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제와 사회적 죽음
올랜도 패터슨 지음, 김혁.류상윤 옮김 / 이학사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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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기다렸는데 마침내 나왔군요. 노예제도의 오랜 역사에 대한 책 같아 참여했습니다. 19세기 조선의 노비 인구 비율은 19세기 노예제 의존도가 최고조에 달했던 미국 남부 오예 인구 비율보다 높았다는 대목부터 흥미를 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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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 창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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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꾼에 사는 세상을 꿈꾸며

-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창비] (2022)




 

시간이 거꾸로 흘러가는 상상을 해본다. 아버지의 해방일지(이하 해방일지)의 화자(아리)의 아버지가 아리를 번쩍 들어 올려 목말을 태우고 어머니 마중 나가던 순간. 화자의 아버지가 빨치산으로 입산하기 전, 사시도 아니었던 10대의 의기양양한 아버지의 모습을 사진에서 확인하던 장면처럼 말이다. 내게도 아리처럼 나의 전부였던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반목하던 시절이 있었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자랐지만, 해방일지를 읽고 나니 세월이 지나면서 사람이 좀 더 너그러워질 수는 있겠다 싶었다.


 

정지아의 소설 해방일지는 어느 노동절 아침, 과거에 구례 지역을 중심으로 빨치산 활동을 했던 여든 두 살의 남자 고상욱의 죽음으로 시작한다. 화자는 이 남자의 딸, 그러니까 빨치산의 딸이다. 아버지의 장례식장에 조문 온 사람들을 처음 마주하며, 굵거나 가늘게 아버지와 연결되어 있던 사람들로부터 비로소 아버지를 좀 더 이해하게 된다. 결국 화자는 빨치산 아버지가 아닌, 나의 아버지를 찾게 되는 이야기다.


 

이야기의 시대적 배경은 1948년의 여순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아리의 아버지는 이 사건에서 간신히 살아남았으나 곧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때 고문후유증으로 사시가 되었다. 이는 개인에게 드리워진 우리 현대사의 상흔이었다. 아버지의 사시는 시대와 반목하고 시대에 부적합했던, 한 남자의 운명을 보여주는 듯했다. 사시의 특징 하나는 그가 어디를 보고 있는지 타인도 잘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6년 동안의 수감 후 출소하는 날 함께 찍었던 가족사진에서도 어딘가를 응시하지만 어디를 보는지 알 수 없었던 아버지의 불분명한 시선을, 딸은 기억해냈다. 아버지는 이제 곁에 없었지만 사진 속 아버지의 골똘한 응시는 내게 이렇게 묻는 듯했다. ‘너희는 지금 어디를 보고 있는가?’, 라고. 소설을 읽는 동안 이 질문이 줄곧 머릿속을 맴돌았다.


 

장례식장에 조문 온 사람들은 아버지의 생전에 어떠한 식으로든 그와 얽히고 엮인 인연들이었다. 70년이 다 되어서야 아버지의 동생(작은아버지)은 망자의 영정을 마주보게 되었다. 여기에 빨치산의 조카라는 이유만으로 창창한 미래가 족쇄 채워진 삶을 살아야 했던 아리의 사촌 오빠 길수, 빨치산 동료의 동생으로 월남전에서 한쪽 다리를 잃고 돌아온 절름발이 노인은, 이들이 지나온 이 세계가 얼마나 폭력적이었는지 증언한다. 물론 아버지의 관계망에는 안쓰럽고 애처로운 이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베풀거나 심지어 목숨을 살려준 인연도 있었다. 아버지의 담배 친구였던 슈퍼마켓집 10대 소녀도 조문을 와 눈물을 훔치는 기이한 상황은, ‘빨치산의 딸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아버지의 숨은 세계를 보여준다.


 

이렇듯 화자가 확인하는 아버지의 여러 인연들은 그가 이 세상에 남겨놓은 촘촘한 그물망이었다. 이 관계의 그물망에는 무참한 시절, 시대의 아픔을 함께 겪어 낸 아름다운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득했다. 아리의 세계에서 볼 수 있는, 깔끔하고 매끄러운 인연이 아니라, 질퍽하고 끈적거리며 질긴 인연들의 세계가 아버지의 세계였던 것이다. 아버지가 살아온 구례라는 상징적인 장소는, 오랜 인연이 만들어 온 작은 감옥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한번으로는 끝내지지 않는 마음, (...) 질기고 질긴 마음, 얽히고 설켜 끊어지지 않는 마음으로 이어진 세계이기도 했다. 부모 세대를 바라보는 내 마음도 그랬다. 이렇듯 잘 보이지 않는 인연들의 그물망으로 서로 돕고 의지하며 때론 서로 일으켜주며 살아온 세계를 나는 무겁고, 무섭고, 그리고 부러웠”(197)던 심정으로 읽었던 것이다.


 

화자 아리는 장례식장에서 비로소 제대로 마주하게 된 아버지의 인연들을 좀 더 이해하게 되었다. ‘빨치산의 딸임을 항상 억울해했던 만큼 아리는 이제 아버지의 인연들 각자의 사정을 헤아려 보게 되었다. 나아가 이들로부터 결국 아버지의 수많은 얼굴들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혁명가 아버지, 경우 바른 아버지를 넘어, 어머니에게 하자고 조르기도 했던 인간아버지의 모습을, 따스해진 유골을 통해 느꼈다. ‘생각이 다르면 안 보면 되지, 맨날 싸우면서 왜 맨날 같이 놀아요?’라고 묻는 딸에게 늘 해주는 아버지의 말은 긍게 사램이제였다. “사람이니 실수를 하고 사람이니 배신을 하고 (...) 용서도 한다”(138)는 아버지는 늘 누군가의 사정을 들여다보려 애쓰는 사람이었다. 이렇듯 아버지의 이 하염없음, 신념보다는 사람의 도리로서 그러했다. 그가 죽는 날까지 인간임을 잃지 않았으니 말이다.


 

지금 우리 시대는 자신의 신념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서로 마주보려는 시도도 하지 않게 된 시절이다. 다시 소설을 읽는 동안 아버지의 초점 없는 시선을 환기해본다. 어딘가에 멈추지 못하고, 머물지 못했던 가족사진 속 그의 시선을. 우린 지금 어디를 바라보고 있을까? 또 우린 어디를 바라보아야 할까? 이들은 뚜렷한 정답이 없는 물음이었지만, 해답의 실마리는 보인다. 한때 서로 총을 겨누기도 했던 박선생과 아버지의 공존에서 찾을 수 있다. 이는 상대방도 나와 같은 인간임을 잊지 않는 일, 또 아버지가 말한 사람의 도리이기도 하다. 완전무결하지 않은 나, 마찬가지로 완전무결하지 않은 상대방이 얽히고 설켜, 끊어지지 않는 그 마음을 간직하는 일. 아버지의 인연들이 응시하는 지점에는 바로 이렇게 인간에 대한 신뢰가 남아 있었다. 이는 아버지의 동창 박한후 선생의 한 마디, “항꾼에(함께) ... 올라네”(50)에 담겨 있었다. 아리에게 아버지 없는 노동절의 아침은 꿈결처럼 낯설었을 것 같다. 대신 아리는 이제 항꾼에 사는 세상을 새롭게 꿈꾸기 시작했을 테다.





[책속으로]

[1] "작은아버지의 사정은 작은아버지의 사정이지, 그러나 사람이란 누군가의 알 수 없는 사정을 들여다보려 애쓰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아버지는 그렇게 모르쇠로 딴 데만 보고 있으면 안 되는 것 아닌가, 그런 생각도 드는 것이다."(42) - P42

[2] "항꾼에, 올라네, 말 사이의 짧은 침묵이 마음에 얹혔다. 저런 말이 하염없이 인생을 살았던 한 남자의 애틋한 정일지 몰랐다."(50) - P50

[3] "한때 적이었던 사람들과 아무렇지 않게 어울려 살아가는 아버지도 구례사람들도 나는 늘 신기했다. 잘 죽었다고 침을 뱉을 수 있는 사람과 아버지는 어떻게 술을 마시며 살아온 것일까? (...) 긍게 사램이제. (...) 사람이니 실수를 하고 사람이니 배신을 하고 사람이니 살인도 하고 사람이니 용서도 한다는 것이다."(138) - P138

[4] "무엇에도 목숨을 걸어본 적이 없는 나는 아버지가 몇마디 말로 정의해준다 한들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옳았든 틀렸든 아버지는 목숨을 걸고 무언가를 지키려 했다."(147) - P147

[5] "구례라는 곳은 어쩌면 저런 기이하고 오랜 인연들이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엮인 작은 감옥일지도 모른다."(163) - P163

[6] "그런데 죽은 아버지가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살아서의 모든 순간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자신의 부고를 듣고는 헤쳐 모여를 하듯 모여들어 거대하고도 뚜렷한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었다."(181) - P181

[7] "여기 사람들은 자꾸만 또 온다고 한다. 한번만 와도 되는데. 한ㄴ번으로는 끝내지지 않는 마음이겠지. 미움이든 우정이든 은혜든, 질기고 질긴 마음들이, 얽히고 설켜 끊어지지 않는 그 마음들이, 나는 무겁고, 무섭고, 그리고 부러웠다."(197) - P197

[8] "죽음이란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것, 아버지는 보통 사람들보다 더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으니 해방의 기쁨 또한 그만큼 크지 않을까, 다시는 눈을 뜰 수 없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198) - P198

[9] "죽음으로 비로소 아버지는 빨치산이 아니라 나의 아버지로, 친밀했던 어린 날의 아버지로 부활한 듯했다. 죽음은 그러니까, 끝은 아니구나, 나는 생각했다. 삶은 죽음을 통해 누군가의 기억 속에 부활하는 거라고. 그러니까 화해나 용서 또한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231) - P231

[10] "천수관음보살만 팔이 천개인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도 천 개의 얼굴이 있다. 나는 아버지의 몇 개의 얼굴을 보았을까? 내 평생 알아온 얼굴보다 장례식장에서 알게 된 얼굴이 더 많은 것도 같았다."(252) - P252

[11] "오래 손에 쥐고 있었던 탓인지 유골이 차츰 따스해졌다. 그게 나의 아버지, 빨치산이 아닌, 빨갱이도 아닌, 나의 아버지."(265) [마지막 문장] - P265

[12] "사램이 오죽하면 글것냐. 아버지 십팔번이었다. 그 말을 받이들이고 보니 세상이 이리 아름답다."(268) [작가의 말 중에서] - P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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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가 되는 법 - 읽고 쓰는 사람으로 책 세계를 만끽하기 위하여 땅콩문고
김성신 지음 / 유유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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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가가 많은 사회는 병들지 않는다

- 서평가 되는 법


 김성신 지음 [유유] (2025)



당신이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다. 일단 서평가가 되어 보라. 되기 어렵지 않다. 책을 읽기만 했던 것에서 딱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책에 대해 쓰기만 하면 된다. (...) 서평가가 되는 것은 어이없을 정도로 쉽다.”(140)


 

서평가 되는 법을 쓴 작가 김성신은 서평가들의 서평가’, ‘서평가들의 멘토라 할 수 있겠다. 이력을 보면 30년 넘게 출판계에 몸을 담고서, 책을 알리고 책에 대해 글을 쓰며 방송에도 출연하여 책을 알려온 작가였다. 그런 출판 전문가가 이번에는 서평가 되는 법에 대해 정리한 글이다. 그가 말하는 서평가 되는 법, 책을 읽기만 하면 누구나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읽은 책에 대해 쓰기만 하면 된다고. ‘, 쉽죠~!’라는 유행어가 떠오른다. 이렇게 그는 30여 년의 노하우를 담아 서평가 되는 법을 한 문장으로 얘기해버렸다.

 


그럼 이제 무슨 할 얘기가 더 남아있단 말인가? 일단 책을 읽기만 하면 서평가가 될 수 있다고 했으니, 책의 나머지에는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책의 나머지 지면에는 저자가 끌어들인 주변 지인들이 서평가로 거듭나는 과정 담겨 있다. 이들은 저자 주변의 느슨했던 지인들이 책을 매개로 어떻게 그와 친밀하고 인간적인 관계를 맺으며 함께 가는 동료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는지도 볼 수 있다.

 


코미디언이 책을 본격적으로 이야기하며 웃기는 서평가가 된 에피소드, 또 오랜 지인이자 호텔에서 30년 일해온 셰프를 꼬드겨 요리하는 서평가,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게 도운 이야기도 만날 수 있다. 물론 글만으로 서평가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이번에 새로 알게 되었다. 책을 읽은 감상을 자신만의 해석을 더해 독후화라고 명명한 독후 감상 활동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글이 새로운 매체로의 창작으로 이어지기도 하는 신기한 경험이다. 이렇듯 저자는 책을 읽은 이라면 누구나 서평가가 될 수 있다고 단언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서평과 독후감이 다르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았고, 실제로 서평가들의 글을 읽어보면 학창시절에 종종 머리를 쥐어뜯으며 써가야 했던 독후감과도 사뭇 다르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 서평 쓰기는 독후감 쓰기와는 분명 뭔가 다르다. 하지만 이 느낌에서 나아가 무언가 서평다운 글을 쓰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는 언제나 나의 큰 관심주제다. 내가 쓴 글을 읽으면 언제나 어딘가 부족함을 느끼던 차였다. 물론 내 글의 기술적인 부분, 특히 표현상의 부족함도 많을 테지만, 저자의 말에 따르면 기술적인 면이 서평의 본질은 아니라고 하니 저자는 이에 대해 뭐라고 이야기할까.

 


좋은 글은 좋은 표현이기보다는 좋은 생각이다.”(18)

 


뭐랄까, 이 단비 같은 명쾌한 답변이라니. 내게 무엇보다 부족한 건 아마도 좋은 생각의 부족이 아니었을까. 좋은 생각에 이르도록 고민하는 일이야말로 서평가가 주목하여 해결해야할 부분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저자가 이야기하는 서평가 되기의 요건 중 가장 본질적이고 중요한 것이 있었다.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서평의 본질은 사랑과 공공성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공공성은 글을 쓰고 발표하는 과정에서 이미 모든 서평가가 무의식중에 염두에 두는 조건이 아닌가?

 


그럼 서평가의 본질로서 저자가 이야기하는 사랑은 뭘까? 이쯤 되면 나는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라 자부하는 독자들이 자신감을 얻을 만 하지만, 이것이 어떤 사랑인지는 좀 따져봐야 할 것 같다. 그가 서평가의 자질로 요구하는 사랑이란 결국 존중이었다. 서평글을 매개로 사랑의 작대기를 연결해 보자면, 글을 쓴 사람과 이 글을 읽는 사람이 이어진다. 곧 서평을 쓰는 이들은 바로 이 두 관계를 고민해야 한다는 말이 아닐까.


 

이를 또 내 방식으로 풀어보면, 저자가 이야기하는 서평가의 사랑은 애써 글을 쓴 사람과 애써 이 글을 읽게 될 사람에 대한 환대가 아닐까. 저자가 말하는 쓰는 자와 읽는 자에 대한 존중을 조금 달리 얘기하자면, 결국 쓰는 이와 읽는 이에 대한 마음가짐, 배려하기에 이르기도 할 것이다.


 

서평은 책을 매개로 하는 비평의 한 장르라고 볼 수 있겠다. 이 때 사람들은 비판적인 읽기를 떠올리다 그만 비판적인 공격’, 혹은 비난을 하기 쉽다. 자신의 잣대를 기반으로 따져가며 읽는 행위에 잘못이 있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 비판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판을 하려면 상대방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정성껏해야 한다고 본다. 뾰족하고 날카로운 서평도 결국 대상(작가와 독자)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먼저였던 것이다.


 

이렇게 혼자 놀이하듯 정리하고 나니, 저자의 말들이 더더욱 마음에 와 닿는다. 저자와 같은 선배를 만날 수 없는, 나와 같은 독자를 위해서도 이런 이야기들을 애써 이야기 해주어서 고마운 마음이 드는 것이다. 물론, 누구나 서평가가 될 수 있지만 아무나 되어서는 안 된다.”(18)라고, 소심한 나에게 처음부터 겁을 잔뜩 주긴 했지만 말이다. 이렇게 이해를 하니 그가 거듭 당부하고 있는 서평가의 요건, ‘사랑공공성또한 이 둘이 서로 별개의 것도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서평가는 책(혹은 저자)과와 책을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단순히 연결하는 역할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기능적인 면에서 AI가 서평가를 가까운 미래에 대신할 수 있는 영역이 있겠지만, 도덕성·윤리성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AI에게 대상에 대한 존중과 아끼는 마음, 그리고 공동체의 안위를 염려하고 스스로 긍정적인 영향력을 전달할 수 있으리라 기대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저자의 말대로 이러한 마음가짐을 지닌 서평가가 점점 더 많아진다면, 정지우 작가의 표현대로 외롭지 않고 병들지 않는공동체를 가꾸는 데 서평가가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서평은 의외로 힘이 세다.”(140)는 작가의 말을 믿어 보자.  




[책 속으로]

[1] "서평가가 되고 싶다면 ‘공공성’이란 단어만은 절대 잊지 말아야 한다."(17) - P17

[2] "누구나 서평가가 될 수 있지만 아무나 되어서는 안 된다."

"좋은 글은 좋은 ‘표현’이기보다는 좋은 ‘생각’이다."

"책에 대한 사랑과 무엇보다 공공성에 대한 엄격한 자기 검증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무엇인가 되고 싶다면 그 일의 본질을 이해해야 한다. 서평의 본질은 바로 사랑과 공공성이다."(18) - P18

[3] "나는 파불루머 프로젝트를 통해 성실한 사람이 유능해지고, 유능한 사람이 훌륭해지고, 훌륭한 사람이 멈추지 않고 계속 정진하는 진정한 고수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56) - P56

[4] "그림은 명사지만 ‘그리다’는 동사지요. 그림은 아무리 대단해져 봐야 고작 비싼 물건 취급이나 받지만 ‘그리는 행위’는 때로 숭고해서 ‘그리는 사람’은 위대함에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57, 독후화 화가 천지수의 말) - P57

[5] "탈북인에게는 남한 사회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내비칠 창구가 없다. 대한민국 사회는 2000년대 이후에도 여전히 체제 우월성의 증거쯤으로만 탈북인들을 소비하고 있기 때문이다."(71) - P71

[6] "서평의 본질은 책(또는 저자)과 독자를 잇는 것이다. 이 일을 잘 하려면 대상에 대한 존중이 있어야 한다. 책과 그 책을 쓴 이 그리고 독자에 대한 존중 말이다. 그런 마음이 없다면 아무리 화려한 글 솜씨를 동원해 책에 대해 떠들어도 결코 좋은 서평가라고 할 수 없다."(127)

"책을 많이 읽는다고 해서 반드시 훌륭한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니다. 히틀러도 스탈린도 유난스러운 독서가였다. (...) 독서에는 실체적인 위력이 있어서 잘못된 철학이나 생각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기도 한다."(127) - P127

[7] "서평의 핵심은 저자와 독자를 향한 존중이다. 좋은 서평가가 되고 싶다면 ‘나는 저자와 독자를 여전히 존중하고 있는가?’하고 스스로 자주 되물어야 한다."(128) - P128

[8] "당신이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다. 일단 서평가가 되어 보라. 되기 어렵지 않다. 책을 읽기만 했던 것에서 딱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책에 대해 쓰기만 하면 된다. 공공성에 대한 인식만 잘 갖추고 있다면, 서평가가 되는 것은 어이없을 정도로 쉽다."(140) - P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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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25-05-13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은 ‘사랑’이고, 사랑을 알려면 ‘사람’과 ‘살다·살리다(살림)’와 ‘사이(새)’라는 낱말을 함께 ‘살펴’야 합니다. 한자말 ‘존중’은 ‘사랑’하고 멉니다. 사랑을 안 하더라도 얼마든지 모시거나 섬기거나 높일 수 있으니까요. 한자말 ‘배려’도 ‘사랑’하고 멉니다. 사랑이 없더라도 얼마든지 ‘마음쓰기’를 하면서 자리를 내주거나 돈을 나눠주거나 밥을 나눌 수 있습니다.

오늘날은 ‘사랑’이라는 낱말을 사랑 그대로 바라보려 하지 않고서, 자꾸 다른 낱말을 끼워맞추려 하기 때문에 오히려 사랑을 더욱 모르거나 등지면서, 사랑흉내나 사랑시늉이나 사랑척으로 기웁니다. 이를테면 ‘좋다·좋아하다’를 섣불리 끼워맞추려 하는데, ‘좋다·좋아하다 = 마음에 들다’이고, ‘마음에 들다 = 마음에 안 들면 모두 쳐낸다’는 밑뜻입니다. 그래서 ‘좋은글·좋은책’이란,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 안 쳐다보거나 치우거나 등진다”는 굴레로 치닫습니다.

한자말을 풀자면, ‘서평 = 글을 짚으며 말하다’요, ‘독후감 = 글을 읽고서 느끼는 대로 말하다’입니다. ‘서평가’란 “글을 찬찬히 짚으면서 꾸밈없이 말하는 사람”일 노릇이라서, 서평가라는 사람은 모름지기 ‘까칠이’일 수밖에 없습니다. 꾸밈없이 말하려면 ‘좋은말’만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듣기에 나쁜말”을 자주 해야 하니까요. ‘독후감’은 누구나 느끼는 대로 밝히는 말이기에, 좋거나 나쁘다고 가를 수 없이, 저마다 다른 삶 그대로 드러내는 말입니다.

여러모로 보면, 우리는 ‘서평가’가 되기보다는 “사랑을 하며 살림을 짓는 새로운 하루를 스스로 그려서 짓는 사람”으로 서면 됩니다. 스스로 사랑을 배우고 익혀서 나누는 사람이라면, 글을 읽건 일을 하건 놀이를 하건 노래를 하건 논밭을 일구건 부릉부릉 쇳덩이를 몰건, 언제나 ‘사랑’을 바탕으로 움직이기에, 서로 살리는 길을 저절로 펴게 마련입니다.

굳이 어려운 한자말로 ‘공공성’이라 할 까닭이 없이, 어린이 곁에 서는 쉬운 우리말인 ‘같이’와 ‘함께’와 ‘모두’와 ‘나란히’와 ‘서로’를 그때그때 다르게 살피고 짚으면서 쓸 줄 알면 된다고 느낍니다.
 





인간과 타자에 대한 철학자의 탁월한 시선

- 한가함과 지루함의 윤리학

: 어떻게 살 것인가

 

고쿠분 고이치로 지음

김상운 옮김 [arte] (2025)

 



일본의 철학자 고쿠분 고이치로의 책 한가함과 지루함의 윤리학을 통독하면서 우선 떠오른 감상은 탁월하다는 표현입니다. 기억에 남아 있는 내용은 많이 없지만, 저자가 철학자인지라 한가함지루함이라는 개념부터 정리하고 논의를 시작합니다. 사람이 토끼 사냥을 나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누가 그에게 고되고 때로는 다치거나 생명의 위협을 느낄 수 있는 사냥 활동에 나가는 대신 잡은 토끼를 던져줄 때, 그 사람이 행복할까라고 묻는 겁니다. 그렇지 않을 것이라 예상할 수 있어요. 저자는 그 이유가, 인간은 지루함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고 진단합니다. 기분전환을 위해서라고 말이죠. 조금 다르게 표현하면, 인간에게 열중할 수 있는 대상이 있다는 것, 그러니까 몰입의 대상이 있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저는 여기에 인간이 행복할 수 있는, 지복에 이르는 열쇠 한 가지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줄곧 저자의 글에 탁월하다를 연발하는 이유는, ‘한가함지루함이라는 키워드로 인류 문명의 핵심을, 그리고 우리 사회와 인간의 모습을 설명해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한 가지 이유는 철학에 익숙하지 않은 저에게도 이해가 가도록 쉽게 썼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런 글쓰기를 하는 저자를 또 다른 수준(another level)'의 저자라고 분류합니다. 철학 전공자가 보시기에 어떨지는 모르겠네요. 적어도 저에게는 이 책과의 만남이 여러 모로 놀라움을 줍니다.

 

어떤 면에선 재독 철학자 한병철을 떠올리게도 합니다. 철학자 고쿠분 고이치로는 일본의 한병철이라고 평가한다면, 좀 더 친근하게 여기실 수 있으실지. 다만 한병철의 문장은 좀 더 압축적이라는 느낌을 줍니다. 문장 자체가 고이치로의 문장보다는 좀 더 밀도감이 있다는 말입니다. 반면 철학 비전공자에겐 고이치로의 문장이 좀 더 친절하게 다가옵니다. 저자는 우리 인류의 문명, 그리고 문화를 진단하고 요약하면서 독자가 잘 이해하도록 글쓰기를 하는 저자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철학 비전공 독자로서는 우리 현대 사회와 인간의 모습을, 이해하기 쉬운 문장으로 써주는 저자의 등장이 반가웠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저는 탁월하다는 생각을 줄곧 하게 됩니다. 이 책으로 저자의 글에 입문했는데, 곧바로 팬이 되어 버린 셈입니다. 그만큼 현재 제 수준에서 저자의 사유와 글쓰기에 감탄하며 읽었습니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지점은, 이 책의 6장인 한가함과 지루함의 인간학 때문입니다. 이 장의 부제는 도마뱀의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을까?’인데요, 도대체 한가함과 지루함을 이야기하는 책에서 도마뱀이 갑자기 뭔 소리인지 궁금하실 겁니다. 이 장(chapter)의 시작은 햇볕을 쬐는 도마뱀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햇볕을 쬐고 있는 도마뱀은 햇볕과 바위를 어떻게 경험하고 있을까?’라고 질문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 질문을 정면으로 다룬 한 생물학자의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6장에서 핵심이 되는 개념이 바로 움벨트(umwelt, 둘레세계, 주변세계)이라는 개념인데요, 이 개념을 본격적으로 소개한 건 19-20세기에 걸쳐 살았던 에스토니아 출신의 동물행동학자 야콥 폰 윅스퀼입니다. 그는 1934년에 출간한 책 <동물들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에서 이 둘레세계개념을 소개했습니다. 이 개념은 생물이 저마다의 감각기관을 통해 인지한 세계를 뜻합니다. 말하자면 각 생물체의 감각을 통해 인지된(혹은 구성된) 세계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억지로 플라톤 철학과 연결 짓자면, 각 존재마다 감각기관을 통해 구성된 어떤 대상에 대한 이미지를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지극히 주관적인 세계를 말하죠. 모든 감각적인 생물의 주체성에 주목하고 이를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고, 동시에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철학자 하이데거와 같은 사람에게서 말이죠. 이 이야기는 뒤에서 다시 언급하려 합니다. 어쨌든 이 모든 생물체의 주체를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근대 철학의 문을 연 칸트를 떠올리는 분도 있을 겁니다. 이런 맥락에서 윅스퀼은 칸트주의 생물(생태)학자라고 불리는 이유일 것입니다. 이 책은 제가 올해부터 진행하는 과학책 읽기 모임의 두 번째 선정도서이기도 했습니다.


 

다시 한가함과 지루함의 윤리학6장에 주목하면, 이 장이 바로 윅스퀼이 제시한 둘레세계의 개념 위에서 전개된다는 점이 흥미롭네요. 처음에 햇볕을 쬐는 도마뱀에서 진드기로 갔다가 결국에는 인간에 이르고 있는데요,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는 인간에게 둘레세계 개념을 적용하는 것은 잘못이다’(335)라고 비판했다고 고이치로는 말해줍니다. 하이데거는 당대의 생물학자 윅스퀼을 비판했다고 소개하는 거죠. 그 이유는 동물은 그 자체로서의 사물을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336). 하지만 고이치로는 오히려 하이데거의 논리를 비판합니다. 하이데거가 동물은 사물을 인식하지 못하지만 인간은 할 수 있다는 말을 하고자 억지를 부리고 있다고 말입니다. 고이치로의 말대로라면 대철학자 하이데거가 이 부분에서만큼은 다소 무리수를 둔 것 같거든요. 하이데거는 인간이 (동물과 달리) 특별하다는 신념을 갖고, 이에 합치되는 주장을 전개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합니다. 어쩌면 동물과 인간에 대해서는 하이데거가 데카르트의 관점을 지녔던 것이 아닐까요? 데카르트는 동물에게는 영혼이 없고 신체만 있는 기계라고 보았다고 하지요. 하지만 그는 인간을 영혼이 있는 기계로는 보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동물과 다르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특별하다.’는 관점으로 이어지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와 관련한 구체적인 논의는 저도 시간이 필요할 듯하므로, 이장의 결론으로 곧장 나아가봅니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점에 대해서 말이죠. 각 존재의 둘레세계는 생물마다 크게 다를 수밖에 없다는 점은 수긍할 수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요. 감각기관의 차이가 종마다 크게 다르니까요. 각 종이 인지한 세계의 모습은 엄청나게 다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당연한 귀결입니다. 이 차이를 저자 고이치로는 인지된 둘레세계를 넘어 이동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달리 표현하면, 모든 생물은 이 둘레세계 사이를 이동하는 능력이 있다고 인정하고 있지만, (동물 보다는) “인간이 다른 동무에 비해 매우 높은 둘레세계 이동능력을 가지고 있다”(352)는 의미로 풀어 설명합니다. 이를 제가 이해한 바로 풀어 설명해보자면, ‘인간은 다른 동물에 비해 타자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상상력이 뛰어나다라는 것입니다. 고이치로는 이 능력을 가리켜 둘레 세계 간 이동 능력’(inter-umwelt mobility)라고 좀 더 폼나게 정의합니다. 제게 좀 더 익숙한 표현으로는 인간이 보다 뛰어난 역지사지의 능력을 갖고 있다라고 표현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 이제 고이치로가 인간의 한가함과 지루함을 다룬 책에서 둘레세계(움벨트)를 이야기한 이유에 한 발 더 나아간 듯합니다. 제가 이해하기로 저자는, 인간은 뛰어난 상상력과 공감력을 통해, 다른 둘레세계로 비교적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기에 지루해한다고 주장합니다. 다시 저자의 표현을 가져와 정리해볼까요. “인간은 둘레세계를 상당한 자유도를 가지고 이동할 수 있기 때문에 지루해 하는 것이다.”(355)라고요. 지루해하지 않는 다른 동물들과 달리 인간이 지루해하는 이유를 윅스퀼이 제시한 개념을 기반으로 설명해내고 있는 것이죠. 물론 이에 동물의 감각에 주목한 후대의 과학 연구자들은 보다 많은 동물이 인간에 상응하는 둘레 세계 간 이동 능력을 지니고 있을 것이라 추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몇몇 동물들은 적어도 어느 정도의 지루함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짐작해봅니다. 어미 앞에서 대나무를 입에 물고 앞구르기를 하는 팬더 푸바오의 모습을 한번 떠올려보시기 바랍니다. 이는 단지 생존을 위해, 본능에만 따른 행동은 아닐 것 같은데요. 생물학자들은 어떻게 이해할지 궁금합니다. 이 점은 물론 더 많은 연구와 확인 절차가 필요하겠지만 말입니다.


 

저자는 6장을 마무리하면서 이 책의 제목인 한가함과 지루함의 윤리학을 이야기하는 힌트를 발견할 수 있다고 떡밥을 던집니다. 아마도 여기까지 읽었으니 마지막 장 까지 힘을 내서 읽어줄 것을 기대하겠죠. ‘마지막 하이라이트가 눈앞인데, 정녕 책을 덮을 것이냐?’고 독자를 유혹하는 듯합니다. 궁금하신 분들은 이 탁월한 책을 읽어보시길.

 


개인적으로는, 타자에 대한 인간의 뛰어난 공감력/상상력으로 둘레세계를 비교적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는 점에도 긍정과 부정의 영향이 따를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니 저자는 여기에 윤리학이라는 표현을 붙이지 않았을까요? 제가 생각하는 윤리학의 작동 원리는 판단하기 전에 여러 조건을 검토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서로 다른 입장에서 행위에 대한 검토가 필요한 것이죠. 달리 말하면, 다른 둘레세계를 검토하고 다가가려는 태도/마음가짐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는 윤리학이라는 표현을 쓰게 되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상 고쿠분 고이치로의 한가함과 지루함의 윤리학에 입문하자마자, 바로 저자의 팬이 되어버린 철알못독자의 감상이었습니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행복의 비결이 뭔지 알고 싶은 독자라면 한 가지 실마리를 이 책에서 찾아보시라는 겁니다. ‘강남 아파트 입성을 이야기하는 책 100권을 읽는 것보다는 이 책을 여러 번 읽어 보는 것이 행복의 비결을 발견하는 데 더 빠르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책, 참으로 탁월하군요! 적어도 제겐 그렇습니다.







*참고로 글에서 언급되지 않았지만 '움벨트'개념이 소개되는 다른 책을 추가해봅니다.

- 에드 용 <이토록 굉장한 세계>

- 캐럴 계숙 윤 <자연에 이름 붙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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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의 해변에서 - 아메리카 원주민, 대항해 시대의 또다른 주인공
캐럴라인 도즈 페넉 지음, 김희순 옮김 / 까치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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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존재들을 기억하고 애도하는 글쓰기

- 야만의 해변에서

: 아메리카 원주민, 대항해 시대의 또다른 주인공


캐럴라인 도즈 페넉 지음

김희순 옮김 [까치] (2025)

 




나는 머나먼 것들을 끊임없이 동경하고 갈망하는 사람이다. 나는 금단의 바다를 항해하고 야만인의 해안에 상륙하는 것을 좋아한다.

- 허먼 멜빌, 모비 딕, 이종인 옮김, 현대지성, 2022, 42p

 


19세기 중반에 출판된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 딕은 인류의 대항해시대가 저물어 가는 시기에서 출현했다. 이 이야기는 경계가 명확히 정해지지 않은 바다 위를 떠다니며 뭍(육지)의 세계를 지탱할 자원을 캐내던 사람들의 서사로 볼 수도 있다. 특히 포경선은 세계의 여러 곳에서 몰려든 다양한 젊은이들이 부대끼는 고립된 공간이기도 하다. 위에 인용한 문구는 이슈메일이 바다로 나가는 고래잡이 항해를 받아들이는 이유를 독백처럼 말하는 대목이다. 이 소설이 나에게 인상 깊게 남는 이유 하나는 작가가 문명과 야만의 경계에 대해 잠시나마 고찰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의 인용문만으로 판단할 때, ‘문명에 속해 있는 이슈메일 자신이 모르는 미지의 해안을 야만인의 그것으로 상정하는, 백인의 시선도 살짝 엿보인다.


 

내가 이 대목을 떠올리게 된 것은 아즈텍 연구의 권위 있는 역사학자 캐럴라인 도즈 페넉의 책 야만의 해변에서을 만났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노예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 아프리카 원주민’, ‘검은 피부를 떠올리는 것은, 아마도 아프리카 출신의 노예에 관해 다양한 매체를 접해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 캐럴라인은 관심의 대상을 조금 달리하여, 아메리카 원주민에 주목한다. 캐럴라인의 책을 만나기 전까진 그토록 많은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들도 자신이 조상들과 더불어 살아왔던 터전으로부터 단절을 강요당하고, 구세계인(유럽인)들에 의해 납치·감금·폭행에 일상적으로 노출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사실 한 번도 제대로 상상해보지 못했던 것 같다. 따라서 이 책은 우리의 시선이 백인 중심의 상투적 시선을 지니고 있지 않은지를 확인하는 리트머스 시험지 같은 책이기도 하다.


 

따져보자. 한 인간 존재가 다른 인간에 의해 의지와 자유를 빼앗기고, 인간성을 박탈당하는 일을 우리는 과연 상상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까? 나는 결코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역사학자인 캐럴라인은 마치 내일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은 사람처럼, 오래된 1차 사료들(이를테면 노예 거래 관련 서류, 법원에서의 소송 기록, 영수증과 같은 자료들)을 찾아 헤맸을 것이었다. 역사학자로서의 절실함을 느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우리에게 당연한 듯 여겨지는 역사 서술의 관점은, ‘문명 vs. 야만의 이분법적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당연하게받아들여지는 것은, ‘문명에 속하고 있다는 전제다. 이러한 시각이 자연스럽게 정해지게 된 까닭은, 무엇보다 인디저너스(Indigenous, 토착민)이 과거에 존재했던 사실이 우리에게 와 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목소리는 유럽인들의 목소리에 덮이고, 인디저너스의 존재 증거는 마찬가지로 유럽인들에 의해 가려져왔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인디저너스들은 삶의 터전으로부터 단절되어 강제 이주당한 상황뿐만 아니라 감금·폭행의 일상적인 대상이 되어야만 했다. 당시 유럽인들에 의해 대상화된 인디저너스들은 일개 사물로서 취급당했다. “(인디저너스들은) 유럽인들의 사상과 열망이 깃든 일종의 암호가 되어 갔다.”(32)는 표현이 처음부터 나의 시선을 붙들었다.

 


저자의 서술방식에서 발견되는 한 가지 특징은, 인디저너스의 입장에서 그들이 어떤 감정을 느꼈을지 부단히 상상했다는 점이다. 역사가 엄밀한 사실에 기반 한 실증적인 학문이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캐럴라인의 서술방식은 좀 독특하다. 서술자 자신이 인디저너스의 입장이 되어보길 주저하지 않는 듯 보이는 까닭이다. 어쩌면 학계에서 동료 학자들의 비판을 상당히 받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들을 더욱더 열심히 찾아내야 한다”(84)며 역사학자로서의 사명감을 드러내고 있다.


 

이 책에서도 잠시 언급되고 있지만, ‘문명야만의 시선에 주목할 때 흔히 떠오르는 텍스트는 몽테뉴의 에세. 몽테뉴는 자신의 식인종에 관해서라는 글 중에서, 브라질의 한 마을에서 유럽에 온 3명의 투피남바인과 대화했던 장면을 집어 넣었다. 그러면서 우리(유럽인들)’가 그들보다 더 야만적이라고 한 바 있다. 훗날 에세를 탐독했던 허먼 멜빌의 야만에 대한 자각은 자신의 작품 속에 반영되기도 했다. 이를 테면, “만취한 기독교인보다는 정신이 맑은 식인종과 자는 게 나을지도 몰라.”(모비 딕, 이종인 옮김, 현대지성, 2022, 64p)라며 야만인에 대한 편견에 저항하고, ‘문명 세계의 한 단면을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예가 버젓이 존재하던 고려할 때, 몽테뉴나 멜빌 모두 캐럴라인의 지적대로, “야만과 문명이 상대적이라는 점을 인식”(302)했다는 사실이 놀랍다.

 


인디저너스의 역사를 대하는 저자의 태도는 어떤 면에서는 줄곧 애도의 성격을 띠는 듯하다. 그들은 대부분 자신의 의사에 반하여 유럽을 방문하게 되었지만, 또 그만큼 많은 수가 여정 중에 바다에 버려지기도 했다. 유럽 땅에 도착해서는 다양한 형태의 노예 제도 시스템과 평범한많은 유럽인들에 의해 소유되고 매매되었으며, 때론 낙인이 찍히고 폭행을 당했다. 인간성이 박탈된 역사였다. 따라서 저자의 연구와 저술 작업은 소리 없이, 흔적 없이 사라져간 인디저너스들의 상처를 들여다보고, 다독이는 의식(ritual)으로도 보였다. 그들은 대다수가 애도 받지도 못했던 이들이다. 역사학자 캐럴라인의 역사 서술이 내게는 잃어버린 존재들의 간극을 상상하고 이를 인간의 일로 채우는 작업처럼 보인다. 한 가지 생각을 덧붙이자면,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인디저너스의 시선에서 야만의 해변이란 어쩌면 자신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인간의 자유와 신체를 구속하고 억압하던 구세계 문명의 해안을 가리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결국 경계의 어느 쪽에 발을 딛고 바라보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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