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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후감 - 대중문화의 정치적 무의식 읽기
김성윤 지음 / 북인더갭 / 2016년 1월
평점 :
품절
<덕후감>
김성윤 지음/북인더갭
이 책 <덕후감>은 그 자체로 ‘덕후’스럽다. 스스로 ‘대중문화 비평가’로 불리기 원하는 저자 본인은 동시대 한국 대중문화의 행간을 속속들이 들여다보며 파헤치고 있다. 그리 두텁지 않아보이는 대중문화관련 도서임에도 수많은 한국 대중문화의 키워드가 보이는데, 그동안 여러 매체에 기고했던 글을 모아 수정 보완 작업을 거쳐 완성된 책이다. 저자는 대학원에서 사회학을 전공하는 사회학도로서 말하자면 ‘학구적’인 덕후라고 할 수 있겠다. ‘대중문화의 정치적 무의식 읽기’라는 부제가 암시하듯 저자는 매스 미디어를 통해 알려진 사건들 뿐 아니라, 영화, 만화 및 애니메이션, 방송 프로그램에 주목하고 영문학 전공 경력답게 문학을 통해서도 한국인들의 ‘정치적 무의식’을 해부하고 있다. 저자는 본인의 책을 읽고 ‘독자들이 각자 어떤 질문을 하게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기획했다’라고 의도를 전하고 있다. 독자 스스로 어떤 질문을 하게 된다는 것은 곧 씌여진 텍스트에 대한 이해 뿐 아니라 ‘콘텍스트’에대한 이해를 한다는 점일 것이다. 곧 독자로서 ‘나의 생각’이 어떤지 고민해보고 책과 대화해보길 원하는 것이 저자의 의도라고 생각한다.
나의 대중문화에대한 이해는 가히 유치원생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아니 요즘 유치원생들은 심지어 어떤 가수를 좋아하고 따라부를수 있는 노래가 몇 곡되는 반면, 나는 초등학생 수준도 아닌 유치원생 수준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나로서는 군복무 시절 어쩔수 없이 보게되었던 텔레비젼에서 걸그룹 핑클과 S.E.S.를 보았던 것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이 단서로 나의 연령대를 짐작할 수 있는 분이라면 나의 나이가 이 책에서 정의하는 ‘삼촌팬’의 연령대에 들어있다는 정도로 말할 수 있겠다. 저자가 정의한 ‘삼촌팬’과 동시대인으로서 나는 80년대에 유년기를 보내고, 90년대 대학교를 다녔다. 책을 읽어가면서 저자의 나이도 아마 나와 비슷한 연령대가 아닐까 하고 조심스레 짐작해보았다.
<덕후감>은 ‘삼촌팬’ 세대가 어렸을 때부터 보고 느끼고 경험했을 법한 80년대 정도 이후의 한국 대중문화에 집중하고 있다. 대중문화의 속살을 속속들이 들여다보고 있는 만큼, 그간 한국사회에 있었던 일이나 문화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지 못한 사람이라면 다소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도 보인다. 저자가 여러 매체에 기고한 글을 모은 책인 만큼, 글과 글의 집필 시기나 순서에도 연대기 같은 구성은 아닐 것이다. 본문에서 큰 관심을 보이고 있는 ‘삼촌팬’의 관심 대상인 ‘걸그룹’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관계로 저자가 전개하는 논리와 주장을 전부 다 따라가지는 못하였다. 다시말하면 이 책은 배경적인 이해가 부족한 독자들에게 대중문화에대한 기본적인 ‘기억’을 갖지 못한 이들에게 친절한 책은 아닌 것 같다. 예를 들어 ‘우쭈쭈’란 용어가 어떤 맥락에서 나온 것인지 나는 알지 못했다. 다만 그 맥락과 의미를 짐작해볼 수 있는 단서가 희미하게 보이긴 한다. 아울러 대중문화 속에서 비공식적으로 통용되는 용어들에 대해 나는 알지 못했다. 유명인을 주인공으로 삼아 팬들이 직접 쓴 소설을 가리키는 팬픽(fan-fic)뿐 아니라, 여성 팝스타에 열광하는 ‘여덕 현상’이라고 표현한 걸 크러쉬(girl crush)에 대해서도 매우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과거의 대중문화에 비해 표현의 자유가 ‘다소’ 확보되기 시작했던 80년대 이후 ‘남성의 몸을 시각적으로 소비되기 시작’한 정황도 알게되었다. 이와 반대로 여성들의 여성에 대한 독립적인 시각과 욕구를 반영하는 ‘워너비 신드롬’과 소녀들의 성정 판타지에 대한 언급은 대중문화를 바라보는 또다른 흥미로운 관점을 알게 해주었다.
아마도 내 믿지 못할 기억력에 의하면 ‘짝퉁’에 대한 문제가 대대적으로 기사화되어 드러나 주목을 받게 된 때가 대한민국이 건국 이후 처음 개최하게 되었던 88년 올림픽대회 이후가 아닐까한다. 올림픽을 통해 국제사회의 이목을 받게 된 한국사회는 그동안 베일에 가려져있던 ‘나름의 생존’법이 만천하에 공개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던 것이다. 한국사회에 존재했던 ‘진짜’와 ‘가짜’의 대립은 (물론 여전히 존재하지만) 한국인의 위신을 충분히 위협할만 했고 무시할 수 없는 문제였다. 예컨대 이 시기를 전후하여 국제적인 저자권보호 문제도 국내에 적용되었던 것을 보면 대중 문화 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짝퉁’문화에 대한 경종을 울리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80년대 후반을 거쳐 90년대 들어서면서 외국 제품을 ‘짝퉁’에 대한 대대적인 단속을 거쳐 대한민국은 진품에대한 희귀성을 ‘명품’이라는 개념의 도입으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드는 계기가 마련되었던 것같다. 반면 희귀성에 기반한 ‘명품’은 곧 저자가 말하는 대중의 ‘따라잡기’현상에 의해 한정판이었던 명품이 만인에 의해 소비되기에 이르게 되었다. 곧 고가의 ‘명품’을 구입할 수 있는 계층들은 다시 ‘따돌리기’ 대응을 통해 특정 브랜드의 희소성에서 나아가 그 브랜드에서도 특정한 개별 모델 자체가 희소가치를 갖는 전략을 취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대목은 매우 흥미롭게 다가왔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러한 ‘명품’에대한 대중들의 ‘흉내내기’ → ‘따라잡기’ → ‘따돌리기’ 의 ‘무한반복 패턴’이 현대 한국인의 ‘정치적 무의식’의 일면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았다. 예를 들어 나는 조선 초기에 존재했던 ‘양반’이라는 계층, 수 %가 채 되지 않았을 극소수의 계층이 조전 중기 이후 어떤 이유로 60-70%를 넘게 되었는지 궁금증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이 양반이란 계층을 ‘소비’하고 싶었던 집단 무의식의 욕망이 곧 현대 대한민국의 ‘명품’소비 현상에도 반영되어있지 않은가 하고 생각해보게 되었던 것이다. 이 논의를 확장하면 ‘명품’ 소비의 문제 뿐 아니라, 박사학위나 교수직을 돈으로 사는 관행에도 연결지어볼 수 있고, 90년대 재즈에 대한 붐이 보여주는 ‘재즈거품’, 나아가 고가의 자전거 구입 및 수집, 고가의 캠핑 용품 구입 열풍, 등산복을 교복처럼 입는 한국인에대한 논의까지 관심의 폭을 넓혀볼 수 있을 것이다. 개별성은 인정해야하겠지만, 큰 맥락에서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저자는 또한 ‘이벤트 기념일’에대한 문제를 언급하고 있는데, 이 이벤트 데이는 ‘한국인의 집합의식을 드러내는 표상’이라고 말하고 있다. 문화라는 것은 어느 지역에서 집단적으로 공유하는 ‘기억’에 의존한다. 군사 정권의 역사적 맥락이 보이는 ‘국군의 날 퍼레이드’뿐 아니라, 언제부터인지 새로운 문화의 하나로 자리잡은 ‘빼빼로 데이’도 그러하다. 이 신종의 집단 기억인 빼빼로 데이가 다른 문화에서는 또 다른 기억으로 공유되고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유럽에서는 이 날이 ‘제1차 세계대전 종전일’로 기억되고 있을 터이다. 곧 유럽의 누군가에겐 전쟁에 나갔던 아들이 돌아온다는 ‘기쁨의 날’로 기억되었을 것이다. 인류사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죽은 전쟁 중의 하나인 만큼 아들이 생존하여 돌아온다는 것은 대한민국에서 군복무하던 아들이 전역하여 집에 오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만큼 큰 의미를 가질 것이다. 반면 대한민국에서는 역사문화적 문맥은 도외시 된 체, 신종의 강요된 집단 무의식이 자리를 차지한 셈이다. 저자는 이를 집단의 사회적 묶임(bonding)이 과거 ‘국가’를 매개로 한 것에서 이제는 ‘시장’을 매개로 하게 되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결국 우리가 ‘대기업의 상술’이라고 말하곤하는 이 신종문화는 사실 보다 큰 시야로 보면 우리가 ‘신자유주의 가치’를 착실히 내면화하고 있는 단계라고 볼 수도 있다.
저자는 이 ‘신자유주의 가치의 내면화’문제를 6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이 책에서 한 장 이상에 걸쳐 큰 이슈로 다루고 있다. 그 중에서도 ‘하인스 워드 신드롬’이라 불린 ‘다문화주의’의 등장을 통해 이 다문화주의가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의 이데올로기 보충물이라 언급한 대목은 상당히 인상적인 부분이었다. 흔히 ‘다문화’를 표방한 사회의 인식 변화는 ‘좋은 것’이 아니냐는 막연한 생각을 품고 있었는데, 이 책은 나에게 우리가 흔히 마주하게 되는 인식과 표상마저도 그 맥락 속에서 이해해야하며 다시 바라보고 판단할 것을 일깨워주었다. 어떻게 다문화주의가 신자유주의 가치와 연결될 수 있을까. 저자는 다문화주의가 스포츠, 문화와 결부되어 국가주의로 수렴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과거 미국 이민 1세대의 삶에서 볼 수 있듯이, 미국에 처음 이민을 가서 고생한 많은 한국인들이 식료품점이나 세탁소와 같은 힘든 일로서 새로운 사회에 발을 내딛곤 했던 것처럼, 저자는 이 ‘다문화주의’가 노동의 인종적 분리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 인종적 분리의 경험과 기억이 고착되면 인종에대한 편견이 자라나고 고정되어 버릴 수가 있다. 어쩌면 서구사회가 가지고 있는 ‘오리엔탈리즘’이라는 것도 큰 맥락에서 보다 역사가 오래된 ‘다문화주의’의 오래된 폐혜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런 맥락을 이해한다면 미국에 있는 식품가게에서 한국인들이 ‘오리엔탈 푸드’란 상호명을 쓰는데 다소 고민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보게된다. 다소 이야기가 빗나갔지만, 다시 말하면 저자가 경고하는 다문화주의의 어두운 면은 미국처럼 3D업종에 특정 민족이 종사하게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다시 무한 경쟁의 신자유주의 산업구조에서 이 민족이 고질적으로 불안정 노동에 종사하게되는 악순환을 겪을 수 있다는 점을 깨닫게 해준다.
또 나에게 매우 흥미로웠던 대목은 (90년대에 대학생활을 했던 세대인 만큼)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1995)와 관련하여 영화<어벤져스>와 비교한 부분이었다. 군복무 당시 IMF체제를 경험했던 나로서는 당시에 한국사회가 어떻게 IMF를 맞았고, 어떻게 ‘금모으기 운동’을 했던가를 보게 되었지만, 매일 뉴스를 볼 수 없었던 관계로 다소 제한적인 기억만 가지고 있을 뿐이다. 물론 대한민국이 IMF를 경험한 이후의 사회에 복귀하여 IMF가 우리 사회에 가져다준 변화를 몸소 느끼긴 했지만 말이다. 저자는 <공각기동대>를 이야기하면서 애니메이션 전반에 깔려있는 ‘존재론적 불안’을 끄집어 낸다. 미래 사회이지만 극장판 애니메이션의 도입부처럼 ‘기업 네트워크가 행성을 뒤덮고 전자와 빛이 휘젓고 다녀도, 국가와 민족이 사라져 없어질 정도로 정보화되어 있지 않은 가까운 미래’에 제작자가 상상했던 세계의 모습이 그려진다. 곧 사회의 질서유지를 위해 치안마저도 ‘민영화’된 미래의 모습은 사실 상당히 개연성 있고 수긍이 가는 문제였다. 그런 점에서 <공각기동대>는 매우 ‘신자유주의적’이라는 저자의 주장에 충분히 공감을 하게 된다. 영화 감독 마이클 무어가 제작한 ‘의료민영화’에 관한 영화 <Sicko>에서도 나오듯 손가락이 절단된 환자가 돈이 없다면 본인의 손가락접합 수술의 기회마져도 박탈당할 수 있는 사회가 도래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치안의 민영화’ 문제는 시간의 문제일 뿐이다. 이미 개인 사설 보안유지/경호업체가 많이 생겨난 점도 주목해볼만한 일이다. 나아가 이런 맥락에서 한 나라의 국방 마져도 민영화될 가능성은 없는 것일까? 이런 우려가 나만의 것이 아닐 수 있다. 프랑스 외인부대가 말그대로 ‘용병’들로 이루어진 집단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 것이다. 그리고 해외에서 활동하고 있는 미국의 대 테러 대응 조직 또한 민영화된 단체가 활동하고 있다는 점은 국방의 ‘아웃소싱’가능성을 무시하기는 힘들 것이다. 저자가 “문제는 오늘날 고조되는 위험과 위기, 즉 재난 상황을 만났을 때, 무능한 국가 권력이 아니라 유능한 시장권력에 의존하겠다는 심리적 기대를 우리 스스로 정당화한다는 데 있다.”라고 지적하는 대목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중요하고도 상당히 우려스러울만한 점을 지적하고 있다. 나아가 이런 문제는 ‘선과 악’의 구분을 과거의 전통적인 기준과는 크게 다른 양상으로 만들어나갈 수 있다는 점이다. 영화 <배트맨> 에 나오는 한 대사가 그 가능성을 여실히 대변해준다.
‘그럼 누구랑 싸워야 하지?’ 나쁜 놈들이랑 싸워야 한다.
‘그들은 왜 나쁘지?’ 시스템을 위협하니까.
초등학생들의 대화 같은 이 대사는 치안이 민영화된 사회에서 ‘악’이란 기준이 어떤 것일 수 있는지 여실히 그리고 아주 간명하게 지적하고 있다. ‘우리’의 시스템을 위협하는 것은 모두 ‘악’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미국의 이해에 반하는 국가, 집단이 모두 ‘악’이며 ‘테러리스트’라고 지목되는 논리와 무엇이 다른가. 이들이 왜 악인가. 미국의 ‘자본주의 시스템’을 위협하니까가 그 이유일 것이다. 미국의 자본주의적 질서를 비판하고 대항하는 행위 뿐 아니라 태도나 자세까지도 ‘악’으로 규정될 수 있다는 말이다. 이 ‘태도’나 ‘자세’는 페이스북을 통해, 소셜 미디어및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착실하게 기록된 ‘빅 데이터’를 통해 집단 심리로서 그리고 개인정보로서 이 시스템을 관리하는 이들에의해 조회되고 점검될 수 있는 가능성이 언제든 존재하는 사회가 되었다. 이 책 <덕후감>은 이러한 불편하지만 중요한 문제들을 내가 깨달고 생각해볼 여지를 준 책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대중문화를 ‘전도된 욕망을 비추는 객관적이고도 주관적인 체계’라고 말한다. 대중문화가 성립되어질 수 있는 규칙으로서 대중문화는 대중이 원하는 것을 보여줄 뿐 아니라 대중이 소망해야하는 것을 (너무 앞서가지만 않는다면) 보여주어야한다고
언급하고 있다. 곧 대중문화는 대중이 갖고 있는 욕망의 거울이라는 관점이다. 집단의 무의식이라는 관점에서 저자는 대중문화를 통해 드러나는 현상을 거울을 들여다보듯 구석구석 살펴보고 있다. 책을 끝맺으며 저자는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로선 싸우는 수밖에 없다.”라는 다소 계몽적으로 들리는 결론을 내리고 있는데, 이 책은 대중 문화를 들여다보는 것에 주안점을 둔 것이지 어떤 새로운 대안제시나 훈계를 염두해두지 않은 만큼, 다소 의외의 결말이기도 하다. 어떤 면에서는 저자가 한국사회가 IMF체제 이후 변화된 삶의 윤리를 지적하며 ‘각자도생’을 언급했듯이, 저자의 결론도 ‘각자도생’의 맥락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않아 보이기도 한다. 아니면 어떤 대상에 대한 투쟁을 언급할 때 새로운 ‘연대’의 가능성을 염두해둔 것은 아닐지 모르겠다. 그 점을 저자가 밝혀놓지 않았으므로 모를일이다. 하지만 또 달리 생각해보면 전혀 수긍이 가지 않은 것은 아니다. 살아가며 투쟁하라고 하는 것은 곧 우리에게 익숙한 채 지나치고 우리에게 주는 영향을 무감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제반 문제에대해 ‘의심하고 의문을 가지라’는 주문일 것이다. 우리가 인문학에 관심을 가지고 책을 읽고 고민하고 공부하는 이유도 또한 자유롭게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인간이 되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책을 읽으며 갖게된 저자에대한 인상은 ‘발랄’하면서도 날카롭고 명민하면서도 신랄하다는 점이다. 대중문화에 대한 관심과 지식의 수준으로 보면 저자 자신도 사실 ‘덕후’일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도 있겠다. 그것도 상당히 학구적인 덕후다. 내가 읽은 <덕후감>은 한마디로 발랄한 덕후의 대중문화 독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첨언]
<덕후감>은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친절한 책은 아니다. 한국 사회/문화에 대한 배경 지식이 부족한 나같은 독자라면 책을 온전히 이해하는데 일종의 ‘벽’이 느껴지기도한다. 저자의 설명에 이해가 잘 가지 않는 부분이 있다. 그리고 다소 학술적인 용어에대한 소개를 하지 않으므로 ‘개념적인 용어’에대한 이해에 어려움을 느꼈다. ‘기표’ 혹은 ‘언표’의 개념이나 사용시의 어떤 맥락을 이해하지 못한 경우라면 독자에게 다소 불편하게 다가갈 수도 있겠다. 나아가 80년대, 90년대 드라마를 가지고 대중문화, 대학 문화를 언급한 부분은 보다 폭넓은 (보다 젊은) 독자에게 공감을 얻기는 힘들 수 있겠다. 저자는 물론 폭넓은 지식과 안목으로 다양한 주제를 자유자재로 넘나들지만 독자를 포용하는 자세가 다소 부족하지 않았던가 하는 아쉬움이 있다.(물론 저자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지식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점을 인정해야겠다.)
또 한편, 언어 사용상 눈에 자주 띄는 점이 있는데, 다소 ‘과장적’인 형용사/가치판단의 용어들이 많이 나온다는 점이다. 아마 기고를 하면서 수많은 논객들과의 논쟁으로 형성된 언어습관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아가 ‘-적’이라는 표현이 과하게 눈에 띈다는 점이다. 이 표현의 모호함이 주는 문제는 저자가 설명하는 어떤 개념적인 문제에대한 이해에 방해가 되기도 한다. 이 역시 나의 부족한 지식과 독서 경험 탓으로 돌리게 되는데, ‘-적’이라는 표현은 그래도 많이 나온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젠더적 위계질서”(82면)은 무슨 의미일까? 그리고 ‘’마케팅 전략에 힘입은 ‘대량소비’는 1970년대 신자유주의가 출현하기 전인 실물팽창 국면에서조차 포드주의적 축적 논리에 조응하고 있었다.” 이런 표현은 상당히 많이 등장하는데 어떤 의미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