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철의 <에로스의 종말>과
롤랑 바르트의 <밝은 방>이 만나는 접점에서 머무르기
한병철 교수의 <에로스의 종말>을 다시 읽는다. 책 전체에 대한 서평을 쓸 정도의 실력이 나에겐 없음을 통감하지만 책읽기의 매력이 책의 어떤 부분에서 사람마다 다르게 받아들이게 된다는 점에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늘은 롤랑 바르트의 <밝은 방(영어판 제목: Camera Lucida)>에서 카프카(Franz Kafka)가 말했다는 대목에서 멈춰서 저녁 내내 이 생각 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대목은 다음과 같다.
“사람들은 사물에서 의미를 몰아내기 위해 사진을 찍는다. 나의 이야기들은 일종의 눈 감기다.”(79면)
저자 한병철 교수는 이에 “사물의
내밀한 음악은 눈을 감을 때 비로소 울려 나온다. 눈을 감는 순간에야 사물 앞에서의 머무름이
시작된다.”라고 덧붙이고 있다.(5장 환상, 79면)
롤랑 바르트가 인용했다는 카프카의 말과 한병철 교수가 덧붙인 말은 얼핏보면 서로 연관성이 희박하다. 나는 이 대목에서 과연 이 두 부분이 서로 어떤 연관성에서, 어떤 맥락에서 이렇게 병치되어 나오게 되었는지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카프카의 말이 인용되는 롤랑 바르트의 <밝은 방>의 맥락은 이 책 22장에서 롤랑 바르트 자신이 사진을 보는 행위를 언급하며 그 맥락에서 나온 말로, “사실 – 또는 결국 – 하나의 사진을 잘 보기 위해서는, 머리를 잘 치켜들거나 혹은 눈을 감는 것이 좋다.”라고 말하며 야누흐(Janouch)와 카프카의 대화를 인용하고 있다.
“'이미지에 선행하는 조건은 시선이다.’라고 야누흐는 카프카에게 말하곤 했다. 카프카는 미소지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사람들이 사물을 촬영하는 목적은 그들을 자신의 정신으로부터 쫒아내기 위해서이지. 나의 이야기들은 눈을 감는 하나의 방법이네.’ 사진은 말이 없어야 한다.”
이 두 책에서 롤랑 바르트가 썼던 동일한 문장에 대해 사뭇 다른 느낌의 문장이 나왔다. 한병철 교수는 롤랑 바르트의 독일어판 <밝은 방>에서 인용한 것으로 보이며, 내가 가지고 있는 <밝은 방>은 불어판 번역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는데, 독일어 판으로부터 나온 번역은 매우 간결하다.
카프카의 인용구가 있는 <밝은 방>의 22장은 현대 사진론에 큰 영향을 끼친 바르트의 ‘스투디움’과 ‘푼크툼’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몇 가지 사진을 이야기 한다. 1882년 나다르라는 사진 작가가 찍은 이태리계 프랑스 탐험가의 사진으로부터 바르트 자신의 ‘푼크툼’을 언급하며 시작하고 있다. 바르트에게 있어 ‘푼크툼’은 사진 관람자에게 ‘고통의 확실한 징후’가 되는 것으로서 개인적인 경험과 기억으로부터 환기되는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모두 사망했을)타인의 오래된 가족사진에서 인물이 신던 구두 혹은 목걸이로부터 어린 시절의 아픈 기억을 되살리는 요소가 바로 ‘푼크툼’적 요소라고 할 수 있겠다. 곧 바르트가 생각하는 ‘사진(혹은 사진 감상)이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을 감은 채 평범한 세부가 홀로 (푼크툼을 발견하게 해주는) 감정적인 의식을 향해 거슬러 올라가도록 내버려둠을 통해서 가능한 행위인 것 같다.
다시 카프카의 말(밑줄 친 두 인용구)로 돌아가자면, 롤랑 바르트에게 ‘사진’은 사진에 담긴 대상이 전달하는 정보, 의미를 사진 관람자에게 ‘강요’해서는 안된다는 점이었으리라 생각한다. 어떤 점에서 이러한 ‘강요’는 하나의 폭력일 수도 있을 것이다. 롤랑 바르트는 이런 ‘정보, 의미’를 ‘수다스러움’이라고 칭하고 있는데, 자신에게 감동을 주는 사진은 이 ‘수다스러움’이 제거된 사진이라고 말한다. 바르트는 이 ‘수다스러움’의 범주에 ‘테크닉’, ‘현실감’, ‘르포르타쥬’, ‘예술’ 등을 포함하고 있는데, <에로스의 종말>에서는
이
‘사치스러움'이 현대 사회의 과도한 가시성(혹은 정보)이라는 보다 확장된 맥락에서 이해를 해야할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한병철 교수가 언급한 ‘사물의 내밀한 음악’은 곧 사물의 본질에 대한 ‘이미지 혹은 단상’ 정도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여기에서 이 ‘이미지 혹은 단상’이라는 개념을 생각할 때 도움이 될 만한 부분 중 가장 먼저 떠오르는 대목이 있다. 이 대목은 프랑스 작가이자 대학교수인 아니 에르노(Annie Ernaux)의 소설 <단순한 열정>의 마지막 부분에 있다. 작가 아니 에르노는 50대 중반이던 1990년대 초에 30대 후반의 외국인 유부남과 사랑을 나눈 체험을 바탕으로 이 책을 썼다. 그녀는 “내가 직접 체험하지 않은 허구를 쓴 적은 한 번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고 말하며 평생 글을 써왔다. 내가 보기에 이 책에 기록된 모든 사건이 사실이므로 소설이라기 보다는 '시간 개념이 없는 일기'라고 하는 것이 더 어울릴 것 같지만 아무튼 그건 이 책의 분류를 '굳이' 원하는 사람의 몫이다.
<단순한 열정>의 마지막 대목은 이렇다.
[그 사람은 “당신, 나에 대해 책을 쓰진 않겠지.”하고 말했었다. 나는 그 사람에 대한 책도, 나에 대한 책도 쓰지 않았다. 단지 그 사람의 존재 그 자체로 인해 내게로
온 단어들을 글로 표현했을 뿐이다. 그 사람은 이것을 읽지 않을 것이며, 또 그 사람이 읽으라고 이 글을 쓴 것도 아니다. 이것은 그 사람이 내게
준 어떤 것을 드러내 보인 것일 뿐이다.]
이 대목에서 언급된 작가가 ‘떠올린 단어들’ 곧 작가 아니 에르노의 실존적 ‘인식’이 한병철 교수의 ‘사물의 내밀한 음악’과 동등한 의미를 갖는다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에로스의 종말>로 돌아간다. 이 책의 옮긴이에 따르면 독일어 ‘눈을 감는다’라는 동사는 ‘닫다, 끝내다’ 등의 의미를 지니는 동사를 사용한다고 한다. 곧 ‘눈을 감는다’는 ‘종결’의 의미를 내포한다. 눈을 감는다는 것은 시각적 정보의 결핍을 의미하며 이는 에로틱한 환상을 자극한다고 한병철 교수는 말한다. 여기서 에로틱한 환상은 기본적으로 상상력을 매개로 ‘타자’에 갖는 욕망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한병철 교수는 쿠스타브 플로베르(Gustav Flaubert)의 소설 <마담 보바리>에서 보바리와 레옹이 달리고 있는 마차에서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인용한다. 이 대목에서는 사랑의 행위에 대한 어떤 시각적 묘사도 나오지 않지만 역설적으로 에로틱한 환상을 자극하는 것이다. 이 대목은 <시를 읽은 그대에게>의 정재찬 교수도 '가장 에로틱한 장면'이라고 손꼽는 장면이기도 한데, 여기에 시각적 정보가 자세하게 주어진다면, 에로틱한 환상은 곧바로 파괴될 것이다. 곧 롤랑 바르트가 얘기한 ‘혼란되고 균열된 포르노’로서의 성애에 불과한 것이 되어 버린다.
‘지나친 정보가 주는 환멸’을 떠올리자면 나는 언제나 소개팅에 나가기 전에 페이스북을 비롯한 SNS를 통해 상대방의 사진을 검색하는 젊은 세대를 떠올린다. 개인에 대한 과도한 정보와 가시성(프로필 사진, 셀피 사진 등)을 확보한 이들은 상대방에 대한 ‘기대’가 커지거나 아니면 ‘환멸’이 따를 것이다. 다시 말하면 상대방의 인간다운 매력에 대한 환상(또는 상상력)이 머물 여유가 정보 검색과 더불어 곧바로 박탈당한다. 상대방에 대한 정보가 곧 상대를 결정지어버린다. 이처럼 과도한 정보가 주어지는 세대에게는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관심이 머물 여유가 사라진 세대가 될 것이다.
오늘날 ‘무한한 긍정성’의 양상이나 ‘과도한 가시성’이 성과주체를 지배하고 있으며 이런 가속화 사회에서 ‘눈을 감는 행위’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한병철 교수가 언급한 ‘눈을 감는 행위’는 곧 문자 그대로 눈을 감고 거부하는 행위에서 나아가 ‘종결’의 형식으로서 ‘사색적인 머무름’ 또는 ‘사색적인 안식’이라고 말하고 있는 점에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
한병철 교수가 <피로사회>에서도 언급했듯이 신자유주의의 성과주체는 곧 자기착취적인 존재이다. ‘과도한 긍정성의 강박’은 성과주체를 소진시키는 원인이 되며, 이는 곧 오늘날의 우울증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곧 한병철 교수는 우울증이 신자유주의적인 사회의 특징적인 질병이라고 말하는 이유다.
저자가 이야기하는 ‘에로스’는 환상(곧 상상력)을 매개로 하는 타자에 대한 욕망이다. ‘타자’와 ‘나’의 경계가 분명한 것이다. 반면 신자유주의적인 사회에서는 자아의 나르시시스트화 경향이 강화되어가기에 이는 곧 ‘타자’의 침식이 진행되어 결국 ‘타자’의 소멸로 이어진다고 한다. 나아가 ‘자아’와 ‘타자’의 경계가 해체되어 사라지게되면, ‘타자’에 대한 ‘환상’도 사라지며, 이는 곧 ‘에로스의 종말’을 의미한다는 것, 그리고 나아가 오늘날 예술과 문학이 직면한 위기의 원인이 된다고 한병철 교수는 역설하고 있다. 따라서 이 ‘에로스의 종말’이란 사태는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병폐라고 진단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