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 퍼키스와의 대화
막스 코즐로프 외 지음, 박태희 옮김 / 안목 / 2009년 9월
평점 :
품절


<필립 퍼키스와의 대화>는 필립 퍼키스의 사진집 <THE SADNESS OF MEN>에서 제자이자 정신과 의사인 존 브레이버리 러바인과 나눈 대화와 예술 평론으로 퓰리쳐상을 받은 막스 코즐로프가 쓴 사진집의 서문을 함께 엮은 책이다. 이 책의 번역은 역시 필립 퍼키스 선생의 제자이자 본인 역시 사진가이기도한 박태희 선생이 진행하고 기획한 것으로, 책의 후반부에서는 대화록에 나오는 모호한 부분들을 직접 필립 퍼키스 선생과 함께한 대화를 통해 좀더 명확히 밝히고있다.

 

   가끔 살펴보면 이 책은 얇고 어려운 얘기를 나눈것 같지 않아 지나지키 쉬운 내용들이지만 책을 다시 들여다볼 때마다 '사진을 찍는 활동을 한다는 것'에대해 정말 본질적인 얘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된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은 이미 '유치원'에서 배웠다는 말처럼, 이따금 이 책을 들여다보면 필립 퍼키스 선생은 늘 사진의 가장 중요한 핵심을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발췌한 부분은 내가 만든 키워드에 따라 다시 배열해서 묶어보았다.

 

 

  #바라보기.사진 찍기.셔터 누르기.인화에 관해

"나는 정보 전달을 위해 사진을 찍지 않습니다. 내 사진의 주제는 다른 방식으로 나옵니다. 세상에 대한 동정을 담아내기보다 그저 바라보는 것을 통해서 어떤 질서를 찾아내려 합니다."  (41)

 

"불현듯 무언가 다가오는 순간 셔터를 누릅니다. 내면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야만 합니다. 단지 바라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마법과도 같은 변화를 말합니다. (중략)... 사진에 담긴 형식 혹은 사진의 순간성 혹은 사진에 찍인 바로 그 순간의 무엇, 찍힌 순간의 모습, 프레임 안에 담긴 방식 때문에 일어나는 초월적인 변화를 말합니다."   (44)

 

"35mm 카메라를 쓴다면 노출은 더 주고 현상시간은 줄여야 그림자 부분이 잘 살아나는 필름을 만들 수 있다."   (24)

 

"대상의 가치를 따지기 전에 그저 시선을 끄는 것을 향해 셔터를 누릅니다. 그 다음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을 결정하는 과정이 편집과 인화입니다. 하지만 사진을 찍을 때는 최대한 '백치'상태가 되려고 노력합니다. '와 이게 뭐지? 멋지다. 저 나무덤불에 떨어진 빛을 봐! 저사람의 손 모양 좀 봐!' 이런 식입니다. 그저 바라보고 기록하는 것입니다. 인화와 편집을 할 때는 찍은 것들이 진정으로 내가 말하고 싶은 건지 고민합니다. 인화를 할 지, 그냥 필름으로 남겨둘지도 결정합니다."   (41-42)

 

"사진은 그야말로 삶의 방식 그 자체 입니다. 대상에 반응하면서 사진을 찍는 것처럼 우린 항상 무언가에 반응합니다. 그러므로 사진이란 반응하는 법을 배우는 매체입니다. 아마도 우리가 사진가이므로 삶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하는 지도 모르겠어요. 우린 끊임없이 아름다움을 발견합니다. 진정으로 삶이 경이롭기 때문이지요."

 

"인화는 기억을 바깥으로 공표하는 과정입니다."    (81)

 

"(tone)안에, 그 단계들 안에 수많은 감정이 존재한다."   (25)

 

 

  #사진 배열(sequencing)에 관하여

"편집에서 중요한 것은 물리적인 공간이나 소재가 아니라 정신적인 차원의 연결이다."   (9)

 

"주제나 소재보다는 사진과 사진 사이에 존재하는 무의식의 흐름을 중시하려 했어요. 음악의 선율이나 시적인 감수성을 따라 움직였습니다. 풍경, 인물, 거리, 멕시코... 그래서 독자들이 편집에 대해 어떤 이해를 하게 될지는 전혀 예측을 못하겠군요. (중략)... 난 다른 이들이 듣고 싶은 것을 들려주거나 보고 싶은 것을 보여주는 데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모호하고 혼란스러워도 만일 내 사진과 어떤 공감이 가능하다면 스스로 의미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82)

 

  #프로와 아마추어

"아마추어가 되길 원하는지 프로페셔널이 되길 원하는지 스스로 잘 생각해야 한다는 겁니다. 물론 생계를 꾸려 나가기 위해선 누구나 일을 하고 돈을 벌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 일이 꼭 내 삶의 전부가 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중략)... 나는 돈을 벌기 위해서 강의를 하고 상업 사진을 찍습니다. 그렇게 번 돈으로 내 가족을 부양합니다. 하지만 내 작업과 돈 버는 일을 혼동하지 않습니다. 내 생각에 가장 불행한 사람들은 자신의 작업과 일을 섞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작업은 아마추어처럼 하고 돈을 버는 일은 프로처럼 하세요. 두 가지를 혼동하지 마세요. (중략)... 누구나 위대한 사진가로 인정하는 스티글리츠는 평생 자신을 아마추어 사진가라고 불렀지요."   (83-84)

 

  #사진과 사색하는 삶

 

"사진은 시각적인 '하이쿠'라고 할 수 있다. (존 러바인)"   (46)

 

"나는 사진 작업을 사랑합니다. 무언가를 보존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절대 풀어낼 수 없는 무한한 수수께끼를 탐구한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사진은 답이 없는 수수께끼같아요."   (35)

 

"내 작업에서 소통이란 주제 그 자체보다는 심리적, 정신적 공명에 대한 것입니다."

(37)

 

"사진은 목격한 대상의 존재에 대한 증거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우리 문화 속에서 감수성이 풍부하거나 예민한 존재에 대한 가치는 실질적으로 사라지고 있지요. 오늘날 모든 사람들은 행동가이며 생산자이고 아이디어 맨이지요. 충만한 감성으로 대상을 물끄러미 바라보거나 사색에 잠기거나 하는 대신 말입니다."   (45)

 

 

 

‘사색하는 삶’의 중요성은 한병철 교수의 <시간의 향기>에도 등장한다. 우리가 현대 사회에서 시간성을 다르게 느끼는 이유에 대해 한병철 교수는 우리의 시간이 원자화 되어 사건과 사건사이의 중력이 소멸되어버렸고, 그로 인해 시간의 역사성, 시간의 서사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내가 이해한 것을 나의 언어로 바꾸면 시간의 원자화사건과 사건사이에 존재했던 끈적 끈적함이 사라진 결과인 것이다. 사건사이의 유의미성이 소실되고 시간이 파편화되어버린 사회에서 우리는 항상 시간에 끌려다니고 시간에 쫒길 수 밖에 없다. 그 결과 우리는 외부의 자극에 대해 즉각적인 반응만을 하는 것에 익숙해져있다. 손으로 스마트 폰의 화면을 전환하고 언제나 정보를 찾아 다니는 상황, 디지털 사진기로 대상을 포착하고 즉시 화면을 쳐다보며(침팬지가 하는 행동을 닮았다해서 외국 사진가들은 chimping이라고 한다) 삭제할지 말지 결정하게 되는 사진의 과정이 그러하다.

   롤랑 바르트가 <카메라 루시다>를 썼던 것은 어머니의 죽음을 경험하고 그 애도 과정에서 보게 된 어린 시절의 어머니 사진에서 비롯되었다. 사진이라는 것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이해햐야할지를 오랜 시간동안 사유한 끝에 나온 책이었던 것이다. 결국 (전통적인) 사진의 과정, 다시말해 셔터를 누르거나 사진을 인화를 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 혹은 사진을 통해 어떤 말을 하고 싶은지를 결정하는 것은 기존 사진 매체의 제약으로 인해 사진가 개개인의 사유에 절대적으로 의존했던 것이다. 현재 디지털 작업을 하고 있는 사진가 중에서도 아날로그 사진에 익숙한 작가들의 작업 흐름은 분명 디지털 작업을 하는 젊은 작가들과 많이 다를 것이다. 이는 디지털 매체가 우월하냐 아날로그 방식이 우월하냐와 같은 맥빠지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사진의 본질이 어떤 것이었나를 생각해보기 위함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사진을 하는 과정이 내 앞에 있는 어느 대상, 어느 사진이 나에게 주는 반응이 사진의 본질을 이루고 있다라고 바르트는 우리에게 가르쳐준다고 생각한다. 필립 퍼키스 역시 이 책에서 본질적으로 동일한 이야기를 아주 간결하게 하고 있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에서 혹은 영화 <프루스트의 비밀정원> 에서 보듯, 마들렌 과자 하나가 등장인물의 옛 기억을 불러일으키고있다. 한 인간의 몸에 저장된 기억은 우리가 시간을 인식할 때 가장 중요한 요소들 중 하나이다. 미국 CIA가 연구비를 지원한 전기 충격(고문) 기술에관한 연구(1950년대 캐나다 맥길 대학에서 진행됨)를 보면 인간이 정체성을 인식하게 하는 중요한 요소가 외부에서 끊임없이 주어지는 자극(현재 내가 어디 있으며, 지금이 언제인가를 인식)과 기억(나는 누구인가)이라고 했다. 자의든 타의듵 외부의 자극을 통해 과거를 끊임없이 기억하는 행위는 나에게 의미있는 사건들 사이의 유의미성, 서사성을 이루는 과정이라 생각한다. 아마도 한병철 교수는 이 과정을 사건과 사건 사이의 중력이 회복된다라고 말할 것 같다.

   다시 사진으로 돌아가 필립 퍼키스는  <필립 퍼키스와의 대화>에서 우리는 그저 대상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관찰하거나 사색에 잠기는 기회를 잃어버리고 있다고 말한다. 이는 파편화된 시간들의 연속 속에 우리 자신을 그냥 내던지는 일일 것이다. 사색하는 삶은 이 시간의 원자화에 저항한다. 결국 우리의 시간은 사진을 바라보고 이에 반응하고 사유하는 과정을 통해 회복할 수 있다는 말일 것이다. 그런의미에서 50년 넘게 아날로그 사진, 오로지 흑백의 톤(tone)에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흑백 사진만으로 작업해온 필립 퍼키스의 간결한 대화록은 다시 꺼내  볼 때마다 묵직하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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