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프루스트와 함께하는 여름 - 여덟 가지 테마로 읽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앙투안 콩파뇽 외 지음, 길혜연 옮김 / 책세상 / 2017년 9월
평점 :
절판
《프루스트와 함께하는 여름》
(원제: Un Ete Avec
Proust)
앙투안 콩파뇽/줄리아 크리스테바 외 6명(총8명)
지음
길혜연 옮김 | 책세상
이제, 때가 된 듯하다.
10년 전 어느 무미건조한 실험실 한 구석에서 프루스트의 첫 문장, ‘긴 세월,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를 읽으며 꾸벅꾸벅 졸고 있었을 때거나, 20년 전 어느 지하 벙커에서 군복무하며, ‘우리는 사랑하자마자 아무도 사랑하지 않게 된다’라는 구절을 읽으며 고무신 거꾸로 신은 전 여친에 대한 분노를 삭이고 있었을 때였다면, 프루스트의 텍스트는 나에게 가까이 다가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제는 감히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아니 최소한 시도는 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처음 30페이지가 마지노선’이라는 옮긴이의 귀뜸처럼, 어릴 때 향이 고약한 한약을 먹기 위해 코를 막고 약을 들이마시듯, 프루스트의 흔적을 따라가볼 수는 있겠다는 말이다. 나의 ‘잃어버린 시간’이 앞으로 ‘잃게 될 시간’보다 많아졌음을 절감하게 된 중년에 와서야 나는 비로소 프루스트의 소설을 읽을 준비가 되었나보다. 이 과감한(?) 결심을 하게 된 계기를 마련해준 것은 분명히 <프루스트와 함께하는 여름>을 발견했고, 읽었기 때문이다.
올 가을의 문턱에서 접하게 된 이 책 <프루스트와 함께하는 여름>은 8명의 프루스트 전문가들(전문가 이기 전에 프루스트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가진 이들)이 각자 나름의 주제 8개를 통해 써내려간 각자의 독후 기록이다. 특히 이 책은 몽테뉴의 <수상록>과 몽테뉴의 사상에 관해 간략하게 소개했던(<인생의 맛>(원제: 몽테뉴와 함께한 여름)에서) 앙투안 콩파뇽의 ‘프루스트’ 읽기로 시작하고 있어 반가운 마음으로 책을 열 수 있었다.
시몬느 드 보부아르가 평생 ‘읽고 또 읽고 싶은 책’으로 꼽았다고 하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막상 읽기가 쉽지 않다고 알려져 있다. 한 문장에800단어가 넘는 경우도 있다고 하는 이 악명높은 책도 결국은 한 인간이 생각해낼 수 있는 거의 모든 사유의 영역과 접촉한 흔적을 보여주는 기록이 아니겠는가. 결국 화자에게 불현듯 등장하는 과거의 어떤 기억의 부분들은 결국 독자의 추억을 통해 그 등가물을 찾아 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달리말하면 프루스트의 소설은 작가가 오랜 시간동안, 특히 길지 않았던 작가의 생애 말년을 바쳐 완성해갔던 작품이므로 작가 자신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것이 또한 중요한 문제가 된다. 이러한 우려를 분명히 알고 있다는 듯이 <프루스트와 함께하는 여름>에서는 작품의 내용이나 이론적인 논의에 치우칠 수 있는 전문가들의 프루스트 읽기는 보다 작가의 삶과 밀접한 관련을 보여주고 있다.
【프루스트와 몽테뉴 – 줄기차게 자기의 내면을 향하는 시선】
이 책에 등장하는 8명의 프루스트 전문가 중 한 명인 라파엘 앙토벤이 ‘프루스트와 철학자들’이라는 키워드로 써내려간 글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으면서(즉, 그 소설을 통해 나 자신을 읽으면서), 이 책이 나를 삼키도록 내버려두면서, 항복의 대가로 자비심을 구하며 포식동물 앞에 제 몸을 바치듯 눈을 감고 독서에 몸을 맡기면서, 나는 수많은 철학자들의 말이 긴 메아리처럼 들리는 느낌을 받았다.”(255면)
나는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쓰기 전에 이 책을 소설로 쓸 것인지 아니면 철학에세이로 쓸 것인지를 고민하면서 스스로에게 ‘나는 소설가인가?’라고 수첩에 적어놓았다는 대목에서부터 <에세>의 작가 미셸 드 몽테뉴를 떠올리고 있었다. 나는 아직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어보지는 못했으므로, <프루스트와 함께하는 여름>에서 접하는 상황을 살펴보면, 프루스트라는 사람은 끊임없이 자신의 외부세계(살롱과 같은 사교계 등)에 대한 명민한 관찰자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 대해서도 극도로 까다로운, 예민한 탐색자이기도 했다는 점을 알게된다. 몽테뉴의 <에세>를 떠올릴 때, 프루스트의 ‘나는 소설가인가?’라는 물음에 대응하는 몽테뉴의 독백이 ‘나는 무엇을 아는가(Que sçai-je?)’라는 질문이다. 몽테뉴의 수상록 <에세>가 마치 이 질문에 대한 수렴하는 방향으로 자신에 대한 회의적 성찰을 책을 통해 줄기차게 보여주었다면, 프루스트는 자신의 거대한 소설을 통해 자신의 위치와 정체성을 회의하는 모습으로 드러내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을것이다. 이들의 모습은 결국 당사자의 내면으로 향하는 시선들로서 서로 공유하는 무언가를 갖고있다고 생각된다. 위의 라파엘 앙토벤이 언급한 대목처럼 극히 제한적이나마 나 역시 선배 철학자들의 영향을 자연스럽게 떠올린 배경이다.
‘소속되느냐, 소속되지 않느냐’
작가 줄리아 크리스테바가 읽은 프루스트는 ‘상상의 세계’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이어진다. 현대적인 작가로서의 면모를 이야기하는 대목에서 줄리아는 프루스트의 가족배경을 언급한다. 프루스트는 파리 코뮌 민중 봉기가 한창일 때 유대인 어머니와 카톨릭 신자인 프랑스인 아버지 사이에서 출생했고, 이 것이 프루스트의 인간적인 면, 다시말해 ‘주변부적’인 인물이 된 배경으로 설명하고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프루스트가 유대인에 대해 비판적이지 않았다는 점, 나아가 흔히 ‘드레피스 사건’으로 알려진 알프레드 드레피스가 연루된 사건에 대해 큰 관심을 갖게된 것을 넘어 그를 옹호하는데 적극적으로 관여했다는 점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이러한 프루스트의 배경을 고려해보면 다시 몽테뉴에게로 돌아가게 된다. 15세기 말 에스파냐의 국토재정복 운동을 통해 쫒겨난 유대인들이 전 유럽에 퍼지게 되는 과정에서 몽테뉴의 어머니 가족은 프랑스게 정착하게 된 것이다. 결국 몽테뉴의 어머니가 유대인, 아버지가 카톨릭 신자인 프랑스이었다는 구성마저 프루스트와 동일한 조건을 갖춘 셈이다. 그리하여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던 몽테뉴가 유대교 회당에가서 유대교 신자들과 지적인 대화를 나누고 배척하지 않게 된 점도 결국은 (어머니와 사이는 좋지 못했으나) 어머니의 유산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어떤 확고한 집단에 소속되어 있는 것이 아닌 소속과 비소속의 어느 경계에 있었다는 점, 그리고 이것이 결국 ‘나는 어떤 존재인가?’라는 스스로의 회의적인 시선을 두 사람 모두가 갖게된 배경인지도 모르겠다. 어찌되었든, 나는 <프루스트와 함께하는 여름>을 읽어나가며 프루스트의 삶을 조금 더 알게되고, 조금 더 구체적으로 그와 소설에 대해 상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프루스트와 바르트의 <밝은 방>, 그리고 예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우리 주변을 둘러싼 망자들에게 바치는 기념비다. 이 소설은 그들에게 발언권을 주며 그들을 추모한다. 무의지적 기억은 상실과 소생이라는 복잡한 감정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47면, 앙투안 콩파뇽의 글에서 인용)
<프루스트와 함께하는 여름>에 등장하는 첫번째 작가 앙투안 콩파뇽이 ‘시간’이라는 키워드로 쓴 글을 읽다가 이 대목을 만났을 때, 나의 ‘무의지적 기억’이 연결해준 한 사람은 바로 롤랑 바르트였다. 롤랑 바르트는 자신의 저서 <밝은 방>에서 어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어머니의 사진 한장을 바라보며 사진에 관한 에세이를 써내려가는 것이다. ‘등장인물’이란 키워드로 프루스트와 소설에 대해 써내려간 장 이브 타디에의 글에서 그는 프루스트의 소설에 대한 세간의 인식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어떤 이들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마르셀 프루스트가 자신의 어머니에게 보내는 장대한 편지라고 말한다.”(71면)
나아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화자는 할머니의 죽음에 대해 추억하는 대목이 나온다고 했다. 어린 화자에게 ‘무한한 사랑’을 의미했던 할머니의 죽음을 추모하며, 자신에게 결핍된 존재인 할머니를 소환해낸다. 이렇게 본다면 프루스트의 이 소설이 바르트에게 분명히 영향을 준 부분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나는 바르트의 저서 <밝은 방>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오마주로서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보편적인 인간으로서 우리가 거의 무의식적으로, 운명적으로 결핍하게 될 수밖에 없는 대상은 ‘시간’이다. 그리고 이 시간과 함께 결핍되어가는 우리 삶의 모습들, 우리가 사랑했으며, 사랑하고 있는 모든 대상들에 대한 환기가 바로 프루스트와 바르트의 두 책이 공유하는 인식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밝은 방>과 연결되는 또 하나의 고리’
‘예술’이라는 키워드로 프루스트와 그의 작품에 대해 써내려간 아드리앵 괴츠의 글에서 나는 바르트와 연결되는 또 하나의 연결고리를 찾았다. 음악과 회화를 열광적으로 좋아했다는 프루스트가 유럽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미술관을 일정에 포함시키지 않을리가 없다. 프루스트가 헤이그의 미술관에서 베르메르가 1600년대 중반에 그린 『델프트 풍경』을 보고 ‘난 내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림을 보았다는 것을 알았다’라고 상세히 기록하기도 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진품은 아니지만 인터넷을 이용하여 스크린을 통해 이 그림을 나도 보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또 다시 바르트의 <밝은 방>에 나오는 한 부분을 바로 떠올렸다. 바로 바르트가 나폴레옹의 막내동생 제롬의 사진을 보며 (자신이) ‘황제를 보았던 두 눈을 보고 있다’라고 중얼거리며 책의 서두를 시작하는 대목이다. 프루스트가『델프트 풍경』을 보며 놀라워하고, 아름다움에 만족감을 표시하는 모습을 나는 스크린을 통해 그림을 보면서 상상해보게되며, 이 사실이 바르트가 나폴레옹의 동생 사진을 보며 느꼈을 경이감과 같은 감정들을 떠올려주게 했던 것이다. 이렇게 사소할지 모르지만 프루스트와 바르트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은 나만의 상상은 아닐 것 같다.
‘마지막 연결고리 – 동성애 코드’
<프루스트와 함께하는 여름>을 읽어나가며 프루스트와 바르트의 또 하나의 연결고리를 발견하자면, 바로 성정체성과 관련한 점이다. 넉넉한 집안의 아들이었던 프루스트에게 프루스트의 운전사로 일했던 알프레드 아고스티넬리, 소설가 알퐁스 도데의 아들이자 작가였던 뤼시앵 도데, 그리고 프루스트가 음악에 대한 애호를 더해주었던 작곡가 레날도 안과의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은 어쩌면 놀라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당시에 흔치 않던 ‘동성애적 코드’를 노출시켜 놓았던 프루스트와는 달리 롤랑 바르트는 자신의 저서를 통해 ‘동성애적 코드’를 발견하는 일은 쉽지 않아 보인다. 다만 작가 아니 에르노의 어느 소설에서 ‘우리 둘은 사드보다 더 외설스럽다’라는 바르트의 말을 인용한 첫 페이지를 발견했을 때 바르트는 이미 나에게 강렬한 이미지로 남게 되었다. 사실 보다 엄밀하게는 프루스트의 경우 ‘양성애적’ 코드가 더 적절하겠으나, 바르트와의 연결고리를 고려할 때 ‘동성애 코드’로 한정시켰을 뿐이다.
아울러 흥미로운 것은 책의 전반을 통해 여러 프루스트 전문가들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실제인물들을 찾아 열결짓고 있는 부분이다. 프루스트가 영화배우로서 잠시 연인이기도 했던 루이자 드 모르낭과의 사랑과 추억을 통해 소설 속 인물인 알베르틴을 탄생시킨 것처럼, 사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은 소설이긴 하지만, 프루스트의 삶이 온전히 바쳐지고 반영된 또 하나의 세계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당시에 ‘동성애’와 관련된 무언가를 공공연하게 발설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음을 생각해보면, 프루스트는 자신의 삶 전체를 걸고 이 소설에 투영하느라 분투했음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정리하며】
주말 아침 라디오를 듣고 있다. 가수가 누구인지는 듣지 못했으나, 제목이 “You Belong to Me”라고 하였다. 인터넷에서 검색해서 다시 들어보는데 여러 가수들의 노래 중 나는 Carla Bruni의 버전이 프루스트를 생각하기에 어울리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노래를 들으며, 똑같이 어머니를 애도했던 바르트를 떠올려보고 있다. 그리고 다시 이 ‘무의지적 기억’은 나를 내 가족의 이야기로 연결시켜 준다. 소중한 사람의 부재는 아무리 노력해도 채워지지 않는다. 아픔은 시간이 지나도 아문다고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극복되지 않는 것도 있는 모양이다. 지금 현재 내게 속해있고, 내가 속해있는 사람들을 다시 생각해보게되는 순간이다. Carla Bruni의 곡을 들으며 마무리를 하려는데 이 책 <프루스트와 함께하는 여름>을 지하철에서 읽다가 그냥 먹먹해진 아래 문장을 다시 만났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사랑하느냐가 아니라, (…) 사랑하는 것입니다.”
<꽃다운 소녀들의 그늘에>의 문장 재인용(87면)
그렇다. 프루스트든, 바르트든, 몽테뉴든 이 먼저 살다간 사람들이 남긴 유산이 내게 가르쳐주는 바는 바로 프루스트가 소설 속에 숨겨두었다. 바로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하기’를 언제나 희망하고, ‘사랑했음’을 언제나 간직해두는 것. 프루스트가 일종의 ‘경계인’의 모습을 보여주기는 했다고 해도, 그의 어머니와 할머니는 분명히 그에게 강하게 ‘소속되어’ 있음은 분명하다. 반대로 프루스트 자신의 존재도 그의 어머니와 할머니에게 확고부동히 ‘소속되어 있었음’을 상기하는 것. 이것이 찰나처럼 지나가는 인생에서 우리가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이 아닐까. 그렇다면 나도 이제는 프루스트를 읽을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프루스트와 함께하는 여름>은 나에게 바로 내 삶에서 ‘사랑하기’를 환기해볼 소중한 기회를 준 셈이다.
.
(44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 상실과 그 상실의 자각에 관한 책이다."
(87면)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사랑하느냐가 아니라, (...) 사랑하는 것입니다." <꽃다운 소녀들의 그늘에>에서 재인용
(131면) "우리는 사랑하자마자 아무도 사랑하지 않게 된다." <스완의 집쪽으로>에서 재인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