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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아씨들 1 ㅣ 펭귄클래식 101
루이자 메이 올콧 지음, 유수아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1년 2월
평점 :
절판
소설은 ‘그녀들’의
이야기다. 미국 남북전쟁(Civil war)이 한창일 19세기
후반의 어느 해, 크리스마스로부터 이야기는 시작하고 있다. 북군에 속해있는
군대에 종군 목사로 아버지를 떠나 보낸 마치 가문의 여인들이 겪는 에피소드로 소설의 전반을 이루고, 나머지는
장성하여 각자의 삶을 살아가기 시작하는 딸들의 이야기가 후반부를 이룬다.
네 자매의 어머니, 마치 부인은 특정이름이 나오지는 않고 ‘어머니'의 역할로서만
등장하고 있다. 기존의 관습과 질서를 내면화하고 현모양처의 역할을 수행하지만, 한편으로는
독립적이고 분명한 본인의 의견을 가지고 있으며 언제나 자매들에게 지혜로운 말을 하는 든든한 어머니이다. 인습에
저항하는 캐릭터로서가 아니라 속한 사회속에서 지혜를 발휘하여 포용하고 화합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네 자매의 아버지 마치 목사는 전쟁 통에 가문이 몰락하여 가난한 집의 가장이 된다.
하지만 근면 성실하고 돈독한 신앙과 사람들의 신임을 듬뿍 받으며 가족을 지켜나간다.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자원하여 전쟁터로 간다. 마치 목사는 부인과 네 자매의 무한한 사랑과 존경을
받는 존재이다. 하지만 실제로 루이자 올컷은 아버지와의 관계가 원할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런 이유로 소설에서의 비중은 크지 않고, 전쟁터에 보낸 설정으로 마치 가의 여인들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다.
다음 네 자매를 살펴보면, 맏이인 메그(마가렛
마치)가 있다. 어머니를 절대적으로 따르면서도 호화로운 생활에 대한
갈망이 언제나 있어 고민한다. 노래를 잘 불러서 매일 전통처럼 이어지는 가족의 합창 시간에 고운 목소리로
노래하는 언니이다.
둘째 조(조세핀 마치)는 네 자매 중 가장 개성이 강하다고
할 수 있는데, 저자 루이자 올컷의 분신처럼 보인다. 여성적인 예절과
관습을 체질적으로 싫어하고, 책읽기 글쓰기를 좋아한다. 겉으로는 남자
아이같은 이미지로 그려지지만 자세히 보면 감수성이 매우 예민하다. 또 모험을 좋아해서 돌아다니기,
이야기를 매우 좋아한다. 글을 쓸 때면 의식처럼 항상 작업복을 입고,
‘소용돌이 속에 빠진 상태’로 글을 쓴다.
셋째 베스(엘리자베스 마치)는 수줍음이 심하여 모르는
이가 말을 거는 것도 부담스러워한다. 음악을 사랑하여 피아노치는 것을 매우 좋아한다. 매우 여성스럽고 말없이도 가족을 위해 자신의 일을 하는 타입이며 언제나 사람들로부터 사랑받기를 갈망한다.
네 자매의 막내는 에이미(에이미 커티스 마치)다. 미술에 심취하여 그림그리기를 좋아하고 예술적 감각이 풍부하다. 한편으로 자존심이 매우 강한
캐릭터로 나온다.
이들 다섯 명의 여인들 외에 중요한 남자 캐릭터가 한 명
더 있다. 이름은 로리(시어도어 로렌스)로서 마치 가의 옆집 부유한 인도 무역상의 손자로 등장하며, 스위스에서 학교를 다닌 적이 있는 소년으로 마치 가의 둘째인 조와 동갑이다.
소설을 읽어나가면서 150년 전 즈음에 그것도 미국에서 쓴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정도로 소설에 나오는 많은 문제들과 대화는 오늘날 우리 삶의 모습들과
많이 겹쳐있다. 특히 여성의 관점에서 여성들이 겪는 여러 문제들(가족,
사랑, 결혼, 죽음 등)을 풀어나가는 이 소설은 날 웃게 하기도 하지만 때론 감동을 주는 장면도 있다. 남자 작가들이
쓰기 힘든 그런 일상의 소소한 디테일들이 녹아있었다.
우선 내가 가장 낄낄거리며 웃었던 장면은 찰스 디킨즈의
소설 <데이비드 커퍼필드David Copperfield>에 나온다는 한 캐릭터 '거미지 부인'을 언급한 장면이었다. 거미지 부인은
디킨즈의 소설에서 과부로 등장하는데 미국으로 이민가는 길에 탔던 배의 요리사로부터 청혼을 받는다. 곧바로
거미지 여인은 옆에 있던 양동이에 담긴 물을 그 요리사에게 부어버리는 장면이 있다. 결혼에 대해 극도의 거부감을
보이는 조에게 로리는 ‘거미지 부인’이라고 놀려대는데, 나는 조의 덤벙대고 선머슴같은
캐릭터를 상상하며 웃음이 나왔던 것이다.
한편 나에게 감동을 주었던 장면들은 네 자매와 마치 부인이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서로 격려와 위로를 해주는 장면들이 나올 때였다. 상대방에대한 공감과 배려로 이들은
아버지가 없는 상황에서 굳건하게 가족을 지탱해나간다. 소설 전체를 통해 어머니 마치 부인의 충고와 인생의
조언들이 나오는데, 여전히 유효한 삶의 지혜를 느낄 수 있다. 특히 교육의 기회가
흔치 않았던 당시의 여성들에게 이 소설은 여자로 태어나 마추치게 되는 인생의 제 문제들에대해 삶의 선배로서 충고하고 격려하는 소설이 되었을 것이다.
물론 페미니즘적인 시각에서보면 불만스러울 수는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의 여성들은 인습의 철폐를 주장하고 전복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관습과 체제
내에서 화합하며, 당대의 가치를 내재화하여 살아가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한계는 지적해볼 수 있겠다. 인류의 역사를 고려해볼 때 지난 150년간의 변화는 가히 엄청난 사건이었다는 점을 고려해볼 때, 단지 현재의 급변한 여성의 지위와
관점에서 과거를 ‘비판’하는 것은 공평하지 못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현재의 시선으로 과거의 관념의
한계를 이해하는 것에서 끝나면 된다. 하지만 150년 전의 사회를 현재
우리의 시각에서 ‘틀렸다’라고 비판한다면 그 것 자체가 모순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중요한 것은 그 ‘차이’를
인식하고 그 시대의 관점에서 당대의 시대상을 바라보도록 노력해야한다는 점이다.
재미있는 부분, 감동적인
부분과 함께 나를 숙연하게 만든 장면도 보인다. 셋째 딸인 베스의 죽음은 ‘삶’과
‘죽음’의 문제를 다시 생각해보게 해주었다. 베스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는 의연함을 보여준다. 자신의 삶의 ‘의미’를
깨닫고 마음 편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베스의 모습에서 ‘제대로 죽을 권리’를
박탈당한 현대인들을 떠올려본다. 현대인들은 의료 기술의 발달로 인한 인간의 평균 수명의 증가를 자축한다. 각종 발암물질, 중금속 및 유사 호르몬 물질, 자연파괴
등으로 인류의 삶의 질에 거대한 어둠이 드리우고 있는 이 시점에도 과학 기술과 의학의 발전을 절대화된다. 그 결과 수많은 사람들은 병원이 보유한 ‘고가의 장비’에
둘러싸인 채, 생명 연장이 강제되고 집이 아닌 병실에서 환자는 죽음을 맞이한다. 어릴 때 나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그러하셨듯이 사랑하는 가족들에 둘러싸여, 평생을 살아온 집에서 숭고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인의
죽음은 ‘기피’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베스의 의연한 죽음을 통해 작가의 삶과 죽음에 대한
태도 또한 배울 수 있었다. 특히 죽어가는 베스가 주위를 둘러보며 아름다움을 깨닫는 장면을 보고 더욱
숙연해진다.
“베스는 종종 주위를 둘러보며 ‘어쩌면
이렇게 아름다울까.’라며
간탄하곤 했다. 가족들이 모두 햇살이 환한 베스의 방에 모여 앉아 있는 모습이 베스에게는 너무나 아름답게 비춰졌던 것이다. 쌍둥이들은 바닥에 누워 발을 차며 까르르 웃고, 엄마와 언니들은 가까이에서 바느질을 했으며,
아버지는 즐거운 목소리로 옛 성현의 가르침이 담긴 책을 읽어주었다. 이런 책들은
수 세기 전에 쓰였지만 그 속에는 좋은 말과 위안을 주는 말이 가득했다. 이는 아버지가 가족들에게 베푸는
작은 예배와도 같았다. 아버지는 희망이 사랑으로 애끊는 마음을 달래줄 수 있고 믿음이 어려움을 감내하게 할
수 있다는 설교로 가족들의 영혼을 위로했다. 신앙심이 깊은 아버지가 감정을 다스리듯 더듬거리며 말하는 목소리에는
듣는 사람의 영혼을 울리는 힘이 있었다. 이렇게 평화로운 시기는 앞으로 다가올 슬픈 시간을 준비하라는 의미에서
주어진 듯했다.”
그리고 나는 이 장면에서 얼마전에 읽었던 가토 슈이치의
자서전 <양의 노래>에 나오는 한 장면을 떠올렸다. 태평양 전쟁의 패색이 짙어가던 일본 상공에 미군 폭격기가 도쿄를 공습 직전, 죽음의
문턱에서 가토 슈이치는 문득 도쿄의 일상을 바라보고 아름답다고 묘사한다. 인간은 자신의 삶의 유한성을 깨닫게
되면 어린아이의 눈과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일까. 우리가 잊고 있던 일상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이 장면들은 나에게 상당히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이러한 인생의 가치관들은 아마도 루이자 올컷의 아버지와
교류했던 당대의 초월주의 작가들(소로우, 에머슨 등)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소로우의 <월든>에 나오는 것같은 소박한 삶에의 긍정과 의지 역시 소설 전반을 통해 어머니의 지혜로운
가르침을 통해 드러난다. 또한 루이자 올컷이 이 초월주의 작가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되는 단서는
올컷이 그리스 로마 신화에대한 지식이 풍부하다는 점이다. <월든>에서도 소로우는 군데군데 그리스 로마 신화의 지식을 엿볼 수 있다. 아니면 그리스 로마 신화에대한
지식은 당대의 중요한 교양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작가로서 당연히 알아야하는 필수 교양처럼 말이다.
그 밖에 여러 작가들에 대한 저자의 독서량이 방대한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찰스 디킨즈의
소설을 좋아했는지, 디킨즈의 소설에 나오는 캐릭터를 많이 언급하고 있다. 사회의 어두운 면을 직시하고 여러 소설을 써내어 당대에 금서로 지정된 책들도 있었던 디킨즈의 소설을 좋아한 점은 루이자 올컷이
지녔을 가치관의 한 단면을 엿보게 해준다. 인간은 홀로 존재할 수 없고, 역사의 결과물이며 당대의 시대, 존재했던 환경적 요소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한 가정의 네 자매와 어머니가 이어가는 이 장편의 에피소드를
통해 재미있다고 느꼈던 점이 있다. 바로 이 여인들이 각자 강한 개성을 가지진 했어도, 결국 작가 루이자 올컷의 분열적인 자화상이 아닐까 하는 점이다. 내 주위의 여성들을 살펴봐도
네 명의 자녀에게서 나타나는 개성들을 모두 조금씩 갖고 있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작은 아씨들>은 엄마가 할머니가 되고, 딸들이 어머니가 되는 삶의 소소한 과정을 통해 다시금 삶의 의미를 환기시켜주었다. 더불어 글쓰기를
말할 때나, 소설 속 바에르 교수를 언급할 때나, 삶을 바라보는 ‘진정성’을
얘기한다. 아울러 이 소설은 현대에들어와 ‘가족’이라는
관념이 파괴되기전 마지막으로 가족의 의미를 보여주는 소설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상화된 ‘가족’의
모습은 우리가 ‘가족 사진’을 찍을 때처럼 우리가 ‘그러하길
바라는’ 우리의 욕망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족에 대한 우리의 욕망마져도
이제는 그 흔적을 찾기 힘들다. 전통적인 ‘가족’의
관념은 이미 희미해진지 오래다. 그럼에도 <작은 아씨들>은 작가 루이자 올컷의 삶에대한 ‘경건’함을
바탕으로 나온 소설이란 생각을 해본다.
(1부-115면) 엄마의 말 "지금 존재하는 행복을 눈치채지 못하면 그 마저도 사라질지 모른다."
(2부-15면) (딸 메그의 결혼식 준비에대해 마치 부인이 하는 말) "이런 모든 일들을 돈으로 해결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잃은 것이 무엇인지 결코 알 수 없다. 가정적인 일은 사랑이 담긴 손길을 거쳐야 더욱 아름다워지는 법이다."
(2부-275면) (막내 에이미가 로리에게 하는 충고) "평생 조 언니를 사랑하고 싶으면 그렇게해. 하지만 그 일로 자신을 망치지는 마. 원하는 것 한 가지를 가질 수 없다고 인생의 수많은 선물을 내던지는 건 나쁜 짓이니까. 자, 내 쓴소리는 여기까지야."
(1부-234면) "그렇다고 노예처럼 일만 해서는 안 된단다. 날마다 규칙적으로 일하고 쉬면 하루가 충만할 거야. 시간을 잘 분배해서 사용하는 방법도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고 말이야. 그렇게 지내면 젊은 날은 보람찰 것이고 늙어서도 후회가 별로 남지 않는단다. 가난하더라도 성공적인 삶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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