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5월투쟁이
넓은
의미의
정치적
개념으로서 ‘보다
적극적인
역사
창조에
개입,
참여함으로써
공동의
운명을
개척하려는
활동’과정에서
본질적으로잠복해
있는 ‘죽음’과 ‘진실’의
관계를
풀어나갔다면,
두
번째
부분에서는
정치와
종교적
진실사이의
관계로
관심을
제한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재미교포작가
김은국이
1964년
출간한
소설 <순교자
The Martyred>를가지고
분석하고
있다.
이
소설은 ‘6.25전쟁’으로
많이
통용되는 ‘한국전쟁’을
배경으로하여,
공산주의
세력에 의해
희생된
12명의
목사에
관한
진실을
중심으로
다루고있다.
이
두
번째
장은
개인적으로
이번
독서에서
상당히
흥미를
갖게된
부분인데,
작가의
소설
이전에
작가
김은국에
관한
관심
때문이다.
김은국
작가는
대학에
입학한지
석
달만에 ‘한국전쟁’(1950)이
발발하여,
자원
군입대한
후
55년까지
복무하다가
도미하여
역사학과
정치학을
공부한다.
학사를
졸업하고 ‘작가워크숍’에
등록,
글쓰기
훈련을
보다
본격적으로하며,
자신의
첫
번째
소설이자
작가로서의
명성을
가져다준 <순교자>를
발표하면서,
영문학과에서
교수로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한다.
내가
대학생시절
인상깊게
읽고
좋아했던
인류학자
제이콥
브로노우스키의 <인간
등정의
발자취>를
번역한
장본인이
바로
김은국
작가였다는
사실,
나아가
이범선의 <오발탄>을
영역했다는
사실도
작가를
다시
보게한
계기가
되었다.
<순교자>에서
재확인
할 수
있는
점은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구분한
두
가지
진실-합리적진리와
사실적진실-중에서
정치권력에
의해
쉽게
왜곡이
가능한 ‘사실적진실’의
취약성이었다.
이점은
시대를
초월하여
하나의
정치공학적
전략으로
빈번히
사용되고
있는
부분이기도하다.
이러한
실례는
앞서
역사학자
한홍구
교수가 ‘검찰사상
최악의
사건’으로
규정했던 ‘김기설
유서대필사건’에서
다시
떠올려볼
수
있다. 강정인
교수는 <순교자>에서
드러나는 ‘사실적
진실’의
왜곡
문제와
1장에서
언급한 ‘김기설
유서대필사건’을
연결지으며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권력에
의한
조직적인
거짓말하기는
전쟁때나
혁명기
뿐만아니라
정권의
정당성이
위기에
처했을
때도
집권세력이
이른바 ‘국면전환’을
위해
흔히
사용하는
국가통치술이
되어가고
있다.”(145면)
우리가
좀더
실감할
수
있는
예로서
이명박-박근혜
정권이
등장할
수
있었던
것,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선출될
수
있었던
것을
상기해볼
수
있다.
이러한
실례들은 ‘집단으로서의
정치적
공동체가
분명한
진리보다는
합의에
의해
그
결속력이
유지된다’는
월린의
지적을
돌이켜볼
때
수긍할
수
있는
사례이다.
곧
집단,
정치적
공동체로서의
결속이
허구로서의
신화에
의존한다는
통찰은
강정인
교수의 <순교자> 분석을
통해
보다
주의깊게
들여다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3]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다루는
내용은
미국 반전(反戰)영화에
관한논의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저자는
미국의
반전영화가
과연
전쟁을
반대하는
입장에
서있는
것인지에
의문을
던진다.
그리고
서구의 ‘동일자’
중심의세계관과
이를
착실히
내면화하고
있는
우리의 ‘서구중심주의’를
지적하고있다.
이장에서
다루고
있는
미국의
반전영화 <디어헌터>, <플래툰>, <지옥의묵시록>, <7월
4일생> 등은
내가
학창시절에
인상깊게
보았던
영화인데,
저자는
내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서구중심주의’적
시각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주로
베트남전과
관련하여
등장한
이 ‘반전영화’들이
사실은
미국인(주로
백인)의
인명피해에만
주로
관심을
갖고
있을
뿐,
베트남인들은
미국의
아들
딸들의 생명을
앗아가는
미개인으로
보여지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보다
정제된
문장으로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미국
반전영화의
베트남인들은
미국인
영화관람자의
지배적
의식속에서
비인간화(타자화)
되어버린다.”(190면)
미국
반전영화에서
드러나는
시각은
과거에
제작된 ‘카우보이영화’의
시각과
다를
바가 없다는
말이다.
곧
미국역사의
주체는
백인
이민자들로서
규정되고
있으며,
저자가 ‘아메리카인디언’으로
부르는
미국
원주민들은 ‘미국사의
객체나
배경’으로
다루어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저자의
시각에서는
미국의
반전영화도
곧 ‘람보시리즈와
다름없이
서부활극’에
다름아니다.
“미국의
반전영화는
전쟁동기의
타당성이
아닌
수행방식의
타당성에
의거해
전쟁에
반대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전쟁방식을
제한하는
움직임도
상대방의
피해는
고려하지
않고 ‘우리의
피해’만을
고려한
결과로,
집단
이기주의를 드러낼
뿐이다.”(192면)
“이점에서
미국의
반전운동은
일관성있는
이데올로기에
입각한
원칙론적
반전을
부르짖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대중의
마음을
쉽게
움직일
수
있는
최대공약수로서의 ‘우리의
피해방지’에
호소하는,
집단이기주의의
발로였다.
결국
이러한
반전운동이
대중적
성공을
거둠에
따라
어떤
면에서는
성공보다도
중요한
반전의
윤리적,
원칙적
의미는
퇴색하게
되었고,
집단이기주의의
한
형태인
공리주의가
빛을
발하게
되었다.”(196면)
이러한
시각은
최근
유럽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
테러사건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다시말해 서방국가의
무고한
시민들이
겪은
희생에는
깊은
애도를
표하면서도,
비서방국가들의
시민들이
겪는
희생에
우리는
동일한
애도를
보였는지
자문해볼
수
있다.
과연
그런가?
미국의
2001년
9·11사건이후,
미국내에
거주하는
무슬림
대학생들이
경찰의
감시를
받아왔다는
사실이
수년
전
드러나
언론의
비판을
받은
적이
있다.
미국은
여러
인종이
서로
융합되는곳(melting
pot)이
아니라
여전히
백인들만의
왕국이었음은
저자가
언급한
반전영화의
사례로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책의
몇
군데에서
저자가
본인의
논의를
전개하는
과정에서
보이는
단정적인
표현들은 ‘과연
그럴까’라는
의구심을
갖게하는
표현들이
간혹
나온다.
이런
부분은
자신감의
발로일
수는
있지만,
동일한
대상에
대해
또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제한할 수 있을 것이다. 혹은
지나치게
단순화하여
바라보고
결론을
낸
것이
아닌가
하는 부분들은
미미하지만
지적해볼 수 있겠다.
이런
몇
가지
점들을
제외하면
미국의
반전영화를
중심으로
우리
안의 ‘서구중심적
가치관’을
지적하고
있는
3장은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깊게
읽은
부분이기도
하다.
흔히 ‘걸프전’으로
불리는 ‘미국-이라크전’
당시
학생으로서
나는
부끄럽지만
미국의
첨단무기에
관한
자료들을
모으는데
상당히
열중했던
일을
상기해
본다.
이번
독서는
어린
나에게
이미
내면화되어있던 ‘강자의
세계관’을
내안으로부터
꺼내어
살펴보게한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또
한
가지
떠오르는
생각은
저자가
베트남전쟁과
걸프전에
대해
미국내
반응이
정반대였던
이유가
무엇일까
의문을
던지는
부분에서
비롯되었다.
분명히
뚜렷한
명분을
갖지
못하고,
밀림에서 ‘보이지
않는’
적을
제거해야
했던
베트남전과는
달리
걸프전에서는
버튼
하나로
목표물을
공격하는
첨단무기의
실험장
성격이
더
강하다는
것이
나의
견해다.
또
모호한
주적을
대상으로한
베트남전과는
달리
걸프전에는
후세인이라는
분명한
미국의적(악)이
상정되어
있던
점도
무시할
수
없다고
본다.
말하자면
걸프전의
경우는
보다
더 ‘컴퓨터게임’적인
요소가
강하게
보인다는
점이다.
후세인은
게임에서
물리쳐
제거해야하는
난이도
높은 ‘왕’으로서
드러나고,
전쟁을
질질끌면서 ‘미국의
아들딸’들의
희생을
증가시키는
것
보다는
백악관에서
버튼
하나로
미군의
희생을
최소로하면서
단기간에
전쟁을
끌어나갈수
있었던
것도 ‘반전(反戰)여론의
반전(反轉)’
현상에
영향을
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곧
걸프전은 ‘게임적요소’로서
화면을
통해 ‘재구성되는’
진실은
베트남전과는
달리
피해자(희생자)들과의
거리두기가
가능해졌다는
점이다.
다시말해서
희생자들의
고통에
더욱
둔감해지게
되는
것이다.
미국의
정치세력은
베트남전쟁을
통해
자신들이
저지른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는 철저함을
보인다.
베트남전쟁을통해
배운
교훈을
다양한
각도에서
활용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나에게
비춰지는
미국의
모습은
걸프전
이후
미국내
전쟁에
대한
여론이
진실을
외면하는
방향으로
가고있는
것으로
보인다.
공동체의
결속을
위해
미국의
정치세력이
주력하는
바는
구성원들의
비판적
기능을
둔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점이다.
이상으로 ‘진리/진실’
– ‘정치’
– ‘죽음’의
상호관계를
들여다보는
저자의
책을
읽으며
메모해둔
것들,
책을
덮고
옆길로
새며
끄적거렸던
나의
생각들을
모아보았다.
저자의
여러
학술논문을
다듬고
정리한
이
책은
정치철학서로서
이해할
수
있겠다.
그러나
한편으로 ‘성찰하지
않는
삶은
무가치하다’라고까지
언급했던
플라톤의
통찰처럼
이
책은 ‘참다운삶’을
살기
위한 통찰을
주고있다.
삶의
대척점을
이루는
죽음은
이
책의
전체를
통해
언급되고
있으며,
이 ‘죽음’은
우리에게
삶을
제대로
살도록
절실하게
요구한다.
‘참다운삶’에
대한
기준은
매우
개별적일
것이다.
‘죽음’이
각자에게
매우
개별적인
현상인
것처럼
말이다.
중세
판화가이자
화가였던
알프레드
뒤러의
그림에,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
지도(화가
홀데인의
그림
버전)에
숨어있는
두개골(곧
죽음)의
이미지를
굳이
떠올리지
않아도 ‘죽음’의
문제는
인류생존의
문제와
떨어질 수
없는 본질적인 ‘인간의
조건’이기도하다.
나는
이
책을
저자의 ‘참다운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의흔적’이라고
하겠다.
머리말에서
저자는 ‘정치세계에서
진리/진실의
지위는
근본적으로
위협받는
듯하다.’(8면)라고
말한다.
이러한
현상은
이미
전세계적으로
보편화되고
있으며,
이러한
맥락에서
초래되는 ‘죽음’은
왜곡된
진실앞에서
다르게
해석되기도
한다는
점에
주목해
본다.
결국
현대
사회에서
정치와
진실과의
관계를
바로잡는
동인은 ‘죽음’을
염두해둔 ‘참다운삶’에
대한
욕망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