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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퀴, 세계를 굴리다 - 바퀴의 탄생, 몰락, 그리고 부활 ㅣ 사소한 이야기
리처드 불리엣 지음, 소슬기 옮김 / Mid(엠아이디) / 2016년 11월
평점 :
절판
<바퀴, 세계를 굴리다>
(원제 The Wheels: Inventions &
Reinventions )
리처드 불리엣(Richard W. Bulliet) 지음
| 소슬기 옮김 | MiD출판사
“바퀴달린 이동수단의 가장 오래된 흔적은 기원전 4000년 경에 남겨졌다.”
(148면)
실증적인 1차 증거물들에 매달리는 고고학자들과 역시 1차 사료에 기반하여 역사학자들은 이와같은 평가를 내린다. 리처드 불리엣은 역사가로서 바퀴라는 대상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며 추적해나가는 역사 탐정과 같은 인상을 준다. 독자는 저자의 설명을 따라가며 고고학자 내지는 역사 탐정이 된 것처럼 저자의 시선을 따라가게 되는데, 그 과정을 따라가는 일이 줄곧 흥미를 자극했다.
(바퀴를 바라보는 세 가지 형태)
저자가 정리한 세 가지 형태의 바퀴는 두 바퀴를 잇는 축과 두 바퀴가 일체형을 이루어 같이 돌아가는 바퀴 형태인 ‘윤축(wheelset)’, 두 바퀴가 독립적으로 돌아가는 ‘독립차륜(independently rotating wheel)’, 그리고 ‘캐스터(caster)’라고 하는 수직축과 수평축을 통해 바퀴가 보다 더 큰 자유도를 가지고 움직일 수 있는 바퀴가 있다. 역사적으로 윤축을 적용한 사례는 광산에서 사용되어 무거운 석탄 등을 나르던 광차 및 기차가 그 한 예일 것이며, 독립차륜은 마차바퀴, 자동차 바퀴를 연상하면 된다. 이에 더하여 윤축 형태의 바퀴보다 다소 늦게 그러나 거의 비슷한 시기 동안 인기를 누린 바퀴의 형태는 바로 ‘독립차륜’ 방식의 바퀴로서 역사상 가장 보편적인 바퀴의 형태를 이루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한 편 앞의 두 바퀴 형태와는 달리 ‘캐스터’는 가구 이동용 바퀴처럼 한 개의 수직회전축과 한 개의 수평회전축을 가진 바퀴의 형태로서 비교적 짧은 역사로서 1700년대 이후에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저자의 설명대로 바퀴의 형태를 크게 세 부류로 나누고 나니 길을 가다가도 무심히 ‘저 유모차는 독립차륜’이라는 생각이 반사적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11개의 장 중에서 ‘캐스터’에 관한 장은 마지막 11장에 간단히 언급되므로 사실상 이 책 <바퀴, 세계를 굴리다>는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윤축’과 ‘독립차륜’ 이 두 형태의 바퀴와 관련한 사항에 거의 모든 에너지를 집중하고 있다.
(심리전의 중요한 요소로서의 이륜전차)
언젠가 이집트 파라오의 전차(Chariot)를 주제로한 다큐멘터리 영상을 본 기억이 있다. 학자들과 과학자들이 현재 남아있는 유물과 기록들을 토대로 실제 파라오의 전차를 재구성하여 만들어내는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였는데, 이 책에서 바퀴를 분류하는 기준으로 본다면 분명히 두 마리 말이 이끄는 람세스2세의 이륜전차는 매우 놀라운 기술의 집약체였다. 이제 이 책을 통해 이집트 파라오의 전차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기가 기원전 1600-1200년이라는 것을 새삼 알게되었다. 저자에 따르면 이 당시의 전차는 당시의 전술에서 실용적인 쓰임 뿐만 아니라 적에게 그리고 아군에게 ‘어떻게 보일지’도 고려한 심리적 전술의 하나로서 중요한 전쟁 무기였다는 점이었다. 사륜 마차 또는 수레와 달리 비교적 소형의 이륜 마차의 가장 큰 장점은 방향 전환이 보다 용이해짐으로 인하여 전시에 빠르게 적진에 침투하여 ‘치고 빠지는’ 전술이 가능했다는 것이 학자들의 설명이었다. 다만 저자는 어느 시점에서 전차가 무용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바로 이륜 전차가 조그만 장애물이 있어도 진행에 큰 지장을 받는다는 점이었다. 따라서 전차의 진행을 방해하고, 말의 발굽을 공격하는 장애물을 던져 설치함으로써 이륜전차의 실용성에 급격한 타격을 입히게 되었던 모양이다.
(바퀴와 인간 사회의 상호작용)
바퀴를 주제하는 연구자들은 인류역사에서 바퀴의 중요성은 인정하되, 바퀴 자체만으로 인류의 삶이 획기적으로 변했다고 바라보지는 않는 듯하다. 다만 인간의 삶 속에서 바퀴가 그 자체만으로 발전할 수 잇는 대상이라기 보다는 바퀴가 달린 수레나 마차가 지나갈 수 있는 길의 인프라 구축 또한 병행해야한다는 점이 먼저 해결되어야 했다. 기원전 3000년 전에는 이미 장장 8000 km에 이르는 실크로드가 유럽과 중국을 이어주는 대륙 내의 통로로서 활발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지역에서 비슷한 양상으로 기술이 발달해왔던 것은 아니다. 말이 끄는 수레가 주로 다니던 길에는 말발굽에 의해 길의 훼손되거나, 말 또는 기타 가축의 배설물이 쌓이는 문제가 있었으나 자동차가 발명되고, 좋아진 도로 포장으로 자동차가 더욱 빠르게 보급되자 동물의 배설물이 도로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하지만 현대의 우리는 차량의 증가로 인하여 더 빠르고 편리한 수단을 얻었지만 교통수단이 점점 빨라지고 그 규모가 커짐에 따라 오히려 교통체증과 교통사고 위험에 노출되게 되었다. 사상가 이반 일리치가 지적한바대로 현대 사회는 ‘반생산성’을 특징으로 하는 사회로 되어버린 것이다. 이는 바퀴달린 운송수단이 사회에 준 간접적인 영향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윤축을 기반으로하는 기차는 제한된 길인 선로를 따라 움직인다. 이 윤축을 사용하는 운송수단은 저자에 따르면 단위거리당 수직거리, 선회반지름의 제약이 따른다. 다시말하면 일정한 수평거리 당 수직거리의 변화는 곧 더 큰 동력이 필요한지의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다. 아울러 윤축에 기반한 운송수단은 독립차륜을 사용하는 수단에 비해 회전이 용이하지 않으므로 더 긴 거리를 회전해 가야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윤축 운송수단의 제약이 현대의 풍경에 상당한 영향을 주게 되었다. 달리 표현하면 기차의 동력을 최소화하기 위해 낮은 언덕이나 산을 깎아 보다 평평하게 선로를 건설하는 경우를 들 수 있다. 이와 더불어 독립차륜 방식에 바탕을 두는 자동차의 발달과 빠른 보급으로 도시 내의 풍경도 새롭게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두 가지 바퀴의 방식에 기반한 운송수단은 인간의 수직적 환경을 변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수평적 환경도 변화시켰다. 다시 말하면 철도는 선로를 중심으로 양쪽의 세계를 나누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심지어 저자는 ‘철도가 공동체를 둘로 갈라놓는 결과를 흔히 초래한다’(38면)라고 까지 언급하고 있다. 결국 바퀴에 의존한 운송수단은 도시를 비롯한 우리의 삶에 분열적 생태계를 구축했다라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동물이나 사람의 왕래를 우선 방해하고, 철로를 중심으로 한 쪽은 부유자들이 사는 지역, 다른 한 쪽은 극빈자들이 모여사는 지역과 같이 우리의 삶을 분열시킨 사례를 보여주기도 한다.
(바퀴의 섹시즘 그리고 마차의 유니섹스화)
바퀴에 대한 역사를 더듬어 가면서 눈에 띄는 쟁점하나는 이 바퀴를 사용한 운송수단이 성에 따른 차별의 역사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세르반테스의 소설 <돈키호테>에서도 끊임없이 조롱받는 기사계급의 시대는 어떤 시대보다도 더 두드러지게 성차별적 요소를 보여주는 것 같다. 기사계급은 여성을 ‘보호’한다는 명분아래, 사실은 여성 특히 상류층 여성을 억압하는 핵심 계급이 되었던 시대가 중세라고 볼 수도 있겠다. 저자에 다르면 ‘독립차륜’ 방식이었던 마차는 진정한 남성(기사)이 말을 타고 이를 호위하는 동안 ‘여성들만의 탈 것’으로 인식되었고, 곧 마차는 ‘쇠퇴’하고 ‘비하’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15-17세기 중반을 통해 마차혁명이 일어남을 여러 번 언급하고 있다. 이는 남성들에 의해 비하의 대상이 되었던 마차가 이 시기 이후 남자 귀족들에 의해 이용되면서 마차가 그 위상을 회복한 계기로 파악해볼 수 있다. 다시말하면 마차가 더이상 ‘여성들의 전유물’이 되지 않고, 유니섹스화 되었던 계기로 이해해보면 어떨까.
하지만 이쯤에서 나의 놀라움이 끝나지 않는다. 중세 유럽의 여성들이 처한 상황에 비해, 비슷한 시기 중앙아시아의 ‘유목민 여성’은 받지 않았던 구속으로서 여성이 유목 민족 사이에서 고유한 역할 – 곧 마을의 수레를 책임짐 – 을 수행하였다. 다시말하면 중세 유럽 여성들이 억압을 두드러지게 받게된 시기는 기사도의 흥행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곧 중세 유럽 여성들(특히 귀족 여성들)은 기사도와 중세 기독교의 억압에 받기 시작했다면, 중앙아시아 유목민의 여성이 억압을 받게 되는 계기는 산업혁명에 의해 진행되었다고 봐야할 것 같다. 나는 바퀴에 관한 마차혁명의 계기가 유럽의 흑사병 이후, 달라진 인본주의적 관념 또한 중세시대 여성들 만의 것으로 여겨지던 ‘마차’를 타는 남성의 등장과 그 맥을 같이 하는 것이 아닐까. 이 생각은 ‘로지스틱 곡선’으로 대변되는 혁신의 전파 그래프에서 저자가 전하듯, 중세가 끝나던 시기의 ‘마차의 출현’은 바퀴와 관련한 운송수단의 기술변화와 무관하다는 점을 재확인해준다. 하지만 이를 바라보는 보다 중요한 관점은 ‘유럽의 (상류층)남성이 바퀴달린 이동수단을 바라보는 태도/관점의 변화에 기인한다’(188면)고 하는 점이다. 이는 중세가 끝날 무렵 유럽에서 어떠한 종류의 세계관의 변화가 이루어 졌는가를 파악하는 것이 관건이다. 저자 리처드 불리엣은 이러한 배경에 주요한 영향을 끼친 요소로서 다소 엉뚱하게 화약무기의 개발에 관여한 헝가리 기술자를 언급하고 있다.
사실 나는 흥미롭게 읽어나가다가 저자의 이 주장을 만나니 좀 지나치게 구체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저자가 ‘1450-1650년 사이에 유럽에서의 세계관에 어떤 변화가 있었나?’라고 물을 때, 나는 엉뚱하기는 하지만 좀더 포괄적인 역사를 떠올려보았다. 나의 엉뚱한 생각은 유럽의 흑역사, 곧 ‘흑사병의 출현’에 닿았다. 그 근거로 유럽에서는 1340년대 흑사병의 유행으로 유럽 인구의 약 3분의 1에 해당하는 약 2500만명이 사망했을 것으로 역사학자들은 추정한다고 한다. 이 하나의 사건은 확고한 자리를 차지했던 신의 시대에 신의 권위에 대한 의혹을 조금이라도 품게 하지 않았을까? 한 마을이 흑사병으로 몰살당하고, 단 한명이 혼자 살아남았다고 가정해본다. 그럼 이 사람은 자신의 가족을 모두 빼앗아간 신을 원망하지 않을까. ‘흑사병’이 유럽에 미친 영향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흑사병의 유행을 거쳐 살아남은 자들에게는 좀더 많은 ‘확률적’ 기회가 주어졌을 것이다. 이는 ‘확률’을 기반으로하여 혁신의 전파 양상을 보여준다는 ‘로지스틱 곡선’의 생각과 무관하지 않다고 믿는다. 보다 적은 생존자에게 보다 많은 기회와 빠른 사회의 변화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시기가 바로 흑사병이 잦아든 이후의 유럽이 아닐까.
(바퀴와 오리엔탈리즘)
미국의 역사학자인 저자에게서 동양에 대한 편견을 읽어내었다는 것이 아니라, 나는 오히려 중동역사를 전공한 저자가 바퀴에 얽힌 솔직한 서양인의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을 재확인해본다. 중국의 외바퀴 수레 뿐 아니라 일본의 인력거에 대한 서양인의 반응은 ‘혐오감’이었다고 저자는 전한다. 아시아인으로서 나는 오히려 ‘소가 끄는 수레를 주거지로 사용하며 마을을 구성하는’(168면) 알란족▪훈족 (169면), 그리고 몽고의 무자비한 침략을 받았던 유럽인들의 동방에 대한 뿌리깊은 두려움과 혐오의 연장선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다시말하면 ‘유럽인이 인력거에 혐오감을 드러내었다’라기보다, 유럽인의 뿌리깊은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이 그 혐오의 대상을 인력거라는 사물을 통해 드러내었다라는 것이다.
(마무리하며)
이 책 <바퀴, 세계를 굴리다(원제: The Wheels: Inventions
& Reinventions)>는 바퀴 달린 운송수단의 5500년의 역사를 독자에게 흥미롭게 보여준다. 책의 방점은 아마도 ‘윤축’과 ‘독립차륜’사이에 벌어진 운송수단의 경쟁과 인간의 삶에 준 영향에 있다고 할 수 있겠다. 특히나 이 책에서 ‘마차혁명’이라는 개념은 가장 중요한 모티프일 것이다. 아마도 저자는 이 ‘마차혁명’을 주로 염두해 두며 다음과 같이 책을 마무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양한 고려요소들 사이의 여러 가지 상호 연관성을 분명히 하면서, 바퀴의 이야기는 발명이 누가 무엇을 처음으로 생각했느냐 하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한다.”(260면)
이와 관련하여 책의 부제가 ‘발명(inventions) 그리고 재발명(reinventions)’이라는 점에 다시 주목해본다. 이렇게 부제를 붙인 저자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책을 다 읽고 보니, 기존의 것에 대해 새롭게 그 가치를 발견하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겠다 싶다. 좀더 구체적으로 퍼즐을 맞추어보면 ‘바퀴의 재발명’ 이라는 것은 바퀴에 대한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게 된 ‘마차혁명’의 심리적 성격을 더욱 설득력 있게 제시해주는 것으로 파악해도 될 것이다. 바퀴의 역사와 ‘흑역사’를 살펴봄으로써 좀더 보편적으로 얻은 교훈은 우리 인류의 역사는 일종의 편견을 가진 지배자의 역사였다는 것,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 편견을 깨고 변화해간 도전자의 역사이기도 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