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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 불감증 - 유동적 세계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너무나도 소중한 감수성에 관하여
지그문트 바우만.레오니다스 돈스키스 지음, 최호영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5년 11월
평점 :
품절
<도덕적 불감증>
(Moral
Blindness: The Loss of Sensitivity in Liquid Modernity)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 ▪ 레오니다스 돈스키스(Leonidas Donskis)/최호영 옮김
이 책의 폭넓은 주제에대해 잘 소화했는지 의구심이 든다. 주제넘게 서평이라고 하기보다는 책을 읽고 내 나름의 수준에서 받은 감상을 적어보았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요즘 너무나 많이 인용되고 있어 관심이 가는
사회학자이다. ‘액체 근대’, ‘유동
근대’라는 용어로 고체의 특성처럼 고정화되어있지 않고, 예측이 불가능하고 불안정성이 지배적인 현대 사회의 특징을 요약하고 있는
학자로 잘 알려져있다. 그는 동유럽(폴란드계 유대인) 출신이며 마르크스 주의의 이론가로 한 때 활동했다고 하는데, 아이러니한 사실은 폴란드 공산당의
반유대 운동으로 인하여 (그것도 세계 곳곳에서 인간 해방을 부르짖던 1968년이라니!) 교수직을 잃고 국적마저 박탈당한 체 고국을 떠나야했다고 한다. 일종의 현대적인 정치적 디아스포라의 모습을 그의 삶에서 엿볼 수 있다. 그러고 보니 평생 자신의
정체성과 마주하고 이방인으로서 사회와 세계의 불합리를 몸으로 부대끼며 직시해온 서경식 교수의 목소리와도 비슷한 점이 있다는 것은 비단 나만의 인상일까.
아울러 이 책은 돈스키스가 서문에서도 밝히고 있는 것처럼 편지를 통해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고 삶과 예술을 이야기하는 책이기도
하다. 이들은 과거의 수많은 문학 작품과 예술 작품을 언급하다가도 인터넷과 소셜 네트워크로 연결되어있는 지금
현재의 삶으로 되돌아오기를 반복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동유럽 출신의 두 학자가 ‘악’이나 ‘정치’ 뿐만 아니라 ‘대학’의 의미와 인식의 변화 그리고 새로운 정치 경제적 질서에서 영향을 받는 인간 조건의
변화 등 폭넓은 주제에 대하여 자유롭게 대담하고 있다. 따라서 텍스트는 체계적인 구조를 갖고 기획된 논리적 서술의 경우보다 내용의 집중도가 다소 낮아보이기도 하다. 반면 이들이 자유롭게 언급하는 주제에 대한 배경적인 이해가 좀 더 있어야 이해될만한 사항들이 곳곳에 보였다.
책의 곳곳에서는 개인주의, 원자화, 유대의 파편화와 같은
단어가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있으며, 아울러 디스토피아를 그린 소설과 같은 문학 작품을 반복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자유 시장 경제의 새로운 구조 속에서 우리의 삶이 어떻게 변해가는가하는 진단을 내리고 있다.
바로 원자화, 개인화가 진행되어감에 따라(원자화되는
프레카리아트) 인간은 ‘인간다운 존재’로서 인정 받지 못하고, ‘물건’과 같이 대상화되어 결국은 ‘상품’처럼 소비의 대상으로 된다는 것을 말한다. 그 결과 우리 인간은 점점 도덕적으로 무감각해져감을 경고하고 있다.
마치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극한 상황에 처해있을 때 오히려 ‘비인간적’ 상항에 무뎌져가는 것처럼. 나는 유대인으로서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비참한 생활을 묘사했던 빅터
프랭클 박사의 기록들에서 느꼈던 당혹스러움을 바우만과 돈스키스가 그리고 있는 새롭게 변화해가는 현대사회의 모습을 이야기하는 대목에서 다시 느끼고
있다. 중요한 것은 프랭클 박사의 시대에는 보다 공포와 악의 대상이 우리의 눈에 분명히 보이는 듯하지만,
현대 사회에는 그 공포의 실체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는 ‘악’의 모습이 우리가 이미 익숙해져가고 오히려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페이스 북’일 수 있다는 점이다. 바우만은 우리의 ‘도덕적 불감증’이 “무엇보다 신속하고 강렬하게 이해하고 느낄 것을 요구하는
시대에 우리가 스스로 선택하고 자초했거나, 숙명적으로
받아들인 도덕적 불감증”(26면)이라고 이야기한다. 얼마전 충격 속에서 보게되었던 ‘빗자루’로 교사의 권위를 농락하던 학생들에 대한 영상이 적나라하게 우리 시대의 ‘도덕적 불감증’을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이 책의 두 학자가 이야기하는 폭넓은 화제거리는 바로 한국 사회의 모습을
정확히 지적하고 있는 것 같아 놀라웠는데, 이는 ‘인간의 조건’이 그만큼 전 세계적으로, 보편적으로 인간의
존엄이 실추되는 방향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반증이 아닐지 우려스러웠다. 이 ‘빗자루’ 영상을 보며 받은 충격은 이 영상을 보며 ‘이 사태는 진보 교육감이 초래한 교권 추락’이라는
취지의 공격적인 발언을 하던 앵커의 모습을 보며 나의 충격은 배가 되었다.
이것은 또 다른 도덕적 불감증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나는 이 책을 빠르게 읽지는 못했다. 우선적으로 나의 지식과 배경적인 이해가 부족한 이유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몸을 담고 살아가며 앞으로 평생 살아가야하는 우리 사회를 너무나도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책을 덮고 다시 생각해보고 놀라고 하는 과정이 이어졌다. 이미 100년도 전에 비인간적인 관료의 행태를 지적하고 과료제를 비판했던 톨스토이의
<부활>이 왜 고전인지 다시금 깨닫게 되기도 한다. 더운 여름에 수감자를 이송중인 교도관과 관료들을 이야기하며 규정과 의무만 알고 이를 따르는 비인간적 행태들을 개탄했을 톨스토이는
이것이 인간의 역사에서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는 ‘일상의 악’임을 간파한 듯하다. ‘평범한
악’으로서 비인간화된 관료의 모습은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도,
그리고 안타까운 한국의 근현대사를 통해서 끊임없이 조우하게된다.
한병철 교수가 <심리정치>에서도 언급했듯이
개인의 사생활을 낱낱이 공개하고, 개인들의 욕망이 분출되는 ‘디지철 고해소’인 페이스북은 이 노교수의 시야를 벗어나지 않는다. ‘DIY복종’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듯이 이 신자유주의 시대의 ‘새로운 악’은 피해자들이 인지도 못한 체 ‘자발적으로’ 자신을 폭로하고 스스로를 소비의 주체로 만든다고 지적한다.
우리가 손수 만드는 악마이기에 DIY라고 한 것이다. 결국 우리는 새로운 형태의 ‘사생활의 죽음’이라는 국면을 맞이한 세대가 될 것이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우리의 자녀들, 다음 세대들은 ‘사생활’이라는 것, 프라이버시라는 것에대해 분명히
우리 세대와는 다른 인식을 지니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이 책에서는 언급하지 않았으나
<심리정치>에서도 나타나듯 연결망에 한 시도 쉬지 않고 연결되어 있는
나의 모든 ‘클릭’이나 ‘터치’는 기록되어 거대한 데이터 베이스에 저장되고 있다. 이 데이터 베이스는 집단의 성향을 파악하거나 나만의 맞춤 소비를 위해
언제나 가공되고 이용될 수 있다. 우리는 스스로 우리의 정보 제공 서약에 동의하고 ‘개성’이라는 착각 속에 데어터 베이스화된 보이지 않는 틀 속에 우리를 ‘최적화’시키는 것이 우리의 삶의 모습이란 생각이 들었다. 너무 비관적인가? 하지만 비관적이라는
것은 내 삶을 진실로 마주대하고 직시할 때만 가능하다는 점에서 나는 내가 비관적이라는 사실을 긍정한다.
아울러 내가 새롭게 깨닫게된 점은 돈스키스가 유럽에서 경제적 무능에 대한 법적 책임이 등장하게 되었다고 언급한 대목에서였다.
정치∙경제적으로 무능함이 드러나게되면 ‘처벌’을 받게 되는 사회. 곧 우리에게는 실패할
권리마저 박탈당하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내가 상당히 공감하게 된 대목이었다. 최근에 일흔이 다되도록 아직도 현역에서 일하고 계시는 어느 분과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나의
아버지뻘 되는 분이었는데, 이분과 나눈 이야기 중에 인상적인 부분이 내가 읽은 책의 한 부분을 떠올리게 하였다.
그 분은 “우리
때는 세련되지는 못했지만, 어떤 일을 손수시도해보고
실패도 하면서 배우는 것이 많았어. 지금처럼 해보지도 않고 실패도 않하지는 않았어.”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은 지금 젊은 세대의 무능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실패’를 용인하지 않게 된 사회에 대한 개탄이었다. 요즘 직장에서는 성과주의 도입으로 인해 극히 소수만 실제로 연봉을 많이 받지만 나머지는 도태되고 있다. 작은 실수만 하여도 모든 것은 ‘성과’에 기록되어 반영되기에, 젊은 세대는 ‘실패 자체’를 두려워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도전이나 어려운 문제에 도전 자체를 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었다.
과연 이러한 사회경제구조 속에서 누가 젊은 세대들을 ‘패기없는 젊은이’라고 비난할 수 있을까? 과연 실패를 두려워하는
젊은 이들을 안락함 속에서 자란 ‘게으른
세대’라고 손가락질 할 수 있을까?
다시 언급하지만 이 책에서는 우리 사회의 모습을 뀌뚫는 듯한 지적들이 많이 나오는데, 내가
공감을 많이 하게 되는 부분이 ‘대학’을 주제로한 대목이었다. 인문학이 붐을 이루고 있다는 우리 사회에서 정말로 인문학이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면 왜 대학에서 인문학을
대표하는 문∙사∙철 관련 학과가 폐지되거나 통합되는 것일까? 오히려 한국 사회의 대학은 인문학을 홀대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반면 경영학과 학생의
정원을 1000명으로 늘리는 시대가 되었다. 학생들마져 ‘대학’이라는 경쟁 시장에서 소비의 주체이자 대상으로 바라보게 되는 현실이 도래했다. 대학에서 인문학 열풍에 힘입어 ‘글쓰기 강좌’가 인기라고 한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력서를 잘쓰기위한 이른바 ‘꿀팁’을 알려주는 강좌가 인기라고 한다. 그나마
인기가 없는 것보다야 낫다고 하지만 ‘작문
수업’은 이미 수 십년간 존재하고 있는데 글쓰기 강좌가 개개 학생의 ‘생존 기술’에 요긴하다는 인식이 매우 낯설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다. 대학의 문제에관하여 논하는 바우만도 우리가 맞고 있는 대학의 위기는 교수가 손수 가져왔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만큼 교수들이 대학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존재인 반면, 이들은 이미 신자유주의적인
가치를 너무나 잘 학습하고 내면화하고 있다는 방증일 수도 있다. 바우만은 우리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우려와
비슷한 지적을 동유럽, 중유럽 대학이 처한 상황에서도 언급한다. 곧
중유럽, 동유럽 대학이 마가렛 대처(신자유주의 경제학의 대부인 밀턴
프리드만의 이론을 영국에 도입했다고 알려진)시기에 ‘대학과 교육을 상품화 시킨’ 영국식 대학 경영 방식을 흉내내고 있다는 점을 역시 우려하고 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이러한
상황은 안타깝지만 전세계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라는 확신이 든다.
자유시장 경쟁의 구조 속에서 피할 수 없는 담론이 불평등이라 할 수 있겠다. 장하성 교수의
<왜 분노해야하는가>에서 책 전반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이 불평등은
‘구조적인’ 문제의 일환이라는 것이다. 개개인이
저축하는 부분보다 대기업의 저축이 많다는 것, 그리고 대기업들이 설비 및 사람을 위한 투자를 하지 않고 있다는
점은 임금의 불평등과도 직접적으로 연관되어있으며 이 것이 신자유주의 경제 구조에서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는 주요인이라는 것이다. 바우만은 이 양상을 신자유경제시대의 ‘불안정한 무산계급’이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 헨리 포드, 록펠러의 시대만
하더라도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상호 의존적이어야만 하는 타협적 생활 양식이 존재하여 ‘자본이 감당할 수 있는 불평등의 한계가 존재했다’라고 평가한다.
하지만 오늘날 이런 요인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고 진단한다. 급속한 중산계급의 붕괴로
‘프레카리아트’가 증가하고 있다는 것, 나아가 이 프레카리아트는 99%라고 표현하듯, 모든 경제적 계급을 포괄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미 해고된 이들 뿐만 아니라 몇 년 후 명예
퇴직이 예상되는 정규직 노동자들이나 좋은 직장을 얻으려 열을 올리는 대학생들 마져도 여기에 포함된다는 것이다. 아울러 복지 비용 만으로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는 어렵다는 의견은 바우만 교수나 장하성 교수나 인정하고 있는 듯하다.
무관심은 비난이나 증오보다도 더욱 심각한 증상이다. 구조적인 문제 속에서 파편화된 개개인은
점점 무감각해져간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비인간적인 환경에 끊임없이 노출되어있던 이들이 도덕적으로 무감각해져가는
모습이 마치 일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증상이 이제는 전 세계적으로, 그리고 자발적으로 보이지 않게 진행되고 있다. 나는 소위 X세대에 속하지만 이 책에서 바우만은 80년대 중엽부터 90년대 중엽 사이에 태어난 Y세대에 대해 언급한다. 이전보다
‘더 개인주의적이고 상사에게 더 반항적이지만, 무엇보다도 더 불안정한’ 세대로서 Y세대의 성격을 규정하고
있는데, Y세대가 겪는 현재의 문제들이 과연 그 이후의 세대들에서 완화될 수 있을 것인가 묻는다면 회의적일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아마도 이들이 ‘액체 근대’의 사회 구조 속에서 인터넷에 유동적으로 연결되어있는
최초의 세대이기에 예를 들지 않았을까. 불안정한 사회,
불안 속에 살게되는 세대들이 이른바 자발적으로 ‘자유’를 포기하게 되는 시대에 바우만과 돈스키스의 이
책은 우리의 감수성이 변화됨을 가차없이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길 바라지 않지만 '무감각'해진 인류가 맞게될 우리 미래의 모습같다. 아울러 이 책은 단순히 저자 자신의 폭넓은 지식을 드러내는 담론이 아니라 바로 내가 살고 있는 한국 사회의 면면을 꿰뚫어보는 듯한
책이라는 점에서 내가 몸담고 있는 현실을 다시 바라보고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고 생각한다.
책을 덮은 후…
우선 이 책은 역자 후기가 없다! 나는 모든 번역서에 역자 후기가 있어야한다고 생각한다.
번역자는 이 책의 번역 작업에 애착이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역자는 원전의 저자
앞에 나서지 않는다는 겸손의 의도로 역자 후기를 생략했던 것일까? 또는 역자는 번역된 텍스트로만 말한다라는
자신감의 표현일까? 나는 개인적으로 역자 후기가 없는 책은 구입하지 않는다. 내 주관적인 인상으로는 번역작업을 완성하는 1%의 의무를 방기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때문에
그렇다.
문학 평론가이기도 하지만 번역가로도 많은 문학을 번역했던 김화영 교수처럼 멋지고 유려한 글을 바라는 것도 아니다. 단순히 번역기계가 아닌 사람이 한 작업의 흔적으로서, 그리고 텍스트를 가장 깊이 읽고,
고민했던 사람으로서 번역자에게 어떤 인상을 주었으며, 이 책이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나는 독자로서 궁금하다. 따라서 개인적으로 번역자의 후기가 없다는 점은 매우 실망스럽다. ‘번역은 반역이다’, ‘번역은 새로운 글쓰기다’라는 잘 알려진 표현을 굳이 들먹이지 않아도, 번역이라는 것은 지난한 과정이며 번역자는 분명 인정받아야 하는 존재다.
한편 우리말 문장이 쉽게 읽히지는 않는데, 번역의 어투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영역된 책을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 아닐까하는 느낌마저 든다. 번역된 문장들만 보아도 영어 문장의 구조가 연상되는 듯하다.
아울러 1962년 생인 돈스키스가 37년의
나이차이가 있는 바우만(1925년 생)을 부를 때 ‘자네’라고 옮기는 것은 다소 생경한 느낌을 준다. 아울러 바우만의 문장은 호흡이 길고 많은 생각들이 직관적으로 침입해있는 것도 쉽게 읽히지 않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러한 부분은 번역자가 독자를 위해 의미상 문장을 분리하여 문장의 호흡을 조절해주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바램을 적어본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이것은 오래되고 우리에게 익숙한 괴테의 메피스토나 그것의 갱신된 형태인 이스트반 자보의 메피스토가 아니라 일종의 `DIY`즉 `우리가 손수 만든` 악마이다." (51면)
"우리의 악마는 이케아, 페이스북의 모습을 한 DIY다." (52면)
"역사가들이 그들의 일을 하도록 놔두어라." - 루벵 카톨릭 대학 역사학 교수 미셸 뒤물랭의 말 (59면)
: 마치 우리의 국정 교과서 파동 문제에 대해 언급한 대목 같다.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은 부분이다.
"유혹의 면역력을 키우는 한 가지 중요한 수단" - `기억`은 말살될 수 없다. `역사적 기억` (61면)
: 하지만 우리의 역사는 의도된 왜곡으로 인해 우리의 `기억`을 되살리는 것이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다는 교훈을 준다.
"너무 많은 기억은 우리의 유머 감각뿐 아니라 우리 자신까지도 죽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을 포기할 수 없다." (68면)
: 우리는 기억해두어야하고 기억해내려고 노력해야한다. 모르면 알려고 해야한다.
"악은 오히려 평범한 삶의 사소함과 진부함으로 간주하는 것에 숨어 있다." (69면)
"소셜 웹사이트들은 ... 모든 독재자와 그들의 첩보기관에게 하늘에서 떨어진 돈과도 같은 정말로 뜻밖의 선물이며..." (105면)
"도끼는 나무를 찍는데 사용될 수도, 머리를 자르는데 사용될 수도 있다. 선택은 도끼의 몫이 아니라 도끼를 손에 쥔 사람들의 몫이다." (108면)
"오늘날 유럽에서 우리는 경제적 무능에 대한 법적 책임이라는 개념의 등장을 목격하고 있다. 어떤 종류의 정치 경제적 무능도 처벌을 면할 수 없다." (128면)
"가장 심각한 것은 중유럽과 동유럽이 마가렛 대처 시대에 시작된 대학과 교육의 상품화에 지나지 않는 영국식 대학 경영 방식을 열심히 흉내 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앞에서 언급한 불균형과 비대칭을 제거하는 데 기여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28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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