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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 - 꼿꼿하고 당당한 털의 역사 ㅣ 사소한 이야기
커트 스텐 지음, 하인해 옮김 / Mid(엠아이디) / 2017년 1월
평점 :
절판
<헤어 Hair: A Human History>
커트 스텐(Kurt Stenn) 지음 | 하인해 옮김
| MID
(‘털은 그저 털이 아니었다’)
언젠가 나의 머리카락이 하루에 얼마나 자라는지 궁금했던 적이 있다. 한 달에 약 1 cm 정도 자란다고 가정하고 계산했더니, 내 머리카락은 초 당 약 4 나노미터(nm)의 속도로 자라고 있었다. 이 거리는 DNA를 이루고 있는 염기쌍 10개 사이의 거리에 해당하는 거리(대략 3.4 nm)와 맞먹는다. 분자 크기 세계에서 본다면 내 머리카락은 매초에 DNA염기쌍 10개 사이의 거리에 해당하는 거리만큼 '격렬하게' 세포분열을 한 후 단백질 합성을 하여 피부 위로 밀어올리고 있다는 말이다. 내 두피 아래에서 지금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이 격렬한 생명현상이 바로 나의 일부라고 생각하면, ‘털은 그저 털이 아니다’라는 말이 다시 보이게 될 것이다.
이제 다루게 될 책 <헤어>를 손에 넣기 전에, 아내가 나에게 ‘야한 생각을 너무 많이 해서 내 머리카락이 빨리 자라는 것 같다’라고 의심의 눈길을 보낸 적이 있다. 인간이란 존재가 아무리 심신이 유기적인 존재라고 하여도, 과연 생각만으로 단백질 합성 속도가 더 빨라질 수 있다는 말이 사실일까? 스트레스에 의한 심리적인 영향이 소화불량, 불면증과 같은 생리적 변화를 야기하는 사실에 비추어보면 전혀 근거없는 말도 아닐 것 같다. 나는 우선 부당하게 아내로부터 받은 의심의 눈길대신 머리카락의 성장에 대한 진실을 설명하고 아내의 미안해하는 눈빛을 보겠다는 사심가득한 목적을 가지고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저자 커트 스텐은 병원 의사이자 과학자로서 평생 털과 모낭을 연구해온 독특한 전공을 가진 인물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책을 쓰게 된 동기를 이발소에서 경험한 일화로부터 말하고있다. 이발사와의 대화 중 털에 대한 사람들의 무지와 과소평가하는 태도를 보고 지구 위에 사는 존재자로서 털이 갖는 중요성과 의미를 폭넓게 소개하기로 결심한다. <헤어>는 크게 3부로 나뉜다. 1부에서는 털에 대한 과학적 배경지식으로부터
풀어나가는데, 털의 구조 및 성장주기와 같은 생물학적 기초지식에서부터, 진화적 의미, 탈모 등에 대해 알기 쉽게 소개한다. 2부에서 저자는 가장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는데, ‘털 자체’에 대한 인문적 고찰을 하고있다. 무엇보다도 ‘털’은 매우 강력한 메시지 전달 수단임을 다양한 측면에서 조명한다. 마지막 3부에서는 ‘털에 얽힌’ 인류사적 측면을 이야기한다. 비버의 털과 가죽을 얻기 위한 인간의 탐욕이 초래한 결과와 영국이 양모 산업의 전모 등을 매우 흥미롭게 이야기해주고 있다.
(털에 관한 과학적 배경지식)
우선 ‘털’박사 커트 스텐이 설명하는 털의 역할은 우리 몸에서 하찮은 존재가 아니라 생물이 지구상에 등장하여 지금까지 진화해온 역사를 보여주는 단서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원시포유류인 오리너구리는 조류나 파충류처럼 알을 낳지만, 새끼가 알에서 부화하면 포유류처럼 젖을 먹는다. 곧 오리너구리는 조류, 파충류, 포유류의 유전자를 모두 갖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원시포유류로서 진화의 단계를 지지해주는 증거다. 이러한 진화 단계를 고려하면 생물체와 외부세계를 구별짓는 ‘경계’로서의 ‘표피(보호막)’은 어류, 파충류, 조류, 포유류에 따라 다른 형태로 변형이 되기도 했다고 한다. 조류의 경우, 표피가 가는 섬유형태로 갈라져 깃털이 된 반면, 포유류는 바로 ‘털’의 형태로 진화했다는 식이다.
털에 관한 흥미로운 배경지식을 하나 하나 알아가면서 나의 흥미를 강하게 끌었던 부분은 ‘털’의 미스터리한 성장 주기에 대한 부분이었다. 우선 저자는 털의 기본적인 세 가지 성장주기를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털의 ‘성장기’에는 진피에 있는 모낭세포에서 ‘맹렬한’ 속도로 세포분열이 일어나는 시기로서 모간(털)은 1달에 약 1 cm를 피부 밖으로 밀려나온다. 다음 단계인 ‘휴지기’에서 세포분열은 중단되고 성장이 정체상태에 이르며 머리카락은 피부에 단단히 고정되는 시기이다. 이 시기가 끝나면 ‘탈락기’가 이어지는데, 이 때 털이 빠진다. 사람은 매일 50-100개의 머리카락이 정상적으로 빠지게 되는데, 이 시기에 빠지는 머리카락이 ‘탈락기’에 있는 녀석들인 셈이다.
털의 성장 주기를 새롭게 알게되면서 나의 관심을 끌게된 것은 털이 미스테리한 주기를 갖는 경우이다. 예컨대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으면 머리카락이 하얗게 셀 수 있고,
호르몬에 따라 머리가 벗겨질 수 있다.”(61면)와 같은 경우이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바로 뒤에 미국 소설가 애드가 앨런 포의 단편 <큰 소용돌이에 빨려들어서>를 소개하며, 한 젊은 어부의 이야기 꺼낸다. 젊은 어부는 바다 한가운데서 폭풍우를 만나 밤새 극심한 파도와 싸우면서 단 하루만에 머리전체가 하얗게 센 이야기를 하는 대목이 나온다. 문득 ‘목소리 소설’로 알려진 노벨문학상 수상(2015년)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의 어느 대목을 떠올린다. 이 책에서 저자는 전쟁에 참여한 러시아 여성들의 증언을 기록하고 있는데, 잔혹한 전투 현장에서 극심한 스트레스로 하루만에 머리가 하얗게 세어버린 여인들의 증언이 나오기 때문이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과장은 아닐까 의심했지만, 이런 증언이 한 건이 아니었다. 커트 스텐은 "드물기는 하지만 의사들은 생명을 위협하는 끔직한 정신적 충격으로 모발이 갑자기 변하는 현상을 목격한다."(63면)라는 점도 덧붙이고 있는데,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의 인터뷰기록을 읽을 때는 어린 러시아 여군들이 받았을 스트레스의 강도를 보여주겠거니 했지만, 어쩌면 이런 불가사의한 일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한다.
우선 커트 스텐은 포의 소설 속 인물을 언급하면서 머리카락이 하얗게 세어버린 현상에 대한 과학적 설명을 시도하고 있다. 과연 이런 일이 가능할까를 설명하는 사례로 소설 속 인물을 든 점은 우선 저자의 설명에 대한 신빙성을 떨어뜨린다. 나아가 단 하루만에 머리카락이 하얗게 세어버린 이유로 저자는 엉뚱하게도 스트레스로 인한 ‘원형탈모’를 그 원인으로 들고 있다. 죽을 뻔한 고비로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대부분의 까만 머리카락이 빠져 하얗게 두피가 드러났다는 설명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인터뷰한 전직 여군들을 인터뷰했다면 과연 ‘원형탈모’를 그 이유로 설명할 수 있었을까?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에 등장하는 전직 여군들이 전쟁에 참여한 나이대가 대부분 10대 후반이었다. 극심한 전투의 스트레스로 하루만에 원형탈모가 일어나 검은 머리카락이 빠지고 하얀 두피가 드러났다라고하면 10대 후반의 젊은 여성들이 하루만에 대머리가 되었어야하기 때문이다. 이런 설명은 설득력이 부족해보인다. 커트 스텐은 ‘탈모’에 관한 이야기로 넘어가기 위한 장치로서 머리카락이 하얗게 세어버린 젊은 어부를 언급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다른 설명이 가능하지 않을까. 인간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외부의 자극에 민감하고, 인간의 심리적 요인이 신체에 주는 영향이 긴밀하고 직접적인 존재이다. 머리 색에 대한 저자의 설명대로 피부 아래에 있는 ‘멜라닌 색소’가 전쟁과 같은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색소의 분포에 영향을 줄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 이 부분은 당분간 나의 궁금증으로 남을 것 같다.
(털의 문화적 기능 –
메시지 전달 수단)
<헤어>를 읽기 전까진 ‘털’에 대한 포괄적인 관점을 생각해본 적은 없다. 굳이 오랜 기억을 더듬어본다면, 털에 관한한 단지 단편적인 사례들로서 나의 경험 속에 존재할 뿐이었다. 예를 들어 학창시절 두발 규정에 대한 반감과 ‘삭발’한 학생에 대한 ‘반항아/이단아’로서의 처벌에 대한 기억이 우선 떠오른다. 그리고 빡빡머리 군복무 시절이 있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대부분의 사회에서 ‘길고 단정하지 못한 털, 머리카락’은 사람들에게 신뢰를 주지못하는 메시지를 주었다. 또는 의도적인 장발 세력으로서 60년대 미국에서 유행했던 히피족들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긴머리를 하나의 트레이드 마크처럼 하며 ‘저항’의 메시지를 전달하였다. 저자는 집단성을 극대화하는 수단으로서 ‘삭발은 비인간화와 정복이라는 메시지를 분명하게 전달한다’라고 말한다. 사형수를 처형하기 전에 머리카락을 삭발하는 과정은 사형수로부터 ‘인간다움’의 흔적을 제거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역사를 거슬러 1431년 잔 다르크가 화형당하기 전, 1793년 마리 앙투아네트가 단두대에 서기 전 삭발당한 사례에서 ‘인간다움을 제거하는 과정’을 분명히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이렇게 희생당한 대상이 ‘여성’일 경우, 삭발은 그 메시지의 잔인함을 더욱 극대화한다고 볼 수 있다. ‘인간다움의 제거’에서 나아가 ‘여성다움의 제거’라는 기능이 더해짐으로써 이러한 메시지의 강렬함은 더욱 극적으로 부각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희생자가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말이다.
삭발에 대한 이야기를 더 이어가자면, 또 떠오르는 사례는 나치가 기획한 유대인 절멸 수용소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가해진 나치의 ‘비인간화’ 절차로서 수용되어있던 유대인들에게 동일한 옷을 입히고, 몸에 난 모든 털을 깎아버림으로써 각자의 개성을 말살한 점을 들 수 있다. 같은 옷을 입고, 동일한 머리 모양을 한 이들을 이름이 아닌 수감번호로 불리며 개성을 박탈당한 집단이 되었다. 유대인 수용소에서 인간이란 존재의 존엄성이 제거된 것이다. 유대인 수용소의 생존자 중 잘 알려져있는 프리모 레비의 증언으로부터, 이 공간에서 피수용자들이 인간이란 존재에 대한 자각이 희미해진 상태에 익숙해져가는 상황을 레비의 증언에서 엿볼 수 있다. 이제 <헤어>를 통해 털(주로 머리카락)이 강렬한 인간의 본성을 드러내준다는 의미에서 ‘털은 강력한 메시지 전달 수단’이라는 관점을 분명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좀더 밝은 이야기를 떠올려보자.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여주인공인 오드리 헵번은 ‘탈출한 공주’를 연기한다. 곧 하루의 짧은 일탈을 맛보는 고귀한 존재로 등장하는데, 오드리 헵번의 보편적인 이미지는 ‘우아함’에 있다. 그 이미지의 형성에 헵번의 헤어스타일이 절대적으로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로마의 휴일>에서 로마에 국빈으로 머무는 동안 로마 시내로 탈출한 공주는 거리를 걷다가 우연히 미용실을 지나치는 장면이 나온다. 공주는 미용실에 들어가 긴 머리를 귀밋머리 단발로 자르게 된다. 미용실에서 머리카락을 자르는 장면은 공주의 ‘변신’에 대한 욕망을 대변한다. 한 번쯤 일반인들처럼 거리를 산책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기도 하고 데이트도 해보고 싶다는 소박한 바램이 이 영화의 한 장면에 나오는 것이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내면의 여러 ‘자아’ 중에서 자신이 바라는 이상적인 자아를 ‘선택’한다는 의미로서 이 장면의 역할을 상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또한 우리가 우연치 않게 지나치게 되는 장면이지만 머리카락이 분명한 메시지 전달 수단임을 확인해보는 또하나의 사례가 될 것이다.
(인류사에서 털이 끼친 영향들)
인간의 털이 아닌 동물의 털과 가죽을 ‘벌거벗은 인간’이 이용하게 됨으로써 털을 가진 동물의 수난사는 인류사에서 이미 일찌감치 시작되었음을 <헤어>는 보여준다. 16세기에 이미 가장 인기있었다는 비버의 모피교역으로 17세기 서유럽에서 비버가 사실상 멸종되었다고 한다. 인간의 탐욕은 다시 구대륙에서 신대륙으로 눈길을 돌려 북아메리카에서 비버 모피를 유럽에 들여오는 교역이 활발해졌다. 그 결과 1840년대 이미 북아메리카의 비버 가죽교역은 이미 붕괴하게 되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저자는 모피를 찾아 아메리카 원주민을 따라 서쪽으로 이동하며 누비던 서구인들이 북미 대륙의 지도를 만들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저자의 언급대로 비버를 거의 멸종상태에 만들면서 제작한 지도작성 작업이 ‘인류에 기여’한 일이라 말할 수 있을까. 인간의 탐욕대로 숲을 약탈하고 파괴함으로써 고대 그리스와 고대 로마의 멸망을 가져왔듯이, 모피를 얻기위해 다른 동물을 수없이 멸종시키고 생태계를 교란시킨 인간에게 장기적인 관점에서 자연이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인간은 그 대용물을 또 다시 찾아 나설 것이지만 이 동물들의 털이 인류에 기여했다고 평가하기는 힘들 것같다.
인류의 문화에 영향을 끼친 동물털의 예로 저자는 잉들랜드의 양모산업을 이야기한다. 13-14세기 중세 유럽에서 ‘돈이 되는’ 양모 무역은 급속하게 확장되었고, 이 양모무역을 통해 근대 자본주의의 토대가 마련되었다고 한다. 바로 은행, 금융의 기원이 양모 무역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메디치가가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것, 신대륙을 발견했던 콜럼부스의 가문이 양모 무역에서 큰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배경은 바로 ‘털’과의 관련성을 다시 조명해주고 있다. 그만큼 중세 말기에 양모무역은 이미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고 이해된다. 보다 흥미로운 점은 잉글랜드의 양모가 오늘날 어떻게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양모 산업의 전통을 갖게 되었는지에 관해서이다. 13세기 궁정의 조직적인 노력으로 플랑드르 지방의 앞선 양모 산업 관련 종사자들을 강제 이주시키고 잉글랜드에 귀화시킨 점, 그리고 국가적으로 양모 수출입에 대한 통제등을 통해 오늘날 후손들은 전통있는 양모 산업의 전통을 갖게되었다는 것이다. 이쯤되면 우리는 ‘털이 단지 털이 아님’을 충분히 인정하고도 남을 일이다. 그만큼 지구상의 모든 동물들에 있어 털은 신체 외부 환경와 내부를 경계짓는 표피의 변형으로서 개체 자체의 생존에 지극히 중요한 존재일 뿐만 아니라, 개체들의 삶에 깊숙히 영향을 주고받는 변수였던 것이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다시 이 책을 읽기 전 내가 품었던 사심어린 독서의 목적을 상기해본다. 내 머리카락이 ‘야한생각을 많이 해서 빨리 자라는 것’이 아님을 주장할 수 있는 단서가 있을까. 저자는 모발의 성장을 남성호르몬의 안드로겐이 주는 영향과 견주어 언급하는 대목은 보인다. 일단 안드로겐 농도가 급상승하는 사춘기에 2차 성징으로서 음모와 겨드랑이와 다리에 털이 나는 것 뿐만 아니라 털이 ‘두꺼워지는’ 현상을 말하고 있긴 하지만, 모발이 ‘빨리 성장’하는 것에 관한 언급은 분명 찾아볼 수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야한 생각하기’라는 심리적 동인이 생리적으로 어떤 변화를 야기하는지 확신할 수 있어야하는데, ‘야한 생각을 많이 하는 일’과 안드로겐의 분비와의 관계에 대해 연관성을 찾기 힘들다. 오히려 ‘야한 생각을 많이 함’과 ‘머리카락의 빠른 성장’에 대한 아내의 비난에 대한 나의 대답은 이렇다. 머리카락은 사람이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으면, 오히려 ‘탈모’가 진행되거나 남성호르몬인 안드로겐이 불균형하게 분비되도록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야한 생각을 하는 행위’는 모낭 하부 세포의 세포분열을 더욱 빠르게 하여 단백질을 더 빨리 합성한다는 말보다(단백질 합성 속도의 상한선도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극심한 스트레스 상태로부터 벗어나게 해줌으로써 ‘탈모’의 확률이나 남성호르몬의 불규칙한 분비 가능성을 극소화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야한 생각을 하는 행위’는 머리카락을 빨리 자라게 해주지는 못해도, 머리카락의 성장에 제한이 가거나 호르몬 분비가 불규칙하게 분비되어 성장 저해 요소를 제거함으로써 머리카락의 지속적인 성장을 보장해준다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곧 정상적인 머리카락의 성장 속도를 방해하지 않음으로써 (각종 스트레스 환경 속에 살고 있는 현대인으로서)우리가 ‘머리카락이 빨리 자란다’고 인식할 수 있지 않은가.
또 하나, 남성중심적인 신경과학의 연구결과 및 편견을 비판한 심리학자 코델리아 파인의 저서 <젠더,
만들어진 성>에서도 언급하듯이, 과학의 급속한 발달로 현대 신경과학 분야는 fMRI와 같은 뇌활동부위 영상을 많이 보여주고 있다. 코델리아 파인이 비판하고 있는 바대로 뇌에서 일어나는 활동부위에 대한 기록을 심리적으로 해석하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근본적인 문제를 ‘야한 생각에 의한 머리카락의 성장’과 결부지어볼 수 있을 것같다. 다시말하면 뇌활동 전위를 기록한 자료만으로 피검사자가 무슨 생각을 했으며 어떤 심리적인 반응에 기인했는지 소급해서 그 심리적인 원인을 찾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다시 정리하면, 나의 머리카락이 매우 잘 자란다고 하더라도 이 사실이 내가 ‘야한 생각을 많이 함’이라는 심리적인 동인 하나로 소급해서 지적할 수는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 오히려 ‘야한 생각을 많이 한다면(나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바쁜 일상생활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줄이거나 벗어남으로써 ‘탈모’예방이나 불균형적인 호르몬 분비 문제를 예방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더욱 설득력있지 않은가 하는 점이다. 오히려 야한 생각을 함으로써 ‘건강한 모발’을 지키는데 오히려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은가라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주장일 수는 있지만, 아내의 비난에 대한 나의 입장은 이렇다.
<헤어>를 읽고 받은 인상을 다시 떠올리자면, 털은 그저 불필요하게 신체에 난 존재가 아니라, '나'라는 개체가 인간이라는 종의 계통이 겪어온 진화 과정의 흔적을 보여주는 존재라고 할 수 있겠다. 아울러 인간의 문화가 발생한 이래로, 털은 매우 강력한 메시지를 담는 수단으로서 기능하였다는 점을 상기해본다. 나아가 '벌거벗은 원숭이'로서 다른 동물의 털과 가죽을 이용하기 위한 인류 욕망의 대상으로서 털과 관련한 경제활동은 인류 역사의 무대에서 중심적인 기능을 수행해왔다고 보아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메시지 전달 수단으로서의 털에서 더 나아가 DNA라는 인간 고유의 정보를 담고 있는 머리카락은 현대에 이르러 새로운 정보를 지닌 수단으로서 중요성이 재평가되어야할 것 같다. 털은 그저 털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