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가 되는 법 - 읽고 쓰는 사람으로 책 세계를 만끽하기 위하여 땅콩문고
김성신 지음 / 유유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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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가가 많은 사회는 병들지 않는다

- 서평가 되는 법


 김성신 지음 [유유] (2025)



당신이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다. 일단 서평가가 되어 보라. 되기 어렵지 않다. 책을 읽기만 했던 것에서 딱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책에 대해 쓰기만 하면 된다. (...) 서평가가 되는 것은 어이없을 정도로 쉽다.”(140)


 

서평가 되는 법을 쓴 작가 김성신은 서평가들의 서평가’, ‘서평가들의 멘토라 할 수 있겠다. 이력을 보면 30년 넘게 출판계에 몸을 담고서, 책을 알리고 책에 대해 글을 쓰며 방송에도 출연하여 책을 알려온 작가였다. 그런 출판 전문가가 이번에는 서평가 되는 법에 대해 정리한 글이다. 그가 말하는 서평가 되는 법, 책을 읽기만 하면 누구나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읽은 책에 대해 쓰기만 하면 된다고. ‘, 쉽죠~!’라는 유행어가 떠오른다. 이렇게 그는 30여 년의 노하우를 담아 서평가 되는 법을 한 문장으로 얘기해버렸다.

 


그럼 이제 무슨 할 얘기가 더 남아있단 말인가? 일단 책을 읽기만 하면 서평가가 될 수 있다고 했으니, 책의 나머지에는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책의 나머지 지면에는 저자가 끌어들인 주변 지인들이 서평가로 거듭나는 과정 담겨 있다. 이들은 저자 주변의 느슨했던 지인들이 책을 매개로 어떻게 그와 친밀하고 인간적인 관계를 맺으며 함께 가는 동료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는지도 볼 수 있다.

 


코미디언이 책을 본격적으로 이야기하며 웃기는 서평가가 된 에피소드, 또 오랜 지인이자 호텔에서 30년 일해온 셰프를 꼬드겨 요리하는 서평가,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게 도운 이야기도 만날 수 있다. 물론 글만으로 서평가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이번에 새로 알게 되었다. 책을 읽은 감상을 자신만의 해석을 더해 독후화라고 명명한 독후 감상 활동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글이 새로운 매체로의 창작으로 이어지기도 하는 신기한 경험이다. 이렇듯 저자는 책을 읽은 이라면 누구나 서평가가 될 수 있다고 단언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서평과 독후감이 다르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았고, 실제로 서평가들의 글을 읽어보면 학창시절에 종종 머리를 쥐어뜯으며 써가야 했던 독후감과도 사뭇 다르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 서평 쓰기는 독후감 쓰기와는 분명 뭔가 다르다. 하지만 이 느낌에서 나아가 무언가 서평다운 글을 쓰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는 언제나 나의 큰 관심주제다. 내가 쓴 글을 읽으면 언제나 어딘가 부족함을 느끼던 차였다. 물론 내 글의 기술적인 부분, 특히 표현상의 부족함도 많을 테지만, 저자의 말에 따르면 기술적인 면이 서평의 본질은 아니라고 하니 저자는 이에 대해 뭐라고 이야기할까.

 


좋은 글은 좋은 표현이기보다는 좋은 생각이다.”(18)

 


뭐랄까, 이 단비 같은 명쾌한 답변이라니. 내게 무엇보다 부족한 건 아마도 좋은 생각의 부족이 아니었을까. 좋은 생각에 이르도록 고민하는 일이야말로 서평가가 주목하여 해결해야할 부분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저자가 이야기하는 서평가 되기의 요건 중 가장 본질적이고 중요한 것이 있었다.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서평의 본질은 사랑과 공공성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공공성은 글을 쓰고 발표하는 과정에서 이미 모든 서평가가 무의식중에 염두에 두는 조건이 아닌가?

 


그럼 서평가의 본질로서 저자가 이야기하는 사랑은 뭘까? 이쯤 되면 나는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라 자부하는 독자들이 자신감을 얻을 만 하지만, 이것이 어떤 사랑인지는 좀 따져봐야 할 것 같다. 그가 서평가의 자질로 요구하는 사랑이란 결국 존중이었다. 서평글을 매개로 사랑의 작대기를 연결해 보자면, 글을 쓴 사람과 이 글을 읽는 사람이 이어진다. 곧 서평을 쓰는 이들은 바로 이 두 관계를 고민해야 한다는 말이 아닐까.


 

이를 또 내 방식으로 풀어보면, 저자가 이야기하는 서평가의 사랑은 애써 글을 쓴 사람과 애써 이 글을 읽게 될 사람에 대한 환대가 아닐까. 저자가 말하는 쓰는 자와 읽는 자에 대한 존중을 조금 달리 얘기하자면, 결국 쓰는 이와 읽는 이에 대한 마음가짐, 배려하기에 이르기도 할 것이다.


 

서평은 책을 매개로 하는 비평의 한 장르라고 볼 수 있겠다. 이 때 사람들은 비판적인 읽기를 떠올리다 그만 비판적인 공격’, 혹은 비난을 하기 쉽다. 자신의 잣대를 기반으로 따져가며 읽는 행위에 잘못이 있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 비판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판을 하려면 상대방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정성껏해야 한다고 본다. 뾰족하고 날카로운 서평도 결국 대상(작가와 독자)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먼저였던 것이다.


 

이렇게 혼자 놀이하듯 정리하고 나니, 저자의 말들이 더더욱 마음에 와 닿는다. 저자와 같은 선배를 만날 수 없는, 나와 같은 독자를 위해서도 이런 이야기들을 애써 이야기 해주어서 고마운 마음이 드는 것이다. 물론, 누구나 서평가가 될 수 있지만 아무나 되어서는 안 된다.”(18)라고, 소심한 나에게 처음부터 겁을 잔뜩 주긴 했지만 말이다. 이렇게 이해를 하니 그가 거듭 당부하고 있는 서평가의 요건, ‘사랑공공성또한 이 둘이 서로 별개의 것도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서평가는 책(혹은 저자)과와 책을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단순히 연결하는 역할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기능적인 면에서 AI가 서평가를 가까운 미래에 대신할 수 있는 영역이 있겠지만, 도덕성·윤리성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AI에게 대상에 대한 존중과 아끼는 마음, 그리고 공동체의 안위를 염려하고 스스로 긍정적인 영향력을 전달할 수 있으리라 기대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저자의 말대로 이러한 마음가짐을 지닌 서평가가 점점 더 많아진다면, 정지우 작가의 표현대로 외롭지 않고 병들지 않는공동체를 가꾸는 데 서평가가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서평은 의외로 힘이 세다.”(140)는 작가의 말을 믿어 보자.  




[책 속으로]

[1] "서평가가 되고 싶다면 ‘공공성’이란 단어만은 절대 잊지 말아야 한다."(17) - P17

[2] "누구나 서평가가 될 수 있지만 아무나 되어서는 안 된다."

"좋은 글은 좋은 ‘표현’이기보다는 좋은 ‘생각’이다."

"책에 대한 사랑과 무엇보다 공공성에 대한 엄격한 자기 검증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무엇인가 되고 싶다면 그 일의 본질을 이해해야 한다. 서평의 본질은 바로 사랑과 공공성이다."(18) - P18

[3] "나는 파불루머 프로젝트를 통해 성실한 사람이 유능해지고, 유능한 사람이 훌륭해지고, 훌륭한 사람이 멈추지 않고 계속 정진하는 진정한 고수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56) - P56

[4] "그림은 명사지만 ‘그리다’는 동사지요. 그림은 아무리 대단해져 봐야 고작 비싼 물건 취급이나 받지만 ‘그리는 행위’는 때로 숭고해서 ‘그리는 사람’은 위대함에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57, 독후화 화가 천지수의 말) - P57

[5] "탈북인에게는 남한 사회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내비칠 창구가 없다. 대한민국 사회는 2000년대 이후에도 여전히 체제 우월성의 증거쯤으로만 탈북인들을 소비하고 있기 때문이다."(71) - P71

[6] "서평의 본질은 책(또는 저자)과 독자를 잇는 것이다. 이 일을 잘 하려면 대상에 대한 존중이 있어야 한다. 책과 그 책을 쓴 이 그리고 독자에 대한 존중 말이다. 그런 마음이 없다면 아무리 화려한 글 솜씨를 동원해 책에 대해 떠들어도 결코 좋은 서평가라고 할 수 없다."(127)

"책을 많이 읽는다고 해서 반드시 훌륭한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니다. 히틀러도 스탈린도 유난스러운 독서가였다. (...) 독서에는 실체적인 위력이 있어서 잘못된 철학이나 생각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기도 한다."(127) - P127

[7] "서평의 핵심은 저자와 독자를 향한 존중이다. 좋은 서평가가 되고 싶다면 ‘나는 저자와 독자를 여전히 존중하고 있는가?’하고 스스로 자주 되물어야 한다."(128) - P128

[8] "당신이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다. 일단 서평가가 되어 보라. 되기 어렵지 않다. 책을 읽기만 했던 것에서 딱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책에 대해 쓰기만 하면 된다. 공공성에 대한 인식만 잘 갖추고 있다면, 서평가가 되는 것은 어이없을 정도로 쉽다."(140) - P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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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타자에 대한 철학자의 탁월한 시선

- 한가함과 지루함의 윤리학

: 어떻게 살 것인가

 

고쿠분 고이치로 지음

김상운 옮김 [arte] (2025)

 



일본의 철학자 고쿠분 고이치로의 책 한가함과 지루함의 윤리학을 통독하면서 우선 떠오른 감상은 탁월하다는 표현입니다. 기억에 남아 있는 내용은 많이 없지만, 저자가 철학자인지라 한가함지루함이라는 개념부터 정리하고 논의를 시작합니다. 사람이 토끼 사냥을 나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누가 그에게 고되고 때로는 다치거나 생명의 위협을 느낄 수 있는 사냥 활동에 나가는 대신 잡은 토끼를 던져줄 때, 그 사람이 행복할까라고 묻는 겁니다. 그렇지 않을 것이라 예상할 수 있어요. 저자는 그 이유가, 인간은 지루함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고 진단합니다. 기분전환을 위해서라고 말이죠. 조금 다르게 표현하면, 인간에게 열중할 수 있는 대상이 있다는 것, 그러니까 몰입의 대상이 있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저는 여기에 인간이 행복할 수 있는, 지복에 이르는 열쇠 한 가지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줄곧 저자의 글에 탁월하다를 연발하는 이유는, ‘한가함지루함이라는 키워드로 인류 문명의 핵심을, 그리고 우리 사회와 인간의 모습을 설명해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한 가지 이유는 철학에 익숙하지 않은 저에게도 이해가 가도록 쉽게 썼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런 글쓰기를 하는 저자를 또 다른 수준(another level)'의 저자라고 분류합니다. 철학 전공자가 보시기에 어떨지는 모르겠네요. 적어도 저에게는 이 책과의 만남이 여러 모로 놀라움을 줍니다.

 

어떤 면에선 재독 철학자 한병철을 떠올리게도 합니다. 철학자 고쿠분 고이치로는 일본의 한병철이라고 평가한다면, 좀 더 친근하게 여기실 수 있으실지. 다만 한병철의 문장은 좀 더 압축적이라는 느낌을 줍니다. 문장 자체가 고이치로의 문장보다는 좀 더 밀도감이 있다는 말입니다. 반면 철학 비전공자에겐 고이치로의 문장이 좀 더 친절하게 다가옵니다. 저자는 우리 인류의 문명, 그리고 문화를 진단하고 요약하면서 독자가 잘 이해하도록 글쓰기를 하는 저자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철학 비전공 독자로서는 우리 현대 사회와 인간의 모습을, 이해하기 쉬운 문장으로 써주는 저자의 등장이 반가웠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저는 탁월하다는 생각을 줄곧 하게 됩니다. 이 책으로 저자의 글에 입문했는데, 곧바로 팬이 되어 버린 셈입니다. 그만큼 현재 제 수준에서 저자의 사유와 글쓰기에 감탄하며 읽었습니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지점은, 이 책의 6장인 한가함과 지루함의 인간학 때문입니다. 이 장의 부제는 도마뱀의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을까?’인데요, 도대체 한가함과 지루함을 이야기하는 책에서 도마뱀이 갑자기 뭔 소리인지 궁금하실 겁니다. 이 장(chapter)의 시작은 햇볕을 쬐는 도마뱀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햇볕을 쬐고 있는 도마뱀은 햇볕과 바위를 어떻게 경험하고 있을까?’라고 질문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 질문을 정면으로 다룬 한 생물학자의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6장에서 핵심이 되는 개념이 바로 움벨트(umwelt, 둘레세계, 주변세계)이라는 개념인데요, 이 개념을 본격적으로 소개한 건 19-20세기에 걸쳐 살았던 에스토니아 출신의 동물행동학자 야콥 폰 윅스퀼입니다. 그는 1934년에 출간한 책 <동물들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에서 이 둘레세계개념을 소개했습니다. 이 개념은 생물이 저마다의 감각기관을 통해 인지한 세계를 뜻합니다. 말하자면 각 생물체의 감각을 통해 인지된(혹은 구성된) 세계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억지로 플라톤 철학과 연결 짓자면, 각 존재마다 감각기관을 통해 구성된 어떤 대상에 대한 이미지를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지극히 주관적인 세계를 말하죠. 모든 감각적인 생물의 주체성에 주목하고 이를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고, 동시에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철학자 하이데거와 같은 사람에게서 말이죠. 이 이야기는 뒤에서 다시 언급하려 합니다. 어쨌든 이 모든 생물체의 주체를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근대 철학의 문을 연 칸트를 떠올리는 분도 있을 겁니다. 이런 맥락에서 윅스퀼은 칸트주의 생물(생태)학자라고 불리는 이유일 것입니다. 이 책은 제가 올해부터 진행하는 과학책 읽기 모임의 두 번째 선정도서이기도 했습니다.


 

다시 한가함과 지루함의 윤리학6장에 주목하면, 이 장이 바로 윅스퀼이 제시한 둘레세계의 개념 위에서 전개된다는 점이 흥미롭네요. 처음에 햇볕을 쬐는 도마뱀에서 진드기로 갔다가 결국에는 인간에 이르고 있는데요,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는 인간에게 둘레세계 개념을 적용하는 것은 잘못이다’(335)라고 비판했다고 고이치로는 말해줍니다. 하이데거는 당대의 생물학자 윅스퀼을 비판했다고 소개하는 거죠. 그 이유는 동물은 그 자체로서의 사물을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336). 하지만 고이치로는 오히려 하이데거의 논리를 비판합니다. 하이데거가 동물은 사물을 인식하지 못하지만 인간은 할 수 있다는 말을 하고자 억지를 부리고 있다고 말입니다. 고이치로의 말대로라면 대철학자 하이데거가 이 부분에서만큼은 다소 무리수를 둔 것 같거든요. 하이데거는 인간이 (동물과 달리) 특별하다는 신념을 갖고, 이에 합치되는 주장을 전개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합니다. 어쩌면 동물과 인간에 대해서는 하이데거가 데카르트의 관점을 지녔던 것이 아닐까요? 데카르트는 동물에게는 영혼이 없고 신체만 있는 기계라고 보았다고 하지요. 하지만 그는 인간을 영혼이 있는 기계로는 보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동물과 다르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특별하다.’는 관점으로 이어지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와 관련한 구체적인 논의는 저도 시간이 필요할 듯하므로, 이장의 결론으로 곧장 나아가봅니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점에 대해서 말이죠. 각 존재의 둘레세계는 생물마다 크게 다를 수밖에 없다는 점은 수긍할 수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요. 감각기관의 차이가 종마다 크게 다르니까요. 각 종이 인지한 세계의 모습은 엄청나게 다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당연한 귀결입니다. 이 차이를 저자 고이치로는 인지된 둘레세계를 넘어 이동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달리 표현하면, 모든 생물은 이 둘레세계 사이를 이동하는 능력이 있다고 인정하고 있지만, (동물 보다는) “인간이 다른 동무에 비해 매우 높은 둘레세계 이동능력을 가지고 있다”(352)는 의미로 풀어 설명합니다. 이를 제가 이해한 바로 풀어 설명해보자면, ‘인간은 다른 동물에 비해 타자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상상력이 뛰어나다라는 것입니다. 고이치로는 이 능력을 가리켜 둘레 세계 간 이동 능력’(inter-umwelt mobility)라고 좀 더 폼나게 정의합니다. 제게 좀 더 익숙한 표현으로는 인간이 보다 뛰어난 역지사지의 능력을 갖고 있다라고 표현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 이제 고이치로가 인간의 한가함과 지루함을 다룬 책에서 둘레세계(움벨트)를 이야기한 이유에 한 발 더 나아간 듯합니다. 제가 이해하기로 저자는, 인간은 뛰어난 상상력과 공감력을 통해, 다른 둘레세계로 비교적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기에 지루해한다고 주장합니다. 다시 저자의 표현을 가져와 정리해볼까요. “인간은 둘레세계를 상당한 자유도를 가지고 이동할 수 있기 때문에 지루해 하는 것이다.”(355)라고요. 지루해하지 않는 다른 동물들과 달리 인간이 지루해하는 이유를 윅스퀼이 제시한 개념을 기반으로 설명해내고 있는 것이죠. 물론 이에 동물의 감각에 주목한 후대의 과학 연구자들은 보다 많은 동물이 인간에 상응하는 둘레 세계 간 이동 능력을 지니고 있을 것이라 추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몇몇 동물들은 적어도 어느 정도의 지루함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짐작해봅니다. 어미 앞에서 대나무를 입에 물고 앞구르기를 하는 팬더 푸바오의 모습을 한번 떠올려보시기 바랍니다. 이는 단지 생존을 위해, 본능에만 따른 행동은 아닐 것 같은데요. 생물학자들은 어떻게 이해할지 궁금합니다. 이 점은 물론 더 많은 연구와 확인 절차가 필요하겠지만 말입니다.


 

저자는 6장을 마무리하면서 이 책의 제목인 한가함과 지루함의 윤리학을 이야기하는 힌트를 발견할 수 있다고 떡밥을 던집니다. 아마도 여기까지 읽었으니 마지막 장 까지 힘을 내서 읽어줄 것을 기대하겠죠. ‘마지막 하이라이트가 눈앞인데, 정녕 책을 덮을 것이냐?’고 독자를 유혹하는 듯합니다. 궁금하신 분들은 이 탁월한 책을 읽어보시길.

 


개인적으로는, 타자에 대한 인간의 뛰어난 공감력/상상력으로 둘레세계를 비교적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는 점에도 긍정과 부정의 영향이 따를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니 저자는 여기에 윤리학이라는 표현을 붙이지 않았을까요? 제가 생각하는 윤리학의 작동 원리는 판단하기 전에 여러 조건을 검토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서로 다른 입장에서 행위에 대한 검토가 필요한 것이죠. 달리 말하면, 다른 둘레세계를 검토하고 다가가려는 태도/마음가짐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는 윤리학이라는 표현을 쓰게 되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상 고쿠분 고이치로의 한가함과 지루함의 윤리학에 입문하자마자, 바로 저자의 팬이 되어버린 철알못독자의 감상이었습니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행복의 비결이 뭔지 알고 싶은 독자라면 한 가지 실마리를 이 책에서 찾아보시라는 겁니다. ‘강남 아파트 입성을 이야기하는 책 100권을 읽는 것보다는 이 책을 여러 번 읽어 보는 것이 행복의 비결을 발견하는 데 더 빠르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책, 참으로 탁월하군요! 적어도 제겐 그렇습니다.







*참고로 글에서 언급되지 않았지만 '움벨트'개념이 소개되는 다른 책을 추가해봅니다.

- 에드 용 <이토록 굉장한 세계>

- 캐럴 계숙 윤 <자연에 이름 붙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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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의 해변에서 - 아메리카 원주민, 대항해 시대의 또다른 주인공
캐럴라인 도즈 페넉 지음, 김희순 옮김 / 까치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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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존재들을 기억하고 애도하는 글쓰기

- 야만의 해변에서

: 아메리카 원주민, 대항해 시대의 또다른 주인공


캐럴라인 도즈 페넉 지음

김희순 옮김 [까치] (2025)

 




나는 머나먼 것들을 끊임없이 동경하고 갈망하는 사람이다. 나는 금단의 바다를 항해하고 야만인의 해안에 상륙하는 것을 좋아한다.

- 허먼 멜빌, 모비 딕, 이종인 옮김, 현대지성, 2022, 42p

 


19세기 중반에 출판된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 딕은 인류의 대항해시대가 저물어 가는 시기에서 출현했다. 이 이야기는 경계가 명확히 정해지지 않은 바다 위를 떠다니며 뭍(육지)의 세계를 지탱할 자원을 캐내던 사람들의 서사로 볼 수도 있다. 특히 포경선은 세계의 여러 곳에서 몰려든 다양한 젊은이들이 부대끼는 고립된 공간이기도 하다. 위에 인용한 문구는 이슈메일이 바다로 나가는 고래잡이 항해를 받아들이는 이유를 독백처럼 말하는 대목이다. 이 소설이 나에게 인상 깊게 남는 이유 하나는 작가가 문명과 야만의 경계에 대해 잠시나마 고찰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의 인용문만으로 판단할 때, ‘문명에 속해 있는 이슈메일 자신이 모르는 미지의 해안을 야만인의 그것으로 상정하는, 백인의 시선도 살짝 엿보인다.


 

내가 이 대목을 떠올리게 된 것은 아즈텍 연구의 권위 있는 역사학자 캐럴라인 도즈 페넉의 책 야만의 해변에서을 만났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노예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 아프리카 원주민’, ‘검은 피부를 떠올리는 것은, 아마도 아프리카 출신의 노예에 관해 다양한 매체를 접해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 캐럴라인은 관심의 대상을 조금 달리하여, 아메리카 원주민에 주목한다. 캐럴라인의 책을 만나기 전까진 그토록 많은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들도 자신이 조상들과 더불어 살아왔던 터전으로부터 단절을 강요당하고, 구세계인(유럽인)들에 의해 납치·감금·폭행에 일상적으로 노출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사실 한 번도 제대로 상상해보지 못했던 것 같다. 따라서 이 책은 우리의 시선이 백인 중심의 상투적 시선을 지니고 있지 않은지를 확인하는 리트머스 시험지 같은 책이기도 하다.


 

따져보자. 한 인간 존재가 다른 인간에 의해 의지와 자유를 빼앗기고, 인간성을 박탈당하는 일을 우리는 과연 상상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까? 나는 결코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역사학자인 캐럴라인은 마치 내일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은 사람처럼, 오래된 1차 사료들(이를테면 노예 거래 관련 서류, 법원에서의 소송 기록, 영수증과 같은 자료들)을 찾아 헤맸을 것이었다. 역사학자로서의 절실함을 느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우리에게 당연한 듯 여겨지는 역사 서술의 관점은, ‘문명 vs. 야만의 이분법적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당연하게받아들여지는 것은, ‘문명에 속하고 있다는 전제다. 이러한 시각이 자연스럽게 정해지게 된 까닭은, 무엇보다 인디저너스(Indigenous, 토착민)이 과거에 존재했던 사실이 우리에게 와 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목소리는 유럽인들의 목소리에 덮이고, 인디저너스의 존재 증거는 마찬가지로 유럽인들에 의해 가려져왔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인디저너스들은 삶의 터전으로부터 단절되어 강제 이주당한 상황뿐만 아니라 감금·폭행의 일상적인 대상이 되어야만 했다. 당시 유럽인들에 의해 대상화된 인디저너스들은 일개 사물로서 취급당했다. “(인디저너스들은) 유럽인들의 사상과 열망이 깃든 일종의 암호가 되어 갔다.”(32)는 표현이 처음부터 나의 시선을 붙들었다.

 


저자의 서술방식에서 발견되는 한 가지 특징은, 인디저너스의 입장에서 그들이 어떤 감정을 느꼈을지 부단히 상상했다는 점이다. 역사가 엄밀한 사실에 기반 한 실증적인 학문이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캐럴라인의 서술방식은 좀 독특하다. 서술자 자신이 인디저너스의 입장이 되어보길 주저하지 않는 듯 보이는 까닭이다. 어쩌면 학계에서 동료 학자들의 비판을 상당히 받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들을 더욱더 열심히 찾아내야 한다”(84)며 역사학자로서의 사명감을 드러내고 있다.


 

이 책에서도 잠시 언급되고 있지만, ‘문명야만의 시선에 주목할 때 흔히 떠오르는 텍스트는 몽테뉴의 에세. 몽테뉴는 자신의 식인종에 관해서라는 글 중에서, 브라질의 한 마을에서 유럽에 온 3명의 투피남바인과 대화했던 장면을 집어 넣었다. 그러면서 우리(유럽인들)’가 그들보다 더 야만적이라고 한 바 있다. 훗날 에세를 탐독했던 허먼 멜빌의 야만에 대한 자각은 자신의 작품 속에 반영되기도 했다. 이를 테면, “만취한 기독교인보다는 정신이 맑은 식인종과 자는 게 나을지도 몰라.”(모비 딕, 이종인 옮김, 현대지성, 2022, 64p)라며 야만인에 대한 편견에 저항하고, ‘문명 세계의 한 단면을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예가 버젓이 존재하던 고려할 때, 몽테뉴나 멜빌 모두 캐럴라인의 지적대로, “야만과 문명이 상대적이라는 점을 인식”(302)했다는 사실이 놀랍다.

 


인디저너스의 역사를 대하는 저자의 태도는 어떤 면에서는 줄곧 애도의 성격을 띠는 듯하다. 그들은 대부분 자신의 의사에 반하여 유럽을 방문하게 되었지만, 또 그만큼 많은 수가 여정 중에 바다에 버려지기도 했다. 유럽 땅에 도착해서는 다양한 형태의 노예 제도 시스템과 평범한많은 유럽인들에 의해 소유되고 매매되었으며, 때론 낙인이 찍히고 폭행을 당했다. 인간성이 박탈된 역사였다. 따라서 저자의 연구와 저술 작업은 소리 없이, 흔적 없이 사라져간 인디저너스들의 상처를 들여다보고, 다독이는 의식(ritual)으로도 보였다. 그들은 대다수가 애도 받지도 못했던 이들이다. 역사학자 캐럴라인의 역사 서술이 내게는 잃어버린 존재들의 간극을 상상하고 이를 인간의 일로 채우는 작업처럼 보인다. 한 가지 생각을 덧붙이자면,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인디저너스의 시선에서 야만의 해변이란 어쩌면 자신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인간의 자유와 신체를 구속하고 억압하던 구세계 문명의 해안을 가리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결국 경계의 어느 쪽에 발을 딛고 바라보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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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스트와 베타 (반양장)
로저 젤라즈니 지음, 조호근 옮김 / 데이원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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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데미우르고스의 인간-되기 여정

로저 젤라즈니의 프로스트와 베타(2025)

 




SF장르의 거장 아서 C. 클라크는 문학 장르로서의 판타지와 SF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SF는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을 다루지만, 판타지는 일어날 수 없는 사건을 다룬다고 말이다. 달리 말하면 SF는 주로 과학적 법칙이나 원리가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세계를 다룬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또한 과학기술이 가져올 미래의 모습이 디스토피아적인 작품이 많다는 것이 또 다른 특징이기도 하다. 이는 아마도 작가의 비판적 의식과 인간에 대한 깊은 관심이 작품에 투영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 다른 SF의 거장이자 시인이었던 로저 젤라즈니의 단편 프로스트와 베타역시 다소 암울한 미래를 배경으로 한다. 인류가 핵전쟁으로 멸망한 이후의 세계, 인간 없는 지구의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다소 암울한 배경에서 출발하지만. 전개 과정이 꼭 그렇지만은 않다. 여기 프로스트라는 이름의 의식을 지닌 기계(혹은 AI 로봇)가 인간 없는 지구의 북반구를 관할한다. 남반구를 관할하는 기계는 베타-머신이라 불렸다. 프로스트는 북극점에 머물며 하늘 위의 영구 궤도에서 돌고 있는 솔컴이라는 기계의 명령만을 받는다. 솔컴은 인간이 멸망할 경우 지구 재건 계획을 인간으로부터 위임받은 기계다. 만약 솔컴이 재건 계획을 수행하기 어려워지면 그 권한은 깊은 지하에 자리 잡고 있는 디브컴이 넘겨 받게 되어 있었다. 디브컴은 솔컴의 대체자였다.


 

오래 전 인간의 핵무기에 솔컴이 타격을 받자, 정해진 절차에 따라 재건 작업 재개를 위해 디브컴이 활성화되었다. 문제는 디브컴이 재건 작업을 지휘하기 시작했지만, 솔컴의 타격이 크지 않아 스스로 손상을 복구하여 재건 작업을 재개한 상황이었다. 지구의 재건 작업을 맡은 지휘자가 이제 둘이 되었기에 지휘 체계에 혼선이 있을 수밖에. 이들은 각자의 세력을 키워 서로의 재건 작업을 파괴하기에 이른다. 지구에 인간이 없다보니 이 두 존재의 지휘권 분쟁을 정리할 제3의 존재가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이미 사라져버린 인간의 명령만을 받는다는 모순과 직면한 것이다.


 

이 작품에서 가장 눈에 띄는 캐릭터는 단연 프로스트다. 그에게는 아주 특이한 점이 있었는데, 놀랍게도 기계가 취향을 가졌다는 점이다. 어떤 대상이나 활동에 흥미를 갖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의 취미 대상은 이미 멸망한 인간이었다. 이제는 사라진 도도새의 흔적을 찾는 생물학자처럼 말이다. 프로스트는 어느 날 찾아온 디브컴의 수하 모르델로부터 인간의 유물인 책을 입수하게 된다. 이 시점부터 그의 인간 탐구는 급물살을 타기 시작한다. 모르델의 도움으로 지구에 남아 있는 도서관의 모든 책들을 스캔한 프로스트는 이제 인간의 본성을 알고 싶다는 포부를 내비친다.

 


하지만 모르델은 오래 전 인간과 대화를 해본 적이 있던 기계였다. 그는 인간이 본성적으로 계측을 알지 못했지만, 기계의 도움으로는 계측할 수 있었던 존재라고 프로스트에게 알려준다. 이후 이어지는 두 기계의 만남으로부터 본격적인 인간 탐구가 진행된다. 모르델에 따르면, 기계는 세계를 측정하고 수치화된 정보를 데이터로 구조화할 수 있지만, 얼음이 차갑다와 같은 감각적 경험을 할 수 없는 존재다. 이처럼 인간만이 지니는 특성이 유일한 화두가 되면서 인간에게는 기분과 감정도 있었음을 이야기하지만, 이를 지금껏 스캔한 정보로 이해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프로스트는 충분한 데이터가 있으면 자신도 차가움을 인식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온 우주의 모든 데이터를 모아도 당신(프로스트)은 인간이 될 수 없을 것”(21)이라는 모르델의 말도 순순히 동의하지 않은 프로스트는 데이터 수집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이를테면 프로스트는 취향과 고집(의지)을 지닌 기계였던 셈이다.


 

이후 프로스트는 인간의 을 닮은 감각 기관을 만들어 아름다움에 대한 탐구를 하거나, 예술 작품을 만들어 보려고 시도하기도 한다. 나는 인간이 지닌 취미/취향은 보다 중립적인 의미에서 광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라는 생각을 하는데, 프로스트는 말하자면 이런 인간적인 면모에 상당히 다가간 기계였던 것이다. 그는 심지어 자신의 관할 구역도 아닌 남반구의 브라이트 디파일까지 방문하여 인간에 대한 정보를 수집한다. 이곳은 핵전쟁으로 절멸한 인간의 마지막 도시로, 안데스 산맥의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프로스트는 이곳을 다녀온 후 여러 가지 조각 작품도 만들어보는 데, 인간의 미적 취향에 대한 탐구행위인 셈이다. 그는 단순한 모방 작업을 통해서도 프로스트는 예술이 무엇인지, 인간성의 본질이 무엇인지 뚜렷한 답을 얻을 수 없었다. 인간은 단지 방대한 정보의 총합도, 감각 기관을 통한 계측 정보의 방대한 총체도 아니었던 것이다. 감각만으로 인간이 될 수 없음은 물론이었다.


 

북극점에 머무는 프로스트가 얼음층 밑에서 발굴한 인간의 시체를 통해 생명을 품은 점을 실험실에서 배양하는 설정은 다소 의외였다. 하지만 프로스트의 의도는 결국 인간이 직접 되는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토록 집요한 기계라니, 분명 무모한 목표에 다가가려는 인간의 집요함, 혹은 광기를 가진 기계라 할만 했다. 이제 프로스트는 방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또 모르델과 대화를 통해 인간성의 본질은 인간의 생리 구조에서 비롯된다.”(65)는 결론을 얻었다. 달리 말하면, ‘을 가진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프로스트에게 명령을 내리던 솔컴의 반대, 그리고 프로스트의 인간-되기가 실패할 경우 디브컴에게 데리고 갈 검은 로봇을 대동한 모르델. 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프로스트는 마침내 인간 프로스트로 태어난다. 제대로 서지 못해 실험대에서 굴러 떨어지기도 하고 고통으로 비명을 지르기에 이른다. “나는...두렵다라고 첫 마디를 내뱉었지만, 그가 정말 인간이 되었는지는 아무도 확신하지 못했다. 프로스트의 변신을 지켜본 모르델과 베타 머신은 프로스트가 인간이라 주장했다. “그는 계측할 수 없는 개념인 두려움과 절망을 아는 존재요. 프로스트는 인간이요.”,“그는 탄생의 트라우마를 경험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힌 겁니다.”(75)라고 말이다. 이제 인간 프로스트는 감각마저 더 이상 계측할 수 없이 부정확해졌다.


 

그렇다면 저자인 젤라즈니는 인간성의 본질을 두려움과 절망의 인식 여부에 두었던 것일까? 인간의 이러한 특징은 인간이 어떤 정보의 총합, 혹은 총체가 아니라 감정과 더 많이 결부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이 점은 인간에 대해 매우 중요한 단서를 환기한다. 계측하고 수치화할 수 없는 인간의 감정이란, 무엇보다 인간의 생리적 구조, 즉 몸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발달한 단계의 AI라고 해도 몸과 결부된 의식이 없는 존재는 결국 기계에 불과하다는 점을 말하고 있지 않은가. 몸이 전제되어야만 이와 결합된 의식이 스스로를 주체로 인식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몸은, 그리고 이와 결합된 의식은 주체의 정체성 형성의 근간이라는 해석을 더해본다. 이런 이유로 인간의 본질로 거론된 두려움과 절망이라는 감정은 몸과 의식의 상호작용을 먼저 겪어야 가능하다고 본 것 같다. 이제 보니 프로스트는 취향뿐만 아니라 인간이 되고자 한 용기와 인내심을 가진 기계이기도 했다.


 

프로스트와 더불어 주목한 캐릭터는 남반구를 주재하던 베타 머신이다. 그는 허락 없이 남반구에 들어온 프로스트의 인간 탐구 과정에 흥미를 느낀 듯하다. 프로스트와의 대화가 끊임없이 새로운 질문으로 이어짐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나아가 베타는 프로스트의 인간-되기프로젝트를 적극적으로 도왔다. 또한 인간 프로스트가 인간임을 인정하고 지지했던 기계다. 이후 인간 프로스트의 요청으로 둘은 인류가 멸망한 최후의 장소 브라이트 디파일에서 만날 것이었다. 소설의 마무리에서 베타는 그녀가 되는 것으로 끝난다. 프로스트의 이브로 탄생하는 것일 게다. 핵전쟁으로 인류가 사라진 그라운드 제로에서, 인간 프로스트와 베타(AI 기계)가 새로운 인류의 탄생을 예비하는 설정이 사뭇 의미심장하다.

 


개인적으로 프로스트와 베타를 신인류의 조상으로서 ‘AI 데미우르고스라 불러본다. 데미우르고스는 플라톤 철학에서 우주를 만든 신으로 등장한다. 인류가 마지막으로 사라진 바로 그 장소에서 그녀로 거듭나는 프로스트와 베타는, 신인류의 아담과 이브로서 세계를 다시 설계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인류가 멸망한 미래를 배경으로 삼고 있지만, 분위기는 결코 어둡지 않게 다가온다. 무엇보다 프로스트의 인간-되기여정은 인간다움의 조건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해준다. 최근 인간 vs. 기계라는 대립구도로 인간에 대한 기계능력의 우월함을 비교하는 사례를 많이 접한다. 특정한 기능 영역에서 이제 기계/AI와 경쟁하여 인간이 이길 방도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기계에게 지워진 논리, 책임, 의무만이 아니라 두려움, 절망 그리고 자부심을 느낄 줄 아는 능력이 있었다. 인간이 이런 존재라는 사실이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지, 새롭게 곱씹어본 독서였다.





[책속으로]

[1] "그들은 그를 프로스트라 불렀다. 솔컴의 모든 피조물 중에서도 프로스트는 가장 훌륭하고, 가장 강대하고, 가장 이해하기 힘든 존재였다."(5, 첫 문장)

"그들은 그를 프로스트라 불렀다. 그들은 그녀를 베타라 불렀다."(79, 마지막 문장) - P5

[2] "그의 취미는 인간이었다."(8) - P8

[3] "내가 곧 논리다."(13)

"인간은 논리를 창조했다."(14, 솔컴의 말) - P14

[3] "(인간은) 근본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본성을 지녔고. (...) 인간은 계측을 모르는 존재였다오."(18, 모르델의 말) - P18

[4] "인간에게는 기분과 감정이 존재했소."(20)

"감정에는 환산계수가 존재하지 않소."(21, 모르델의 말) - P21

[5] "기계란 인간에 비하자면 안팎이 뒤집힌 존재요. 기계는 인간과는 달리 과정의 세부 사항을 서술할 수 있지만, 인간처럼 그 과정 장체를 경험할 수는 없소. (...) 온 우주의 모든 데이터를 모아도 당신은 인간이 될 수 없을 것이오, 강대한 프로스트여."(21, 모르델의 말) - P21

[6] "나는 그 인간에게서 유래한 파괴된 상징 살해자이자 고대의 이야기꾼이기 때문이다. (...) 나는 지구의 마지막 인간을 파쇄했다. 고의로 한 일은 아니었다."(38, 광석 파쇄기의 말) - P38

[7] "저는 인간에 대한 지식을 얻으러 왔습니다."(48) - P48

[8] "나 자신이다."(51, 자신을 모방한 조각을 만든 프로스트의 말) - P51

[9] "당신은 인간의 논리적 피조물이오. 예술은 비논리요."(55, 모르델) - P55

[10] "당신이 추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프로스트?
나는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64, 프로스트와 베타의 대화)

"이것은 태어나기를 기다리는 나의 모습입니다."(65, 프로스트)

"나는 ... 그저... 인간이 될 겁니다."(67, 프로스트) - P67

[11] "... 나는... 두렵다."(72, 인간 프로스트의 첫 마디) - P72

[12] "두려움을 아는 것은 오직 인간뿐이다."(73, 솔컴의 말)

"인간 외에 절망을 아는 존재가 또 있겠습니까?"(74, 베타 머신의 말)

"그는 계측할 수 없는 개념인 두려움과 절망을 아는 존재요. 프로스트는 인간이오."(75, 모르델의 말) - P75

[13] "내가 아는 것은 계측과 ... 의무뿐이오."(76, 모르델의 말) - P76

[14] "그(인간 프로스트)는 더 이상 예전처럼 계측을 알지 못했다."(77) - 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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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 - 우리의 민주주의가 한계에 도달한 이유
스티븐 레비츠키.대니얼 지블랫 지음, 박세연 옮김 / 어크로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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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황금기는 씨 뿌리는 마음들에 달려 있다


- 스티븐 레비츠키·대니얼 지블랫의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2024)


 




미국의 황금기가 지금 시작됩니다.’(The Golden Age of America Begins Right Now)

 

이 문구는 두 번째 집권에 성공한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의 공식 슬로건이다. 미국의 정치학자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이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이하 극단적 소수)를 출간할 당시(2023)만 해도 트럼프가 다시 대통령이 될 가능성은 훨씬 낮아 보였을 것이다. ‘트럼프가 백악관을 떠나 민주주의가 다시 균형을 회복했다고 믿고 싶다던 저자의 바람과 달리, 트럼프 행정부는 복귀에 성공했고 이제 막 100일이 지났다. 한 사회가 중요한 교훈을 배우기엔 시간이 너무 짧았던 탓일까? 저자가 슬며시 내비치던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극단적 소수에서 저자는 헝가리 독재자 빅토르 오르반에 대해 들려준다. 오르반은 성숙한 헝가리의 민주주의를 거의 합법적인 수단을 통해완전히 허물어뜨린 인물로 소개되어 있다. 아마도 그라면 트럼프 행정부의 귀환과 대한민국의 계엄 사태를 보고 정치에서는 모든 일이 가능하다.”(90), 우리의 상상력 부족(?)을 조롱했을 법하다. 이 책은 부유한 민주주의 국가가 어떻게 극단적으로 변질될 수 있는지 탁월하게 분석한다. 한편 현대인이 살아가는 지배적인 환경으로서의 민주주의를 지켜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일러주고, 동시에 민주주의 국가가 나아가야할 방향을 균형 있게 설명한다. 대한민국의 독자가 이 책을 펼쳐볼 이유는 바로 여기, 트럼프 행정부의 귀환과 대한민국의 계엄 사태가 교차하는 지점에 우리가 서 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가 퇴행의 위기에 처한 지금, 우리는 민주주의를 어느 방향으로 향하게 할 수 있을까?


 

한 국가의 민주주의를 무너뜨릴 수 있는 존재는 무턱대고 폭력을 휘두르는 집단이 아니다. 그럼 정말 위험한 존재는 누구인가? 저자에 따르면, 이들은 주류 정치인들 중에서 표면적으로’ 민주주의에 충실해 보이는 무리들이다. 이들은 권력을 지닌 소수이지만, 기득권에 대한 집요함을 드러낸다. 물론 이러한 권력에 대한 의지는 정치인이라면 당연해 보인다. 문제는 이들이 소수만의 이익을 위해 기존 제도를 교묘히 비틀어 합법적으로 보이는 기회를 마련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 결과는 공공의 이익에 반하고, 심지어 개인의 자유마저 심각하게 침해하거나 훼손할 여지가 있다. 이런 이유로 표면적으로 충직한민주주의자들은 민주주의를 파괴하는데 결정적으로 방아쇠를 당길 수 있는 존재들이다.


 

기득권을 상실할 수 있다는 두려움과 이로 인한 위기감은, 권력을 지닌 소수가 공권력을 동원하고 때로는 폭력에 호소하려는 유혹에 빠지게 한다. 이들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극단주의자들(이를 테면 극우 단체)에게도 손을 내밀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정치적 패배나 기득권 상실의 두려움은 이들의 행보에 보다 근원적인 동인으로 작동한다. 대통령이 자신의 정치적 목적에 반하는 집단을 제거하기 위해 국민을 대상으로 계엄령을 선포하여 군을 동원하고, 사법 기관을 물리적으로 공격하는 집단을 두둔하는 국회의원들의 모습이 대한민국만의 유별난 사례는 아니었던 것이다.


 

지난 몇 달간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상황만 보아도, ‘완전무결해 보이는헌법에 본질적인 맹점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나아가 여러 민주적 제도들은 양날의 검과 같다. 동일한 헌법 조항도 당파적 이익을 위해 무리하게 사용될 때,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집단을 무너뜨리는 무기로 사용될 수 있다.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기 위해 왜곡된 법률 해석을 필요로 했던 인디라 간디의 권력 남용과 정치적 몰락은 우리에게 기시감이 들게 하는 사례다. 권력을 쥔 이들이라면 어떤 제도를 시행할 때마다 손에 든 검처럼 신중을 기해야할 일이다.


 

민주주의 제도는 가능한 한 다수의 의견을 반영하고자 한다. 이는 지극히 합리적인 태도다. 하지만 인류는 민주주의의 역사를 통해 소수의 의견도 소중하다는 것을 어렵게 배웠다. 다수라고 항상 합리적이거나 옳은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문제는 소수의 의견을 경청하고 보존하려는 장치가 도리어 다수에게 족쇄를 채우는 경우다. 미국 내 인종 차별적인 투표법들을 감시하고 견제할 수 있는 투표권법이 대법원 5명에 의해 폐지되어 버린 사례를 떠올려 본다. 이는 권력을 지닌 소수가 민주주의의 정체, 혹은 퇴행을 불러온 사태다. 적은 표를 얻고도 승리하는 선거를 가능하게 하여 트럼프 2기의 출범을 견인한 미국의 선거인단 제도는 어떤가. 미국 민주주의에서 다수에게 재갈을 물리고 민주주의의 구현을 가로막는 소수 권력의 문제도 있다. 헌법 수정을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어렵게 만든 미국 상원 제도가 그렇다. 간접 선거 방식인 선거인단 제도를 직접 선거인 보통 선거 방식으로 전환하려는 사회의 운동과 입법 과정이 상원에서 거듭 무산된 상황은 미국이 마주한 고질적 문제로 그 해결이 쉽지 않아 보인다. 기로에 서있는 미국 민주주의의 현장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단서다.


 

극단적 소수에서 저자들은 권력을 차지한 소수가 공동체 다수의 의사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할 때, 민주주의 국가가 어떤 부작용을 겪을 수 있을지 보여준다. 지금 대한민국은 민주주의를 다시금 배우는 중이다. 민주주의라는 제도에 그 자체의 취약성과 제도의 불완전성이 있음을 인식하는 일은 매주 중요하다. 우리는 우리의 민주주의를 재검토하고 새로 구축해야 하는 시점에 있다. 그러므로 민주주의 제도의 잠재된 한계를 깨닫는 일에서 더 멀리 바라볼 수 있는 상상력과 인내심이 절실하다. 주류 정치인 중에서 표면적으로 충직한 민주주의자들을 가려내는 일도 필요하다. 이 책을 읽고 사회의 제도들을 직접 운용하는 각 분야의 대표들의 자질을 검증하고 이를 요구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겠다. 무엇보다 우리는 미래의 대표들에게 타자에 대한 존중의 마음가짐이 있는지를 가장 먼저 확인해야 할 것 같다.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와 그 구성원을 아끼고 살피는 마음이 없는 이들이 어떻게 다수를 대표할 수 있을까.


 

여기에 우리는 정치인들의 손에 든 민주적 제도라는 검이 어느 쪽으로 기우는지도 지켜봐야 한다. 침묵하지 않고 말해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움직이기 위해 우리의 몸을 가볍게하면 더 좋겠다. 응원봉을 들고 시위 현장을 찾은 수많은 대한민국 시민들처럼 말이다. 노르웨이 인들이 오랜 시간 성숙한 민주주의를 구축해온 사례는 우리에게도 작은 희망의 씨앗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당장 필요한 일은 이러한 희망의 씨앗을 뿌리는 일이 아닐까. 물을 주어 보살피고 어떤 열매와 만나게 될지 상상해보는 일과 함께 말이다. 그러니 이 책의 독자부터 발걸음 가볍게 씨 뿌리는 사람이 되면 어떨까.







 [책속으로]

[1] "오늘날 미국 사회가 직면한 급박한 위협은 소수의 지배다."(21) - P21

[2] "민주주의는 정당이 선거에서 패배하는 시스템이다."(29)

"패배를 받아들이고 권력을 평화적으로 넘겨주는 규범은 오늘날 민주주의의 근간이다."(29)

"정당이 지는 법을 배울 때, 민주주의는 비로소 뿌리를 내린다."(36) - P36

[3] "정치인들이 패배를 지지 기반에 대한 존재적 위협으로 느낄 때, 그들은 권력 이양에 필사적으로 저항할 것이다."(39) - P39

[4] "표면적으로 충직한 민주주의자들은 반민주 세력을 정당화하는 단계에서 나아가 그들을 격려하고 심지어 더 급진적으로 만들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독재의 평범성(banality of authoritarianism)이 의미하는 바다."(76)


"그들은 심오한 원칙을 기반으로 민주주의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민주주의에 무관심할 뿐이다. (...) 그러나 결국 그들은 그 과정에서 민주주의 붕괴에 반드시 필요한 조력자 역할을 맡게 된다."(76) - P76

[5] "시민들이 헌법적 강경 태도를 보고 이를 인식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77)

"21세기의 독재 정권 대부분이 헌법적 강경 태도를 기반으로 삼고 있다."(89) - P89

[6] "독재 세력은 주류 정치인들이 그들을 묵인하고 보호할 때에만 성공할 수 있다."(182) - P182

[7] "반민주적인 극단주의자와 관계를 끊는 것은 민주주의 행동의 세 번째 원칙이다."(183) - P183

[8] "선출된 정부가 일시적으로 차지한 다수 지위를 활용해서 야당을 무력화하고, 혹은 게임의 법칙을 바꿔서 경쟁을 가로막음으로써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하도록 허용해서는 안 된다."(206) - P206

[9] "반민주적인 정당은 소수를 보호하기 위해 설계된 제도를 이용해서 독재를 인정하고 ‘강화’하기까지 한다. (...) 반다수결적인 제도는 소수 정당을 경쟁 압박으로부터 보호함으로써 전제적인 극단주의를 강화한다."(276) - P276

[10] "미국은 2023년 이전에 전직 대통령을 기소한 적이 없었지만, 일본과 한국, 프랑스, 이스라엘, 이탈리아 등 많은 기존 민주주의 국가들은 그렇게 했고, 그럼에도 그들의 정치 시스템은 후퇴하지 않았다. 대통령이나 총리가 중범죄를 저지를 때, 민주주의는 그 누구도 법 위에 군림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줘야 한다."(331) - P331

[11] "투표를 더 쉽게 만들고, 게리맨더링을 없애고, 선거인단 제도를 직접적인 보통선거로 대체하고, 상원 필리버스터를 없애고, 상원을 보다 비례적으로 만들고, 대법원 종신제를 폐지하고, 헌법 수정을 좀 더 쉽게 만드는 개혁. 이 모든 변화를 통해 미국은 세상의 모든 나라를 따라잡게 될 것이다."(341, 저자들이 주문하는 미국의 개혁안 요약) - P341

[12] "더 중요한 것은 헌법 개혁을 위한 아이디어가 거대한 국가적 정치 토론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변화를 가로막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침묵이다."(342)

"변화를 고려하지 않을 때, 우리는 변화를 이룰 수 없다. 논의와 아이디어는 결코 공허한 노력이 아니다."(344) - P344

[13] "사회 운동은 개혁을 지지하는 새로운 유권자 집단을 양산하고 현상 유지를 옹호하는 이들의 입지를 약화시킴으로써 정치인의 선거적 계산을 바꾼다. (...) 대규모 사회 운동이 정치적 셈법을 바꿔놓으면서 그들은 포괄적인 개혁을 받아들였다."(353) - P353

[14] "오늘날 미국에 필요한 것은 민주주의 개혁 의제만이 아니라, 민주주의 개혁 ‘운동’일 것이다. 이를 통해 각계각층의 시민을 국가 차원의 지속적인 사회 운동으로 집결시킴으로써 상상력을 자극하고 공적 논의의 틀을 바꿔나가야 한다."(358) - P358

[15] "미국의 민주주의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그리 민주적이지 못했던 과거를 똑바로 바라봐야 한다."(365) - P365

[16] "민주주의 수호는 이타적인 영웅의 과제가 아니다. 민주주의를 위해 일어선다는 말은 우리 자신을 위해 일어선다는 뜻이다."(369) - P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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