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인물을 중심으로 시대를 구체적으로 상상하기
- 영화 <오펜하이머>의 개봉을 앞두고
지난 20세기에 일어났던 제2차 세계대전은 과학자, 특히 물리학자들의 전쟁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대표적인 예로 원자폭탄 개발과 레이더 기술을 꼽을 수 있다. 특히 원자폭탄 개발은 ‘맨해튼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진행되었다. 이 프로젝트는 나치의 핵개발 움직임에 대항하기 위해 두 물리학자 레오 실라르드와 아인슈타인이 당시의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에게 보낸 청원 편지로부터 추진되었다. 이 프로젝트의 수장을 맡은 이가 물리학자 줄리우스 로버트 오펜하이머(Julius Robert Oppenheimer)였다. 그는 원자 폭탄 개발을 성공적으로 이끌었고, ‘원자 폭탄의 아버지’로 불리게 된 인물이다.
이번 달 15일, 그러니까 일본의 패전일이면서 우리에게는 해방일이 되는 날에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제작한 영화 <오펜하이머>의 개봉을 앞두고 있어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특히 78년 전 오늘(8월 6일)은 인간이 인간에게 최초의 원자 폭탄을 사용했던 날이다. 이날 미군은 길쭉한 모양의 원자 폭탄 ‘리틀 보이’를 히로시마에 투하했다. 우리는 제대로 실감하지 못할 수 있겠지만,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는 원자 폭탄 피해자 후손과 더불어 역사 속의 오늘을 기억하는 행사가 진행될 것이다. 한 가지 더 생각해볼만한 것은 원폭 피해자에는 ‘일본인’만 포함되는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당시 도시에 살았던 조선인을 비롯한 여러 국적의 사람들도 있었음을, 원자 폭탄은 국적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1945년 7월 16일에 시행되었던 트리니티(Trinity Test) 핵실험 당시의 폭발 모습. 실험 후 휘어진 철근 구조물 앞에 서있는 오펜하이머.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모자를 쓰고 있다.) [출처: 위키피디아]
(일본에 투하 된 두 종류의 원자 폭탄. 처음 투하된 폭탄이 길쭉한 모양의 '리틀 보이'로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투하되었다. 3일 후인 8월 9일에 럭비공 모양의 '팻 맨'은 나가사키에 투하되었다.) [출처: 위키피디아]
맨해튼 프로젝트는 20세기 과학사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 역사에서도 중요한 지점을 차지한다. 국·내외의 과학자들을 비밀리에 한데모아 국가의 중대사를 추진했던 거대 프로젝트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과학사에서 많이 등장하는 인물들이 보이는데, 오펜하이머를 비롯하여, 엔리코 페르미, 닐스 보어, 한스 베테, 존 휠러, 리처드 파인먼, 필립 모리슨(오펜하이머의 제자), 에드워드 텔러 등등의 쟁쟁한 과학자들이 대거 참여하기도 했다. 주목해볼만한 또 다른 점은 이 프로젝트에 크게 기여했던 과학자들 상당수는 유럽에서 나치를 피해 건너온 이들도 많았다는 점이다. 그러니 순수한 독일인보다는 유대계 과학자, 혹은 유대계 이민자의 후손이 큰 역할을 맡기도 했다. 오펜하이머 본인 역시 독일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유대계 이민자의 후손이기도 했다. 여기에는 역시 유대계 독일인이었던 아인슈타인을 빼놓을 수 없는데, 이 두 사람을 동시에 다룬 《아인슈타인과 오펜하이며》도 이런 맥락에서 흥미롭다. 이 책의 저자 실번 슈위버는 물리학자이자 과학사가이기도 하다. 두 천재 과학자를 비교하며, 이 책에서 이제는 다소 진부해 보이기도 하는 천재성의 의미에 대해 묻고 있기도 하다. 그는 또 다른 유대계 미국인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과 교류하며 그를 인터뷰하기도 했던 인물이다. 역사 속의 인물들과 직접 교류했던 저자의 경험과 폭넓은 인터뷰를 통해 인물을 이해해볼 수 있는 책으로 기대된다.
이달에 개봉될 영화의 원작이자 영감을 준 도서는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다. 처음에 빨간색 띠가 들어간 하드 커버 판이 나왔고, 최근에 영화 <오펜하이머> 개봉에 맞추어, 소프트커버 판의 특별판(검은 표지)이 나왔다. 이 책의 저자 카이 버드와 마틴 셔윈은 이 책으로 퓰리처상을 받기도 했다. 영화에는 오펜하이머 외에, 과학사에서 등장하는 여러 과학자들의 모습도 등장할 것으로 기대해본다. 그 중 한 명은 물리학자 엔리코 페르미다. 그는 원자 폭탄 실험이 진행되어 충격파가 도달했을 때, 떨어지는 종이 조각의 낙하 시간과 거리에 관한 정보만으로 원자 폭탄의 폭발력을 추산했다고 하는 에피소드가 있는 인물이다. 그는 이론과 실험 모두에 두각을 나타냈다고 하는데, 영화 속에서 그의 모습도 볼 수 있을까 궁금하다.
(엔리코 페르미. 이론과 실험 분야 모두에서 탁월한 과학자로 잘 알려져 있다.)
[출처: 위키피디아]
뿐만 아니라 젊은 대학원생으로 이론 개발 분과에 참여했던 리처드 파인먼의 모습도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는 기밀문서를 보관해놓은 금고를 모두 열어 사람들을 놀라게 한 에피소드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원자 폭탄 실험이 진행되기 직전에 아내가 사망하는 아픔을 겪은 인물이기도 하다. 파인먼이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한 정황에 대한 에피소드는 올해 출간된 제임스 글릭의 《파인먼 평전》을 통해 만날 수 있다. 이 책에서 한 가지 기억나는 장면은 미국 뉴멕시코 앨러모고도(Alamogordo)의 사막 한 가운데에서 시행된 최초의 원폭 실험인 트리니티(Trinity) 테스트 당시, 이 장면을 유일하게 맨 눈으로 지켜 본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단순히 젊은이의 치기로 결정한 행동이 아니라, 빛과 열의 물리적 특성에 관한 이해를 바탕으로 이를 생생하게 예측하고 내린 결정이었던 셈이다. 또 이 책은 원자 폭탄 개발 전후, 그리고 전쟁이 끝난 직후에 물리학자들이 갖게 된 권력과 권위에 대해 저자는 저널리스트로서 평가하며 이를 잘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역시 보다 궁금한 건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오펜하이머다. 지난 겨울(2022년 12월) 어느 신문 기사에서 ‘원자폭탄의 아버지’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68년 만에 ‘소련 스파이’ 혐의를 완전히 벗었다는 내용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과학자가 자신의 양심에 따라 행동한 대가를 국가는 어떤 식으로 갚았으며, 역사에 오점을 남겼는지를 보여주는 본보기가 될 것이다.
(참고기사: https://v.daum.net/v/20221218171232607)
(1946년 당시의 로스 앨러모스 연구 그룹. 사진 가운데 가장 어두운 상의를 입고 있는 이가 로버트 오펜하이머다. 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에 있는 인물이 엔리코 페르미이며, 페르미의 뒤쪽, 오펜하이머의 왼쪽 자리에 앉아 뭔가 몰두하는 젊은이가 리처드 파인먼이다. 얼굴은 가려졌으나 오펜하이머의 오른쪽 자리에 훗날 안보청문회에서 오펜하이머에게 불리한 증언을 했던 에드워드 텔러가 앉아 있다.) [출처: 위키피디아]
다시 오펜하이머의 평전으로 돌아 가본다. 이 책의 제목에 등장하는 프로메테우스는 그리스·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신이다. 인간에게 금지된 불을 가져다 준 죄로 제우스에게 미움을 받고 벌을 받았다. 프로메테우스는 커다란 바위에 끊어지지 않는 쇠사슬로 손과 발이 결박된 채, 독수리에게 끊임없이 간을 쪼아 먹히는 고통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프로메테우스(prometheus)’라는 이름이 ‘미리 생각하는 자’라는 의미임을 고려할 때,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고도 인간에게 불을 비롯한 문명을 가져다준 존재로도 여겨진다. 사실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준 신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으나, 물과 흙으로 인간을 빚은 다음, 제우스 몰래 회향풀의 줄기에 불을 감추어 두었다가 인간에게 나누어 주었다는 배경 속에서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프로메테우스가 왜 인간에 대한 애정을 지닌, 인본주의적인 신의 상징으로 여겨지게 되었는지 말이다. 곧 프로메테우스는 신화에서 인간의 창조자였다. 기독교의 등장 이전에 물과 흙으로 인간을 빚은 모티프는 유대교의 골렘 신화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골렘은 ‘카발라(Cabala)라는 전통적 유대교 신비주의의 산물’이며, 곧 ‘종교적 마법이라는 수단을 통해 생명을 얻은 인공 인간’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모티브가 결국 기독교 신의 인간 창조 신화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노아의 대홍수 모티브가 훨씬 이전의 수메르 문명에 빈번했던 대홍수와 관련 신화의 영향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는 것처럼 말이다.
(참고 도서: 《김헌의 그리스 로마 신화》, 《프로메테우스의 야망》)
이런 의미에서 인류에게 원자폭탄이라는 공멸의 가능성을 지닌 원자폭탄을 가져다준 인간으로서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라는 별명이 붙은 이유를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게 한다. 하지만 이 이름이 더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최초의 원자 폭탄이 투하되어 민간인 수십 만 명을 죽음으로 몰고 간 후 오펜하이머가 보인 행보다. 그는 가공할만한 원자 폭탄의 파괴력을 확인하고, 이 무기가 지닌 잠재력과 정치적 의미를 간파한다. 이후 계획되었던 수소 폭탄 개발 계획에 반대하여, 미 군부 집단의 눈 밖에 나게 된다. 50년대에 미국 전체를 흔들었던 매카시 광풍의 여파로 맨해튼 프로젝트를 성공시켰으나 이후 원자 폭탄의 사용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보였던 과학자들을 뒷조사하고 사상검증을 하는 등 후폭풍은 많은 이들에게 상처를 남겼다. 무엇보다 프로젝트의 수장이었던 오펜하이머에게 큰 생채기를 남겼다. 그는 비밀인가 취급 권한을 박탈당했고, 공식적인 자리로부터 모두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청문회에서 그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고, 군부가 좋아할 수소 폭탄 개발을 적극 지지했던 에드워드 텔러와의 행보와 극적으로 대비된다. 이런 민감한 문제들이 얽혀있기에, 이번에 개봉되는 영화 <오펜하이머>가 과학사에 관심 있는 일반 독자뿐만 아니라, 현재 미 정계에서도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두툼한 책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속에는 20세기 인류사의 한 획을 그은 맨해튼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수장의 절정기와 내리막길이 오롯이 담겨 있다.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신념으로 프로젝트를 성공시켰으나, 그는 거대한 집단 속에서 자신이 한 일의 의미를 되묻고 검토하였으며 멈춰 설 줄 알았던 인물이었다. 여기에 거대한 흐름에 맞서 반대의 목소리를 내고 행동했던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나는 유례없는 이 인물에 매력을 느낀다. 나는 앞서 제2차 대전은 물리학자들의 전쟁이기도 했다고 언급했다. 이 말은 부분적으로 진실이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과학기술은, 진부한 표현이긴 하지만, ‘양날의 검’으로 작동한다. 그러나 원자 폭탄을 투하할 것이냐의 결정은 정치의 영역이다. 물론 그렇다고 과학자들이 원자폭탄 개발로 사망하게 된 피해자와 파괴된 도시와 전혀 무관해지는 것은 아닐 테다. 이들도 자신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그 의미를 검토하고, 책임 있는 의식도 필요하다고 본다. 인간은 때로 잘못된 길을 가기도 하고 실수도 하지만, 자신의 과오를 깨닫고 자신이 가는 길을 되짚어 가거나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펜하이머의 행보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전해줄 수 있다.
이번에 영화 개봉으로 읽어볼 만한 관련 도서들을 떠올려보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선 논픽션 작가 리처드 로즈의 《원자 폭탄 만들기》와 《수소 폭탄 만들기》가 있다. 특히 《원자 폭탄 만들기》는 1988년 퓰리처상 논픽션 부분을 수상했고, 전미 도서 비평가협회상 및 도서상(1987)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 책은 바로 오펜하이머가 수장으로서 ‘맨해튼 프로젝트’를 이끌었던 결과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반면 《수소 폭탄 만들기》는 원자 폭탄 보다도 더 강력한 ‘수소 폭탄’을 개발하는 과정을 담고 있어서, 오펜하이머 이후의 이야기를 주로 담고 있다. 원자 폭탄의 위력을 실감하고도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본격적인 냉전 시대의 포문을 연 수소 폭탄 시대를 조망하고 있다. 이 두 가지 큰 기획을 집요하게 담아낸 작가 리처드 로즈의 문제의식을 살펴볼 수 있을 것 같다.
(로스 앨러모스에서 ID사진으로 사용했던 오펜하이머의 사진과 수소 폭탄 개발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군부의 편에 섰던 물리학자 에드워드 텔러. 오펜하이머는 '원자 폭탄 개발'을, 텔러는 '수소 폭탄 개발'을 이끌었다.) [출처: 위키피디아]
또 원자 폭탄 개발에 큰 기여를 한 물리학자로 엔리코 페르미를 들 수 있다. 《엔리코 페르미 평전》의 저자 지노 세그레는 페르미의 제자이자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던 에밀리오 세그레의 조카라고 한다. 또 다른 저자 베티나 호엘린은 독일계 미국인으로, 물리학자인 아버지가 독일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이민자의 자녀다. 이 책의 저자들은 페르미의 면모를 누구보다도 더 가까운 거리에서 재구성할 수 있었을 것 같다.
페르미에 관한 또 다른 책으로 《엔리코 페르미, 모든 것을 알았던 마지막 사람》을 주목해본다. 이 책의 저자 데이비드 슈워츠 역시 눈에 띄는 배경을 지니고 있다. 저자의 아버지 멜빈 슈워츠는 1988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항한 과학자인데, 아버지는 페르미의 제자가 될 뻔했다고 한다. 무엇보다 아버지의 유품에서 발견한 페르미에 관한 글로 이 작업을 시작했다는 설명이 호기심을 더한다. 《엔리코 페르미 평전》이 과학자가 쓴 과학적 평전이라면, 《엔리코 페르미, 모든 것을 알았던 마지막 사람》은 정치학자로서 페르미의 유산에 주목한 인물 평전의 성격으로 볼 수 있겠다. 특히 기존에 공개되지 않았던 새로운 기록 자료나 인터뷰 등이 담겨 있어 주목해볼만한 책이다. 두 저작 모두 페르미에 대해 보다 친밀하게 알고 있던 이들에 대한 접근성을 잘 활용한 저작으로 볼 수 있겠다.
저널리스트의 입장에서 원자 폭탄 투하 전 116일간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담은 《카운트다운 1945》도 함께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이 책은 탐사 보도를 해온 저널리스트 크리스 월리스와 미치 와이스의 결과물이다. 이 책에 따르면, 최초의 원자 폭탄 투하 직전의 상황은 불황실성 그 자체였던 것 같다. 무엇보다 최초의 원자 폭탄 투하 시에는 한 달 전(7월 16일)에 이루어 졌던 트리니티 테스트 실험에서 사용되었던 둥근 모양의 내폭형 원자 폭탄(플루토늄 사용)이 아니라, 실제 작동조차 불확실했던 총류형(혹은 포신형)의 ‘리틀 보이’(우라늄235 사용)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는 당시 기술로는 폭탄 제조에 필요한 우라늄 농축기술이 아직 완전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고 한다. 게다가 맨해튼 프로젝트를 인가했던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 프랭클린이 4월에 갑자기 사망한 사건은 당시의 급박하고 안개 속 같은 정국을 보여주는 불안한 징후였다. 프랭클린 대통령 이후, 부통령 해리 트루먼이 대통령이 되어 전쟁을 지휘하게 되었던 것도 또 하나의 불확실한 변수였다. 이 책은 원자 폭탄이 최초로 투하되기 전 약 4달 간의 기간에 워싱턴 정가를 중심으로 일어나는 정황을 저널리스트의 눈으로 보여주는 책이다.
여기에 더하여 ‘원폭 투하’라는 모티브에 관계된 여러 작품들을 더 모아볼 수 있겠다. 우선 2017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던 가즈오 이시구로의 《창백한 언덕 풍경》가 떠오른다. 이 소설은 원자 폭탄이 나가사키에 떨어진 사건(1945년 8월 9일)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이 소설의 특징은 원자 폭탄의 참상을 생생하게 그려내는 것보다 ‘절제된 서술’이 인간 내면을 드러내는 작품이라고 알려져 있다.
또 존 허시의 《1945 히로시마》가 있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상공에서 원자 폭탄이 터진 사태로 순식간에 8만 명 가까운 사망자를 냈다고 한다. 저널리스트로서 존 허시는 원폭 투하 1년 후 파괴된 도시를 방문하여 생존자 여섯 명을 만나 증언을 기록한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앞서 언급한 도서들은 주로 과학사적 맥락에서 읽어볼 수 있는 책들을 소개한 셈이지만, 문학과 논픽션/다큐멘터리 결과물의 관점에서는 내가 서 있는 자리를 옮겨, 피해당자사의 입장을 들여다보게 해준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특히 이 점에서 서경식 교수가 어느 칼럼과 책에서 ‘상상은 구체적이어야 한다’는 말이 떠오르곤 한다. 올해 기상이변과 집중 호우로 남부에 피해자가 속출하고 상당한 재산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인원이 적어 기준에 미치지 못하므로’ 재난 선포하기가 어렵다는 정부의 대응은, 관련 책임자들의 도덕적 무책임과 공감력의 빈곤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이들에게 피해자 수는 그저 정보로만 여겨졌을 뿐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서경식 교수가 반복해서 글로, 말로 이야기해주는 것은 바로 피해자의 고통을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것도 구체적으로 말이다. 이 작업은 고통을 동반한다. 하지만 그래야만 우리가 인간이라는 이름값을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참고기사: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025406.html)
마르그리트 뒤라스의《히로시마 내 사랑》이라는 책도 눈에 들어온다. 이 소설은 동명의 영화 <히로시마 내 사랑>으로도 제작되었다고 한다. 히로시마라는 공간에서 벌어진 원자폭탄 투하라는 참상을 모티브로 하는 이 소설은 주인공 프랑스 여인의 비극적 기억에 관해 이야기한다. 여기에 또 실타래처럼 떠오르는 책은 20세기 일본의 지성으로 여겨지는 가토 슈이치의 자서전 《양의 노래》다. 자신의 회고를 담은 이 책에서 의사이기도 한 저자는 히로시마의 참상을 직접 목격하고, 일본의 패전을 지켜보았던 지식인이었다. 한쪽에서는 원자 폭탄을 개발한 이야기와 투하하기까지의 이야기를 떠올려 보았다면, 다른 쪽에서 원자 폭탄의 참상을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이해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는 책들이라고 볼 수 있겠다.
여기에 아직은 번역이 되어 있지 않으나, 국내에도 여러 권의 저서가 번역 출판 된 물리학자이자 과학 저술가 짐 배것(Jim Baggott)의 《The First War of Physics》(미국판)나, 《Atomic: The First War of Physics and the Secret History of the Atom Bomb 1939-49》(영국판)이라는 과학사 서적도 주목해본다. 그 밖에 원자 폭탄을 주제로 한 역사서나 과학기술서등은 훨씬 많을 것이다. 영화 <오펜하이머>의 관심에 이어 다양한 관점의 책이 번역되어 나오면 흥미로울 것이다.
처음에 생각했던 도서 소개는 이런 것이 아니었는데, 쓰다 보니 항상 옆길로 새어 버린다. 여전히 두서가 없다. 하지만 최근 많은 사람들의 주목과 기대를 받고 있는 영화의 개봉을 기회로 함께 읽어볼만한 책들을 모아보았다. 원자 폭탄 개발과 투하라는, 인류사에서 전대미문의 이 사태에 대해 이를 단순한 ‘정보’로서만이 아니라, 보다 구체적으로 이 국면을 상상해보는 일은 앞으로도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