모비딕


허먼 멜빌 지음  | 록웰 켄트 그림  |  황유원 옮김  |  문학동네



새해를 맞아 록웰 켄트의 그림이 곁들어진 허먼 멜빌의 일러스트 모비딕 버젼을 읽기에 도전해봅니다. 짧지만 꾸준히 30개의 독서 일기가 모이길 기대하며…. 오늘은 본문이 시작하기 전에 어원편을 읽어봤습니다.  소설의 시작에 인용된 수많은 발췌문들을 보면, 멜빌이 자신의 방에서 홀로 권의 소설을 써내기 위해 읽었던 책들 일부를 짐작해볼 있습니다. 멜빌은 고래 대한 언급이 나오는 수많은 문헌들을 보고 발췌하여 모아놓았네요. 하느님이 만드신 고래와 요나의 이야기가 담긴 성경에서부터 시작하여 로마의 현인들, 몽테뉴, 셰익스피어, 밀턴, 괴테, 호손, 각종 여행기 항해기, 에드먼드 버크, 다윈, 페일리의 글이 모여있습니다. 처음 다른 출판사의 판본으로 읽어봤을 때는 그다지 주목하고 보지 않았던 부분입니다. 다윈은 대학시절 신학자 생물학자였던 페일리의 자연신학 항상 옆에 끼고 다니며 초자연적이며 지적 존재인 신이 자연을 설계했다 페일리의 주장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멜빌은 페일리와 다윈의 주장과 이들이 주장한 이론이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 바로 이런 맥락을 알고 있었다는 반증을 어원편을 통해서도 짐작해볼 있습니다.   


저는 이미 모비딕 읽었기 때문에 발췌문들 중에 어떤 점이 소설에 ·간접적으로 사용되었을지 정황이 조금 눈에 들어오는 같습니다. 그런데 이번 읽기에서는 흥미로운 점이 모비딕 출간한 해가 1851년인데, 다윈이 비글호를 타고 오랜 항해를 마치고 자신의 항해기를 출간한 것이 1839년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인류가 생물과 세계에 대한 관점을 바꾸는데 영향을 미친 종의 기원 출간한 해가 1859년이라는 점이구요. 그러니까 모비딕 다윈의 항해기와 종의 기원 세상에 나온 시기 사이에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소설을 읽어가다 보면 나오겠지만, 멜빌은 생물의 진화에 관한 아이디어가 등장하는 대목이 나올 겁니다. 물론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오류가 있는 점이 있지만 모비딕 당시 생물의 진화에 관한 최첨단 이론의 세례를 받은 소설이기도 하다는 점입니다. 물론 멜빌의 소설이 이교도적이고 신성모독적이라는 당시 신앙인들의 비판을 받기도하고 결과 인기를 누리진 못하고 잊혀지듯 했지만, 작가의 입장에서 당시에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어쨌든 오늘은 다윈의 항해기에서 발췌한 인용문으로 모비딕읽기를 시작해봅니다.


(32)

한번은 아마도 수놈과 암놈이었을 괴물(고래) 마리가 해안(티엘라델푸에고)에서 돌을 던지면 맞힐 수도 있을 만큼의 거리, 너도밤나무가 가지를 드리운 바로 아래서 교대로 천천히 헤엄치는 모습을 보았다.

- 다윈, 어느 박물학자의 항해기

 

 

록웰 켄트의 목판화가 담긴 일러스트 버전은 너무나 유명하여, 록웰 켄트의 대표작으로 인정받고 있다고 합니다. 록웰 켄트의 그림이 있는 모비딕초판은 구하기도 어렵고 가격이 상당하고 합니다. 아직 그의 그림들을 훑어 것은 아니지만, (그림을 모르는 비전문가의 관점에서 보아도) 그의 그림들은 매우 간결하면서도 강렬한 매력이 느껴집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에는 선이 분명한 멜랑콜리가 느껴진다고 해야할까요. 그의 판화그림은 비극 모비딕 너무나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그림 하나 하나가 영화의 포스터 장을 보는 같이 명료합니다. 록웰 켄트의 그림이 있는 초판본을 구할 수는 없지만, 번역본이 나온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싶고 충분히 만족스럽습니다. 특히 분권되어 있지 않고 권의 두툼한 책으로, 마치 거대한 고래와 같은 묵직함을 주고 있다는 점이 무엇보다 마음에 듭니다. 그리고 번역자의 꼼꼼한 주석작업에도 주목해보게 되네요. 다른 판본에서 언급되지 않았던 부분들에 대한 주석이 더해져서 다시 읽으면서 새롭게 보이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다시 읽기 Re-reading 기쁨을 새롭게 맛보기 시작했습니다.  이번에 다시 읽어보는 기회에는 선이 뚜렷한 록웰 켄트의 그림을 보느라 달이 금방 지나갈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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