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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 만들어진 성 - 뇌과학이 만든 섹시즘에 관한 환상과 거짓말
코델리아 파인 지음, 이지윤 옮김 / 휴머니스트 / 2014년 6월
평점 :
절판
‘만들어진 사회, 그리고 인간의 가소성’
- <젠더, 만들어진
성>을
읽고
【내 안에 선명히 각인되어 있는 기억으로부터 –
어릴적 경험】
어렸을 때 우리 집에는 피아노가 한 대 있었다. 누나는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 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고, 우리 집에는 피아노 소리가 자주 들리게 되었다. 내가 6살 때 즈음의 일이다. 초등학교에 들어간 누나가 피아노 학원을 다니면서 ‘바쁜’ 생활을 하는 동안 누나를 괴롭히며 빈둥거리던 나에게 부모님의 관심이 모아졌던 모양이다. 피아노 학원에 가보라는 어머니의 권유에 나는 발걸음이 무거웠는데,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 그 이유는 내가 당시에 ‘피아노는 여자들만 연주하는 악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빈둥거리는 남자아이라도 나의 생각에 피아노는 남자인 내가 ‘연주해서는 안되는’ 악기였던 것이다. 피아노 학원에 가서도 내 또래의 여자 아이들과 누나가 피아노를 연주하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그 곳에 있다는 사실을 수치스럽게 느꼈다. 도대체 어떤 연유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이 질문은 내가 오래도록 지닌 – 아마도 가장 오래된 – 궁금증이었으며 풀리지 않을 숙제였다. 그리고 당시 어린 내가 느꼈던 수치스러운 감정은 이후 30년이 훌쩍 지나도록 아직도 느낄 수 있을만큼 내 안에 분명히 각인되어있다.
실험 심리학자 코델리아 파인의 저서 <젠더, 만들어진 성(Delusions
of Gender)>를 읽으면서, 피아노 학원에서 나 자신을 부끄러워하던 어린 ‘나’를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발견했다. 이 책에는 아이가 어머니의 뱃속에서 세상으로 나오면서 얼마나 많은 ‘성구별적’ 문화 코드로 둘러싸여 있는지를 깨닫게 해준다. 나아가 아이가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 아이의 성별을 알게된 부모가 아이에게 갖는 기대의 유형이 얼마나 다른지 보여주고 있다. ‘여아=분홍색’, ‘남아=파랑색’과 같은 전형이 이름표나 담요, 옷 등부터 아이가 뱃속에서 움직이는 모습을 묘사하는 언어까지 노골적으로 유형화되어있음을
알게되었다. 일단 아이가 태어나면 ‘성구별적’ 환경의 무차별적인 세례를 받는다. 저자의 책을 읽어보면 우리가 성에 대해 상식처럼 알고 동의하게 되는 사항들 – 예컨대 남자와 여자의 대화법이 다르다는 점 – 이 일종의 ‘모태신앙’과도 같이 우리의 삶에 스며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나아가 저자는 ‘성’에 대한 고정관념이 가장 강한 시기가 보통 5-6세 때라는 점도 언급하고 있다. 이는 내가 6세 즈음 피아노를 배우고 연주하는 일이 ‘부끄러운 일’이라고 느꼈던 경험이 나만의 특수한 사건이 아님을 말해준다. 저자가 하나의 장(章)의 제목으로도 사용한 ‘성평등은 집에서 시작된다’는 문구는 이 ‘성구별적’인 세상에서 성평등에 대한 감수성을 기를 수 있는 곳은 바로 가정이라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만약 내가 어려서부터 보다 주의깊게 이러한 편견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피아노를 더 좋아하고 즐길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물론 이 사례는 피아노에 대한 호불호를 넘어 한 인간의 삶에 평생 영향을 줄 수 있는 가치관의 문제에도 연결될 수 있다. 성인이 된 지금까지 내가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내린 수많은 결정들도 어쩌면 나를 둘러싸고 있던 이러한 ‘성구별적’ 환경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학습’된 견해의 결과일지도 모른다.
【성차별 선진국으로서의 미국】
이 책에서 발견하게 된 사실 하나는 미국 사회가 얼마나 ‘성차별적’인 문화를 만드는데 있어 선진국이었가 하는 점이다. 성차별과 관련한 편견 중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곧, 남자는 ‘수학 및 과학’등 이성적이고 분석적인 학문에 능한 반면, 여자는 상대방에 공감하는 일과 종합하는 일에 능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별 차이를 부각시키고 정형화하기위해서
미국내 최고의 지식인들이 여성의 ‘열등한 특성’을 발견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연구를 했던가를 깨닫게 되어 놀랍다. 미국이라는 사회는 백인 남성에 의해, 백인 남성을 위해 치밀하게 설계된 성차별 국가라는 인상을 받았다. 예를 들어 대학의 컴퓨터공학과에서
공부하는 여학생 비율을 국가별로 비교한 통계가 매우 흥미롭다. 저자가 제시한 통계자료를 보면, 제3세계 국가에서 컴퓨터공학과의 여학생 비율은 50%를 상회하는 반면, 유독 미국에서 15%수준에 불과했다. 이 사실은 미국사회에 형성되어 있는 ‘성구별적’ 사회심리 구조가 얼마나 포괄적으로 남녀의 심리와 행동에 영향을 주고 있는지에 대해 단서를 제공한다. 좀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19세기 말 하버드 의대 교수였던 에드워드 클라크는 여성의 열등한 특성을 의학전문가의 관점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여성의) 지적 노동은 난소에서 뇌까지 위험할 정도로 맹렬하게 에너지를 보내 생식력을 위험에 빠뜨리고, 의학적으로 심각한 다른 질병들을 야기한다.” 그러므로 여성이 열등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생리학적인 지식을 동원하여 남성의 우월성을 드러내려는 노력은 그나마 유식하게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이러한 사회 지식인층에서 여성과 남성의 ‘뇌크기 차이’를 가지고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했던 사실을 알게되면 더욱 경악하게 된다. 곧 미국이라는 사회가 국내 최고의 지식인들(백인 남성들로 구성된 집단)에 의해 남녀의 성차별적인 인식이 계획적이고 정교하게 형성된 사회임을 보여준다. 나아가 이 책은 인간이란 존재는 모순적으로 얼마나 쉽게 사회환경으로부터
영향을 받을 수 있는지, 그리고 오랜 시간동안 형성된 행동을 바꾸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또한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현대에 들어서는 남녀 사이의 생물학적인 차이를 가지고 여성의 열등함을 주장하는 충격적인 사례들은 과학기술의 급격한 발전으로 사라진 반면, 그 자리를 신경과학의 뇌촬영 영상이 대신하게 되었다. fMRI(기능적 자기 공명 영상)나 PET(양전자 단층촬영)로부터 ‘재구성’된 뇌의 활동부위 스냅사진들은 여성과 남성의 ‘뇌기능의 차이’를 분명하게 보여주는데 ‘이용’되고있다. 여기서 ‘이용’이라고 한 이유는 과학장비로 측정된 신경과학적 결과와 실제 남녀의 행동의 차이를 연결해주는 심리적 해석이 매우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 ‘측정’된 데이터를 해석하는 데 있어 수많은 가능성을 전문가들은 자신들의 관점에서 여과하고 선택하여 그 의미를 ‘추출’하기 때문에 그렇다. 인간이란 복잡한 존재로부터 측정한 단순한 전기적인 신호를 다시 그 심리적 원인으로 환원하는 데에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따라서 앞으로 ‘신경과학’에서 보여주는 뇌활동의 남녀 차이를 제시하며 ‘그러므로 남녀가 다르게 행동한다’라고 주장하는 연구가 있다면, 우리는 이 연구를 다시 살펴보아야 한다. 여성과 남성의 다른 선천적인 차이를 지지하는 사람으로서 하버드 대학 인지심리학자인 스티븐 핑커를 들 수 있다. 핑커도 앞에서 19세기 말 ‘여성의 신체적 열등함과 지적 열등함’을 언급했던 하버드대 교수 에드워드 클라크의 견해와 크게 다를바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스티븐 핑커는 신경과학의 결과를 언급하며 좀더 고도화된 자료와 언어로 자신의 견해를 제시하는 것만 다를 뿐이었다. 곧 장비로부터 측정된 수치와 지표만으로 복잡한 인간의 심리를 해석하려는 우를 범하고 있다. 결국 미국이라는 사회에서 가치중립적이라고
여겨지는 과학의 연구결과가 이를 다루는 ‘(백인)남자 전문가 집단’에 의하여 어떻게 남녀 차이를 지지하는 견해를 공고히 해주고 있는지 살펴볼 수 있었다.
저자인 코델리아 파인은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를 책의 중간에서 다음과 같이 슬며시 내비친다.
“뉴로섹시즘(신경과학이 만들어내는 성차별)은 고정관념의 손상, 한계,
잠재적 자기 성취를 촉진한다. 3년 전 나는 내 아들의 유치원 선생이 아들의 뇌가 감정과 언어를 연결하지 못한다고 주장하는 책을 읽는 걸 발견했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쓰기로 결심했다.”(254면)
책에서는 약 40년 전 자신의 아이가 성차별적 문화에 노출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노력했던 한 심리학자 부부를 언급한다. 이 부모는 아이가 보는 책을 보고 성차별적인 신호가 보이면 지우거나 수정하고, 가정에서 육아와 집안일을 동일하게 나눠 하도록 노력했다. 코델리아 파인은 이 부부들과 같은 노력을 하지는 않았지만, 아이들이 보는 책이나 교육과정에서 평등한 성교육을 방해하는 문화적인 신호들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나는 이들 전문가만큼은 아니지만,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문화환경이 우리를 얼마나 은밀하고 강력하게 규정하고 있는지를 새삼 깨닫게 되었다. 가까운 예로 나의 조카를 떠올려본다. 조카는 어린이집에 가기 전까지 부모들이 걱정할 정도로 ‘변신로봇’류를 좋아하던 여자 아이였다. 그런 조카가 어느 순간 로봇을 집어던지고 분홍색과 공주 코드에 집착하는 것을 보았을 때, 당시에는 나도 ‘여자 아이니까’하고 인정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젠더,
만들어진 성(Delusions of Gender)>은 나의 이러한 고정관념을 보기좋게 깨주었다. 이 모든 급격한 변화가 ‘성호르몬’의 영향 때문이나 생물학적-선천적으로 다르게 배선된 뇌구조의 차이 때문이 아니라, 아이들을 둘러싸고 있던 ‘성차별적’ 환경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여성들이 자신들은 ‘여자라서 수학을 잘 못한다’라고 하는 말을 듣게 되면 이것은 ‘사회에 형성된 편견의 영향을 받은 개인이 그렇게 선택한 것’이라는 나의 막연한 견해가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당연히 어느 한 집단이 이러한 결정을 내리고 있다면, 그건 개인의 문제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집단적인 ‘마취’의 작용과 같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내 말은 여성과 남성사이에 해부학적/생리학적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 차이는 특정 분야의 지적 성취와는 무관하다는 점, 그리고 과학기술 분야에서 여성들이 보다 덜 선호하는 이유는 사회심리학적인 편견의 결과라는 뜻이다. 곧 테스토스테론이라는
성호르몬에 의해 여성과 남성의 생물학적/생리학적 차이가 존재하더라도, 그 차이가 어느 한 집단의 우열을 가리는 문제와는 무관한 일이다. 이것은 어떤 근거를 ‘선택’하여 주장하느냐에 달려 있는 문제일 뿐이다.
책을 읽으면서 아쉬웠던 점은 저자가 여성과 남성에게서 보이는 차이(행동의 차이든 테스토스테론에 노출된 차이든 혹은 뇌구조의 차이든)를 과소평가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는 점이다. 자신의 견해를 뒷받침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아 반론의 여지가 있는 점들을 ‘사소한 차이’라고 무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저자는 타인의 실험과정 및 결과에 대해 날카롭게 비판하고 잘못 해석될 가능성을 설득력있게 제시한다. 반면 내가 볼 때 저자의 연구에서도 파고들어 의문을 제기한다면 명확한 대답을 얻기 힘들만한 부분이 보인다. 저자는 이 부분에 시간을 따로 할애하지는 않은 것같다. 오히려 저자가 여러 연구들에서 보이는 ‘사소한 차이’를 무시하기보다 여기에 주목하고, 다른 연구자들의 편견에 의해 잘못 해석되고 있는 점을 지적했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내가 저자라면 남녀간의 이 ‘사소한 차이’를 무시하고나 덮어두는 것보다, ‘인간의 여성과 남성은 이러한 ‘사소한 차이에도’ 이러한 차이가 여성과 남성의 지적 성취 및 우열을 구분하는 근거가 되지 못함을 보여주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평등’의 의미란 무엇일까】
이 책을 읽으며 사람들과 나눈 이야기들 중에는 ‘양성평등’의 의미를 되묻게 하는 상황을 여러 번 맞게 되었다. 과연 ‘평등’의 의미를 우리가 제대로 이해하고 있던가하는 의문이 들었다. 구체적인 상황에서 ‘평등’의 의미를 물을 때 우리는 모든 상황에서 50:50으로 역할이나 몫을 분담하는 ‘기계적이고 산술적인 평등’의 의미만을 막연히 주장하고 있지는 않는가. 그리고 이 잣대로 타인에게 강요하거나 심지어는 고통을 주고 있지는 않은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누군가 ‘모든 직업 분야에서 여성도 남성과 동일한 기회와 일자리를 배분해야한다’라고 주장한다면 이 차체만으로도 많은 문제를 불러올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추구해야하는 ‘평등’이라는 것은 ‘기계적 산술적 평등’의 의미로 한정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자본주의가 태동한 이후, 혹는 산업혁명 이후 변화된 ‘인간의 조건’과 우리가 현재 인식하고 있는 ‘평등’의 의미가 연관되어있지는 않을까 생각해볼 수 있다. 예컨대 과학기술의 영향을 받은 산업혁명과 자본주의의 결합으로 여성과 남성에게 ‘동등한 기회’를 주는 ‘경제적 평등’을 생각해봄직하다. 오히려 경제적 관념이 반영된 ‘평등’은 여성과 남성에게 대등한 기회를 부여하고 있으므로 그 자체로 이상적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믿음’이 모든 분야에 적용되면 여성과 남성의 생물학적/생리학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과연 모두가 행복하고 만족할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해볼 수 있겠다. 이는 분명 우리가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문제를 안고있다. 남성이 여성처럼 임신할 수 없는 생물학적인 문제에도 여성에게 동일한 노동의 강도를 요구하거나, 휴가없이 남성과 동일하게 일을 강요하게 된다면 이것이 공평한 문제인가 반문해볼 수 있다. 따라서 ‘평등’이라는 말을 우리가 사용할 때, 보다 주의를 기울여 이 개념이 적용되는 상황을 민감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누군가는 ‘동등한 기회를 부여받는 동등한 경쟁자’로서 인식하는 것이 무엇이 문제인가라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문제는 ‘기계적이고 산술적인 평등’의 신조를 서로에게 강요하게 될 때(예컨대 명문화된 규정이나 법 등으로 강제력을 띠게 될 때), ‘평등’의 의미가 부여할 수 있는 ‘폭력성’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 윤리적인 판단을 필요로할 때, 상황을 둘러싼 환경과 이와 연관된 사람들의 입장을 모두 고려해야하는 것처럼, 평등의 개념을 현실에서 적용할 때 보다 유연하고 상대적인 가치를 염두해두어야 할 것이다.
【만들어진 성, ‘젠더’의 의미에 한 발 더 까까워진 기회】
이 책을 읽게 되면서 ‘젠더’의 의미에 대해 한 번 더 눈길을 주게 되었다. ‘젠더’가 단순히 여성과 남성을 나누는 ‘성’의 대체물이 아니라 사회학적으로 의도된 결과임을 깨닫는다. 페미니즘의 방향이 앞으로 어떠해야하는가라는
문제는 너무나 근본적이지만 한편으로는 복잡한 문제다. 그만큼 세상의 절반인 여성들의 삶 전반에 이들 모든 문제가 관여되어 있으며, 그 해결의 실마리도 우리의 삶 전반에서 찾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사회학자 파멜라 스톤이 “여성들이 경력을 단절하고 가정으로 향하는 진정한 이유는 가정 내 성불평등 때문이다."라고 말한 점에 공감하며 다시금 내 삶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어떤 문제가 우리의 삶 전반에 배어있다면 그 문제는 일상에서, 좀더 구체적으로는 가정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낼 수 있겠다. 나아가 새로운 방향으로 문제의 해결책을 실천해나가는 것으로 시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여성과 남성이 서로에 대한 생명을 붇돋아주고 존중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찾아야 한다는 점이다. 가정 내의 성불평등은 부부가 설겆이를 50%씩 나눠하거나, 청소 구역을 절반 씩 나눠하는 문제를 넘어 서로에 대한 존중과 배려의 마음가짐을 갖는 것 그리고 작은 것부터 실천해나가는 것이 더욱 근본적인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읽고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인간이 타인 및 주변환경과 상호작용하며 스스로 형성되어가는 섬세한 존재임을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저자가 책을 쓰게 된 동기
"뉴로섹시즘은 고정관념의 손상, 한계, 잠재적 자기 성취를 촉진한다. 3년 전 나는 내 아들의 유치원 선생이 아들의 뇌가 감정과 언어를 연결하지 못한다고 주장하는 책을 읽는 걸 발견했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쓰기로 결심했다."(254면)
1장 시작부분 - 성전환자 Jan Morris의 말 인용
"여자 대우를 받을수록 나는 더 여성스러워졌다. 싫든 좋든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 사람들이 나를 보고 차를 후진시키거나, 병마개를 따는 일에 무능력하다고 생각하면 이상하게도 나는 그 일에 서툴러졌다. 알수 없는 일이지만, 사람들이 내가 들기엔 상자가 너무 무거울 거라고 하면 실제로 상자는 무거웠다."
"나는 광대하다. 내 안에는 다수가 존재한다." (월트 휘트먼의 말) - 심리학에서 개인의 다양한 자아 중에서 선택된 특정 자아를 일컫는다. 활동자아(active self)는 매 순간마다 사회적 환경에 따라 변하는 역동적인 카멜레온에 가까운 자아이다.(1장 참조)
*사회학자 파멜라 스톤의 말(7장 참조)
"여성들이 경력을 단절하고 가정으로 향하는 진정한 이유는 가정 내 성불평등 때문이다."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말(7장 참조)
"남성도 부모이긴 마찬가지이고, 실제로 남성이 집안에서 동등해지기 전까지는 여성이 집 밖에서 동등해지는 일은 절대없다."
"당신의 딸이 여성적 방식으로 세상을 접하는 건 당신의 딸이 가진 소녀의 뇌 때문이다."(10장 참조)
*거리언 연구소에서 출판한 <It‘s a Baby Girl!>(2009)에서 인용한 문구. 이 저서는 여성과 남성이 다른 뇌 구조(생물학적, 선천적 차이)로 인하여 남녀 행동의 차이를 지지하는 입장으로, 후천적,문화적 영향에 대한 고려를 무시하고 있다.
*영장류 학자 프랜시스 버튼의 견해(11장)
"영장류의 태아기 호르몬이 그 개체가 태어나 속하게 될 특정 사회에서 자신의 성에 맞는 행동을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영향을 미친다."
- 곧 이 말은 성별에 따른 다른 행동 양식은 선천적인 영향(호르몬 등의 영향)에 의한 문제에 결정적인 영향이 있는 것보다 사회심리적 영향이 매우 지대함을 암시한다. 유전자가 남녀로 하여금 수학을 좋아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인자가 아니라는 말이다.
*또 다른 영장류 학자 윌리엄 메이슨의 견해(11장)
"부모 행동에 대한 설계는 유아기에 이미 존재하고, 양성에서 동일한 형태로 나타나며, 평생 계속해서 드러난다. 그러나 유아에 대한 관심은 성에 따라 나누기 시작한다."
- 여기서 엿볼 수 있는 점은 ‘부모 되기 행동‘이 유전자에 의해 프로그램되어 평생 영향을 주고있다는 점인 반면, ‘유아에 대한 관심‘은 호르몬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이다.
*성차별적인 생물학자의 견해 - 조지 로매니스(George Romanes)
"여성의 뇌 무게가 평균적으로 남성보다 140그램 더 적다는 점을 보면, 단순히 해부학적 기반을 가지고도 여성의 지적 능력의 열등함이 뚜렷하다는 걸 기대할 수 있어야 한다. 게다가 여성의 일반 체격은 남성보다 튼튼하지 않다. 따라서 심각하거나 오래 지속되는 뇌 활동에서 오는 피로를 더 견디기 힘들 것이므로, 생리적 바탕을 가지고도 유사한 에측이 가능해야 한다. 실제 사실을 가지고 보면, 여성에게 독창성이 부족하다는 데에서 그 열등성이 가장 눈에 띄게 드러나며, 이는 특히나 더 고도의 지적 작업에서 더 확연하게 나타난다."
- 사회에 영향력을 가진 지식인이 의도한 성차별적 구조를 만드는데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을지 생각해볼 수 있다.
*하버드 의대 교수 에드워드 클라크의 견해(14장 참조)
"(여성의) 지적 노동은 난소에서 뇌까지 위험할 정도로 맹렬하게 에너지를 보내 생식력을 위험에 빠뜨리고, 의학적으로 심각한 다른 질병들을 야기한다."
*교육운동가 레너드 삭스의 견해(15장)
"남녀 뇌의 발달 차이를 무시한 교육 과정은 글 못쓰는 남자아이와 자신들이 ‘수학바로‘라고 생각하는 여자아이를 만든다."
-남녀의 차이를 부각시켜 교육을 성별에 따라 다르게 해야한다고 주장하는 교육가들의 발언으로서, 남아를 ‘글 못쓰는 인간들‘, 여아를 ‘수학바보‘라고 미리 구분지어 놓고 이에 따른 차별 교육을 ‘맞춤 교육‘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범하게 되는 순환오류이다.
*남여에 따라 다르게 성유형화된 부모들의 기대(17장)
- "전 제 아들에게 농구하는 법을 가르쳐 주고, 야구하는 법도 가르치고 싶습니다." - "여자아이라면 예쁜 옷을 입혀 주고 인형을 사주고 무용 수업을 받게 해주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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