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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지구를 돌려라
칼럼 매캔 지음, 박찬원 옮김 / 뿔(웅진)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거대한 지구를 돌려라》
(원제: Let the Great World Spin)
칼럼 매캔(Column McCann) 지음 | 박찬원 옮김 | [뿔>
책을 많이 읽었음을 드러내보이는 사람보다 한 권의 소설, 짧은 소설 한 편에서도 묵직한 이야기를 자신의 삶과 견주어 꺼낼 수 있는 사람들이 부러웠었다. 젊은 시절에는 속독가들의 능력이 부러웠고, 다치바나 다카시와 같은 다독가가 부러웠었더랬다. 하긴 그 때는 책을 거의 읽지 않았으니, 나와는 전혀 다른 세상의 이야기였기에 일말의 부러움도 나에게는 사치였을 것이다. 30대가 훌쩍 넘어 어릴 때 읽던 <영웅문>과 같은 무협지 이후 다시 소설이란 것을 읽어보기 시작했다. 젊은 시절 나에게 문학이란 ‘무용한 것’,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이었고, ‘쓸모 없음의 쓸모’를 알기에는 내 안에서 쌓여야할 시간이, 그리고 삶의 고단함이, 곧 ‘밥벌이의 지겨움’이 좀더 필요했던 모양이다.
언젠가 고 최인호 작가가 중학교 때 쓴 단편을 읽어본 적이 있다. 좀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다. 중학생이 부부사이의 미묘한 갈등과 심리를 이해하고 이를 유머러스하게 단편으로 써놓은 글이었다. 나는 불굴의 노력, 후천적인 노력이 매우 중요하다고 믿는 사람이다. 하지만 최인호 작가와 같은 이런 분들을 보면 ‘타고난’ 무언가를 무시할 수는 없다는 것도 이제는 믿는다. 꾸준한 노력으로(예컨대 1만시간 이상의 꾸준한 노력으로) 뛰어난 수준에 도달하는 것은 누구나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탁월함’의 경지라는 것은 분명 다른 차원의 문제라고 믿는다. 그리고 이 ‘타고난’ 탁월함이 없는 나에게 자신의 결핍을 계속 들여다보며 스트레스를 받는 일은 무의미하다고 나에게 말해주고 싶은 것이다. 나와 같은 이들이 불굴의 의지와 꾸준한 노력으로 이를 수 있는 경지는 이 ‘타고난 탁월함’의 경지에 ‘점근적’으로만 다가갈 뿐 이들은 결국 만나지 않을 것이다. 결국 ‘타고나지 않음’을 비관할 필요는 전혀 없다는 것이 나의 결론이다. 칼럼 매캔의 소설 <거대한 지구를 돌려라>를 읽으면서 나는 저자가 바로 이런 ‘타고남+탁월함’의 차원에서 사는 사람의 일종이라 생각했다.
오늘 한 권의 소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들은 리뷰라고 이름 붙이기에는 부끄럽지만 한 권의 책을 읽고 한 페이지라도 그 인상을, 책에 대한 내 기억들을 남겨두고자 끄적거리던 것들을 모은 메모에서 출발하였다.
<거대한 지구를 돌려라>의 작가 칼럼 매캔은 아일랜드 출신(1965년 생)의 작가로 1990년대 뉴욕에 정착했다고 한다. 곧 성인이 되어 ‘이방인’으로서 낯선 사회에 정착하게된 작가가 ‘신대륙’에서 바라본 삶의 양상들이 소설에 나타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미국 개척기에 네덜란드인들이 도착하여 ‘뉴암스테르담’이라고 불렀던 지금의 ‘뉴욕’을 통해 작가는 미국사회가 안고있는 사회의 문제들과 미국의 트라우마를 직간접적으로 예리하게 들추어낸다. 1974년 ‘쌍둥이 빌딩’으로 알려진 세계무역센터에 줄을 걸고 그 사이를 걸었다는 프랑스인 필리프 프티에 관한 사건이 각색되어있긴 하지만 이 소설에서 하나의 중심 축을 구성하고 있다. 지금은 2001년 ‘테러’로 인하여 무너진 110층의 세계무역센터 위를 우아하게 걸었던 이 프랑스인의 사건과, 그 아래 구질구질하고 피폐한 삶 또는 부유하지만 공허한 삶을 살아가는 소시민들의 삶과 과연 어떤 상관관계가 있다는 말인가. 소설을 읽어가면서 내내 떠올렸던 궁금증이었다.
우선 이 책의 시간적인 배경은 70년대를 주축으로 하여 후반에 이르러 소위 ‘9.11테러’ 이후의 삶이 대비되어 나온다. 이 두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것은 아마도 이 ‘9.11테러’가 미국인에게, 곧 작가 자신에게 갖는 의미를 되짚어보는 작업을 염두해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분명 이 ‘9.11테러’의 존재는 작가에게, 나아가 미국인들에게 크나큰 트라우마를 남겨준 사건일 것이다. 한국인들에게 1997년 ‘IMF외환위기’가 가져다준 트라우마와 사회의 질적 변화와도 같이 ‘9.11테러’는 미국인들에게 실로 ‘거대한’ 사건이었음이 분명하다.
70년대의 미국은 무엇보다도 명분없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회의와 방향 상실로 인해 트라우마를 겪던 시기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거대한 지구를 돌려라>에서는 이 ‘거대한’ 모순의 세계에서 상처입은 채 살아가야만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들어있다. 베트남 전쟁에 아들을 내보낸 어머니들의 이야기가 담겨있고,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기도 한다. 나아가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이 실질적으로 그리고 여전히 백인 사회에 어떻게 뿌리내리고 있는지, 나아가 이에 대해 양심적인 백인들이 느끼고 항상 지니고 있으면서도 일상에서 회피하곤하는 백인들의 죄책감(white guiltiness)에 대해서도 보여주고 있다. 기나긴 이 소설이 점점 눈에 들어오는 것은 사실 중반을 넘어서이다. 다양한 등장 인물에 매번 시점이 바뀌어 화자가 동일하지 않은 점은 다소 혼란스럽다. 하지만 저자가 이 등장 인물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무엇보다 따뜻하기에 소설의 후반으로 가면서 점점 공감하게 되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저자는 미국사회에 만연하는 모순과 편견의 양상을 간접적으로 독자가 들여다볼 수 있도록 안내하는데, 미국사회가 겪는 트라우마를 통해 직간접적으로 상처받는 이들의 삶이 어떻게 치유되고 있는지에 대해서 저자는 다양한 인물들의 시선에서 바라보듯 쓰고 있다. 등장 인물들은 허구의 인물들이지만 결국 미국인들의 실체적인 모습을 모두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사회의 모순으로부터 상처를 입은 채 무기력하게 살아가야하는 이들의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도 소설의 등장인물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삶에 의연하게 대처하고 부대껴 나가는지를 그리고 있다.
이 소설에서 볼 수 있는 미국의 트라우마는 구체적으로 이런한 것이다. 세계의 도시 ‘뉴욕’에서도 부유한 동네로 알려진 맨하탄의 ‘파크 애비뉴’와 대비되는 우범지역인 ‘브롱크스’지역을 통해 오래된 자본주의의 모순을 보여주고있다. 나아가 미국의 세계지배 야욕의 일환으로 벌어진 베트남전에는 파크 애비뉴든 브롱크스에 살든 이들 가족의 아들들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트라우마를 남기는 것이다. 또 다른 오래된 트라우마는 인종차별이다. 미국의 구치소에 백인 죄수보다 흑인죄수가 많다는 짤막한 문장을 통해 작가는 미국의 이 오래고 구조적인 인종차별의 흔적을 지적하고 있다. 이는 인종의 우열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모두가 이방인인 이 신대륙에서 한 이방인 인종이 어떻게 다른 인종을 구조적으로, 체계적으로 배체시키는지에 관한 오래고 고질적인 문제인 것이다. 또 앞에서도 언급한 베트남전과 70년대 반전분위기가 지배한 사회의 분위기, 그리고 전쟁이 남긴 개별적인 존재들의 영원한 상처들이 보여진다. 그리고 ‘9.11테러’이후 농담마져도 조사대상이 된 ‘경직된 미국사회’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이것은 테러가 미국역사에 영원히 남긴 트라우마이다. 아울러 2005년 미국 남부 미시시피지역이나 뉴올리언즈 지역 등을 중심으로 큰 희생을 초래했던 허리케인 ‘카트리나’의 희생자들과 그 가족들의 모습이 후반에 잠시 나오면서 미국이라는 배의 결함, 국가의 사회안전망에 대한 의혹을 저자는 분명히 인식하고 독자에게 제시하고 있다. 특히 2017년 지금(8월-9월), 미국 텍사스 지역을 강타한 허리케인 ‘하비’가 남긴 흔적들과 희생자들로 기사가 넘쳐나는 시점에서 이 소설은 이 거대하고 모순된 세계는 끊임없이 돌아가고 있음을 내게 상기시켜주었다.
이러한 트라우마는 낯설지 않다. 우리에게 ‘외환위기’와 ‘세월호사건’을 통해 사회안전망이란 허구였다는 사실과 우리 사회의 ‘불확실성’, 그리고 이러한 모순에 발을 딛고 살아가야만하는 우리의 모습을 다시금 떠올리게 해주는 것이다. 또 소설에서 짤막하게 그러나 계속 반복해서 언급되는 이라크전의 희생자 소식에 관한 언급은 어떤가. 작가가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2001년 이후 질적으로 변화해버린 사회의 분위기를 공항보안검색 에피소드에서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농담이 사라진 사회’, ‘가벼움이 사라진 사회’에서 살아가야하는 사람들의 어께에 걸쳐진 삶의 무거움을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이는 아마도 아일랜드에서 자라고 성인이 되어 ‘신대륙’에 정착한 저자의 이방인으로서의 시선이기에 보다 피부에 와닿도록 인식하는 문제들인지도 모른다.
저자는 세계를 바꿀려는 의도를 가진 것은 아니겠지만, 분명히 자신이 속한 사회를 민감하게 주시하고 예민하게 반응하는 작가다. 나만의 생각이겠지만 소설의 제목에 드러나는 ‘거대한 지구’, ‘거대한 땅덩어리’는 곧 여기에 발을 딛고 살아가야만 하는 인간사회의 ‘모순’이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우리가 어떠한 행동으로도 이러한 모순을 제거하거나 바꾸기 힘든 것이라면, 우리가 이러한 ‘거대한 모순’ 속에서 살아가야만 한다면, 우리는 이 거대한 땅덩어리의 작은 점으로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 모순의 땅에서 어쩔수 없이 살아가야하는 우리라면, 하늘에서 우아하게 살 수는 없는 것일까? 어쩌면 칼럼 매캔이 1974년 수백미터 상공에서 세계무역센터 사이를 줄 하나에 의지해 건넜던 필리프 프티의 에피소드를 소재로 삼은 것도 결국은 보잘것없는 우리 인생에서 ‘쓸모 없음의 쓸모’가 얼마나 ‘쓸모있는지’에 주목했기 때문이 아닐까. 혹은 차라리 부조리한 지상의 삶에서 한번쯤 꿈꿔볼만한 아름다운 이상에 대한 동경이자 인생에 대한 하나의 ‘은유’는 아니었을까. 땅에 발을 떼어본 적없이 땅만보고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 대해 저자는 하늘을 보고 때로는 아찔하지만 아름다운 꿈을 꾸는 순간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가끔씩은 하늘을 보며 살라고말이다.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언급했던 ‘위험한 삶을 살아라’, ‘자신을 가볍게 하라’, ‘춤을 추어라’와 같은 알쏭달쏭한 말들은 곧 자신에게 맞닿는 삶의 유희에 대한 것이 아니었을까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자신을 가볍게 하고 춤을 추기 위해서는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한 긍정, 삶에 대한 긍정이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여기에 (세대를 뛰어넘어)우리에게 반복적으로 계속되는 트라우마가 남긴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힘에 대한 실마리가 있음을 저자는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일전에 소설이라는 것을 읽으며 작가가 하는 말이나 옮긴이의 말이 제대로 이해되지 않는 점이 있었다. 그리고 나에게는 이것이 마치 나의 정신적 미성숙을 드러내주는 것같은 오랜 콤플렉스였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 나는 그동안 매우 ‘얕은’ 삶을 살아온 것만 같은 결핍을 언제나 느꼈다. 바로 나 혼자 인생에서 뒤쳐져 있다는 조바심 같은 것을 느끼곤 했다. 나이가 좀더 들고서야, 그리고 소설을 한 권 한 권 읽어 나가면서야 비로소 행간에 숨은 삶의 고단함을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하는 것 같다. 그리고 칼럼 매캔의 <거대한 지구를 돌려라>는 나에게 내가 그동안 갖고 있던 나만의 콤플렉스를 더이상 가지지 않아도 좋다고 말해주는 첫 번째 책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